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19강)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마 5:17-2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28

(제19강)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 (마 5:17-20)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크게 세 가지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고, 모든 병과 악한 것을 고치시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삼대 사역이고 우리 교회의 영원한 표어입니다.
  예수님은 가는 곳곳마다 병든 자를 치료해 주시고, 배고픈 군중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풀어 배불리 먹고도 12광주리를 남기는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사역 초기에는 많은 기사와 이적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이 메시아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산상보훈의 하이라이트는 팔 복입니다. 우리는 팔 복을 다 배웠습니다. 팔 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눠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을 향한 성도의 마음'입니다. ⑴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우리는 채워지기 전에 먼저 비워야 합니다. 세상의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은 위엣 것으로 채울 수가 없습니다. 욕심을 비우고 낮아진 마음이 바로 겸손입니다. ⑵애통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죄에 대하여 애통해야 하고, 이웃에 불쌍한 영혼을 위하여 애통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⑶온유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온유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잘 길들여진 성품을 의미합니다.

  또 ⑷의에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건강한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왕성한 식욕입니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의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말합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려면 끊임없이,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 /아멘!/
  두 번째로는 '성도들이 이웃을 향한 마음'으로 ⑴긍휼이 여겨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이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자비의 마음입니다. ⑵마음이 청결해야 합니다. 이 말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을 말합니다. 즉 세상으로 한 발짝 교회로 한 발짝이 아니라 온전히 인생의 초점을 하나님께 맞추는 것입니다. 라디오도 사이클을 잘 맞추어야 잡음이 없습니다.

  그리고 ⑶화평케 해야 합니다. 나누어진 곳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화해 자로 오셨습니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고 이웃과 화평을 누려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⑷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도 견디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죄를 지어 당하는 핍박은 가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삶은 살기 위해 당하는 핍박은 귀한 것입니다. 성경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에게 어떤 복이 있습니까?
  ⑴천국의 시민권을 갖는 복이 임합니다. 미국에서 살려면 미국 시민권이 있어야 하고, 한국에서 살려면 한국의 시민권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가서 살려면 천국의 시민권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만 주어지는 비자입니다. 천국은 아무나 못 들어갑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들만 들어가는 곳입니다.
  ⑵하나님의 위로를 받습니다. 부모의 위로도 귀합니다. 남편의 위로도 힘이 됩니다. 그러나 창조주 하나님이 위로는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위로입니다. 이런 위로 속에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위로 자는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할/
  ⑶땅을 기업으로 차지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땅은 세상의 땅이 아니라 약속의 땅을 의미합니다.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⑷배부름의 복입니다.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원어 성경에는 '살찌게 한다.'로 나와 있고, 영어 성경은 '만족한다.'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⑸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그렇습니다. 심은 대로 거둡니다. 갈6:7절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심을 때 거두는 질서의 법입니다. /아멘!/
  ⑹하나님을 보는 축복입니다.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눈이 어두워진 인간은 절대로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⑺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 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신분은 대단합니다.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보호를 받게 되고 하늘나라의 기업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믿/
  ⑻선지자와 순교자의 반열에 서는 축복입니다. 12절에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그 다음 13-16절에서는 팔 복을 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소금이 되고, 빛이 되고, 산 위에 동네가 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살 때 제구실을 다하는 삶을 살라'는 당부입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이 시작됩니다. ◀제목 소개!▶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당시 많은 사람들과 종교 전문가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구약을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구약 해석에 충동을 일으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구약의 가르침과 다르다고 하며 계속 공격하는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네가 전하는 말씀이 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희들이 구약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잘못된 안식과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책망하셨습니다.
  한 예를 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명령 앞에서 그들은 겉으로 살인만 하지 않았으면 율법을 잘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해석은 다릅니다. 사람이 마음에 미움을 가지고 있거나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바로 살인한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율법의 메시지의 본질을 바로 해석해 준 것입니다.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예수님은 율법인 창3:15의 말씀대로 여자의 후손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성경 말씀대로 처녀의 몸에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또 미가 선지자가 기록한 성경 말씀대로 예수님은 유다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고난을 받으시고 성경 말씀대로 죽으셨습니다. 성경대로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사흘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하늘에 오르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은 성경에 절대적으로 순종하시고 그의 순종적인 삶을 통해서 성경 말씀을 완전케 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를 생각해 보십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얼마든지 예수님 자신의 새로운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 다 신명기에 있는 성경 말씀으로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 보더라도 예수님은 그만큼 성경 말씀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셨습니다. /할/


  ▶예수께서 하신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러 왔다.'는 말씀 속에는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①구약의 율법이나 선지자들의 글은 완전하다고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은 완벽합니다.
  ②구약의 뜻과 예수님의 뜻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금 은혜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구약의 율법이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구약에 기록된 모든 율법은 일획 일 점까지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은혜와 연합해서 더 완벽하게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계십니다. /할/
  ③오히려 예수님의 말씀과 행위가 구약의 말씀을 완성시킨다는 뜻입니다. 깊은 신앙을 가졌던 사도바울도 롬10:4절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당시 유대인들은 나사렛 예수가 율법을 폐하러 왔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여기 '폐한다.'는 말은 '흩으러 뜨린다.'는 말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모아서 조직적으로 정리해 놓았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것을 전부 흩트려 뜰이고 망가뜨린다고 오해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본문 17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완전케 하려'오신 분입니다. 여기 '완전케 한다.'는 말은 '성취하기 위해서, 율법을 다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의 마침'이란 '율법의 끝이란 말로써 율법의 완성이란 뜻'입니다. 이 말은 대단히 중요한 용어로써 로마서에서 한번 나오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다 지킨 의인이지만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인 된 모습으로 돌아가시어 죄인을 의롭게 하신 것입니다. /할/
  여기 '마침'이란 율법의 요구가 다 채워졌다는 의미입니다. 또 다른 의미는 율법 자체가 예표적인 것인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완성되었다는 말입니다.
  구약시대는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순서를 보면 제사가 먼저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가 뒤에 오신 것 같지만 의미상으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그 의를 설명하기 위하여 미리 율법의 표를 보내주어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로마서에서 바울은 율법은 일시적인 것이요, 미완성의 것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필요했으며,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인도하는데 까지만 필요했습니다.   
  율법은 몽학선생으로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실제(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예표적으로 주어진 제사는 끝이 났습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의 전체를 뜻하고 있습니다. 모세 5경이 율법입니다. 학자들의 분석에 의하면 그 율법에는 세 가지 법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입니다.
  ⑴그러면 의식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제사와 관련된 법이요,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과 레위인에 대한 법이요,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성소, 즉 장소에 관한 법이요, 제사를 드리는 절기에 관한 법들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의식법입니다.
  출애굽기에도 많이 나오고, 레위기에도, 신명기에도 많이 나옵니다. 레위기를 읽다 보면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수많은 제사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의식들은 전부 장차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그 죽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모든 제사가 예수님의 십자가에 집중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면 번제로 죽은 염소처럼, 속죄제로 죽은 양처럼, 화목제로 죽은 황소처럼 우리 예수님도 인류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죽을 것이라는 것을 그 제사를 통해서 전부 예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어린양의 제물로, 자기 자신이 대제사장이 되어, 그리고 십자가를 거룩한 제사를 드리는 성소의 번제단으로 삼으시고, 그 위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보혈의 피를 흘리셨습니다. 실체가 와서 진짜 제사를 드린 결과 지금까지 그림자 같이 구약에서 드리던 모든 제사는 이제 끝난 것입니다.
  ⑵그리고 시민법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민족 가운데서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너는 내 것이다. 나는 네 하나님이다.' 하시고는 '너는 그러므로 거룩해야 된다. 다른 민족하고 구별되어야 된다.'면서 하나님이 직접 이스라엘을 통치하셨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신정 국가라고 합니다. 이 신정 국가를 하나님이 세우시고 직접 다스리는데는 자연히 구체적인 법들이 있어야 합니다. 백성들이 서로 이해 관계 때문에 싸울 때 판결을 내려 주어야 할 어떤 법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법, 저런 법을 많이 만들어 주셨는데 이것이 시민법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가 여자 옷을 입으면 안 되고, 여자는 남자 옷을 입으면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율법 시대에 산다면 바지를 입고 예배드리러 온 여자들은 다 쫓겨 나가야 합니다. '이런 음식은 먹지말고, 저런 음식은 먹어라.' 이것이 다 시민법입니다. 이런 시민법도 이제는 예수님이 오시므로 막을 내렸습니다. /할/
  ⑶도덕법은 십계명에 압축되어 있는 아주 중요한 법입니다. 이 법은 폐지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의지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상숭배를 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왜 살인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왜 간음하지 말라고 하시는지' 우리는 이 법을 통해서 그분의 의중을 읽을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원히 존속되는 이상, 이 법도, 이 법의 정신도 영원히 존속됩니다.
  하나님의 도덕법은 한 마디로 이렇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 다 포함이 됩니다. 이 법은 하나님의 거룩을 상징하는 영원한 법입니다. 이 법을 율법에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도덕법도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시민법도 의식법도 도덕법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케 되었습니다. /할/
  ▶선지자라는 말은 당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선포한 사람을 가리켜 선지자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선지자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미리 20절에 나오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⑴서기관은 '성경을 쓰는 자'라는 뜻으로 일반적으로 율법에 능통한 학자들입니다. 그들은 5세부터 교육을 받아 12세가 되면 배움의 아들이라는 고등 교육을 받아 30세가 되면 가르치기를 시작했는데 그들의 직책은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고, 송사하며, 재판하기도 했습니다.
  저들을 랍비나 율법사라고도 불렀고, 공회의원(산헤드린)도 되었습니다. 당시 상류사회에 속한 자들이요 지배층에 속하는 자들이요 소이 지금으로 하면 '인텔리'그룹입니다.
  ⑵바리새인들은 어떤 무리들인가 알아보겠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와 그리고 엣세네파 등의 3대 종파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유력한 종파가 바리새파입니다. 그들은 당시 약 6천명의 수를 헤아렸다고 하는데 한마디로 경건주의 자들입니다. 바리새파라는 말은 '분리주의'라는 뜻이 있습니다. 즉 다른 종파와는 분리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외형적으로만 율법을 잘 지키는 자 같았으나 율법주의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형식적이요 의식적인 자들입니다.
  ⑶그러면 당시 율법주의에 대하여 알아보겠습니다. 십계명이나 구약은 하나의 큰 원칙이지 세부규정이 없었습니다. 가령 '안식일을 거룩이 지키라'고만 했지, 안식일에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지 말아야 되고 무슨 일을 해도 된다는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후에 서기관들이 생활형편에 인용될 수 있는 규례를 무수히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간에 많은 변론이 생겼습니다. 안식일을 거룩이 지키고 아무 일도 하지 말라 했으므로 서기관들이 여러 가지로 규정을 했는데 그들 사이에도 많은 변론이 있었습니다.
  안식일에 '등잔을 이리 저리 옮길 수 있느냐 없느냐? 여인들이 가발을 쓰거나 부로 찌를 달 수 있느냐 없느냐? 남자가 아이를 들어줄 수 있느냐? 없느냐?' 따위의 문제들의 변론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규정해 놓은 것을 보면 '오리 길을 가지 말라, 글은 종이나 가죽에 잉크로 두자 이상 쓰면 죄가 되고, 땅이나 모래 위에 쓰면 죄가 안 된다. 병자가 생길 때, 생명의 위험이 없으면 다음 날 까지 기다리고, 귀, 코, 목 같은 곳의 응급 치료를 가하나 그 이상 치료해서는 안 되고 입에 넣은 틀니까지도 뽑아놓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안식일에 무화과나무의 열매 한 개 이상의 무게는 짐으로 간주했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안식일에는 지팡이를 못 집게 했습니다. 절뚝발이는 목발을 들지 못하게 했습니다. 심지어 의족을 달고 있는 사람도 안식일에는 그것을 벗어놓아야만 했습니다. 그것을 들고 있으면 짐을 지고 있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면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이 됩니다.
  앞에서 잠깐 말씀드렸습니다 만은 환자이야기입니다. 급한 환자가 있으면 안식일에는 치료를 하되 그 병이 더 심해지지 않을 정도로만 치료할 수가 있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병을 낫게 한다면 그것은 일하는 행위로 간주되어서 계명을 어긴 셈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어느 안식일 날,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가에 38년 동안이나 병들어 누워있던 사람의 병을 깨끗하게 고쳐주셨습니다. 이 한 가지만 하더라도 그들의 눈으로 보면 예수님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될 일을 하신 셈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안식일에 예수님이 병을 낫게 하신 것만 해도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의 눈으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거기에다가 그 병자에게 자기 자리를 들고서 걸어가라고까지 말씀하셨으니 그들이 얼마나 기가 막혔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가리켜 '성경을 폐하려 온 자'라고 비난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와 같은 문제로 논쟁을 벌여 끝없는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습니다. 한마디로 사소한 규례나 규칙으로 사람을 묶어 시종 법만 찾는 율법주의자들입니다.
  이처럼 서기관들은 어떤 규례와 규칙을 만들어 내었고, 바리새인들은 이 모든 규례를 지키기 위하여 보통 시민생활에서 분리되었던 사람들입니다.
  이 서기관 법이 여러 세대동안 구전되어 내려온 불문법이 있는데 주후 3세기경에 그 대오를 수립한 것이 '미쉬나'라고 합니다. 후에 학자들은 그 법전을 주해했는데 이것을 '탈무드'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당시의 전통파 유대인들은 이 규율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은 섬기는 것이며 그들의 생사문제가 여기에 달려있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보수파 랍비들은 안식일에 TV에 나오는 축구중계를 보아야겠는데 채널을 돌리는 것은 노동행위에 속하는 것이므로 전날 미리 채널을 맞춰 놓는다고 합니다. 안식일에 전철을 타도 자기 손으로 문을 여는 것은 노동행위로 간주하기 때문에 남이 열어주면 들어가고 내릴 때, 문이 열리면 내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이런 행위가 결국은 의식적이며 외적으로 흘렸기 때문에 독선주의요, 율법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 때에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비볐는데 유대인들은 그것을 타락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러한 적개심이 커져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율법정신은 무엇입니까? 17절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러 오셨다'고 했고, 18절에서는 '율법을 다 이루기 위해서 오셨다.'고 했습니다.
  성경 마22:36절 이하에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묻기를 '선생님! 계명 중에는 어떤 계명이 제일 큰 계명입니까?'라고 묻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십계명을 보면 제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고, 5-10계명은 네 이웃은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의 주장하는 율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온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중심적인 율법은 실현하기 위해서 왔지 너희들처럼 만들어 놓은 세칙이나 규칙을 지키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소극성은 적극성으로 바꾸었습니다. 예수님은 또 형식적인 것은 중심적인 것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막2:23절 이하에 보면 안식일 날 예수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시는데 제자들이 시장하여 밀 이삭을 잘라 비며 먹는 것을 보고는 아무 책망이 없었습니다. 이것을 본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비판하기를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때 예수님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당시 율법을 가르치는 장본인이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에 관한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적인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일에 얽매여 종이 되어 안식일을 숭배하라고 주신 줄 잘못 알고 있는 그들에게 안식일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주신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하나님이 안식일을 인간에게 주신 목적은 하나님 앞에서 영과 육이 건전하여 영육간에 몸을 바쳐 하나님께 헌신하도록 주신 것입니다. 안식일에 하나님께 찬양하고 예배드리는 교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영적으로 건강하게 되고, 육적으로는 건강을 재충전하여 새 힘을 얻어 영육 간에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라고 했습니다.
  마12:9-13절에 보면 안식 일날 예수님이 회당에 들어가시자 그곳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어서 고치시려고 할 때, 그들이 예수님을 책잡고자하여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냐'고 질문하자 '예수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고 하시고는 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성경이 절대적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성경 말씀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성경이 권위 있는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 말씀이 영원하지 못하고 시대에 따라서 바뀔 수밖에 없다면 성경은 절대적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이 결코 변할 수 없는 영원성을 가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예수님은 중요한 사실을 말씀하실 때 종종 이러한 표현을 쓰셨습니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날 옛 하늘과 옛 땅은 사라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라는 의미가 됩니다. 또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이란 말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여기서 '일획'이라는 것은 구약 성경을 기록한 히브리 철자 중에 가장 작은 것을 가리킵니다. 또한 '일 점'이라고 하는 것은 그 가장 작은 철자에 찍는 작은 점을 이야기합니다.
  아무튼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의도는 무엇입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 중 단어 하나 문자 하나도 변함 없이 다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성경 말씀의 '영원성'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해봅니다. 마22장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당시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 가운데에서도 율법만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외의 성경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절대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활을 믿지 않았던 주된 이유는 모세가 율법서에 부활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사두개인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여 모세는 말하기를 사람이 만일 아들이 없어 죽으면 그 동생이 그 아내에게 장가들어 형을 위하여 후사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예수님에게 한 가지 예를 들면서 예수님에게 물었습니다. '우리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 장가들었다가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 동생이 형수를 취했습니다. 그런데 그도 후사가 없이 죽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일곱째까지 계속했습니다. 그러다가 그 여자도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됩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말로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그러한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금도 주저하시지 않고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그러면서 예수님은 율법에 속한 출3장에 있는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모세의 가시떨기나무에 관한 글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 가운데서 예수님이 부활의 근거로 제시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오래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다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자신을 가리켜서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었고, 이삭의 하나님이었고, 야곱의 하나님이었느니라'고 과거형을 써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고 현재형을 쓰셔서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의 하나님이심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지금도 살아있다는 사실을 모세도 증거하고 있음을 예수님은 율법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명쾌하게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
  여러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세보다도 수백 년 이전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모세는 예수님보다도 1,400년 앞선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시대를 초월해서 영원불변한 진리의 말씀으로 남아있음을 예수님은 보여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성경을 가리켜서 수천 년 전에 기록된 하나의 고전처럼 취급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우리에게는 성경 말씀이 절대적이고 영원한 불변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지금도 살아 우리의 삶 속에 역사하면서 우리 길의 빛이 되고 우리 발의 등이 되어서 우리의 발걸음을 의의 길로,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믿/아멘!/
  ▶그러면 율법의 가치를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약시대, 복음시대, 은혜 시대에도 정말 율법이 필요하냐는 율법의 가치에 대하여 의견이 분분합니다. 얼마 전 신학교 노 교수가 '십일조는 구약의 전제 물이다. 신약시대에 언제 예수님이 십일조를 내라고 했느냐? 그러므로 십일조를 낼 필요가 없다.'고 아주 잘못된 주장을 폈다가 신학교에서 쫓겨난 사건이 있었습니다.
  오늘날 전혀 율법이 필요 없다고 치부하는 사람들이 꽤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율법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율법의 목적과 우리에게 주는 유익이 무엇입니까? 크게 세 가지로 알아보겠습니다.
  ①몽학선생입니다.
갈3:24절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라고 했습니다. 몽학선생이란 요즘 사용하지 않은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원래는 '수행자, 보호자'의 역할을 하는 '가정교사'란 뜻입니다.
  구약시대에는 각 가정마다 노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노예들 중에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청지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청지기 가운데서 특별히 주인의 뒤를 있게 될 자녀교육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몽학선생입니다. 이 몽학 선생은 주인집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집에서 골방까지 그 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보호해 주고 인도해 주는 자입니다. 화장실도 가르쳐 주고, 욕실도 가르쳐 주고, 청소하는 법, 젓가락 숟가락질하는 것 학교에 가는 길까지 이 모양 저 모양 수종을 들면서 그르치는 자를 의미합니다.
  율법의 첫 번째 역할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율법인 십계명을 대할 때 '하나님은 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다른 신을 섬겼구나, 새간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는데 우상을 만들었구나, 여호와의 이름은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고 했는데 망령되이 일컬었구나!' 이때 우리는 '아하! 내가 죄인이구나! 내가 어떻게 해야 될까?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하는 역할입니다.
  ②죄를 깨닫게 합니다. 율법의 역할은 예수님께 인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뒤에는 율법의 역할이 있습니다. 롬3:22절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에는 율법을 읽을 때면 우리들은 '아! 내가 큰 죄를 저질렀구나!' 자기 자신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도록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만듭니다.
  ③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시119:105절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는 말입니다. 구약성격의 십계명을 비롯한 율법은 하라는 율법은 구약에는 248개 가 나와 있고, 하지 말라는 명령은 365개, 합쳐서 613개입니다. 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기뻐하시는 것이고, 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 하나님께 영광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하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삶이요,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생명 걸고 지키는 것입니다. /믿/아멘!/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본문에서는 율법의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라도 그것은 완전한 것이고 영원한 것이기에 그것을 타협하거나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적은 것이라고 버리는 자는 그가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는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지만 적은 것이라도 잘 지키면 천국에서 '크다'고 일컬음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또 본 절에서 '지키고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그쳐서는 안 되고 지키고 가르치라는 주님의 말씀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아멘!/

 

  ▶20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7-19절의 결론이기도 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대조시켜 하신 말씀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의보다 제자들이 더 의로울 자가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의 의는 외식, 형식, 의식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의 의는 마음의 중심입니다. /할/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인간의 힘으로 인간의 노력으로 의지하면 천국에 못 들어갑니다. 율법으로는 못 들어갑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므로 만이 완전한 의, 하나님이 의롭다고 하신 의, 하나님이 주신 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만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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