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35) 아브라함의 기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08

3) 아브라함의 기도를 보게 된다.

두 천사(두 사람)가 하나님의 명을 받아 소돔성으로 가는 것을 본 아브라함은 소돔성의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였다. 그는 소돔성에 있는 자기 조카 롯과 그 가족 그리고 혹시 롯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의인이 어느 정도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이 그곳으로 살러 간 이후부터 소돔성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더욱이 조카 롯이 살고 있던 소돔이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에게 사로잡혔을 때(창 14:11-12), 아브라함은 그의 사병 318인을 인솔하고 가서 싸워 조카 롯과 그 재물 그리고 소돔성을 구원한 일이 있었다(창 14:13-16).
이런 역사적 관계를 맺고 있던 아브라함이고 보면 그 성에 하나님의 심판이 임박하였음을 직감하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함은 당연한 순서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어떤 기도였을까?

(1)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에 기초한 기도였다.

곧 의인과 악인을 함께 취급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기초한 기도였다.
창세기 18장 23절에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려나이까…」라고 하였다. 그 뒤 25절에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라고 한 것을 보면 확실해진다. 이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공의로운 속성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증거이다. 이 사실에 대해서 칼빈은 ‘의인이 악인의 사회에서 같이 징계를 받을 수 있으나(일반적 재앙) 결코 그 일로 인하여 멸망하지는 않는다.’라고 하였다.

(2)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기초한 기도였다.

아브라함은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창 18:24)라고 질문 형식의 기도를 하였다.
그때 하나님은 의인 오십을 찾으면 그 온 지경을 용서하리라고 하였다(창 18:26). 그 후 45인(창 18:28), 40인(창 18:29), 30인(창 18:30), 20인(창 18:31), 10인(창 18:32)까지 숫자를 줄여가며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속성을 모르는 자는 이런 기도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알고 있었던 아브라함이기 때문에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는 의인 곧 믿는 자에게는 실로 무한한 것이었다. 그것은 무조건적이고 선수적이고 영원적이고 불변적인 것이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긍휼과 자비는 잃어버린 아브라함 자손에게 절대 소망이다.

(3) 의인의 존재론적 의미를 알고 올리는 기도였다.

소돔과 그 주변의 성에 살고 있는 의인의 중요성은 그 의인을 인하여 다른 사람도 잠정적으로나마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의인 50인을 인하여, 의인 45인을 인하여, 의인 40인을 인하여, 의인 30인을 인하여, 의인 20인을 인하여, 의인 10인을 인하여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응답이었다. 바로 여기에 의인의 존재론적 의미가 있다. 의인의 존재론적 중대성이 있다.
이렇게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의인들은 그 시대의 역사를 존립시키는 귀한 존재들이 된다. 그것은 범죄한 다수의 면죄라기보다는 죄없는 소수의 멸망을 하나님께서는 원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의인은 비록 소수일지라도 하나님 앞에는 그렇게 귀중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판받아 마땅한 역사가 오늘날까지 항상 그 역사 속에 존재하는 소수의 의인 때문에 심판이 연기되고, 감소되고, 면죄받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역사 속에서의 의인의 존재론적 의미와 목적과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애굽 제국 가운데 고센땅에 살던 이스라엘의 존재론적 의미였다. 로마제국에서 그리고 일본 신사참배시대에 한국에 남아있던 소수의 순교적 신앙인들의 존재론적 의미였다. 우리나라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택자를 위하여 환난의 날들을 감한 일이 있다. 일본에서는 45년 8월 17일 새벽을 기해 한국의 기독교 신자들을 멸종할 계획을 세웠으나, 하나님께서 8.15해방을 주심으로 중단되었다. 6.25사변시 공산당들로 인하여 남한 전역이 절단났으나 부산과 마산 한쪽은 남겨두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북한이나 러시아, 중국이나 기타 이슬람교 국가와 사회주의 국가 안에 존재하는 소수의 기독 신자들은 참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귀중한 존재들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의 한국은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교육적, 문화적 이유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것이 아니라 1000만이 넘는 한국 기독신자들에게서 그 존재론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 한국 교회가 받은 21세기 세계 선교의 주역이라는 관점에서 한국역사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복음적 이유, 선교적 이유에서 한국 역사의 존재적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의 의인은 그 시대, 그 역사의 구심력이 된다. 의인의 영향력은 바로 하나님 자신과 관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 기독교적 국가의 세계적 영향력을 조명해야 할 것이다. 저들은 확실히 오늘 세계 문명을 선진하는 영도력을 갖고 있다.

(4) 아브라함의 지극한 경외심과 겸손의 기도였다.

지금 아브라함은 소돔성을 위하여 무려 여섯 차례나 그 수를 줄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창 18:27), 「내 주여 노하지 마옵시고 말씀하게 하옵소서…」(창 18:30), 「내가 감히 내 주께 고하나이다…」(창 18:31), 「주는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더 말씀하리이다…」(창 18:32)라고 한 사실에서 충분히 그의 경외심과 겸손이 드러나고 있다.
여기서 그가 소돔의 의인을 위하여 기도했다고 해서 자기를 의롭고 대단한 사람으로 여긴 것이 결코 아니다. 그의 자세는 감히 죄인이 소돔의 의인을 위하여 기도한다는 자세이다. 참된 기도자는 언제나 여호와를 향한 지극한 경외심과 겸손이 그 중심에 근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진실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자는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바로 자기의 의를 앞세우는 교만 그것이다.

(5) 소돔의 의인을 향한 아브라함의 대신 기도는, 죄악의 세상 중에 있는 오늘 날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께 올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기도를 연상하게 한다.

흔히들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이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크게 잘못 되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는 오직 한 분 예수밖에 없다.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이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하는 기도를 중보기도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대신(代身)기도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소돔 가운데 있는 의인이 악인 때문에 망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아브라함의 대신기도는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의 중보기도를 연상하게 해주고 있음이 확실하다(롬 8:34, 히 7:24-25).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이 기도는 오늘 지상 교회가 세상 중에 있는 여러 신자들을 위하여 대신기도를 감당해야 될 복음의 제사장적 사명을 일깨워주고 있다.

(6) 이 기도는 대면적 기도, 대화적 기도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본문을 주시하면 아브라함이 여호와 앞에 섰다(창 18:22), 가까이 나아갔다(창 18:23)고 하였다. 또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고(가로되),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대답(여호와께서 가라사대)하셨다. 대면하고 대화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33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즉시 가시니 아브라함도 자기 곳으로 돌아갔더라」고 하였다. 여호와께서 ‘즉시 가시니…’라고 하는 표현으로 의인화적 상태를 나타냈다. ‘하나님이 사라진 사실이다’(Keil)라고 하였다. 아브라함도 마므레 자기 집으로 되돌아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천사는 사명을 띠고 소돔성으로 들어갔다(창 19:1). 정말 기도가 만남과 대면과 대화로 이루어진 장면이다.

이 본문에서의 결론적 교훈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는 구원과 축복을 가지고 오셨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소돔의 심판 소식을 가지고 오셨다. 바로 구원과 심판의 하나님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기도는 세상 중에 있는 의인을 위한 교회의 사명 중에 하나라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과 같은 기도여야 한다.

4) 그 사람들은 여호와께서 보낸 소돔성의 심판을 위한 여호와의 사자였다(창 19:1-19).
지금 우리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그 사람들’을 보고 있는 중이다. ‘그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약속한 축복을 재확인해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창 18:1-19).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소돔성의 죄악과 그 종말의 심판을 알려주려고 왔던 사람들이었다(창 18:20-21). 이때 우리는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한 사실을 보았다.
또한 그들은 소돔성 심판을 위한 여호와의 사자였던 사실이 19장에 나타나고 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그 세 사람 가운데 한 분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작별하고 가셨다고 하였다(창 18:33). 그리고 다른 두 사람, 곧 천사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아 저물 때에 소돔성에 이르렀다(창 19:1). 창세기 19장 13절에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고 한 사실에 우리는 유의해야 한다.
이 말씀은 그 사람들 중에 두 사람, 곧 두 천사가 소돔에 살고 있던 롯에게 자신들의 정체와 사명을 알려주고 있는 내용이다. 곧 저들은 여호와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심판의 사자들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1) 소돔성 방문과 소돔성의 패역을 직감하는 두 천사를 보게 된다(창 19:1-11).
① 먼저 사람으로 나타난 두 천사는 롯에게 경건한 영접을 받게 된다(창 19:1-3).
날이 저물 때 소돔성에 도착한 두 천사는 마침 그때 성문에 앉아 있던 롯의 영접을 받아 그 집으로 안내받고 저녁식사를 대접받게 된다. 물론 롯의 영접이 아브라함의 영접에는 비하지 못하지만 부지중에 하나님의 천사를 영접하는 롯의 태도는 참으로 갸륵한 의인의 경건을 보여주고 있다.
② 두 천사는 롯의 집에서 소돔성의 패역을 직감하게 된다(창 19:4-11).
그 날 밤 그 천사들이 눕기 전에 소돔성에 살던 사람들이 무론 노소하고 롯의 집을 에워쌌다(창 19:4). 그리고 롯에게 이르기를 「이 저녁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 19:5)고 하며 달려들었다.
저들이 말한 ‘상관’(야다, [d'y;)은 성적 관계를 나타내는 말로 특히 여기서는 남색(男色)을 의미한다. ‘소돔’(sodomy)이란 말 자체가 남색을 뜻한다는 사실을 보면 그 당시 소돔성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과 문란이 어떠했음을 알 수 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지금 세계적으로 공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에이즈(AIDS)가 특히 동성애 행위, 곧 남색 행위에서 기인되었다는 사실이다. 순리가 아닌 역리 행위요, 질서가 아닌 무질서 행위이다. 성경을 보면 남색은 고대 가나안에 널리 유행되었던 악습이었다(삿 19:22). 율법에서는 이를 가증한 행위로 금지하고 있다(레 18:22, 20:23, 겔 16:50, 롬 1:27).
그때 롯은 문 밖으로 나갔다(창 19:6). 그리고 저들에게 이르기를 「청하노니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 내게 남자를 가까이 아니한 두 딸이 있노라 청컨대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이끌어 내리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에게 행하고 이 사람들은 내 집에 들어왔은즉 이 사람들에게는 아무 짓도 하지 말라…」(창 19:7-8)고 애원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롯의 연약한 처세와 불의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물론 그의 이러한 심사는 악을 제지하기 위한 절박한 상황에서의 제안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악을 제지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또 다른 악을 유발시키는 이런 처세는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롯은 소돔의 패역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그 결과 그는 ⓐ ‘이놈’이라고 하는 욕설을 들었을 뿐이었다(창 19:9). ⓑ 소돔에 들어와 붙어사는 우거자의 대접을 받았다(창 19:9). 롯이 본래부터 소돔인이 아닌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 지도자로서의 권을 상실당했다. 「이 놈이 들어와서 우거하면서 우리의 법관이 되려 하는도다…」(창 19:9)라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롯은 평소에 그들에게 선한 충고를 도모했던 것 같다. ⓓ 더 나아가 롯은 저들에게 밀침을 당했다(창 19:9). 롯에게는 전혀 악을 제지할 힘이 없었다. 마침내 저들은 롯을 밀어제치고 덤벼들어 롯의 집 문을 깨뜨리려고 하였다.
바로 이 순간 롯의 집안에 있던 ‘그 사람들’ 곧 두 천사는 롯을 집으로 끌어들이고 문을 잠갔다. 손님을 보호하려 했던 롯이 오히려 그 손님(나그네)에게 보호를 받게 된 셈이다. 이 일로 인하여 소돔성에 나타난 그 천사들은 소돔성의 패역을 직감하게 되었다.
③ 마침내 그 두 사람(천사)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을 나타내 저들의 눈을 멀게 해버렸다(창 19:11).
그 천사들이 저들의 눈을 어둡게 한 것은 하나님의 이적이다. 이러한 일은 아람군대가 도단성에 있는 엘리사를 잡으러 왔을 때도 하나님께서 엘리사를 통하여 나타냈던 적이 있다(왕하 6:18). 이는 영구적인 어둠이 아니라 일시적이고 잠정적으로 저들의 시신경을 마비시켜 버린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 결과 저들과 롯을 향한 저들의 패역한 행위가 중단되었다.
(2) 롯을 향한 그 두 사람의 메시지를 보게 된다(창 19:12-22).
① 그 두 사람은 먼저 저들이 소돔성을 방문한 목적을 알려 주었다.
창세기 19장 13절 중에 「…여호와께서 우리로 이 곳을 멸하러 보내셨나니 우리가 멸하리라」고 하였다.
말하자면 저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사자로 소돔성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때 롯은 아마 무척 놀랐을 것이다. 그들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의 사자, 곧 천사들임을 깨달았기 때문에 말이다.
② 그 심판의 이유는 소돔성의 큰 죄악 때문이라고 하였다.
창세기 19장 13절 상반절에 「그들에 대하여 부르짖음이 여호와 앞에 크므로…」라고 하였다.
악이 차면 거기에 소리가 나고, 그 소리는 마침내 하나님께 상달이 되고, 그 결과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라는 메시지이다.
③ 롯에게 속한 자를 다 이끌어내라고 하였다.
창세기 19장 12절에 「그 사람들이 롯에게 이르되 이 외에 네게 속한 자가 또 있느냐 네 사위나 자녀나 성중에 네게 속한 자들을 다 성 밖으로 이끌어내라」고 하였다.
이것은 소돔성을 심판하러 온 천사들의 세 번째 메시지에 해당된다. ‘네게 속한 자들’을 심판받을 소돔에서 밖으로 이끌어 내라는 것이다. 마지막 전도의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를 받을 대상은 ‘네게 속한 자’, 곧 롯에게 속한 자였다. 그들을 이끌어내야 하는 것은 소돔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는 시간에 소돔과 같이 멸망하지 않고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고 거듭 밝히고 있다(창 19:15, 17, 22).
그러나 롯에게 속한 자는 정말 없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기도 중에 나오는 의인 열 사람이 소돔에는 없었다. 이 소돔 멸망 소식을 전달받은 롯의 사위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농담이라고 여겼다(창 19:14). 여기 ‘농담’은 ‘희롱하다’, ‘우습게 여기다’라는 뜻이다. 이 말이 저들에게는 정말 웃기는 소리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롯의 아내는 세상의 애착 때문에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다(창 19:17, 26).
롯에게 속한 자가 누구였던가?
자신과 그의 두 딸뿐이었다. 하나님의 천사들은 롯에게 속한 자를 구원하기 위하여 행동하였다. 먼저 재촉하였다(창 19:15). 그리고 롯과 아내와 두 딸의 손을 직접 붙잡고 성 밖으로 인도해 주었다(창 19:16-17). 하나님은 저들에게 인자를 더하셨다(창 19:16).
④ 오직 앞만 보고 가라고 하였다.
창세기 19장 17절에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무르거나 하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고 하였다.
여기까지 이끌려 나온 롯은 천사에게 도망하여 산까지 갈 힘이 없다고 하였다(창 19:19). 그러면서 작은 성 소알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였다(창 19:20). 천사는 이번에도 그 소원을 들어 소알성을 멸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창 19:21).
⑤ 소알성으로 속히 도망하라고 하였다.
창세기 19장 22절에 「그리로 속히 도망하라 네가 거기 이르기까지는 내가 아무 일도 행할 수 없노라…」고 하였다.
롯이 소알성에 이를 때까지 하나님의 심판이 지연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는 다섯 번째 메시지였다. 롯이 소알에 도착했을 때 해가 돋았다고 하였다(창 19:23). 참으로 긴 밤, 무서운 밤, 고통의 밤, 진통의 밤이었다.
(3) 소돔의 심판과 롯의 구원이다(창 19:23-29).
① 소돔성의 심판 주는 하나님 자신이었다(창 19:24).
② 심판의 도구는 유황과 불이었다(창 19:24).
③ 심판의 범위는 전 소돔과 고모라였다(창 19:24-25).
④ 심판의 대상은 성에 거하던 모든 사람이었다(창 19:25).
⑤ 심판의 정도는 완전 멸망이었다(창 19:25). 다 엎어 멸하셨다고 하였다. 철저한 파괴, 완전한 파괴였다.
⑥ 롯은 심판 중에서 구원받았다.
창세기 19장 29절에 「하나님이 들의 성들을 멸하실 때 곧 롯의 거하는 성을 엎으실 때에 아브라함을 생각하사 롯을 그 엎으시는 중에서 내어 보내셨더라」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심판으로 폐허가 된 소돔과 고모라를 보았다고 하였다(창 19:27-28).
(4) 소돔의 심판에서 받는 결론적 교훈
①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본다.
하나님 자신이 직접적으로 아니면 간접적(천사)으로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시는 것을 본다(창 19:1, 4, 10-11, 12, 15, 17, 21, 22).
② 의인 열 사람이 없는 소돔은 그 존재 이유가 없었다(창 18:32).
롯에게 속한 자, 곧 의인 열 사람이 소돔에는 없었다(창 19:12).
③ 사람들의 죄는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고 있다(창 19:13).
④ 심판받은 사람들이 주는 교훈이다.
첫째, 하나님의 사자(천사)를 욕보이려는 무리(대중)들이 있다(창 19:4-9). 즉 다수의 패역이다. 둘째, 하나님의 소리를 농담으로 여기는 롯의 사위 같은 자가 있다(창 19:14). 셋째, 말씀에 대한 불신앙과 세상에 대한 애착으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와 같은 자가 있다(창 19:17, 26).
⑤ 심판의 형태가 주는 교훈이다.
첫째, 예고된 심판이다(창 18:17, 19:13). 예수님의 재림도 예고되어 있다(마 24: ). 둘째, 갑자기 임한 하나님의 심판이다(창 19:24). 예수님의 재림도 갑자기, 도적 같이 임한다고 하였다(벧후 3:10). 셋째, 유황과 불의 심판이다(창 19:24, 벧후 3:10-12). 넷째, 불가항력적 심판이다(창 19:24, 벧후 3:12, 계 18:2). 다섯째, 소돔성 전부를 다 태워버린 심판이다(창 19:25). 예수님의 재림시에 이루어질 심판도 우주적인 심판이다(마 24: ).
⑥ 구원받은 롯을 본다(창 19:29).
성경은 그를 가리켜 의인이라고 하였다(벧후 2:8).
⑦ 심판의 진실성 곧 역사성을 본다.
오늘의 사해는 소돔 심판에 대한 산 증거요 위대한 웅변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의 입증도 나온다(눅 10:12, 17:29).
⑧ 성경은 이를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의 예조로 삼으라고 교훈하고 있다.
누가복음 17장 28-30절에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 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 인자의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고 하였다.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소돔은 그 존재적 의미나 목적이 없어져 버리고 말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기독 신자들의 존재론적 의미를 찾을 수 있다.

5) 모압과 암몬의 기원(창 19:30-38)
소돔과 고모라의 종말은 인류의 범죄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종말론적인 교훈을 준다. 지금 지도상에 나타난 사해바다는 바로 그 도시의 종말론적인 참상을 웅변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모압과 암몬 족속의 기원을 보게 된다. 소돔에서 소알로 도망(피난)했던 롯은 씻을 수 없는 패륜에 빠져, 선민의 대적이 되는 모압과 암몬 족속의 기원이 되는 수치를 남기게 된다.
(1) 롯의 패륜(창 19:30-35)
소돔을 빠져나와 천사들에게 이끌리어 소알까지 피난한 롯은 거기에서 여호와가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유황과 불에 의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전멸하여 엎어지는 최후 심판을 직접 목도했다(창 19:24-25). 참으로 끔찍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 심판 중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 심판의 참상을 목격함으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롯은 두려워 더 이상 소알에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소알에서 나와 두 딸과 함께 산속의 굴에 거하게 되었다(창 19:30). 왜 두려움이 일어났는지 모르나 소돔성의 심판을 목격한 당사자로서 공포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거기에서 더 멀리 떨어진 산으로 올라가 산속에 있는 굴에 거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실상 심판 전날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롯에게 소돔성을 떠나라고 재촉하면서 지정해 주었던 장소였기도 하다(창 19:17). 아마도 이 산은 사해 동편에 있는 모압 산일 것이다.
거기서 롯은 부끄러운 족속의 조상이 되는 패륜의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두 딸로 말미암아 일어난 패륜적인 계책 때문이었다. 큰딸과 작은 딸이 함께 꾀하여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창 19:31-32)라고 하였다.
저들은 소돔과 고모라 전역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절단되어 버린 결과를 보고 인종이 멸종된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배필 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고 도모하였다. 곧 종족을 보존하자는 뜻이다. 어쩌면 종족 보존의 욕망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큰딸이 아비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만취상태에 빠지게 한 후 롯과 동침하였다(창 19:33). 다음 날 밤에는 작은 딸이 같은 방법으로 그런 패륜을 범했다(창 19:34-35). 이때 롯은 만취한 상태라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9:33, 35).
이러한 롯의 두 딸의 추악한 부친상간의 악습은, 저들이 소돔의 타락한 성문화에 얼마나 익숙해 있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2) 두 딸에게서 난 자들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
창세기 19장 36-38절에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고 하였다.
여기 ‘모압’은 ‘메아브’(ba'me) 곧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롯과 큰 딸 사이에 생긴 패륜의 열매이다. 성경에서 ‘모압’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사람의 이름으로나 아니면 그 자손들이 살던 지방을 가리키고 있다.
이들의 영토는 주로 아라비아 사막과 서쪽으로 사해, 남쪽으로 에돔, 북쪽으로는 아르논강 사이에 위치한 전 지역이다(민 25:1-3). 구약성경에는 모압이란 이름이 25회 가량 나오는데, 모압 족속이 섬긴 신의 이름은 그모스였다(민 21:9, 왕상 11:7, 33).
그리고 38절의 ‘벤암미(yMi['-@B])는 ‘내 백성의 아들’, ‘내 근친의 아들’, 혹은 ‘암(몬)의 아들’ 등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
벤암미는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이는 롯과 작은 딸 사이에 생긴 패륜의 열매였다. 주로 요단강 동편 얍복과 아르논 두 강 사이에 자리잡았는데 모압의 북쪽이 된다. 저들 거주지의 중심은 현재의 암만(Amman)이다. 저들의 신은 몰렉이었다(레 18:21, 왕상 11:7)).
(3) 이 본문의 기록에서 받는 영적 교훈
① 성경기록의 신실성을 보게 된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내촌감상) 씨는 이 부분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이런 패륜 사건을 기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견해는 잘못이다.
성경의 기록은 언제나 사실의 기록이고 진실이다. 타락한 인간의 죄악을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기록함을 통하여 오히려 성경의 진실성을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어두운 장면의 기록은 여기뿐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인간의 부정과 불결함이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가?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다윗이 그러했고, 예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가 그러했다. 야곱의 아들 유다, 선지자 요나, 예수의 제자 도마 등등 성경은 저들의 인간됨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그래서 예수는 죄인의 구주임을 알게 한 것이다(막 2:17, 딤전 1:15).
중국의 성인 공자의 제자가 30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제자들에 관한 기록을 보면 3000명 제자들의 생애에 아무런 흠이 없다고 한다. 그런 아무런 흠이 없는 기록이야말로 그것이 진실이 아닌 기록임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② 패륜의 씨(후손)는 언제나 선민의 대적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다.
신명기 23장 3절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그 이유를 신명기 23장 4절 이하에 기록하고 있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영접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방해하고, 심지어 거짓 선지자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려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민 23-24장).
이사야 16장 6절에도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라고 하였고, 예레미야, 에스겔, 스바냐서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모압을 저주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③ 롯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대 홍수 후에 구원받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한 것을 보았다(창 9:20-24). 그러나 그 아들 셈과 야벳이 아비의 실수를 가려주는 밝은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롯의 실수는 노아의 실수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성적 패륜을 범한 장본인이고, 그의 딸들이 여기에 주역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언제나 밝고 유쾌하고 명랑하지 못한 면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을 택하여 떠났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창 13:10-11). 그때 그의 육안은 밝았으나 영안은 어두웠다. 후에 전쟁을 통하여 징계를 받을 때 삼촌 아브라함의 대의적인 의리로 구원되었을 때도(창 14:12) 삼촌 쪽으로 따라 오지 않고 그대로 소돔에 머문 것도 어두운 처사였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성의 심판을 예고하고 급히 피난할 것을 재촉할 때도 그의 태도는 극히 미온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멀리 산까지는 도망할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그가 살던 소돔이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을 받을 때, 피난 중에 그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결국 아내마저 잃었다.
해질 때 소돔성에 도착했던 천사들이 롯과 딸들의 손을 이끌어 소알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돋을 정도였으니 그의 행동이 얼마나 영적으로 둔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피난 후에는 타락한 방법으로 자손을 생산하기까지 했는데 그 자손 모압과 암몬은 영원히 선민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롯이 구원을 받았겠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일어날 정도이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2장 6-8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고 롯의 구원을 확실히 기록하고 있다.
‘고통하던 롯을 건지셨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다’고 하였다. ‘의인’, ‘의로운 심령’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의는 아브라함에게 비할 바가 못된다. 이는 죄악의 성 소돔 사람들에 비해 쓰여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롯에게 인자를 더하셨다고 하였다(창 19:16). 롯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큰 인자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았다(창 19:19).
그럼에도 그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같이 느껴진다. 구원 중에는 부끄러운 구원도 있고, 영예로운 구원도 있다. 부끄러운 구원은 그 믿음에 따라오는 행위에 대한 상급(열매)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낙원에 이른 한편 강도의 경우가 그러하다(눅 23:43).
롯의 경우 그에게 속한 자가(창 19:12) 없었다. 사위에게까지도 롯의 전도는 힘이 없었다. 농담(조소)거리로 여겨질 뿐이었다(창 19:14). 아내마저 떨어져 버렸다(창 19:26). 겨우 두 딸이었으나 그 딸들까지도 불륜의 자식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성경은 의인 롯이라고 칭했다. 그를 건지셨다고 했다. 삶의 열매가 없었다. 영적인 영향력이 없었다. 그래서 부끄러운 구원에 속한 자 같다.
영예로운 구원은 그 믿음의 행위에 상급, 축복, 열매가 따르는 것이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따르는 것이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은 죽음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것을 인자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12:23-24)?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21장 26절에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라고 하였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전 세기, 전 지역에서 주의 복음을 전한 결과 맺은 축복의 열매들, 복음의 전리품들을 가지고 영광의 새 예루살렘성에 입성한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실로 영광스러운 구원이 아닌가? 롯에게는 이런 것이 따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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