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강) 긍휼히 여기는 자! (마 5:7)
오늘 우리는 기독교인들에게 주어진 황금률인 팔 복의 다섯 번째 복 앞에 섰습니다. 팔 복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되어집니다. 1-4복까지는 예수 믿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한 자세에 대한 말씀이고, 5-8복은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이웃에 향한 자세에 대한 말씀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성도의 자세는 무엇인가? ⑴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갈급해 하고 겸손히 낮아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⑵죄에 대하여 심각하게 애통해야 합니다. ⑶하나님의 거룩을 바라보는 온유한 모습을 가져야 합니다. 온유는 잘 길들여진 마음입니다. 성령으로 잘 길들여진 성도가 온유한 자입니다. ⑷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사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이제 오늘 그 다섯 번째는 성도가 이웃을 향한 마음의 자세를 말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 '복이 있나니' 그랬는데 복이란 대체 무엇입니까? 고대인들은 대체로 복의 개념을 ⑴훌륭한 아내를 맞는 것 ⑵부유해지는 것(재물) ⑶평안을 누리는 삶 ⑷덕을 쌓는 일 ⑸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고종명) 이런 사람을 가리켜 5가지 복 받은 사람이라고 5복 자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에는 말하는 '복이 있나니'에서 복의 개념이 무엇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복의 원어는 '마카리오스'인데 이 마카리오스는 4가지 경우에 쓰이는데 그 4가지 경우에 속할 때 복된 것입니다.
①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섰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복의 출처가 되십니다. 딤전1:11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물고기는 물 속에 있을 때가 본래적인 모습이듯이 인간은 하나님 안에 있을 때가 본래적인 상태요, 복된 상태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우리는 당신이 창조했기에 당신 안에서만이 참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축복 자는 하나님께 발견되어지고 하나님을 발견한 자가 정말 복된 자입니다. 해만 바라보는 해바라기처럼 주님만 바라보는 주 바라기가 되십시오, 주님은 당신은 복된 자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②'마카리오스'라는 말은 '바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바치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역설적인 말입니다. 복이란 말은 피의 제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구약의 피의 제물은 하나님께 바치는데서 나온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소유가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치는 그 자체가 복이라고 했습니다.
쉽게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소유는 인간을 욕망의 포로를 만듭니다. 미국의 한 여자가 영양실조로 굶어 죽었는데 그 집 안방 금고에서 약 5억 원의 현금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 재물을 쌓아갈 때는 탐욕이 생기지만, 하나님께 드릴 때는 흥분이 있고, 기대가 있고, 설렘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맛보지 못할 즐거움입니다. 행20:35절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할/
③'마카리오스'라는 말은 '남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 준다.'는 뜻입니다. 어떤 불쾌한 감정이 오더라도 복스러운 말은 하고 저주스런 말을 하지 않은 상태를 '마카리오스'라고 합니다. 남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자가 복된 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자신을 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치고 입으로 침 뱉고 마음을 아프게 하는 자들에게 열두 영 더 되는 천사들을 동원시켜 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카리오스'의 복입니다. 사람들은 조그만 사건에도 너무 들 흥분합니다. 그러나 바다는 65억의 오물을 다 받고도 말이 없습니다. 하늘은 65억의 잘못을 다 보고도 침묵을 지키고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 포근한 마음, 어머니의 마음 같습니다. 돌 던지는 이에게 사랑을 던지는 마음, 오른 뺨을 칠 때, 왼뺨을 돌려 대는 심정, 이것이 '마카리오스'의 복입니다. /할/
④'마카리오스'라는 말은 '심령의 오아시스'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복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솟는 것입니다. 즉, 자기 안에서 솟아납니다. 외부적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상황에 대처하는 마음의 자세가 문제입니다.
욥은 동방에서 최고의 의인입니다. 그는 동방에서 최고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다 잃어버렸습니다. 재산도, 건강도, 아내도, 자식도, 친구도, 명성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렇다고 행복까지 잃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언제나 행복했습니다. '주신 자도 여호와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임을 믿고 고백했습니다.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과 내일' 이 두 가지는 꼭 붙잡았습니다. 욥은 외부적으로 싸늘한 환경이지만 내부적 평강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내 안에 오아시스처럼 솟아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마카리오스'의 복입니다. /할/
주님이 이 말씀을 선포하실 때, 그 당시 사회적인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을 때 시대적인 상황은 이스라엘을 강력한 힘의 나라 로마의 지배를 받을 때였습니다. 로마는 힘을 숭배하는 나라요, 철학을 근거로 세운 나라입니다. 로마인들은 힘이 있는 무사와 용기 있는 자를 존경하였고, 긍휼이나 자비심을 경멸했습니다. 철학을 존중하는 로마인들은 긍휼이나 자비를 '영혼의 질병'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노예는 주인에 의하여 무참히 살해되었고, 여자와 아이들의 인권은 무시된 채 노리게 감에 불과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원했는데 부인이 딸을 낳으면 그 아버지는 얼마든지 그 딸도 죽일 수 있는 사회가 바로 그 당시 로마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배경에서 우리 예수님께서 긍휼에 덕을 가르치셨습니다. 얼마나 값진 교훈입니까?
▶그렇다면 긍휼은 무엇입니까? 원어적인 뜻을 보면 '자비, 인자, 사랑, 친절, 따뜻한 마음', 더 나아가서는 '변함 없는 사랑'으로 변역 됩니다.
본래 긍휼은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로 타락한 인간의 마음속에는 용서해주고 싸매어 주는 긍휼이 없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긍휼은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무한히 용서하시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이 마음을 받아야 베풀 수 있습니다.
▶사랑을 말할 때 상대를 따라 세 가지로 구분됩니다.
①나보다 높은 사람을 향한 사람이 있습니다. 부모나, 스승, 상관에게 하는 사랑은 존경, 공경, 경외라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②나와 동등한 위치에 있는 사람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친구, 연인, 동료들에게 하는 사랑을 우정, 애정, 연정이라고 합니다.
③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향한 사랑을 가리켜 긍휼, 인자, 또는 자비라는 말을 씁니다. 그래서 본문에 나오는 긍휼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할 때,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합니다. 삼하24:14절 '다윗이 갓에게 이르되 내가 곤경에 있도다.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내가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노라' 또한 시145:9절에서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 /할/
하나님의 최대 긍휼은 죄와 허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시게 한 것입니다. 엡2:4-5절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아멘!/
우리는 모두 주의 긍휼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받고 사는 우리는 이제 그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요일4:11절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였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또 긍휼이라는 말은 '엘레오스'라는 말로 자비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70인 역에서 '사랑'이라는 뜻의 '헤세드'와 '동정'이라는 뜻의 '라하밈'의 변역어로도 사용된 말이기도 합니다. 이중 히브리어 '헤세드'는 다양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특별히 주인과 종, 하나님과 인간의 언약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구약에서는 이 말을 주로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언약의 성취 자이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구원의 사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100여 년 전에 장래가 촉망되는 미국의 젊은이 언더우드와 아펜셀라가 왜 풍요로운 미국 땅을 버리고 오지인 한국까지 오게 된 것입니까? 하나님을 모르고, 구원과 생명의 길을 모르고, 참 진리를 모르고,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의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고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불쌍히,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한국 땅에 건너온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복음의 역사, 생명의 역사, 구원의 역사가 이 한국 땅에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삼천리금수강산에 사람들의 영혼까지 보석처럼 아름다워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긍휼입니까?
①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헬라어원인 '엘레오스'를 직역하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두 가지 면에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⑴'어려운 자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약한 자, 고통을 겪는 자, 가난한자, 외로운 자를 불쌍히 여기는 무한한 동정심이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과 무관할지라도 적극적으로 그의 입장에 서서 그를 이해하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배고픈 사람의 입장에서 그 사람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병들어 고통 받는 자의 입장에서, 어려움 속에서 고생하는 자의 입장에서, 그런 의미에서 긍휼은 사랑의 구체적인 설명이요, 실천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멘!/
주경학자 '렌스키'는 '단순히 사람을 동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에서 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클레이' 교수는 '단순히 타인을 동정하거나 도와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입장에서 그 처지와 형편을 보고 느끼는 공감대'까지 해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웃의 정신과 마음속에 들어가서 마침내는 그가 느끼는 대로 함께 느끼고 아파하는 상태가 본래 주님이 말씀한 의도라고 했습니다.
▶16세기 이후 서구인들이 아프리카 항로를 발견한 후 17세기부터는 많은 서구인들이 사하라 사막 남쪽 밀림의 대륙을 답사하면서 많은 금과 진주, 다이아몬드를 캐냈습니다. 그리고 흑인들을 사냥하듯이 붙잡아 노예로 부려먹었습니다. 이러한 때, 리빙스톤은 흑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억제할 수가 없어서 복음을 들고 아프리카를 찾았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슈바이처가 그 길로 갔습니다.
긍휼이란 그야말로 '자기를 희생하면서 어려운 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긍휼과 사랑과 은혜란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란히 살아가는 의좋은 세 자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왓슨은 '사랑이 애인을 방문하는 친구와 같은 것이라면 긍휼은 병자를 방문하는 의사와 같다'고 했습니다. 적십자사운동의 창시자 나이팅게일은 고향을 떠나 크리미아 전쟁터에 찾아가 군인들의 상처를 치료해 주었습니다. 이런 봉사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유명한 성 프랜시스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말을 타고 길을 가는데 웬 거지가 추위에 떨면서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 프랜시스는 말에서 내려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거지가 '너무 춥다.'고 대답하자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거지에게 입혀 주었습니다. 옆에 있던 제자가 '그러면 거지는 따뜻해 질 수 있지만 선생님은 춥게 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성프랜시스는 '거지를 불쌍히 여긴다면 내 옷을 벗어 주고 내가 대신 추위에 떨어야 한다네. 자신의 추위를 계산하면 옷을 벗어 줄 수 없지만, 긍휼이란 나이 손해를 생각하지 않고 다만 그가 얼마나 추울까만 생각하고 옷을 벗는 것이라네.' /할/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긍휼의 모습입니다.
⑵'원수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나를 학대하고 못살게 하고 적대시하는 사람, 또 온갖 죄악을 저지를 사람들에 대해 불쌍히 여기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달아 죽인 원수까지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소하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니이다.' 원수까지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을 때 죄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할/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레 선생이 길을 지나가다가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웨슬레으 절친한 친구와 사이가 나빠서 서로 욕하고 원수로 지내는 중이었습니다. 웨슬레가 그에게 '형제님, 아직도 그 친구를 미워합니까?'라고 묻자, 당연한 듯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웨슬레가 '이제 웬만하면 용서하시지요'하고 화해를 권했지만 그는 여전히 이를 갈면서 '그놈만은 죽어도 용서할 수 없다'고 욕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웨슬레는 '좋습니다. 마음대로 하세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당신은 절대로 죄 지으면 안 됩니다.' '왜요?' '그렇게 남을 용서하지 못하니 당신도 용서받지 못할 것 아닙니까? 그러니, 당신은 절대 죄지으면 안 됩니다.'라고 따끔하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한량없는 용서를 받은 자로서 그것은 생각지 못하고 형제의 작은 잘못에 분노하고 원한을 가지고 대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똑같은 죄를 얼마나 자주 범하며 살아갑니까?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연약하여 생각으로 죄를 짓고 입술로 죄를 짓고 행동으로 죄를 짓고도 하나님 앞에 나아와 '이 죄인을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한량없는 긍휼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다 용서해 주시는 놀라운 자비와 긍휼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멘!/
②긍휼은 용서하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진리 가운데 조건부 교훈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⑴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겸손하고 순수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⑵남의 잘못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도 용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18:35절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믿/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문을 보세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주님은 삭개오와 같은 매국노도 불쌍히 여겨 용서해 주셨고, 간음한 여인도 용서해 주셨습니다. 주님은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리는 무한정의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엡4:32절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할/
우리가 남을 용서할 수 있을 때, 우리도 하나님께 용서를 구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 하나님 앞에 모여 예배드리고 있습니다. 조용히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 보십시다. 아직도 마음에 섭섭한 사람, 원망스러운 사람, 미운 사람, 내가 이겨야지 하는 어떤 적대감, 시기심을 품고 있지는 않은 지요, 조용히 푸시길 바랍니다. 정 용서할 수 없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 용서의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남을 용서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용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마음자세가 중요합니다.
⑴용서는 아픔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 자신이 먼저 많은 아픔, 고통, 괴로움을 겪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의 아픔을 건져내셨습니다.
⑵용서는 책임이 동반됩니다. 남의 잘못을 용서할 때는 먼저 내 마음 속에 남의 잘못에 대해 내가 함께 책임지겠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님도 우리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 담당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우리가 용서도 받았으니 남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할/
③긍휼은 편견이 없는 넓은 마음입니다. 성 프란시스가 어느 추운 날 말을 타고 외딴 길을 가는데 거기 거지 하나가 추위에 떨면서 구걸하고 있었습니다. 말에서 내려 가만히 살펴보니 문둥병자였습니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추위를 생각지 않고 외투를 벗어 문둥이에게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거지가 한술 더 떠서 이런 요구를 합니다. '선생님! 나를 한동안 꼭 껴안아 주시겠습니까?' 프란시스는 문둥병이 옳으면 어찌하나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진심으로 그를 껴안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편견이 없는 넓은 마음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마음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긍휼의 마음은 남의 문제를 내 문제로 아는 마음입니다. 남의 고민을 내 고민으로 여기고 남의 사정을 내 사정으로 느끼는 심정입니다. 거기에 진정한 사랑이 있고, 용서가 있습니다.
▶주님은 눅10:30절 이하에 긍휼의 깊은 의미를 우리들에게 주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여리고에서 강도 만난 자의 이야기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 만난 사람 곁으로 한 제사장이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지나갔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경우, 어떤 동정이나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전혀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냥 지나갔다고 기록합니다. 이때 또 한 사람이 지나갔습니다. 그는 세상 적으로 볼 때 별 볼일 없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길가에서 강도 만나 죽어 가는 사람에게 상상할 수 없는 도움을 주었습니다.
33절 이하를 보면 ⑴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⑵가까이 가서 ⑶그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어 주고 ⑷자기 말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는 ⑸이튼날에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을 돌보아 주시오, 부비가 더 들면 내가 올 때에 갚아주겠소!'
이 사람이 보여준 것이 긍휼입니다. 편견 없는 넓은 마음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을 적대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사마리아 사람의 세 가지 귀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⑴긍휼의 대상이 누구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죽어 가는 사람의 신분이 누구인가를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그 사람이 누구인자보다 당장 죽게 된 그의 형편이 더 중요했습니다.
⑵긍휼은 자기 자신을 생각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이익과 체면을 생각했다면 그는 결코 강도 만난 사람을 돌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기의 이익과 생활이 없는 일에 시간과 돈과 정열을 다 쏟아 놓았습니다. 돈이 더 필요하면 돌아올 때, 갚아주겠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은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요즘 이런 사람이 있다면 병신으로 보던지 미친 사람으로 볼 것입니다.
⑶긍휼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긍휼은 가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과 발에 있어야 합니다. 긍휼은 구체적으로 형통입니다. 어떤 사람은 눈물을 많이 흘리고 감격을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도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런데 행동이 없습니다. 이것은 긍휼이 아닙니다. 긍휼은 구체적으로 말없이 행동하는 것이요, 아무도 모르게 실행하는 믿음이랍니다. /믿/
▶홀트 여사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홀트 여사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버려진 많은 아이들을 보았습니다. 그 마음에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을 외국에 입양시키는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버려진 아이들에게 새 삶을 살게 하는 홀트 아동복지회가 세워졌습니다. 이 복지 회를 통하여 많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튼튼하게 자라났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귀한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었습니까? 바로 긍휼히 여기는 마음, 불쌍히 여기는 마음 때문입니다. /아멘!/
▶사도 바울이 빌립보 성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성을 지날 때에 한 여인이 바울을 보고 소리를 지릅니다. 행16:17절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고 소리를 지르고 다닙니다. 이 점쟁이 여자는 진짜 점쟁이입니다. 바울과 실라를 보는 순간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생명의 복음,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 여인이 이렇게 귀신같이 맞추는 것은 그가 귀신에 붙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 만 아니라 이 여인은 종으로 주인에게도 붙잡혀 있었습니다. 점치는 것을 통하여 많은 돈을 버는데 이 돈은 다 주인이 챙겼습니다.
바울이 이 여인을 바라보면서 불쌍히 여겼습니다. 육신은 다른 사람의 종으로 종의 사슬에 묶여 있고, 영혼은 악한 영에게 붙잡혀 있는 이 여인을 긍휼히 여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귀신을 쫓아내어 그 여인을 악한 영의 사슬에서 자유케 해 주었고 그 영혼을 구원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인의 주인 되는 사람은 여인에게서 귀신이 떠나서 귀신같이 맞출 수가 없이 되었고, 더 이상 점을 쳐서 돈을 벌 수 없게 되었습니다. 화가 난 주인은 바울과 실라를 고소하자 바울과 실라는 붙잡혀 매를 맞고 빌립보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주인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여인이 종으로 붙잡혀 있던지, 귀신에 붙잡혀 있던지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돈 버는 일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여인을 귀신의 손에서 벗어나게 하였고, 영혼을 살리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라멘!/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웃에게 긍휼함을 나타내야 합니다. 마18장에서 예수께서 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신하가 임금님께 많은 돈을 빚졌습니다. 그러나 형편이 어려워서 꾼 돈을 갚을 수가 없었습니다. 옛날에 돈을 빚지고 갚지 못하면 종이 됩니다. 자식이 종으로 팔려가고, 아내가 종으로 팔려가고, 자신도 종으로 팔려 가야 했습니다.
많은 빚을 졌지만 갚을 능력은 없고, 이제 가족 모두가 종으로 팔려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제부터 자자손손이 종의 멍에를 메고 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방법으로 이 신하는 임금님 앞에 나아가 엎드렸습니다. 자신의 딱한 사정을 말하면서 열심히 일해서 조만 간에 임금님의 돈을 모두 갚겠다며 불쌍히 여겨 줄 것을 애원했습니다.
임금님은 사정하는 신하에 대하여 긍휼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불쌍히 여겼습니다. 임금님은 은총을 베풀었습니다. 신하의 그 많은 빚을 나중에 갚으라고 유예시켜 준 것이 아니라 아예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갚지 않아도 됩니다.
그 많던 빚더미에서 벗어난 신하는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잠을 잘 때에도, 길을 걸어 갈 때에도, 음식을 먹을 때에도 자신이 갚아야 할 빚을 생각하면 밥맛이 없었고,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긴 한숨만이 튀어 나왔었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빚더미에 눌려지냈어야 했습니다. 임금님에게 나중에 갚겠다고 말을 하였지만 사실은 갚을 수 없는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빚을 탕감 받은 것입니다. 그렇게도 자신을 짓누르던 빚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날아갈 것만 같습니다. 오랜만에 삶의 희열을 느꼈습니다. 이렇게 큰 기쁨을 가지고 거리를 활보할 때입니다.
자신에게 약간의 돈을 빌려간 사람을 만났습니다. 곧 갚겠다고 말을 하면서도 여태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신하는 이 사람을 붙잡고 끌고 갔습니다. 왜 돈을 갚지 않느냐고 다그쳤습니다. 곧 갚겠다고 사정하는 그를 발로 차고 때리고 옥에 가두었습니다.
자신의 돈을 갚지 않는 자에게 이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를 지켜본 사람들이 심히 민망하여 임금님에게 가서 신하가 한 일을 다 아뢰었습니다. 이를 들은 임금님은 몹시 노하셨습니다. 당장 그 신하를 끌고 오게 했습니다. 임금님은 그를 무릎 꿇어 앉힌 뒤에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그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고 말씀하시며 그가 그 빚을 다 갚도록 감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우리들이 참으로 더럽고 추한 죄인이고,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저주와 형벌의 장소인 지옥에 던져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데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불쌍히 여기셔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의 이 더럽고 무서운 죄를 다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무거운 죄의 짐을 다 벗겨 주셨습니다. 죄의 사슬에서 풀려나 자유 함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로서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이 비유의 결론인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 같이 너도 그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라는 말씀처럼 우리도 이웃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기도 중에 가장 중요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입니다. 마6:12절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 이웃의 죄를 용서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마6:14-15절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할/
▶이 긍휼은 어떻게 우리에게 전가됩니까?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주님과 연합할 때, 우리에게 이식되는 성품이 긍휼입니다. 여러분! 인간이 본능적으로 긍휼의 성품을 갖고 있다고 보십니까? 성경의 진단은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우매한 자, 배악하는 자, 무정한 자, 무자비한 자라고 롬1:31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면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옷 입는다.'고 바울은 골3:12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긍휼은 성도가 완성해야 할 덕목 중에 하나랍니다. 히4:16절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할/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긍휼을 받아야 합니다. 이 받은 긍휼을 가지고 이제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합니다. 누구에게 베풀어야 합니까?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야 합니다. 우리는 특별히 예수를 모르는 죽어 가는 불쌍한 이웃에게 이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은 목자 없이 유리하는 영혼들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사람들은 각자 사람들을 보는 눈이 다릅니다. 학자는 사람을 대할 때 무식과 유식으로 다룹니다. 상인은 사람을 대할 때 돈으로 생각합니다. 정치인은 사람을 한 표로 봅니다. 군인은 사람을 적군, 아군으로 나눕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인 저와 여러분은 사람을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저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지 안 믿는지, 저 사람이 지옥으로 갈 것인가 천국으로 갈 것인가를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아멘!/
유명한 '찰스 피니' 목사는 어느 날 시카고 번잡한 거리에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고 운 것입니다. 왜 울었을까요? 예수 없이 살아가는 영혼이 불쌍해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그 영혼이 불쌍해서 울었답니다. 우리에게도 이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이 긍휼의 마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십시다. 기도할 때 긍휼의 마음을 주십니다. 특별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랑할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십시다. 우리 그리스 찬에게 이웃이란 미움의 대상이 아니라 오직 긍휼의 대상이요 기도의 대상입니다. /할/
▶그런데 성경에 보면 긍휼을 입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 죄 두 가지가 있습니다.
⑴불신의 죄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긍휼을 베풀어주려고 해도 하나님의 긍휼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긍휼을 입지 못하고 결국 불과 유황과 타는 불 못에 던지움을 당합니다.
⑵성령을 훼방하는 죄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일을 훼방하고 대적하는 자는 결국은 망하게 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긍휼이 여기는 자가 받을 복은 무엇입니까?
①자기에게 유익이 옵니다. 딤전1:2절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의 순으로 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발견하고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긍휼이 있습니다. 또한 이 긍휼을 체험한 사람들에게 평강이 있습니다. 이 평강은 주님이 주시는 평강입니다(요14:27).
②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긍휼을 베풀면 우리는 또한 이웃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이것은 성경의 교훈이며 동시에 역사의 교훈입니다.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고,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둡니다(갈6:7-9). /아멘!/
③하나님으로부터 긍휼하심을 받습니다. 이것이 최고의 복입니다. 출33:19절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할/아멘!/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놀라운 역사를 이룹니다. 첫째, 나에게 은혜가 되고, 둘째는 이웃을 복되게 하고, 셋째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어느 마을에 행실이 바르지 못한 아들을 둔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너에게 착한 사람이 되라고 수 없이 타일렀지만 아무 소용없는 일이니 이제부터는 네 스스로 좋지 못한 일을 했다고 느낄 때마다 저 기둥에 못을 하나씩 박도록 해라' 아들은 어머니의 소원인데 그까짓 것 못하겠느냐는 마음으로 기둥에 못을 박기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더 이상 못을 박을 곳이 없게 될 정도로 기둥에는 못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날 밤 이 아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해서 못된 짓이라고 한 것만 해도 저렇게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남이 볼 때는 내가 얼마나 많은 못된 짓을 했을까?' 그리고 밤새도록 참회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다음날 아침 아들은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습니다. 어머니는 차분하게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그만 눈물을 닦아라. 네가 네 잘못을 뉘우쳤다면 그것으로 됐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하도록 하고 그 때마다 저 기둥의 못을 하나씩 빼도록 해라' 아들은 그 날부터 새사람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둥에 꽉 찼던 못이 말끔히 다 빠졌습니다. 그러나 기뻐하기보다는 오히려 가슴이 아팠습니다. 기둥에 남아있는 못 자국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못 자국을 볼 때마다 지난날을 생각하며 마음속의 못 자국을 지우기 위해 더욱 선한 일에 힘썼다고 합니다. /할/
우리의 온전치 못한 행위를 볼 때마다 주님의 못 자국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못된 마음 때문에 남은 못 자국입니다. 나의 교만 때문에 생긴 못 자국입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 스스로 아무대가 없이 만드신 흔적입니다.
'버클리'는 '긍휼히 여기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연합시키고 긍휼히 여기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우리를 갈라놓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남을 긍휼히 여기면 하나님과 내가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된다는 것입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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