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3강) 예수를 따르는 자의 각오! (마 8:18-2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57

(제43강)     예수를 따르는 자의 각오! (마 8:18-22)

 

  본문은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려는 두 종류의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신 사건'입니다. 한사람은 서기관으로써 예수님께 나아가 '선생이여!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당신만 따르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또 한 사람은 제자 중에 한 사람으로써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라고 말하자, 그때 예수님의 대답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우리의 이성으로 생각해 볼 때,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그런 의문을 가질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는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셨고, 제자 중 한 사람이 먼저 가서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해 달라고 요구하는 소극적인 태도임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시면서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귀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적극적으로 따르겠다는 서기관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가로놓은 고난을 각오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소극적으로 따르겠다는 제자에게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최우선'임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할/ ◀제목소개!▶

 

  본문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18절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
  똑같은 배경을 설명한 마가는 막4:35절에 '그 날 저물 때에'라는 말을 명기해 놓았습니다. 아마 베드로의 장모를 치료해 주시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간인 것 같습니다.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시고 이적을 행하시니 소문이 온 세상에 퍼져 예수님이 가시는 곳곳마다 인산인해의 인파가 모였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저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고 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저편으로 건너가자고 하셨을까요? 지금 계신 곳은 갈릴리 서쪽에 위치한 가버나움에 있습니다. 저쪽은 아마도 갈릴리 동쪽을 가리키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저편으로 가라고 하셨을까요?
  ①복음운동은 온 세상 전체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어느 한 지역에만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또 어느 한 나라에만 국한 될 수도 없습니다. 온 세상은 사마리아 땅 끝까지입니다. /아멘!/
  ②예수님이 많은 기적을 베풀자 사람들은 크게 놀라고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많은 혁명과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는 일심단원들이 있었는데 검(전쟁)을 이용해서라도 이 민족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독립단체입니다. 이 당은 흔히 '열심 당, 셀롯 당'이라고 합니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바라바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라고 나와 있지만 그가 열심당원 중에 가장 대표되는 인물입니다. 가롯유다도 사실은 열심당원 출신입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이적을 행하는 것을 볼 때에 '야! 저분이 우리의 지도자가 되고 왕이 된다면 우리도 저 로마의 압정에서 벗어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들을 가졌습니다.
  요6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을 때도 그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왕을 삼으려고 했습니다. 그때도 피하셨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한 나라의 왕이 된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영광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왜 그런지 아시지요? 예수님은 우주의 창조자시며 온 우주의 왕이시기 때문입니다. /믿/아멘!/
  예수님은 한 나라의 왕으로 오시지 않고,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려고 오신 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왕으로 삼으려고 하는 열심당원들은 피해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자고 제자들에게 명하신 것입니다.
  ③그 다음 건너편으로 가자는 이유는 '제자들의 복음에 대한 열심을 시험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제자들이 얼마나 복음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를 시험해 보셨습니다.
  지금도 우리 주님은 우리를 시험해 보십니다. '얼마나 영혼을 사랑하는가? 복음의 열정이 있는가?'를 시험해 보십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를 모르고 죽어 가는 저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뜨거운 마음을 달라고 기도합시다. /아멘!/

 

  ▶19절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씀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이 서기관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하시는 일과 그 능력에 감동되어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심한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께 '뿅'하고 가버린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능력에 말씀입니다. 또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많은 이적을 보이시는 예수님을 보고 그만 감탄해 버린 사람입니다.
  당시 '서기관은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한 번 알아보아야 합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 있어서는 특별히 서기관과 랍비라고 하는 지도계층이 있었습니다. 랍비라고 하면 랍비학교를 졸업한 율법에 대한 전문가로써 회당에서 가르치는 선생을 말함인데 지금 우리로 말하자면 목사 신분입니다.
  또 서기관은 주로 성경을 기록하고 해석하며 가르치는 일을 맡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나오는 서기관과 랍비 두 신분의 사람들은 모두가 다 성경에 전문가들입니다. 이들은 남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배우며 그 뜻을 보다 깊게 재해석하여 실천하는 특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본문의 서기관이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것을 보면 그는 예수님의 율법의 가르침에 먼저 놀랐을 것입니다. 너무 감동적이고 은혜롭게 율법을 가르침으로 '아! 내가 저분을 따라야겠다.'는 마음이 강하게 일어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여! 당신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겠나이다.' 각오를 말한 것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그 서기관의 마음속에는 아무래도 조금 거리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예수님은 참 훌륭하고 놀라우신 분 같은데 함께 다니는 제자들이 꺼림칙했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사실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촌놈들인데다 불학 무식한 어부 출신들이고, 당시 강도라고까지 지칭하는 세리 마태가 따라다니는 것이 못마땅했습니다.
  한마디로 수준이하의 사람들과는 어울리기가 좀 뭐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요3장 니고데모가 밤에 혼자서 예수님을 찾아와 영생의 도리를 물었던 것도,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싶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있는데도 주위 사람들 때문에 한 밤중에 몰래 눈을 피하여 영생의 말씀을 받고 그 도리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여기 서기관이 '예수님을 좇겠다.'는 말은 대단히 깊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배운다는 것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함께 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한 결심이고, 그 당시에는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기관의 또 다른 착각을 한 번 정리해 보아야 합니다. 그 당시 서기관의 직책은 종교적으로 상류계급에 속한 자이기에 존경받는 위치에 있습니다. 그는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으로 종교적 우월감에 사로잡힌 자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가 결단만 하고, 자기가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지 주님을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알 것은 주님을 따르는 것은 '분명한 소명 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내 의지, 내 결단보다도 주님의 부르심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할/ 예수 믿는 것은 내가 원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서기관의 또 하나의 착각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서기관의 용기는 너무나 맹목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수많은 군중들과,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들을 보면서 예수님과 같이 있기만 하면 굉장히 유익하리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세상 말로 하면 팔자 좀 고치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면 영광도 얻고, 생기는 것도 많아지고, 자기의 이름과 지위도 지금보다는 훨씬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또 예수 믿으면 무조건 축복을 받고, 병도 낫고, 모든 것이 잘 되고, 무엇을 하든지 성공하고 형통한 일만 있을 것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 믿기 때문에 희생해야 할 몫이 더 커지고, 예수 믿기 때문에 세상 것을 포기해야 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내어놓아야 하는 제자로서의 치러야 할 대가가 있음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고백 앞에 큰 도전을 받아야 합니다. 행20: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할/

 

  ▶2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인간적인 생각에서 보면 갈릴리 어부 출신들에 비해 당대의 지도급인사인 서기관 출신이 따라 준다면 참으로 고마워해야 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이 서기관이 좇음을 허락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속에서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의도가 오히려 그 길을 막는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그 서기관의 마음을 읽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할/
  '저는 선생님만 따르겠습니다.'라고 매달리는 서기관에게 예수님은 너무 엉뚱한 말씀을 주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쳐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십니다. 여러분, 김빠지는 소리가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 속에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 서기관을 시험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래도 네가 끝까지 나를 따르겠느냐?'를 묻고 계시는 말씀입니다. 한마디로 네가 이래도 '죽도록 충성할 수 있느냐?'를 묻고 계시는 것입니다. /할/
  여기서 '죽도록 충성'한다는 것은 '시간적으로는 죽을 때까지요, 질적으로는 죽는 일까지도 충성하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고 따질 것 다 따지고 말할 것 다 하고는 진정한 충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서기관을 향하여 '네가 언제까지 나를 따를 것이냐? 이렇게 인기가 좋고 영광스러운 때에는 따라 다니다가 인기가 사라지고 위기가 오는 날에는 그만 두고 떠날 것이 아니냐?'라는 뜻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생활은 죽는 날,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는 날이 끝나는 날입니다. 그러므로 한번 시작한 신앙생활은 마지막 순간까지 가야하는 것이지 중간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아는 한 사람이 병석에 누워 있다가 전도를 받아 주의 종의 기도를 받고 병이 치료되었습니다. 그때 그는 평생을 다 바쳐 열심히 할 것같이 서둘었습니다. 그런데 불과 3년도 안되어서 그 신앙 다 까먹어 버리고 도로 세상으로 나갔습니다.
  '왜 교회 안 나가냐?'고 물었더니 '3년 간 나가 주었으면 은혜를 갚았다.'는 식으로 말을 했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다시 병을 얻고 실음, 실음 앓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만 바로 믿고 죽으면 천당이나 갈 터인데, 불쌍한 영혼입니다.

  본문의 예수님의 대답은 참 지혜로운 대답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겠다는 사람에게 거절하시지 않았습니다. 자격이 없다고도 말씀하시지 않고 자격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산에 사는 여우도 자기의 굴이 있고, 넓은 창공을 나는 새도 저녁이 되면 깃들일 장소가 있다. 그러나 네가 따르고자 하는 나는 머리 둘 곳 하나 없는 사람이다. 그래도 네가 나를 따르겠느냐?' 쉽게 말하면 '정말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따를 수가 있겠느냐?'라는 깊은 질문이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보실 때에 '아무래도 네 마음속에 무엇인가 바람이 있고, 조건이 있는 것 같으니 그것 가지고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를 때 자기들 나름대로 꿈이 있고, 설렘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로마를 쳐부수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면 그들은 우의정, 좌의정 한 자리씩을 탐내고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참다운 사명 자는 어떤 물질적인 것, 자리를 보장받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구원해 주신 은혜가 감사하고 직분 주신 것이 감사해서 생명 바쳐 충성하는 것이지요. /아멘 입니까?/
  어떻게 보면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의 자격이 충분히 있는 것 같습니다. 그는 어부로 있을 때 굉장한 부자였답니다. 지금도 시몬 베드로가 살았던 가버나움에 가보면 팔각형으로 된 그의 집터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그는 배와 그물뿐만 아니라 많은 종업원들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시몬 베드로 혼자 어부 노릇한 것이 아니고, 안드레 요한 야고보 등과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습니다. 말하자면 하나의 조합으로 구성된 것입니다.
  학자들은 당시 베드로를 조합장 정도라고 했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자 배도 그물도 처자식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이 '여우와 새'의 비유 속에는 너도 베드로처럼 '다 버리고 나를 따를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할/
  주님은 지금도 당신의 자녀들이 일시적인 감격에서 따르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일시적인 감격은 일순간 불타다가 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원하시는 제자는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희생을 각오한 사람'들입니다. 즉 '십자가를 질 수 있는가? 자기 목숨이라도 바칠 수 있는 지'를 바라십니다. /할/
  지금 헌신하고 계신 여러분들이여, 주님을 따르기로 나셨으니 끝까지 결단하며 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어떤 사람이 '내일 죽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내일 죽을 것이다.'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전7:4절에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초월해집니다. 돈이고 권력이고 다 놓고 가야 합니다. 또 죽음 앞에는 진실해 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나는 죽은 몸이다.' 생각하고 신앙생활하면 하나님이 시간마다 사건마다 살려주실 줄 믿습니다. /믿/
  성경은 역설적인 교훈이 많습니다. 예수님이 '많이 갖기를 원하느냐? 그럼 주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되고, 죽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이 상'을 주십니다. 인간의 방법과 하나님의 방법은 정반대입니다. 세상의 법과 하나님의 법도 정반대입니다.
  세상 법은 주는 자가 손해입니다. 그러나 성경 눅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는 자는 집 생각도 하지 말라'는 깊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지금 평신도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로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의 마음을 훤히 아시고 나를 따르는 자는 어디를 가서 환영받는 자리보다 핍박받는 자리가 더 많고, 인기보다도 고독한 길을 가야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주님의 골고다 십자가 언덕까지 따르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 길이 좁은 문, 좁은 길입니다. /이해가 되고 믿어지면 아멘!/

 

  ▶여기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인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단7:13-14절에 '내가 또 밤 이상 중에 보았는데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자에게 나아와 그 앞에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로 그를 섬기게 하였으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라 옮기지 아니할 것이요 그 나라는 폐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단7:13절에 처음 언급하신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본체이고 성자 예수님께서 사람이 된 메시아란 뜻으로 복음서에서 80회가 넘게 사용된 말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자기를 말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신 칭호입니다. 이 칭호는 주님의 겸손에 관하여 사용된 언어이고, 특히 머리 둘 곳이 없다는 것은 주님의 소유가 없음을 설명한 단어입니다.
  주님은 여우나 새보다 평안히 안식할 곳이 없다고 했습니다. 요7:53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은 산에서나 들에서 밤이 맞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면서 밤을 지새웠습니다. 실로 우리 주님은 오실 때도 가난하게 빌린 마구간으로 오셨고, 죽음도 요셉의 빌린 무덤에서 마치셨습니다.
  '플러머'(Plummer)라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는 남의 마구간을 빌려서 세상에 태어났고, 남의 무덤을 빌려서 생을 끝냈다.'고 했습니다.
  왜 우리 주님이 가난하게 오셨습니까? 그분은 만 왕의 왕이요, 이 세상을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이십니다. 그런데 왜 가난하게 그렇게 오셨습니까?
  고후8:9절을 보세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할/
  예수님이 우리의 가난을 위하여 친히 가난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부요하게 살아가야 할 축복 자들입니다. /믿/아멘!/
  권위 있는 해석은 아닙니다마는 어떤 주석가는 예수님이 '여우와 새'를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은 '이 서기관의 마음속에 여우같이 간사한 마음과 새 같은 허영심으로 가득 채워져 있어서 인자는 네 마음속에 들어갈 곳이 없다는 뜻에서 비유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제 또 다른 제자와의 대화를 보겠습니다.

 

  ▶21-22절 "제자 중에 또 하나가 가로되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우리는 여기서 '제자 중에 또 한사람'이라는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교회 안에 문제는 불신자가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다는 사람 중에서 항상 문제가 발생합니다.
  '주여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이 요구는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너무 당연한 요구입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장사하는 것은 의무적이요, 윤리적이요, 그 보다 급한 일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해석을 잘못해석하면 부친이 돌아가셨는데도 장례식에도 갈 필요가 없다.'고 해석할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도대체 '기독교는 불효를 가르치는 종교인가? 부모의 장례도 치르지 말라니 너무하지 않는가?'라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장례식에 가야 합니다. 주님은 부모에게 효도를 가르치셨고, 손수 십자가 위에서 그 효를 실천에 옮기신 분이십니다. 이 말의 뜻은 그 당시 중동문화를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이 제자의 말은 '유산을 받을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죽으면 자식에게 유산을 줍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직 살아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가고 싶은데 아버지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유산을 받은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는 것이 이 제자의 말의 뜻입니다.
  당시의 관습은 부모가 나이가 많거나 병에 걸려 있을 경우 자식은 멀리 떠나지 못합니다. 그때는 전화도 전보도 편지도 요즘처럼 빨리 가는 그런 때가 아닙니다. 그렇게 멀리 가면 부모님이 갑자기 돌아가실 때 장례를 치를 수가 없습니다. 그런 배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의 제자의 부모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 부모가 돌아가신 경우라면 하루만 장례식을 지내면 되는데 그것은 예수님이 기다리지 못해서 '장례식 그만두고 나를 따르라!'고 그렇게 말씀하실 예수님이 아니십니다.
  요즘 말로 비유해서 표현한다면 '예수 믿으세요'하고 전도하면 '돈 좀 벌어놓고요, 사업을 일으켜 놓고요, 지금 젊으니까 실컷 놀다가 늙어지면 예수 믿을게요.' 이렇게 저렇게 핑계되는 말이 바로 본문의 제자의 말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22절에서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세상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 물건을 가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유산은 '신앙의 유산' 뿐입니다. 세상 것 때문에 영혼은 놓쳐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느라고 예수님을 잊어버려서도 안 됩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받으려고 아버지가 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 후에 주님을 따르는 것은 너무 늦습니다. 이 제자는 12제자 중에 하나가 아니라 70인의 제자라고 주석학자들이 풀이한 것을 참조합니다.
  오늘 이 제자는 세상 것에 먼저 우선순위를 둔 자입니다.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그래서 주님이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다. 성도의 삶의 우선순위가 먼저 예수님을 좇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삶의 우선순위가 바로 되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이 말씀의 믿음이 가면 크게 아멘 하십시다.
  눅9:61-62절을 참조해 보세요!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눅9:23절에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할/
  ▶주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아멘!/
  ▶십자가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⑴고통의 십자가입니다. 인간 생활에 자연히 따르는 고통, 고난이라고 합니다. 사는 데는 고통이 따릅니다. 그 고통을 감당해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느니라.'
  ⑵핍박의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는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만 있습니다.
  딤후3: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마5:10-12절에서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고 하셨습니다. 
  ⑶남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바로 남을 위한 십자가였습니다. 흑인 목사 '마틴 루터 킹' 목사는 흑인들을 위해 십자가를 졌습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고난이요, 희생이요, 헌신이요, 자기의 죽음입니다. 기독교는 죽는 종교입니다. 바울은 '날마다 십자가 아래서 나는 죽노라'고 말했습니다. 죽음 뒤에 찬란한 부활의 새 아침이 잉태됩니다. /믿/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이 말씀을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회를 상실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 것도 기회입니다. 기회가 지나가 버리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일을 후일로 미룹니다. 교회 나가는 일을 다음 기회로 미룹니다. 많은 직분 자들이 후일에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게 경고합니다.
  약4:4절에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했고, 잠27:1절에서는 '너는 내일 자랑하지 말라. 하루 동안에 무슨 일이 날는지 네가 알 수 없음이니라'고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이 땅 위에 무슨 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할/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으라는 전도를 받을 때 이런 식으로 대답합니다. 아이들을 좀 키워 놓고서, 사업의 기반을 좀 다져 놓고서, 돈 좀 벌어 놓고서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그 어떤 일도 예수를 믿는 일보다 우선이 될 수 없고, 또 되어서도 아니 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의 각오가 있습니다.
  ①우리의 가난이나 손해나 핍박이나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서기관에서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②주님의 일에 우선권을 두어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 적인 의무도 포기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습니다. 새벽에 좀 편안하게 잠자고 싶은 것이 사람의 욕망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바로 믿으려고 할 때 주님과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잠자는 것을 양보하고 주님 앞에 나와 교제하고 찬양해야 합니다.
  ③소명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러 이 귀한 직분을 주셨다는 확실한 사명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할/
  ④그런데 그 사명이 인생을 행복하게 합니다. 사명감에 헌신하는 사람은 보상을 기대하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자식을 키우면서 무엇도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저 귀엽고, 그저 사랑스럽고 그저 행복합니다. 사명을 최고의 영광으로 압니다.
  사도바울은 주께 받은 사명 때문에 '매도 수없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뻔도 했고, 유대인들에게 40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창으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배가 파선의 위기를 맞나 일주일을 깊은 데서 지냈으며 여러 번 선교 여행 중에 강의 위험, 동굴의 위험, 이방인의 위험 시내의 위험, 광야의 위험, 거짓 형제의 위험을 당하고 여러 번 자지도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수많은 고난으로 얻은 것은 '그 몸에서 십자가의 흔적'뿐이었습니다. 그는 자나 깨서나 예수님을 생각하는 마음 하나로 그는 행복했습니다. 그 마음은 예수님의 생각으로 가득했고, 오직 사명을 다하는 일에만 즐거워하고 기뻐했습니다.
  ⑴환난과 고통 가운데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예수님의 소중함을 압니다. 가난과 질병 속에서 만난 예수님의 그 은혜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 생명을 바친 순교자는 생명을 바치고 얻은 예수님이 얼마나 소중하겠습니까?
  여러분, 값을 많이 주고 산 것이 귀하고 보배입니다. 값싸게 믿는 예수는 값싼 예수로 보입니다. 아무 것도 바친 것 없이 믿는 예수님은 공짜 예수요, 공짜이기에 언제나 버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몸 된 제단에 정성을 쏟고 헌신과 봉사를 이기지 않은 사람은 그 만큼 소중한 예수를 붙들게 됩니다.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고 하셨습니다.
  ⑵사명감에 사는 사람은 지칠 줄 모르는 힘이 솟아납니다. 또 사명감은 인생을 용감하게 만들고 성실하게 살도록 만듭니다. 사명을 깨달았을 때 인생은 위대하게 됩니다.
  ⑶전도하는 일 사명입니다. '내 남편, 내 친구, 내 이웃'을 전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받드는 것 사명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사명입니다. 선교, 구제, 건축 헌금 이 모두가 사명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더 큰 사명입니다. /믿/
  ⑤주님이 필요하시다면 우리는 몽땅 내놓아야 바른 제자입니다.
  ⑴시간을 손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내가 구원을 받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고백한다면 주님을 위해서 시간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해서는 안 됩니다.
  주일날 한 시간 드리는 것을 그렇게 힘들어하고, 아까워하고, 주저주저하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께 엎드려 '복을 주세요'하고 기도할 수도 없습니다. 신앙인은 먼저 내가 가지고 있는 소중한 시간을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아멘!/
  ⑵물질도 손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예배에는 반드시 제물이 따릅니다. 성경을 보면 '내게 올 때는 빈손으로 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갈 때는 언제나 우리 손에는 제물이 들려져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배자의 기본자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주님 때문에 시간뿐 아니라, 때로는 물질도 손해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정말 예수의 사람들이라고 하면 이 세상에서 언제나 이익만 챙기려고 하면 안 됩니다. 평안 하려고만 해서도 안 됩니다. 불이익을 당할 각오도 좀 하고, 손해도 좀 볼 용기와 의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이 적어도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할/
  저는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제자로써의 주님을 따르는 자세가 절대 필요합니다. 삶의 우선순위가 잘 정리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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