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38강)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마 7:21-2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53

(제38강)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마 7:21-23)

 

  본문은 산상보훈의 결론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참된 신앙을 위하여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거짓 선지자들을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난 예수님은 우리가 참된 천국 백성이 되기 위해 두 가지 실제적인 말씀을 더해주십니다. 그 첫 번째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씀으로, 천국이란 단순히 입술로만 고백하는 것으로써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 주님의 기쁘신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수 있음을 말합니다.
  그 다음 24절 이하에 말씀을 보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과 같고,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목 소개!▶

 

  여러분! 천국이 확실히 있음을 믿습니까? 만약 천국이 믿어지지 않으면 그 신앙은 처음부터 잘못된 신앙입니다. 천국은 어떤 곳입니까? 계21:4절에 보면 '눈물이 없는 곳이요, 다시 사망이 없는 곳이요, 애통하는 것, 곡하는 것, 질병의 아픔이 없는 곳'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가 무엇인가? 죽음이요, 애통할 일이요, 질병의 아픔입니다. 그러나 천국에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아멘!/ 그리고 계21:23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고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등이 되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우리가 세세 무궁토록 왕 노릇 하는 곳이 천국입니다. /믿/
  우리는 이 천국을 소망하고 이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1절을 보면 그 천국에 누가 들어갈 수 있다고 하십니까?

 

  ▶21절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매우 조심스러운 말씀입니다. 신앙고백에 있어 입으로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 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이 고백처럼 가장 아름답고 분명한 신앙고백의 표현은 없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는 말의 잔치로 끝나는 종교가 아닙니다. 믿음의 바른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말은 마음에 없는 입술의 고백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입니다. 불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자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믿으면 누구나 천국 가는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주여, 주여 하는 자 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분명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의 뜻을 잘 헤아려 봐야 합니다. '주여!'하고 열정적으로 주님을 부르면서도 정말 그 속에 헌신하고 순종함이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주여 부르는 것이 그저 하나의 입술의 표현이요, 습관이 된 자가 있습니다.
  본문은 그런 자들을 가리켜 하시는 말씀입니다. '주여!' 이 말은 상대적으로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뜻도 내포됩니다. 쉽게 표현하면 '주님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고, 나는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주인과 종은 하늘과 땅입니다. 종은 조건 없이 주인에게 헌신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종은 주인이 내린 그 어떤 명령에도 이유가 없고, 불평이나 불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종은 자기주장이나 자기 생각이 없습니다. 종은 조건 없이 주인에게 헌신하고 복종해야 합니다. 주인과 종 사이는 오직 순종과 헌신뿐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문제점은 종인 자기가 주장할 것 다 주장하고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우선인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먼저입니다. 자기가 판단하고 자기가 주장하고 자기 마음에 맞으면 행동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말로만 주여, 주여 하지 그 실생활은 그 고백과는 정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이 바로 본문입니다.
  마15장에 보면 하루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그들은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말을 들으시고 탄식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8-9절에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입술로는 예수님을 공경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마음으로는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말았습니다.
  가룟 유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을 흘리시면서 기도하고 나신 뒤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검과 몽치를 든 무리를 이끌고 예수님에게로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와서 거짓으로 입맞춤을 했습니다. 무리에게 신호를 보내기 위함이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렇습니다. 입술로만 예수님을 공경하는 것은 결국 가룟 유다의 거짓된 입맞춤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8:31절을 보세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누가 예수님의 참 제자입니까? 누가 진정한 천국의 백성입니까?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순종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이 산상설교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의 백성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여, 주여' 하는 신앙고백이 안전을 보장해주지 못합니다. 믿었기 때문에 자동으로 구원받을 거라며 신앙생활이 방만해지는 것을 예수께서는 경고하십니다. 주님은 말이 아니라 우리의 행함을 보시기 원합니다. 신앙고백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믿음을 찾고 계십니다.
  믿는 것은 순종이고, 순종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부름 앞에 응답하여 따르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자기의 뜻이나 생각이 아닙니다. 세상적인 상식이나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당시 거짓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세상의 가치대로 살았던 자들이었습니다.
  온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반드시 행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믿음이 뿌리라면 행함은 그 열매입니다. 믿는데 행함이 없다면 온전한 믿음이 아닙니다.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일에 목적을 두지 않는다면 이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며 자기 이득을 얻기에 급급하게 되고야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엄청난 일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오래 전에 어느 시골 교회에 연세가 좀 드신 목사님께서 새로 부임을 하시고 첫 설교로 사랑에 대한 말씀을 전했습니다.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주일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입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지난주일 설교를 똑같이 하는 것입니다. 예배가 끝나고 난 뒤에 교인들은 수군대면서 킥킥 웃으며 '아무래도 목사님이 기억력이 없나 봐 어떻게 지난주일 설교를 그대로 할 수가 있을까?'
  그런데 그 다음 주일이 되었는데 또다시 똑같은 설교를 합니다. 성도들이 화가 났습니다. '우리가 시골 사람들이라고 목사님이 우리를 무시하는 모양이다.'
  결국 교회는 목사님을 내보내기로 결정하고 통보를 하자, 목사님은 아무 말도 없이 보따리를 싸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성도들이 좀 안되었다 싶은 생각이 들어 다음 주일에 고별 설교라도 하고 가시라고 말합니다.
  목사님은 다음 주일에 설교를 하셨는데 역시 그 날도 똑같은 내용으로 설교를 하십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 하셨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사랑 없는 모습을 보였으면 목사님께서 마지막으로 고별설교를 하시면서도 똑같은 설교를 하셨을까?' 그들은 자신들을 돌아보면서 회개하고 울면서 목사님이 못 가시도록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은 그 교회에 그대로 남기로 하고, 그 다음 주일이 되자 성도들은 당연히 똑같은 설교를 하리라고 예상을 했는데 뜻밖에도 다른 설교를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제는 우리가 사랑하면서 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봉헌생활에서부터 실천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직도 십일조생활을 하지 않는 성도가 있으면 이제부터 모두가 십일조를 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들이 그 설교를 듣고 나서 십일조를 했을까요? 안 했을까요?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안 하면 1년 내내 계속 똑같은 설교를 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많고 적고 간에 다 순종해서 십일조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가 되자 목사님의 설교가 또 바뀌었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전도에서 나타납니다. 모두가 전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목사님의 설교가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가 나가서 열심히 전도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에도 설교가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떨어지자 모두가 앞을 다투어서 봉사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니까 교회가 놀랍게 바뀌어졌습니다. 교인들 스스로는 성령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날이 갈수록 크게 부흥을 하게 되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천국은 입술로만 주여, 주여 외치며 형식적이요, 위선적인 태도를 용납하지 않는 곳입니다. 겉모양과 속 모양이 같은 자들이래야 천국을 소유할 수가 있습니다. /할/ 22절에 보면 그 날에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많다고 했습니다.

 

  ▶22절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이 말씀은 '주여, 주여'하는 것이 필요 없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큰 잘못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 주여,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은혜로운 일이요, 영광스러운 고백입니다. 롬10:13절에 보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회개한 우편 강도는 그의 생명이 끊어지기 직전에 주님을 향하여 '주여! 당신의 나라가 임하실 때 나 같은 죄인을 기억해 주옵소서!'하고 고백하고 기도했더니  즉시 우리 주님은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가 있으리라!'고 응답하셨습니다. /할/
  한마디로 '주여' 소리 한 번하고 구원받아 천국으로 들어간 것은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여! 주여!'하는 고백이 진정한 고백이냐가 문제입니다. 주여! 주여!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주인으로 나의 주권자로, 믿고 고백하느냐 믿지 않고 고백하느냐 그 문제에 따라 다릅니다.
  우리 모두 주여 이 고백 속에 나의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나의 주권자로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할/
  우리가 잘 아는 행3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가다가 성전 미문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구걸하고 있었는데 베드로는 그를 측은히 여겨 기도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내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하자 그의 발목에 힘이 생겨 뛰기도 하고 걷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높이려고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12)고 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그 앉은뱅이를 낫게 한 것은 자기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이름이 낫게 했으니까 오직 예수그리스도 그분에게 모든 영광을 돌리라는 것입니다. /할/

 

  ▶22절은 다시 보면 주여, 주여 외치는 자들이 세 가지 일을 했다고 말합니다.
  ⑴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다고 말합니다. 주의 종이란 명목 하에 거짓 예언과 거짓 가르침으로 영혼을 죽이는 거짓 선지자가 이 땅에도 많습니다.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여러분 이 말세에 여러분들이 교회를 잘 선택한 것도 큰복입니다. /아멘입니까?/ 우리 참 행복한 교회는 칼뱅의 정통의 노선을 사수합니다.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이것이 한마디로 한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할/
  예수 없는 교회는 생명이 없습니다. 예수 없는 말씀 속에는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만 전하려고 합니다.
  ⑵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는다고 했습니다. 요즘 귀신 쫓는 사람들이 참 많아졌습니다. 귀신이 나갈 때는 굉장합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충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귀신을 쫓아낸다고 다 진짜는 아닙니다.
  조희성이도 귀신을 쫓아내고, 문성명이도 귀신을 쫓아냅니다. 무당도 귀신을 쫓아냅니다. 대순진리교도 귀신을 쫓아냅니다.
  ⑶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능력을 행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쳤고, 앉은뱅이도 일어났고, 장님도 눈뜨게 하는 기적을 많이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거짓 선지자들도 이러한 기사와 이적을 잘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마24:24절을 보면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사람들은 기사와 이적을 보고 따라다닙니다. 기사와 이적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전부는 아닙니다. 예수님이 전부입니다. 복음이 전부요, 말씀이 전부입니다. /아멘!/
  ▶22절을 다시 한 번 갖추려 보면, 그 날은 바로 심판 날을 가리키는 말로 심판 날에 예수 앞에 서서 하는 말이 '예수님! 왜 나는 모른다고 하십니까? 내가 주의 종으로써 설교도 얼마나 잘했고, 큰 권능을 받아 귀신도 쫓아내고 병도 낫게 했는데 주님께서 그래도 저를 잘 모르겠습니까?' 이때 우리 예수님이 대답이 무엇입니까? 23절을 보겠습니다.

 

  ▶23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겉으로 보면 진실하고 열정적으로 주여, 주여 합니다. 선지자 노릇도 합니다. 귀신도 쫓습니다. 능력도 행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 한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죽도록 일해 놓고 주님이 모르신다고 부인하시면 이것은 보통 큰 일이 아닙니다. 실컷 예수 믿고 충성한다고 했는데 주님 앞에 서는 날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고 한다면 이것은 엄청난 비극입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주님이 모르신다고 하시는데 어떻게 천국에 갈 수가 있습니까? 지옥 음부에 갈 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왜 주님이 모르신다고 하십니까? 불법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겉으로 나타난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에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삼상16: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고 하셨고, 롬10:10절에서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마음도 없이 입술로만 시인하는 그런 신앙의 고백이 아닙니다. 입술의 고백이 마음이 고백과 같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마음 중심에 겸손함이 있는가? 사랑이 있는가? 진실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양심을 버리지는 않았는지? 자기의 명예를 위해 남을 짓누르지는 않았는지를 보십니다. 사람이 사람을 속일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도 기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일 수가 없습니다. 그분은 그렇게 쉽게 속아넘어가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에 없는 가시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의 고백을 주님은 거부하십니다.
  눅6:46절에서 예수님은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즉 왜 불법을 행하면서 '주여, 주여 하느냐?'는 질타입니다.
  여기 불법이란 '아노미아'란 말로, 즉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불법을 행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지 않고 자기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입니다.
  즉 하나님의 뜻은 성도가 거룩이 주일을 지키는 것을 바라십니다. 그런데 주일성수를 온전히 지키지 못하면 그것이 불법이 됩니다. /할/ 그렇습니다. 불법은 주님의 뜻과 정반대입니다. 주님의 뜻은 성도가 하나 되기를 원하십니다. 성도가 열심을 내기를 원하십니다. 죽도록 충성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믿/
  그렇다면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21절을 보십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제목의 결론입니다.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가 들어갈 수 있습니다. /믿/ 여기에 천국에 대한 정의가 있습니다. 천국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곳입니다. 다시 말하면 천국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는 곳입니다. /할/

 

  ▶저는 오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찾아 함께 알아보려고 합니다.
  ①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6:40절에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여기에 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곧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을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요6:28절을 보면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제자들이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라고 묻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하나님이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쉽게 표현하면 믿음이라고 합니다. 믿음은 귀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믿음을 시시하게 보지 마십시오, 또 우리의 믿음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믿음 안에는 인간의 생사화복이 다 들어 있습니다.
  믿음은 지금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아멘!/ 믿음은 지금도 산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믿음만이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듭니다.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잡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뜻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뜻도 잘 아는 잡니다. 그래서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아멘!/
  ②살전5:16-22절에 보면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여기에 보면 하나님의 뜻이 여섯 가지로 나와 있습니다. 세 가지는 '하라고 하는 것'이요, 세 가지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하라고 하는 세 가지는 우리가 너무 잘 아는 말씀입니다.
  '기뻐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흔히 이것을 가리켜 그리스도인의 '3행의 삶'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간단한 말씀 같지만 깊이 음미해 보면 굉장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냥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했으면 경우에 따라서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면 될 것인데, 말씀 앞에 한결같이 어려운 조건 하나를 붙여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는 것과 기도하되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과 감사하되 범사에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아주 어려운 조건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24년이 지난 뒤 쓰인 말씀입니다. 이때 그리스도인들이 엄청난 박해를 받을 때였습니다. 박해를 받고 고난을 당하고 수모를 당할지라도 기쁨을 잃지 말고, 기도하는 것을 잊지 말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삼 행의 신앙입니다.
  ⑴항상 기뻐하라!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기뻐하되 항상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즉 기쁠 때만 기뻐하지 말고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환경, 처지, 조건이라 해도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환경과 처지와 조건이 좋지 않은데 기뻐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기뻐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고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은 종교적인 언어입니다. 신앙을 떠나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주님이 그런 삶을 사셨습니다.
  주님이 잡히시던 전날 밤 다락방에 최후에 만찬을 제자들과 함께 나눕니다. 내일 새벽이면 예수님은 체포됩니다. 그리고 내일 오후에는 십자가에 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일을 미리 다 알고 계셨습니다. 자기를 팔 제자인 가롯유다가 지금 옆에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의 감정은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가롯 유다에게 '너는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것이 좋을 뻔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만찬을 마치고는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로 올라가십니다. 그 길은 결코 유쾌한 길이 아닙니다. 기분이 좋은 그런 등산도 아닙니다. 그런데 마26:30절에 보면 '찬미하며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찬미한 것이 아닙니다. 그 찬미와 그 기뻐함이 바로 종교적인 힘이고, 신비한 능력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고난을 받으면서도 찬미했고, 박해도 받으면서도 기도했고, 스데반 집사는 순교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왜 기뻐했습니까? 천국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⑵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적 호흡입니다. 사람은 순간마다 숨을 쉬면서 목숨을 이어가듯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지금 이 시간 영적인 삶을 이어가는 소중한 호흡입니다. /믿/
  성도가 새벽에 나와 첫 시간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한마디로 귀한 신앙입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처럼 하루에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하나님의 성전에 나와 기도하는 것은 정말 귀한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뜻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하루 종일 기도만 하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이 말씀은 '항상 영적으로 근신하여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엡6: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왜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기도만이 하나님의 능력을 행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할/
  ⑶범사에 감사하라! 감사는 그리스도인의 덕목입니다. 범사란 모든 경우에 어떤 경우든지, 그러니까 기쁠 때도 감사, 슬플 때도 감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무엇이 잘 되어질 때 그 된 것 때문에 감사하고, 무엇이 어렵고, 안 풀린다 할지라도 그것이 더 큰 축복으로 바뀌는 것을 믿고, 바라보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한 할머니가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서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외칩니다. 조건을 보면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없습니다. 집은 가난하고 자식 하나 있는 것은 술주정뱅이에, 손자 하나 있는 것은 반신불구입니다.
  그런 할머니가 하나님은 영접하고 나서 늘 감사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그렇게 감사한지 물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믿음을 주셔서 감사하다.'고 소박한 대답을 했습니다. 이런 감사가 귀한 감사입니다. 그렇습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시인은 말했습니다.
  감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감사의 조건이 더 열립니다. /믿/ 그러나 불평하면 마귀가 좋아하고, 그 일이 얽히고 설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감사하는 자 되십시다. /할/

  ▶그 다음 삼불 신앙이 있습니다.
  ⑴성령을 소멸치 말라!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입니다. 그런데 성령은 인격적인 신이십니다. 우리가 인격적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모셔들이고, 환영하고, 높여야 합니다.
  '성령님! 저와 같이 가시지요, 성령님, 이 일에 감동 주시고 지혜를 주십시오!' 날마다 의지하고 맡기는 자세가 귀합니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소멸은 '불을 끈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맙시다. /할/
  ⑵예언을 소멸치 말라! 여기 예언은 하나님의 계획을 말합니다. 그 계획 속에는 경고가 들어 있고, 하나님의 경륜이 들어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 모두가 하나님의 예언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그런데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멸망을 받습니다.
  ▶제2차 대전 때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 상공에서 비행기에 경고 전단을 뿌렸습니다. '1945. 8. 6 낮 12시 히로시마에 원자탄을 투하하니 시민들은 모두 50Km 밖으로 대피하라'는 경고 전단을 일주일 전부터 뿌렸습니다.
  이것은 경고의 전단지입니다. 이를테면 이것이 예언입니다. 앞으로 될 일을 미리 알리는 선포입니다. 그 경고의 글 속에는 메시지가 들어있습니다. 사는 길에 대한 안내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결국 자기만 죽습니다.
  그런데 당시 일본 사람들은 그 전단지를 받고 그 예언을 무시했습니다. 그런데 몇몇 사람은 그 말씀을 믿고 50Km 밖으로 도피를 했습니다. 드디어 1945년 8월 6일 정오 12시에 예언대로 원자탄이 히로시마 한 복판에 떨어졌습니다.
  그 순간 번쩍하면서 단 3초 동안에 3천도의 열을 동반한 원자탄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그때 30만 인구 중 20만이 죽었고, 살아남은 자도 모두 핵 방사능 때문에 병에 걸려 지금까지 고생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인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무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라!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주의 강림이 있으리라' 주의 재림을 믿습니까? 분명히 우리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십니다. 우리는 그 분의 오심일 바라보며 준비해야 합니다. /할/
  ⑶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은 선보다 전염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악한 사람이 선해지기보다는 선한 사람이 악해지기가 더 쉽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내 지식, 내 의지, 내 고집으로 맺혀진 열매가 있는지 직시해야 합니다. 지난 시간에 생각해 본 대로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열매부터 말씀하시지 않고 나무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열매가 행위라면 나무는 사람의 됨됨이, 즉 인격과 성품을 말합니다. 즉 예수께서는 우리의 행동을 고치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바뀌라는 것입니다. 순간적으로 보여 주는 행동은 얼마든지 가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속 사람은 여전하면서 행동만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열매 이전에 나무를 바꾸어야 합니다. 이것이 불법을 버리는 행위입니다. 중요한 것은 보이는 열매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나무됨'입니다. 불법을 행하는 근본을 버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사람은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는 불법을 버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습니다.
  16절에 나무의 중요성이 언급됩니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으며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즉 가시나무가 포도나무처럼 보여도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 없으며, 엉겅퀴가 무화과나무처럼 보여도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는 교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자들입니다. 다른 문이 있다고, 다른 길이 있다고 미혹해도 눈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만이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유일한 문이며, 유일한 길이 되심을 알아야 합니다. /할/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아멘!/ 신앙생활은 내 뜻을 죽이고, 주님의 뜻에 맞추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비극이 어디에서부터 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면서부터입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기고 터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살면 이 땅에서도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며 살게 됩니다. /믿/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