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2강) 예수님의 손은 어떤 손인가? (마 8:14-1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6:57

(제42강)   예수님의 손은 어떤 손인가? (마 8:14-17)

 

  본문은 예수님께서 그 유명한 산상 부흥회를 마치시고 내려오셔서 행하셨던 능력 가운데 그 세 번째 치료의 능력을 보이신 사건입니다.
  첫 번째는 한 문둥병자를 고쳐주셨고, 두 번째는 백부장의 하인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베드로의 집으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베드로의 집에 가보니 그의 장모가 와 있었는데 열병으로 몹시 고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본문은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주님께서 고쳐주신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막1장에서도 눅5장에서도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은 내용도 간단합니다만 고치신 방법도 간단합니다.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주님이 손을 대니 그의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마9:20절을 보면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하던 여인이 어느 날 예수님이 자기 동네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길거리로 나왔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그곳으로 지나가시는데 어찌나 사람들이 많은지 그 여인은 많은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주님의 옷자락에 손을 댔습니다.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2년 동안 고통을 주던 혈루증의 근원이 치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
  그런데 비율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의 옷이나 몸에 손을 댄 경우보다는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손을 대신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는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으신 경우가 더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오히려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양을 잡아 가죽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4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인간 실존의 현장을 찾아다니시면서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배고픈 자를 먹여주시고, 속상할 사람은 위로해 주시고 우는 자는 눈물을 닦아 주셨습니다.
  ▶조선일보의 이규태씨의 칼럼에서 '한국 여인이 입는 치마는 그 용도가 다양하다.'고 썼습니다. 그 치마는 입으면 옷이 되고, 깔면 자리, 싸면 보자기, 덮으면 포대기, 가리면 포장, 훔치면 행주, 강물에 몸을 던질 때 뒤집어쓰는 얼굴 가리개, 슬퍼서 눈물 흘릴 때는 손수건이 됩니다.
  옛날의 어머니들은 한에 울고, 시집살이에 울 때마다 치마로 눈물을 닦아야 했고, 그래서 세 벌의 치마가 눈물에 젖어 삭아야 시집살이가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간의 삶의 현장 속에서 겪는 고통, 절망, 좌절, 슬픔, 고독 이 모든 것들이 세 벌 치마를 눈물로 삭이는 것으로 끝날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해결이 됩니다. /믿/아멘!/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눈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 순간 그의 눈에 광명이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그 순간 그는 벌떡 일어나 걷고 뛰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말 못하는 벙어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입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 순간 그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귀에 '에바다' 즉 '열려라'하시니 그 순간 귀가 열려 소리를 들을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뿐입니까? 나인성에 살고 있던 과부의 아들이 죽어 그의 시체를 관에 넣어 묘지로 가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가까이 가셔서 그 관에 손을 대시면서 '청년아! 일어나라'고 하시니 그 청년이 벌떡 일어났습니다. 바로 그 손이 주님의 손입니다. /할/ ◀제목 소개!▶

 

  복 가운데 제일 큰복은 무엇입니까? '건강의 복'입니다. 아무리 큰 권력과 재물을 가지고 있어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없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여 박사학위가 몇 개더라도 건강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복 가운데 제일 큰복은 건강의 복입니다.
  행복은 건강이라는 나무에서 피어나는 꽃입니다.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를 관리하십시오. 분노와 격정과 같은 격렬한 감정의 혼란을 피하고 정신적인 긴장이 계속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날마다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섭취하는 음식물에 대한 조절이 필요합니다. 건강하면 모든 것이 기쁨의 원천이 됩니다. 재산이 아무리 많더라도 건강하지 않으면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모세는 80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40년 간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는 위대한 역사를 이룩하였습니다. 그는 120세의 나이에도 '나는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고 눈이 흐리지 아니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지금은 과학이 발전하여 시력이 나빠지면 안경이나 렌즈로 부족한 시력을 보충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시력이 나빠지면 결국 실명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모세는 120세가 되어도 그는 건강했고 시력도 좋았습니다. 그랬기에 그 위대한 출애굽의 역사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갈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은 40세 때입니다. 그는 45년 간 하나님의 일을 하고 85세 되었을 때 '오늘날 오히려 더 강건하다.'고 고백했습니다. 40세 때 보다 85세 때 더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건강은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2002년 12월 5일 미국 상원의원 '스트롬 서몬트'의원이 100세의 나이로 현직에서 은퇴를 했습니다. 그는 1902년 생으로서 변호사, 판사로 일을 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참가하였고,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사우스캐롤라이나주지사로 일했습니다.
  그가 의장으로서 '이번 상원회기가 끝났습니다.'라고 의사 봉을 두드리는 순간, 동료 및 직원, 의원 보좌관들은 열렬한 기립박수로 그의 마지막을 축하해 주었답니다. 100세까지 현직에서 일한다는 것은 건강했기에 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출15:26절에 '나는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했습니다. 말4:2절에서는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신다.'고 했습니다. 시103:3절에서는 '네 모든 병을 다 고치신다.'고 했습니다. 사53:5절에서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 나음을 입었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님의 열병을 치료하신 사건입니다.

 

  ▶14절 "예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 가사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셨다.'로 시작이 됩니다. 당시 베드로는 갈릴리 의 해변가 가버나움에 살고 있었습니다.
  주께서 베드로의 집에 들어가신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몇 가지로 말을 합니다. ⑴베드로가 초청했을 것이다. ⑵예수님께서 일정한 거쳐가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집에 자주 가셨을 것이다. ⑶요즘 말하는 심방을 가셨을 것이라는 견해들이 있습니다.
  예수님 혼자만 가신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제자들과 같이 동행했을 것입니다. 베드로의 집에 누가 있었습니까? 그의 장모가 그 집에 와 있었습니다. 모시고 사는지 아니면 잠깐 다니려 오신 지는 모릅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장모가 있었다는 것은 그가 결혼한 것만은 분명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로마 카톨릭의 잘못된 교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천주교에서는 교황을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주장하면서 모든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고 독신 제를 주장하며 또 교황의 무오 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배경을 보면 베드로는 결혼한 사람입니다. 천주교의 주장을 무색케 하고 있습니다. 고전9:5절에서도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여기 바울의 편지를 보더라도 베드로가 결혼한 것은 분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결혼을 부인하려고 천주교는 크나큰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님의 형편은 어떻습니까? 열병으로 앓아 누워 있었습니다. '그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 누운 것을 보시고' 열병은 급성 적인 병의 일종입니다. 요즘말로 하면 '장질부사에 걸렸다.'는 그 말입니다. 장질부사에 걸렸으니 그 가정이 얼마나 큰 시험과 고통이 있었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제자요 위대한 사도의 가정에도 이런 어려움이 닥쳐온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는 목사의 가정에도 장로의 가정에도 권사나 집사 님들의 가정에도 이런 질병의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눅4:38-39절에서 의사인 누가는 그녀의 병을 '중한 열병'에 붙들려 있다고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녀를 위하여 예수님께 고쳐 달라고 간구했던 것으로 보아 생명을 위협하는 치명적인 상황에 있음을 직감케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귀한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시고'입니다. 누가 보셨습니까? 주님이 그녀의 열병을 보셨습니다. 보는 것도 누가 보느냐에 따라 판도가 달라집니다. 제자들도 그의 열병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의 열병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님이 보셔야 합니다. 우리의 사정을 주님이 보셔야 합니다. 보시면 해결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아멘!/
  여기 '보시고'는 그 집에 들어서는 즉시 주님이 목격하셨음을 암시하는 단어입니다. 즉 주위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기 전에 그녀의 안타까운 사정을 목도하셨습니다.
  그 당시 베드로의 형편은 어떠했습니까? 눅5:11절을 보면 베드로는 만선된 배도 그물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해온 어부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그 가정이 자연히 어려움이 왔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한 마디로 말해서 남편 노릇도, 아버지 노릇도 잘못하고 있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장모에 대해서는 사위 노릇을 바로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예수님 때문에 가정을 버렸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사정을 아시고 보십니다.
  주의 일 때문에 가정 일이 소홀해 졌습니까? 주의 일 때문에 사업이 소홀해 졌습니까? 주님이 보시고 보상해 주실 줄 믿습니다. 주님은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믿/

 

  ▶15 절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누가 누구의 손을 만졌습니까? 주님이 베드로 장모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갔습니다. 저는 오늘 주님의 손에 포커스를 맞추려고 합니다. 사람들은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악기를 연주하고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일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손은 단순히 도구나 만들고 악기나 연주하고 그림이나 그리고 음식이나 나르는 그런 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은 몇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⑴못 박힌 손, 피 묻은 손입니다.
의사들은 사람의 손에 '이목구비가 들어차 있는 얼굴의 축소판'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온갖 신경이 손에 집중되어 있어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손에 접촉되는 감촉으로 물건의 성격과 질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로마 병정들은 주님의 그 손바닥에 못을 박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목에 박았다고도 합니다. 그때 주님의 손에서는 피가 흘렸습니다. 주님의 양손은 그때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 손은 상처 난 손이며, 피 묻은 손이며, 못 박힌 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산 사람을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그 손에 쇠못을 박는다면 그 아픔과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못 박히신 것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사53:5절에서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아 찍히신 손과 발에서 흐른 피는 나의 죄와 허물 때문에 흘린 피였고, 그 손에 상처도 흔적도 내 죄와 허물 때문임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할/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 피묻은 손을 주님의 능력의 흔적으로 고백했습니다. 갈6:17절에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그 흔적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원히 살 수 있는 영생의 길을 보장받았습니다. /믿/
  그런데 당시 예수님을 따라 다니던 제자들은 부활의 주님을 보고도 의심을 했습니다. 답답하신 예수님이 눅24:39절에서 '내 손과 발을 보고 나 인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신앙에서 의심은 금물입니다. 의심은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의 물결 같은 마음으로 이런 마음은 아무 역사를 일으킬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손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임을 믿습니까? 확실히 믿습니까? 의심하면 불 신앙입니다. 십자가의 사건을 확실히 믿는 사람이 믿음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할/
  ⑵능력의 손! 고치시는 손! 치료의 손입니다. 본문 3절에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할/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 치료의 손, 고치시는 손입니다. 소경의 눈에 손을 대시면 소경이 눈을 떴습니다. 앉은뱅이에게 손을 대시면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막5:35절 이하를 보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찾아가신 예수님께서 소녀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 하시니 그 소녀가 벌떡 일어나 걸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의 손이 닿는 곳엔 기적과 고침에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제가 자랄 때만해도 요즘처럼 약이 흔하진 않았습니다. 구토, 설사해도 익모초 즙을 짜서 코를 막고 마시는 정도가 고작이었고, 열이 나면 찬물수건으로 찜질 정도가 치료방법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느 초겨울에 열이 오르고 골치가 아파서 끙끙거리고 앓고 있을 때, 우리 어머니가 물수건 찜질을 해 주시면서 '엄마 손은 약손이다. 금방 낳게 될 거야'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사실 아플 때 어머니의 약손이 머리에 닿으면 정말 아픔이 가시곤 했습니다.
  정말 어머니의 손이 신통력이 있어서입니까? 아닙니다. 그 어머니의 손은 정성의 손이기 때문에 우리가 위안을 받는 것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손은 어머니의 손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신5:15절을 보면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시37:24절에서도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할/ 주님의 손은 능력의 손이기 때문에 우리를 능히 넘어지지 않도록 붙드실 수 있습니다. /아멘!/
  어떤 사람은 힘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위로 올라가는 힘입니다. 안으로 파고드는 힘입니다. 그리고 밖으로 뻗는 힘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위로 올라가는 힘이며, 우리의 심령 속으로 파고드는 힘이며, 온 세계와 우주로 뻗어나가는 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능력은 전능하신 힘이며, 최강의 힘입니다. /믿/
  ⑶축복의 손입니다. 창1:22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그리고 눅24:50절에서도 '예수께서 저희를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저희에게 축복하시더니'
  마14장을 보면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옵니다. 보리떡 5개와 물고기 두 마리, 주님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5천명을 먹고 열두 바구니가 남는 축복이 있었습니다.
  마14:20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 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어린 아이가 가지고 있을 때도 그때도 보리떡 5개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제자들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그것이 주님의 손으로 넘어가면 역사가 달라집니다. /믿/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떡을 떼니' 다 배불리 먹고 열두 광주리가 차고 넘치는 축복이 왔습니다. 이 축복은 보나마나 그 어린아이 몫일 것입니다.
  지금도 이런 축복은 일어납니다. 주님 손에 얹어 놓으십시오, 주님이 축사하시면 지금도 역사가 일어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축복의 손길에 붙잡히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⑷그 손은 심판의 손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피 묻은 사랑의 손이며, 고치는 손이며, 또한 축복의 손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징계하시는 심판의 손이기도 합니다.
  신2:15절 '여호와께서 손으로 그들을 치사 진중에서 멸하신 고로 필경은 다 멸절되었느니라' 또 욥19:21절에 '나의 친구야 너희는 나를 불쌍히 여기라 나를 불쌍히 여기라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여기 '하나님의 손이 나를 치셨구나!' 여기서 말하는 치셨다는 것은 심판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함께 했던 모세의 경우에도 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싸움에서 승리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계시록을 보면 주님께서는 불꽃같은 눈으로 보시고 손에는 철창을 들고 만국은 통치하시며 심판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초림 예수님은 죄인을 구하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재림의 예수님은 심판 주로 오셔서 죄인을 벌하십니다. 이상으로 주님의 손은 위대한 손입니다.
  본문 15절은 열병으로 고생하던 베드로의 장모를 예수님의 손에 닿는 순간 열병이 떠나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주경학자 크리스소톰은 '그녀는 열병만 나은 것이 아니라 완전한 회복까지도 주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정치도 열병을 앓고 있고, 대학가도 열병을 앓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약이 필요합니다. 15절에서 그 약은 '손을 만지시니'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만져주셔야 합니다.
  한국이 나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한동일 교수는 손가락이 아파 1년 동안 피아노 연주를 못하고 있을 때, 주님의 사랑과 능력을 깨닫고 찬송가를 연주할 때 그 손이 치료받았다고 그가 간증했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손은 우리가 가지고 있을 때 그 손은 별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의 손이 내게 닿을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주님, 우리 참 행복한 교회에 손을 대주시옵소서, 주님, 성도들의 가정에 사업장에 손을 대 주시옵소서, 주님 행복한 모든 영혼들에게 손을 대주시옵소서!' /할/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우리도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왜 기도의 손을 들어야 합니까?
  ⑴우리 인생살이에 문제가 많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가는 길에 문제가 많았습니다. 모세는 그때마다 기도했습니다. 홍해가 가로막을 때에도 기도했고, 마라의 쓴 물을 만나서 백성들이 원망할 때도 기도했고, 마실 물이 없어서 목마를 때도 기도했고 아말렉이 공격해온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때도 기도로 문제를 풀었습니다. /할/
  우리들도 남이 아는 문제가 있고, 남이 모르는 문제가 다 있습니다. 문제가 없는 사람은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고 문제가 없는 사람은 천국에 있는 사람입니다. 문제가 많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우리도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자기를 항복시키고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도와주실 줄 믿습니다.
  ⑵우리는 약하고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약하고 다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자신을 항복시키고 기도하면 강해지고 한계를 뛰어넘어 큰일을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약한 사람이 강해지는 비결이 기도에 있습니다. 무능한 사람이 능력의 사람이 되는 비결도 기도에 있습니다. 내 한계를 넘어서 더 넓고 더 높은 세계를 보며 하나님께 쓰임 받는 비결이 기도에 있습니다. /믿/
  ⑶모든 악의 세력은 물러가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기도의 손을 들 때에 아말렉은 물러갔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걱정 근심 염려, 두려움은 물러갑니다. 기도하면 마귀는 물러갑니다. 시험과 문제는 물러갑니다. /할/ 기도하면 홍해도 갈라지고 여리고도 무너지고 쓴 물은 단물로 바꾸어집니다. /아멘!/
  히스기야는 죽을병이 들었을 때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에 매달렸더니 질병이 물러가고 15년이나 더 살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항복하고 기도하면 원수가 한길로 왔다가 일곱 길로 도망갈 줄 믿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우리에게 오는 이 모든 적을 하나님이 물리쳐 주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어떠한 문제 앞에서라도 좌절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손을 들면 넉넉히 감당하고 적은 물러가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⑷기도하면 은혜 받고 능력 받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능력을 주셔서 무능한 사람이 유능한 사람이 되고 무지한 사람이 지혜로워지고 방황하던 사람이 새 비전을 갖게 되고 맡은 일을 잘못하던 사람이 잘 감당하는 사람이 됩니다.
  구두 수선공이었던 무디는 기도하여 능력 받아 대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폭력배 두목이었던 김익두가 기도하여 능력 받아 대 부흥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무능하다. 가진 것 없다. 배운 것이 없다. 돈이 없다.'고 낙심하거나 타령하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받고 싶은 만큼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분량만큼 그릇 만큼 하나님이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⑸기도하지 않으면 거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하나님께 투자하는 것입니다. 하늘 창고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저축이 많이 되어 있으면 때가 되면 찾아서 쓰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부모가 저축 해놓은 기도 덕분에 오늘 잘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떨어지고 나면 찾아 쓸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저축이 무엇입니까? 앞날을 위하여 오늘 쌓아두는 것입니다. 기도는 저축하는 것입니다. 기도의 저축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할/ 시28:2절에 '내가 주의 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아멘!/
  다시 본문을 보겠습니다.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드니라' 얼마나 아름다운 광경입니까? 연령적으로 보면 이 장모는 최소한 50에서 60사이 것으로 짐작됩니다. 예수님의 발 밑에서 수중 들던 베드로의 장모의 모습을 한번 상상해 보겠습니다. 옷은 흐트러지고 고열로 고생해서 창백한 얼굴은 땀으로 얼룩졌을 것이며 머리는 다 풀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는 표현할 수 없는 기쁨과 감격으로 눈물을 흘렸을 것이고 그 마음은 감사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여기 '수종드니라'는 말은 쉽게 표현하면 '봉사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봉사는 구원 얻은 사람의 마땅한 도리요 행위입니다. 종종 병든 사람을 보면 지금까지는 주님을 위해서 너무나 할 일이 없었는데 이제 내 병만 낫게 해 주시면 주님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결심하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들 중엔 세 종류로 나눠집니다. ⑴병이 낫지도 못하고 평생 병든 몸으로 지나다가 애석하게 죽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⑵병이 나았는데도 주님의 은혜를 감사하거나 그 은혜에 보답하는 봉사도 하지 않고 차일피일 미루다가 기회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치 눅17장에서 예수님께서 고침 받은 열 문둥이 중에 아홉과 같은 사람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그 아홉을 찾으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갔느냐?'
  ⑶병 고침 받고 구원받은 감격에 죽도록 봉사하고 충성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축복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병들었다가 치료받아 감사하고 봉사하는 것을 좋은 일이나 그보다 더 좋은 것은 병들기 전에 건강할 때 사업이 잘 되어질 때 더 열심히 봉사하고 감사하는 신앙이 지혜 있는 신앙입니다. /믿/

 

  ▶16절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예수님의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믿습니다. 원래 소문은 퍼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되도록 좋은 소문만 퍼져야 합니다.
  소문을 듣고 어떤 무리들이 많이 왔습니까? 귀신들린 자, 병든 자들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다 치료해 주셨습니다. 막1:34절에 '예수께서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말씀으로 다 고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능력입니다. 이 말씀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했던 그 말씀입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던' 그 말씀입니다.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가 일어납니다.

 

  ▶17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8장의 사건을 보면서 '문둥병자와 백부장의 하인' 그리고 열병이 떠나가는 것을 보면서 '구약 이사야서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졌구나!' 라고 구약을 해석했습니다.
  마태가 해석한 것에 따르면 예수님은 두 가지 모습이었습니다.
  ⑴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연약한 것은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사53: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렇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어리석어서 그분이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우리의 연약함은 담당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믿/아멘!/
  사람이 강한 것 같지만 사실은 약한 존재들입니다. 엘리야를 보십시오! 그는 대단한 능력을 나타낸 사람입니다. 그릿 시냇가에서 까마귀가 물어다 주는 양식을 먹고 지냈고 심한 가뭄 3년 동안에도 사렙다 과부 집에서 기적의 밀가루통과 기름병을 통해 먹고살았던 사람입니다.
  사렙다 과부의 독자가 죽었을 때 살렸던 사람이요,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고 비가 내리게 했던 능력의 사자요, 바알과 앗세라 선지자 850명을 죽이던 담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연약함이 어디서 나타났습니까? 그 당시 최고의 권력자인 아합왕의 부인 이세벨이 죽인다고 위협할 때, 광야로 도망쳐서 로뎀나무 아래 누워서 하나님께 내 목숨을 거두어가 달라고 애원하던 연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연약한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렇습니다. 돈이 많고 지식이 많다고 강한 것은 아닙니다. 어느 때 자신을 돌아다보면 약하고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고독하고 외로워질지도 모릅니다. 젊어서는 이해가 안 갑니다. 나이가 좀 먹어야 인간이 약하다는 사실을 실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연약한 인생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서로의 약점과 아픔을 품어주어야 합니다.
  ▶어느 날 남편이 부인에게 말하기를 '여보, 당신에게 여러 번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소. 그러나 이제는 말해야 될 것 같소' 그럽니다. 부인은 '남편이 다른 여자가 있는가?'라는 생각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그런데 남편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하기를 '사실, 우리 어머니는 둘째 부인이었소. 나는 첩의 자식이요.'라는 말을 하고는 눈물을 흘립니다. 아마, 남편은 그 말을 하기가 너무나 힘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나 부인이 들어보니 너무나 하찮은 이야기입니다.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고 이제 겨우 이야기해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아요?'라고 웃더니, 이번에는 부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합니다.
  '모처럼 당신이 비밀을 말하니, 나도 그 동안 못했던 비밀을 말할게요.' 남편도 긴장합니다. '사실, 우리 아버지가 전쟁통에 죽은 것은 빨갱이 노릇을 하다가 국방 군에 붙잡혀서 총살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식구들은 고향에도 못 갑니다. 그 동안 당신이 이 사실을 알까봐 너무나 마음을 졸였어요. 그러나 이제 다 털어놓으니 날아갈 것 같습니다.'라고 하면서 이번에는 부인이 웁니다.
  남편도 '육이오 사변 때 그런 일을 당한 가정이 얼마나 많소? 그것이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숨겨왔오?'라고 껄껄 웃습니다. 그 때부터 그 부부는 서로의 과거의 상처를 끌어안음으로 더 깊은 사이가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하찮은 일이 자신에게는 엄청난 인생의 올무가 될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모두 서로의 상처들을 십자가 사랑으로 끌어안으시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할/
  이제 우리가 연약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으므로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무섭지 않습니다. 외롭지 않습니다. 든든합니다. /믿/ 그래서 찬송작가는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라고 찬양했습니다.
  ⑵예수님은 우리의 병을 짊어지신 분입니다.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노라'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은 제한이 없습니다. 무한한 능력입니다. 우리의 영혼만을 구원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병을 고쳐주신 별입니다. 육신의 질병뿐만 아니라 생활의 질병도 치료해 주시는 분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며 우리 인생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본문에서 마태가 '이사야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라'고 강조한 것은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것을 볼 때에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아임을 증명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메시아입니다. 그분은 오셔서 메시아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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