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0강)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가 되자! (마 8: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55

(제40강)     주님이 원하시는 성도가 되자! (마 8:1-4)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설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이 사흘동안 여행을 갔다 왔더니 아내가 잔득 화가 나 있었습니다.
  아담이 아내를 보고 말하기를 '이 넓은 천지에 여자라고는 당신 한 사람밖에 없으니 내가 외도한 것도 아닌데, 어딜 좀 갔다 왔기로 왜 이렇게 화가 났습니까?'
  그리고 아담은 여전히 기쁨으로 찬송을 부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런데 하와는 가만히 있다가 밤에 몰래 아담의 갈빗대를 세어 보드랍니다. 갈빗대 하나 더 뽑아 가지고 어디다 '여자를 하나 더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닌가?'해서입니다. 그렇지 않고야 저 남자가 왜 저렇게 좋아할까 싶어서였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에덴동산에서부터 의심이 많았답니다. 이 의심 때문에 갈등이 생기고 평화가 깨어집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셨습니다. 의심을 다 버리고 하나님을 믿어야 나를 믿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그런 사람이 신앙 인입니다. /아멘!/
  이번에는 교회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자!
  교회란 '과거에 어떤 교회였느냐?'도 중요하지만, '오늘 어떤 교회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보다도 '내일 어떤 교회가 될 것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바람직한 교회 상은 어떤 것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를 몇 가지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바람직한 교회 상은 어떤 것인가?
  ⑴주께서 머리가 되시는 교회입니다.

  엡1:22절에 '또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주셨느니라' 만물 위에 교회가 있고, 교회 위에 그리스도가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세상 위에 있고, 교회 위에는 주님이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 집안의 어른이 누구냐에 따라 가풍과 집안의 질서가 흔들릴 수가 있고, 확립될 수도 있습니다. 머리는 사령탑입니다. 모든 지체는 머리의 지시와 통제를 따라 동작합니다.
  교회는 예수님이 머리입니다. 군대는 말하자면 총사령관이시고 제일 높은 어른입니다. 그 누구도 총사령관 자리를 넘겨다 볼 수 없습니다. 머리되시는 주님은 교회의 질서를 중하게 보십니다. 예수님을 머리로 만드는 교회, 예수님을 높이고 섬기는 교회가 복 받는 교회입니다.
  ⑵잘 모이는 교회가 역사가 일어납니다.

  초대교회는 모이기에 힘썼던 교회입니다. 모여서 말씀 듣고 기도해서 능력 받아 세상에 나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잘 모이는 성도가 복 받은 성도입니다. 모여서 말씀 받고, 능력 받고, 은혜 받아 복음의 진보를 위해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할/
  ⑶화목을 이루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의견대립, 감정대립, 견해 차이 등을 슬기롭게 극복하지 못하면 교회는 항상 시끄럽습니다.   교회는 신앙공동체이기 때문에 모든 문제와 사건을 믿음으로 풀어야 합니다. 이해하고 용납하고 특히 우리들의 몸가짐과 행동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삼국지를 보면 '유비와 관우와 장비'가 나옵니다. 삼대영웅인데 이 세 사람은 개인적으로 보면 별 볼일 없습니다. 유비는 돗자리 장사하는 사람이었고 관우는 서당의 훈장이었고 장비는 백정이었습니다. 혼자서 살 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세 친구가 뭉치니 그 시대를 정복하는 영웅이 된 것입니다. /할/
  ⑷그리스도인의 덕을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며 빛이라'고 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소금도 빛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는 뜻은 이 세상에서 절대 필요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신앙 인들이 구설수에 오르고 비판받는 이유는 말은 잘하지만 실천이 없다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덕이 없다는 것입니다. 약2:17절을 보세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많이 알고 행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 알고 행하는 것이 올바른 지식입니다. 잘 믿는다고 큰 소리 치면서 손가락질 받는 것보다는 소리 없이 말없이 실천하는 숨은 사람이 위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아멘!/
  ⑸선교하는 교회가 되십시다. 전도는 예수님의 지상 명령입니다.
  ⑹기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내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은 '우리 기독교인들이 무당처럼 열심히 기도하기만 하면 아마도 놀라운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무당은 무슨 기도를 하는지는 모르지만 좌우지간 한번 시작만 했다 하면 밤새도록 몸부림을 치면서 부르짖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바람직한 성도는 어떤 성도인가?
  ⑴믿음으로 자기 책임을 다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교회는 직분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권사님, 여 집사님, 집사님들이 있습니다. 직분은 주님이 우리를 충성되이 보시고 주신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 직분을 감당하십시다. 권사님들은 성도들을 주시합니다. 여 집사님들은 성도들을 주시합니다. 구역장님들은 성도들을 주시합니다. 기분이나 감정, 그리고 일시적인 감동으로는 주의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믿음 안에서 사명으로 일을 해야 합니다.
  ⑵서로 화목하는 성도가 되십시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차고, 넘치는 화해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공격적인 사람이나 전투적인 사람이나 부정적인 사람은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게 됩니다.
  교회는 나도 평안해야 하지만 남도 평안해야 합니다. 나의 말 한마디와 행동 하나가 교회의 화목을 깨뜨려서는 안 됩니다. 화목을 이루고 평화를 만드는 선구자가 되어 서로를 아끼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⑶감사하는 교인이 되십시다.

  감사에는 반듯이 동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의 감사는 무조건 감사해야 합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신 것에 감사하십시다.
  감사는 생각해 보면 할수록 많이 나옵니다. 어떤 교회든 교회에는 나름대로의 단점과 장점이 있습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 성도들도 교회의 단점을 위해서는 기도하고 장점을 보고 감사하고 사랑하십시다.
  미국의 남서 침례교 신학교 설립자인 캐롤(B.H. Carroll)의 성경 속표지에 그가 회심한 후 기입해 놓은 글이 있었습니다. 소개합니다.
  '나의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하게 하시고/나의 혀로 당신을 말하게 하시며/나의 눈으로 당신을 보게 하소서/나의 손으로 당신을 위해 일하게 하시고/나의 두 발로 당신을 위해 뛰게 하시며/나의 영혼으로는 당신을 사랑하게 하소서/나는 온전히 당신께 속하였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해 주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는 내 신앙을 키우고 지키는 그릇입니다. 교회와 화목을 이루지 못하면 영적으로 손해가 됩니다. 신앙 인들은 영적으로 막히면 범사가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감사하면서 화목을 이루며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하다가 크게 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할/ ◀제목 소개!▶

 

  마태, 마가, 누가, 요한, 4복음서는 공관복음서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진을 찍을 때 앞에서 찍는 것, 뒤에서, 옆에서, 위에서 찍는 것이 각각 다르듯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묘사하는 특징이 복음서마다 다 다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왕으로 오신 메시아 예수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엄하게도 예수님의 족보에서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복음은 로마인들을 위한 복음입니다. 그래서 종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인자로서의 예수님,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 완전한 사람으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은 인자 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요한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써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고하고 있는 이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5-7장은 왕으로서 선포하신 예수님의 메시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8장부터는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겠습니다.

 

  ▶1절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산에서 내려오시니' 마5:1절에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는 말씀과 대칭을 이루는 구절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산상설교의 긴 말씀을 마치시고 내려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어디로 오셨습니까? 다시 일반 백성들 속에서의 사역을 위하여 갈릴리 호수 근처의 낮은 지방으로 내려오셨음을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올라갈 때가 있고,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불행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미국 같은 나라는 역대 대통령들이 존경을 받고 현직 대통령을 능가하는 외교적 역량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을 볼 때 부러움을 느끼게 됩니다.
  저는 그 이유를 자기절제의 실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올 때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텐데 우리의 지도자들은 올라갈 때는 아는데 내려올 때를 모르기 때문에 타율적 방법이 동원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의 지혜는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한 진리임을 전3장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 올라갈 때도 있고 내려올 때도 있습니다. 사업이 잘될 때도 있고 망할 때도 있습니다. 건강할 때가 있는가 하면 병들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올라갈 때 너무 자만하지 말아야하고 내려올 때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여기 '허다한 무리'란 5:1절에서 나오는 '무리'보다 더 많은 숫자를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에서 말씀을 가르치고 있는 동안 그의 소문이 각지로 퍼져 나가서 사람들이 방방곡곡에서 그의 교훈을 듣고자 예수께로 몰려왔음을 의미합니다.
  다른 학자들은 이 말의 표현을 인산인해를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산에서 천국의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주님은 때때로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산에 가셔서 밤이 맞도록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또 새벽 미명에 산에 가서 기도하셨습니다.

 

  ▶2절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시니 한 문둥병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문둥병자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은 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깊은 은혜를 받고 나면 언제나 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고, 기도원에서 은혜 받고 내려오면 신경질 날 일들이 가득 차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문턱에서 은혜를 다 쏟아버리고 맙니다. 은혜 뒤에 시험이 옵니다. 그러므로 이 위기를 슬기롭게 이겨야 합니다. /아멘!/
  본문을 보면 이 문둥병자의 믿음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됩니다. 먼저 문둥병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문둥병은 나병이라고도 하며 일명 한센병이라고도 합니다. 이유는 노르웨이의 의학자였던 한센이 1879년 나병의 병원균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이름을 따 한센병이라고 했습니다.
  나병의 특징을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이 병은 처음에 작은 반정이 생기고, 그것이 썩어져 가면 더러운 고름이 나고 얼마 안 가서 눈썹이 빠지며 성대는 약해지고 호흡이 거칠어진답니다. 그리고 먼저 손과 발이 썩고 서서히 온 몸에 퍼져나간다고 합니다.
  나병의 발병기간은 9년으로 봅니다. 자신도 모르게 3년, 자신이 알아서 3년, 다른 사람이 알아서 3년, 9년이 되어야 문둥병임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시간이 가면 신체의 부분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병입니다. 손가락, 발가락이 머리 머리가 떨어져 나가 마침내 죽고 마는 병입니다.
  그런데 문둥병은 신체적인 고통도 무섭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문둥병환자로 진단이 나면 철저히 인간 사회로부터 추방을 받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문둥병자는 미처 죽은 사람처럼 취급되었다.'고 했습니다.
  중세기에는 문둥병에 걸리면 사제가 법의를 입고 십자가를 듣고, 환자를 교회로 데리고 와서 그에게 장례예식은 베풀었답니다. 한마디로 죽은 사람으로 간주한 것입니다.
  레13:45절에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 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우리나라도 문둥병자들은 소록도에 격리 수용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팔레스틴에서도 문둥병 환자는 예루살렘과 모든 성벽에 있는 도시에 들어오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회당에는 문둥병자를 위하여 높이 3M, 넓이 2M에 별실을 지었습니다. 이렇게 무섭고 끔직한 병이 문둥병입니다.
  우리 인간은 영적으로 볼 때에 다 죄에 병든 몸입니다. 죄는 문둥병과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둥병은 죄의 그림자이기도 합니다. 죄에 병든 자는 속히 치료하지 않으면 죽어 지옥에 갑니다.
  롬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할/ 이렇게 무서운 병든 자가 오늘 예수님 앞에 나왔습니다. 같이 문둥병자의 신앙을 진단해 보겠습니다.

 

  ▶본 절은 짧은 문장이지만 그 속에 엄청난 믿음의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⑴주 앞에 나와야 합니다.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문둥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이 말은 굉장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절대로 일반 사람들 앞에 나타날 수 없는 입장입니다. 법으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 앞에 그렇게 담대하게 나올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왜? 항상 예수님 옆에는 인산인해의 사람들이 북적거렸기 때문입니다. 그런 입장에서 예수님 앞에 나와 왔다는 것은 믿음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것입니다.
  여러분 죄 사함 받고, 구원받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예수님 앞에 나와야 합니다. 믿음의 첫걸음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끌려 왔던 습관적으로 왔던, 교회에 왔다는 사실은 믿음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은혜 받고, 구원받아 살 것은 예수님 앞에 나오는 길입니다.
  이 저주받은 병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예수님 앞에 담담히 나온 것입니다. 주님 앞에 나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그래서 찬 205장은 '예수 앞에 나오면 모든 죄 사하고 주의 품에 안기여 편히 쉬리라' /할/
  예수님 앞에 나올 때 누구나 어려움이 많이 있습니다. 방해되는 일도 많고, 장애물도 많기 마련입니다. 가족 중에 못나가게 핍박을 합니다. 남편이 부모가 형제가 아니면 친구가 조롱을 합니다. 그러나 나온 자는 복을 받습니다. 신앙은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믿/
  ⑵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나와서 절을 했습니다. '절하고' 예수 앞에 나와서 바로 소원을 고백하지 않았습니다. 절했다는 단어는 마태복음에서 13번이나 나오는데 '경배한다.'는 뜻입니다.
  이 문둥병자는 가볍게 인사한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온 몸으로 겸손과 진실과 순수한 그 모든 것을 다 바쳐 예수님 앞에 조용히 머리를 숙였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주님 앞에 머리를 숙이는 것입니다.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겸손함을 의미합니다. 또한 순종함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은 머리는 들어서는 안 됩니다. 머리를 든다는 말은 교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 앞에 우리는 자존심을 꺾어야 합니다. 신앙이란 고개를 숙이는 것입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많이 봉사하시는 성도 님들은 절대 겸손함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약4: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또한 잠22:4절에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할/
  ⑶자신을 솔직하게 소개해야 합니다.

  '가로되'라는 말은 말을 했다는 의미입니다. 말속에는 인격이 들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주님 앞에 자신의 심각한 문제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병이 낫길 바라는 간절한 요구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보면 이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 아버지인 것처럼 믿음의 관계에서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구걸이 아닙니다. 담담하게 구하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문둥병자입니다. 주님! 나는 이런 고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심각한 고통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내가 이것을 주님 앞에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사람마다 처해있는 환경이 있습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말못할 고민도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못할 고민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 앞에서는 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 있는 사람만이 자기의 고민을 하나님께 진솔하게 고백할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죄를 고백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을 숨깁니다. 주님 앞에 나를 내어놓는 것 같은데 내어놓지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이 문둥병 환자는 자신을 공개합니다. 우리도 예수 앞에 자신을 다 공개해야 합니다. /할/
  ⑷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을 '주'라고 불렀습니다.

  '주여!' 진정한 신앙은 바른 신앙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 당신은 나의 생명의 주인이십니다.' 이 말씀은 마7:21절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라고 말한 그런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주여'가 아닙니다.
  이 문둥병자는 지금 종교적인 쇼를 한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닙니다. 어떻게 하면 목소리를 더 멋있게 낼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표정이 좀 더 멋지게 만들 수 있을까요? 이런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정말 오열하듯이 피를 토하듯이 자기의 온 마음과 인격을 다 바쳐서 '주여'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진실한 신앙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⑸이 문둥병자는 자기의 뜻보다는 먼저 주님의 뜻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 '원하시면'이란 말은 간단한 말 같지만 굉장히 중요한 말입니다. '예수님! 내 병을 고치고 싶습니다. 정말 고침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의 뜻이라면' 이런 뜻이 들어 있는 그런 말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사정이 있고,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내 문제가 우선이고, 급한 것이지 남의 뜻을 생각해 보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 이 문둥병자는 남을 생각할 만큼 여유 있는 입장이 아닙니다.
  그는 돈도 없고, 그 병을 고칠만한 조건이 없는 사람입니다. 집에서 버림받고 친구에게도 버림받은 존재입니다. 육체적으로는 매일매일 고통 속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고 코가 떨어져 나가는 추악한 상태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찌 남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람은 '주님이 원하신다면, 주님의 뜻이라면' 주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은 배워야 합니다. 내 뜻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주님의 뜻을 물어 봐야 합니다.
  '내가 지금 호소하는 이 일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가를,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이 소리가 주님 뜻에 맞는 소리인가를 내가 지금 행하고 있는 이 행동이 주님의 뜻대로 하는 행동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 문둥병자는 '주님의 뜻이라면 내 병을 고쳐주십시오' 얼마나 겸손하고 진실한 태도입니까? '주님이 원하시면' 이 말은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시면 나는 이 병으로 죽어도 좋습니다.' 이런 뜻도 있습니다. 안 고쳐 주어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주님이 원하시지 않으면 나는 안 하겠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있습니까? 주님이 원하지 않을 것을 안 할 용기가 있습니까? 포기할 용기가 있습니까? 또 주님이 원하시면 무엇이든지 합당한 용기가 있습니까? 이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⑹'원하시면'이라는 말속에는 확실한 믿음이 들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시게 있나이다.' 무엇을 느낍니까? 이 문둥병자는 예수님이 병 고치는 능력이 있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능력입니다. 믿음은 기적입니다. 그런데 능력이 그 기적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믿는데서 능력이 나타나고, 믿는데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믿/ 예수님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 능력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에게 능치 못함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문둥병자의 고백은 '주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기에 저 같은 불쌍한 사람도 돌봐주실 줄 믿습니다. 원하시기만 하신다면 무엇이나 하실 수 있는 것을 믿습니다.' 이런 고백입니다. 저는 이 문둥병자의 믿음이 부럽습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3절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문둥병자의 고백을 들은 예수님이 손을 내밀었다고 합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이 손을 내밀어 안수하십니다. 그 끔찍하고 더러운 문둥병자에게 그 거룩하시고 깨끗하신 주님의 손을 대어 안수하셨습니다.
  여러분, 아무나 문둥병자에게 손을 대고 안수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랍비들은 외면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썩어 문드러진 그 몸에 손을 대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본질입니다.
  더러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손을 대신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하신 것이며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내가 원하는데 깨끗함을 받으라' 허준은 의원의 등급을 상의(上醫), 중의(中醫), 하의(下醫)로 나누어 말했습니다. 상의는 신분이나 재물을 보지 않고 병만 보는 의원을 가리키고, 중의는 병도 보고 재물도 보는 의원, 하의는 재물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의원으로 나눕니다. 우리 예수님은 상의 중의 상의입니다. /믿/
  여기 '내가 원하노니'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에서 벗어나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할/
  이 말씀을 배우면서 우리는 창1장의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이 말씀이 떠오릅니다. 주님의 말씀의 동시성과 능력입니다. 말씀은 바로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죽음에서 살려내는 능력이 주님께 있습니다. /아멘!/
  오늘날 인간들에게는 문둥병보다 더 큰 병이 있습니다. 죄라고 하는 병입니다. 문둥병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우리 모두에게 있습니다. 죄는 문둥병자 같습니다.
  문둥병에 걸리면 감각이 없습니다. 코가 떨어져 나가 아프지 않습니다. 죄라는 문둥병에 걸리면 무감각해집니다. 뻔뻔해집니다. 양심에 화인을 맞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 죄는 주님 안에서 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문둥병자를 깨끗함을 받고 얼마나 기뻐했습니까? 이 기쁨이 바로 구원의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요, 하나님을 믿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이 여러분들 속에 가득 있기를 축원합니다. /할/


  ▶여기서 우리는 이 문등병자의 신앙을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⑴먼저 그 문둥병자는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자기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종교의 지도자들이었던 서기관, 대제사장, 바리새인들에게 이 사람은 가지 않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가면 돌에 맞거나 학대를 받을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쳐다보지도 않고 부정하다고 하며 난리법석을 피울 것이 뻔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저분만은 나를 학대하지 않을 것이다. 세상 어떤 사람도 나를 환영하지 않고, 나를 싫어하지만 저 분만은 나를 박대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돌을 던지지 않으실 것이다. 내가 아무리 추하고 더러워도 예수님만은 기꺼이 영접해 주시고 박대하지 않으시리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바로 이 사람은 이 확신 때문에 문둥병에서 놓임을 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사람들이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죄인도, 실패하고 좌절하고 예수님의 곁을 떠났던 사람도, 씻을 수 없는 잘못 속에 방황하는 사람도 예수님 앞에 나아올 수가 있습니다.
  그 분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십니다. /할/
  ⑵그는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당신이 원하시기만 한다면 이까짓 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당신의 능력을 내가 믿습니다.' 그 사람은 예수님의 능력을 믿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능력, 예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아멘!/
  ⑶그는 간절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나아왔습니다.

  '주여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저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죄인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나를 보고 피하고 욕하고 나와는 상종도 하지 않습니다. 나는 갈 곳이 없습니다. 희망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 같은 죄인도 원하시면 깨끗이 하실 수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간절한 마음이요, 겸손한 마음입니다. /할/
  구약을 보면 아람장군 나아만이 문둥병에 걸린 기사가 나옵니다. 이스라엘에서 붙잡혀 온 어린 계집종이 그 집에서 수종을 들다가 자기 나라에 가서 선지자 엘리사에게 안수를 받으면 장군이 고침을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자, 나아만이 아람 왕의 친서와 예물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엘리사를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는 나아만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는 말만을 전합니다. 그 당시 최강국의 대단한 세력을 가진 나아만이 왔는데 와서 기름을 바르고 기도를 하지도 않고 요단 강에 가서 목욕하라는 말만 한 것입니다.
  나아만이 자존심이 상해서 자기 나라로 돌아갈 마음을 가졌습니다. 그때에 옆에 있던 신하가 기왕 여기까지 왔으니 시키는 대로 해 볼 것을 권하고 나아만은 요단강에 가서 일곱 번 목욕 을 합니다. 일곱 번째로 물 속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에 깨끗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할/
  무엇을 의미하는가? 겸손하게 되라는 말씀입니다. 참을성을 가지고 믿음을 가지 라는 것입니다. /할/ 오늘도 주 앞에 나와서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의 겸손한 마음, 큰 믿음을 가지고, 예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주님 앞에 엎드릴 때에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의 병과 그 어떤 문제라도 예수께서 개입하셔서 고쳐주시고 해결해 주실 것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⑷그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나아왔습니다.

  2절에서 그는 '절했다.'고 했는데 이 말은 헬라어로 '프로스 쿠네인'이라는 말로, 이는 신에게 경배할 때만 사용하던 말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믿는 그런 믿음이 역사를 일으킵니다. /아멘!/

 

  ▶4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다만 가서 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고 모세의 명한 예물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 하시니라"
  본 절의 문맥을 살펴보면 더 이해가 됩니다. 
  ⑴'삼가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고' 세상 사람들 같으면 광고, 선전을 많이 하라고 난리 법석을 할 텐데, 우리 주님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인간적인 광고는 하지말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할/
  ⑵'제사장에게 네 몸을 보이라!' 그 당시에는 제사장들이 의사를 겸직했습니다.
  ⑶'모세의 명한 대로' 모세를 율법의 대표자로 봅니다. 이 말씀은 '율법대로 살아라! 말씀대로 살라'는 것입니다.
  ⑷'예물을 드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습니다. 마6:21절에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나님께 마음 깊은 감사를 하라는 것입니다.
  눅17장은 10명의 문둥병자가 다 치료함을 받았는데 아홉은 뿔뿔이 자기의 길로 갔지만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주님께 와서 감사했습니다. 그때 주님은 '그 아홉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감사해야 할 성도가 감사하지 않으면 주님이 찾으십니다.
  ⑸'증거 하라!' 예수님의 능력을 증거 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할/ 요4장에 사마리아 여인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발견하자마자 자기가 살던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했습니다. 결코 구원의 기쁨을 더 누리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않았습니다. /할/ 전도는 성도의 사명입니다. 전도는 주님의 유언입니다. 그런데 전도는 하면 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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