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원태목사강해설교

[스크랩] 창세기 강해(37) 모압과 암몬 족속의 조상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5:10

5) 모압과 암몬의 기원(창 19:30-38)

소돔과 고모라의 종말은 인류의 범죄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었다. 그것은 지극히 종말론적인 교훈을 준다. 지금 지도상에 나타난 사해바다는 바로 그 도시의 종말론적인 참상을 웅변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모압과 암몬 족속의 기원을 보게 된다. 소돔에서 소알로 도망(피난)했던 롯은 씻을 수 없는 패륜에 빠져, 선민의 대적이 되는 모압과 암몬 족속의 기원이 되는 수치를 남기게 된다.

(1) 롯의 패륜(창 19:30-35)
소돔을 빠져나와 천사들에게 이끌리어 소알까지 피난한 롯은 거기에서 여호와가 하늘로부터 내리시는 유황과 불에 의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전멸하여 엎어지는 최후 심판을 직접 목도했다(창 19:24-25). 참으로 끔찍스러운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그 심판 중에서는 구원을 받았지만 그 심판의 참상을 목격함으로 충격을 받게 되었다.
그 후 롯은 두려워 더 이상 소알에도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소알에서 나와 두 딸과 함께 산속의 굴에 거하게 되었다(창 19:30). 왜 두려움이 일어났는지 모르나 소돔성의 심판을 목격한 당사자로서 공포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는 거기에서 더 멀리 떨어진 산으로 올라가 산속에 있는 굴에 거하게 되었다. 이곳은 사실상 심판 전날 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롯에게 소돔성을 떠나라고 재촉하면서 지정해 주었던 장소였기도 하다(창 19:17). 아마도 이 산은 사해 동편에 있는 모압 산일 것이다.
거기서 롯은 부끄러운 족속의 조상이 되는 패륜의 역사를 만들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두 딸로 말미암아 일어난 패륜적인 계책 때문이었다. 큰딸과 작은 딸이 함께 꾀하여 「큰 딸이 작은 딸에게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늙으셨고 이 땅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우리의 배필 될 사람이 없으니 우리가 우리 아버지에게 술을 마시우고 동침하여 우리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창 19:31-32)라고 하였다.
저들은 소돔과 고모라 전역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절단되어 버린 결과를 보고 인종이 멸종된 것처럼 느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세상의 도리를 좇아 배필 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인종을 전하자고 도모하였다. 곧 종족을 보존하자는 뜻이다. 어쩌면 종족 보존의 욕망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강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큰딸이 아비 롯에게 술을 마시게 하여 만취상태에 빠지게 한 후 롯과 동침하였다(창 19:33). 다음 날 밤에는 작은 딸이 같은 방법으로 그런 패륜을 범했다(창 19:34-35). 이때 롯은 만취한 상태라 딸의 눕고 일어나는 것을 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19:33, 35).
이러한 롯의 두 딸의 추악한 부친상간의 악습은, 저들이 소돔의 타락한 성문화에 얼마나 익숙해 있었던가를 짐작케 한다.

(2) 두 딸에게서 난 자들이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
창세기 19장 36-38절에 「롯의 두 딸이 아비로 말미암아 잉태하고 큰딸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모압이라 하였으니 오늘날 모압 족속의 조상이요 작은 딸도 아들을 낳아 이름을 벤암미라 하였으니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었더라」고 하였다.
여기 ‘모압’은 ‘메아브’(ba'me) 곧 ‘아버지로부터’라는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롯과 큰 딸 사이에 생긴 패륜의 열매이다. 성경에서 ‘모압’이라는 말이 나올 때는 사람의 이름으로나 아니면 그 자손들이 살던 지방을 가리키고 있다.
이들의 영토는 주로 아라비아 사막과 서쪽으로 사해, 남쪽으로 에돔, 북쪽으로는 아르논강 사이에 위치한 전 지역이다(민 25:1-3). 구약성경에는 모압이란 이름이 25회 가량 나오는데, 모압 족속이 섬긴 신의 이름은 그모스였다(민 21:9, 왕상 11:7, 33).
그리고 38절의 ‘벤암미(yMi['-@B])는 ‘내 백성의 아들’, ‘내 근친의 아들’, 혹은 ‘암(몬)의 아들’ 등의 의미를 나타내는 말이다.
벤암미는 오늘날 암몬 족속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이는 롯과 작은 딸 사이에 생긴 패륜의 열매였다. 주로 요단강 동편 얍복과 아르논 두 강 사이에 자리잡았는데 모압의 북쪽이 된다. 저들 거주지의 중심은 현재의 암만(Amman)이다. 저들의 신은 몰렉이었다(레 18:21, 왕상 11:7)).

(3) 이 본문의 기록에서 받는 영적 교훈

① 성경기록의 신실성을 보게 된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내촌감상) 씨는 이 부분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말씀이라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 이유는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이 어찌 이런 패륜 사건을 기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견해는 잘못이다.
성경의 기록은 언제나 사실의 기록이고 진실이다. 타락한 인간의 죄악을 아무런 여과없이 그대로 기록함을 통하여 오히려 성경의 진실성을 더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어두운 장면의 기록은 여기뿐이 아니다.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인간의 부정과 불결함이 얼마나 많이 기록되어 있는가? 성군이라 일컬어지는 다윗이 그러했고, 예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가 그러했다. 야곱의 아들 유다, 선지자 요나, 예수의 제자 도마 등등 성경은 저들의 인간됨을 여지없이 폭로했다. 그래서 예수는 죄인의 구주임을 알게 한 것이다(막 2:17, 딤전 1:15).
중국의 성인 공자의 제자가 3000명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제자들에 관한 기록을 보면 3000명 제자들의 생애에 아무런 흠이 없다고 한다. 그런 아무런 흠이 없는 기록이야말로 그것이 진실이 아닌 기록임을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② 패륜의 씨(후손)는 언제나 선민의 대적 노릇을 했다는 사실이다.
신명기 23장 3절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고 하였다.
그 이유를 신명기 23장 4절 이하에 기록하고 있다. 저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 영접하지 아니했을 뿐만 아니라 방해하고, 심지어 거짓 선지자 브올의 아들 발람에게 뇌물을 주어 이스라엘을 저주케 하려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민 23-24장).
이사야 16장 6절에도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 그의 거만하며 교만하며 분노함도 들었거니와 그 과장이 헛되도다」라고 하였고, 예레미야, 에스겔, 스바냐서에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모압을 저주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③ 롯은 부끄러운 구원을 얻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대 홍수 후에 구원받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는 실수를 한 것을 보았다(창 9:20-24). 그러나 그 아들 셈과 야벳이 아비의 실수를 가려주는 밝은 장면을 보았다.
그러나 롯의 실수는 노아의 실수 정도가 아니었다. 그는 성적 패륜을 범한 장본인이고, 그의 딸들이 여기에 주역이 되었다. 그의 생애는 언제나 밝고 유쾌하고 명랑하지 못한 면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삼촌 아브라함을 떠나 소돔을 택하여 떠났던 것이 큰 잘못이었다(창 13:10-11). 그때 그의 육안은 밝았으나 영안은 어두웠다. 후에 전쟁을 통하여 징계를 받을 때 삼촌 아브라함의 대의적인 의리로 구원되었을 때도(창 14:12) 삼촌 쪽으로 따라 오지 않고 그대로 소돔에 머문 것도 어두운 처사였다.
하나님의 사자들이 소돔성의 심판을 예고하고 급히 피난할 것을 재촉할 때도 그의 태도는 극히 미온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멀리 산까지는 도망할 수 없다는 말까지 했다. 그가 살던 소돔이 하나님 심판의 대상이 되어 멸망을 받을 때, 피난 중에 그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소금기둥이 되어 결국 아내마저 잃었다.
해질 때 소돔성에 도착했던 천사들이 롯과 딸들의 손을 이끌어 소알에 도착했을 때는 해가 돋을 정도였으니 그의 행동이 얼마나 영적으로 둔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거기에다가 피난 후에는 타락한 방법으로 자손을 생산하기까지 했는데 그 자손 모압과 암몬은 영원히 선민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보면 롯이 구원을 받았겠는가 하는 의구심마저 일어날 정도이다. 그러나 베드로후서 2장 6-8절에 보면 「소돔과 고모라 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으며 무법한 자의 음란한 행실을 인하여 고통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니라)」고 롯의 구원을 확실히 기록하고 있다.
‘고통하던 롯을 건지셨다’, ‘이 의인이 저희 중에 거하여 날마다 저 불법한 행실을 보고 들음으로 그 의로운 심령을 상하였다’고 하였다. ‘의인’, ‘의로운 심령’이라고 하였다. 물론 이 의는 아브라함에게 비할 바가 못된다. 이는 죄악의 성 소돔 사람들에 비해 쓰여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롯에게 인자를 더하셨다고 하였다(창 19:16). 롯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큰 인자를 베푸셨다는 것을 알았다(창 19:19).
그럼에도 그의 구원은 부끄러운 구원같이 느껴진다. 구원 중에는 부끄러운 구원도 있고, 영예로운 구원도 있다. 부끄러운 구원은 그 믿음에 따라오는 행위에 대한 상급(열매)이 없는 것이다. 예컨대 낙원에 이른 한편 강도의 경우가 그러하다(눅 23:43).
롯의 경우 그에게 속한 자가(창 19:12) 없었다. 사위에게까지도 롯의 전도는 힘이 없었다. 농담(조소)거리로 여겨질 뿐이었다(창 19:14). 아내마저 떨어져 버렸다(창 19:26). 겨우 두 딸이었으나 그 딸들까지도 불륜의 자식이 되어 버렸다. 그럼에도 성경은 의인 롯이라고 칭했다. 그를 건지셨다고 했다. 삶의 열매가 없었다. 영적인 영향력이 없었다. 그래서 부끄러운 구원에 속한 자 같다.
영예로운 구원은 그 믿음의 행위에 상급, 축복, 열매가 따르는 것이다. 30배, 60배, 100배의 축복이 따르는 것이다. 땅에 떨어진 한 알의 밀알은 죽음을 통하여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이다. 이것을 인자의 영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12:23-24)?
요한계시록 14장 13절에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가로되 기록하라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가라사대 그러하다 저희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저희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고 하였다. 요한계시록 21장 26절에 「사람들이 만국의 영광과 존귀를 가지고 그리로 들어오겠고…」라고 하였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전 세기, 전 지역에서 주의 복음을 전한 결과 맺은 축복의 열매들, 복음의 전리품들을 가지고 영광의 새 예루살렘성에 입성한다는 말이다. 이런 경우 실로 영광스러운 구원이 아닌가? 롯에게는 이런 것이 따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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