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7강)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00

(제47강)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 (마 9:9-13)

 

  우리가 어렸을 때는 엿장수가 온 동네가 들을 수 있도록 가위를 들고 소리를 내며 동네를 찾아왔습니다. 엿장수가 오면 동네 아주머니들은 집에 있는 헌옷이나 고무신, 떨어진 것, 빈 병, 부서진 양은그릇 등 아무 쓸모 없는 것들을 모아서 엿장수에게 갑니다. 엿장수는 그것을 받고 가정에 필요한 것을 주었습니다.
  빨래비누, 양제기 그릇을 얻어 오기도 하고 생활에 필요한 여러 가지를 얻어옵니다. 엿을 주기도 하고 사탕도 주기도 합니다. 그 엿을 먹으면 온 손에 엿이 녹아 묻었는데 그 끈적끈적해진 손을 핥아먹기도 했습니다. 그때 그 엿 맛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촌 동네를 찾아오셨습니다. 주님은 소리를 내면서 온 동네를 향하여 가위를 들고 큰소리를 내듯이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가난한 마을, 여러 가지로 어려운 마을에 찾아오셔서 그에게 오라고 신호를 보내십니다. 주님이 왜 오십니까? 내게 있는 모든 나쁜 것을 다 가져 가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쓸모 없는 것, 떨어진 헌 옷, 빈 병, 신발들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서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해, 쓸 만한 것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믿/
  주님은 우리의 가정, 우리의 일터 우리의 심령에 찾아오십니다. 헛 옷을 가져가고, 새것을 주시며, 못쓰는 것을 가져가시고 좋은 것, 귀한 것을 주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오십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의 짐을 가져가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우리의 허물과 부끄러움과 연약함과 쓸모 없는 아무 가치 없는 패인과 같은 우리들의 모든 삶을 가져가시고 위로부터 주시는 거룩하고 신령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하여 찾아오신 것입니다. /아멘!/
  본문을 보니 예수님이 가버나움 동네에 오셔서 당시 세무서 직원이었던 마태를 만나 '나를 좇으라'고 하시니 그가 모든 것을 내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아 예수의 제자가 된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태는 자기의 동족 유대인들의 세금을 받아 로마정부에 바치는 세리입니다. 당시 세리는 정한 세금 외에 과중한 세를 거두어 얼마는 로마정부에 바치고 나머지 많은 돈은 자기가 착복하기 때문에 동족들에게 비웃음과 손가락질을 받았고 적대시되었습니다.
  당시에 '창녀, 이방인, 죄인, 세리' 이 모두는 유대인들이 개로 취급할 정도로 죄인 취급을 했습니다. 그런 죄인에게 우리 주님은 오셔서 그를 제자 삼으셨습니다.
  마태는 자기를 인정해 주신 예수님이 너무 고마워서 하루는 예수님을 초청해서 식사대접을 했습니다. 이 자리에는 자연히 마태의 친구였던 세리들도 참석했습니다. 이 광경을 본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추궁을 합니다.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느냐?'고 제자들에게 큰 소리로 물었지만, 사실은 그들이 예수님이 듣도록 큰 소리로 추궁을 한 것입니다.
  그들의 소리를 들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대신해서 대답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 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주님은 죄인을 불러 의인 삼으시고 병든 자들을 건강한 자 삼으시려고 오늘도 저와 여러분 곁으로 오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본문은 병든 자와 죄인을 비교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병든 자란 죄인을 비유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병든 자에게 좋은 의원이 필요하듯이 우리 인생들 모두가 죄를 범한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병에서 고침 받고 해결 받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예수님이 필요한 것입니다. /믿/ ◀제목 소개!▶


  ▶9절 "예수께서 거기서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치료해 주신 그 집에서 떠나셔서 지나가시다가 가버나움 거리를 지나 가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가버나움 거리를 지나가시는데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은 것을 보시고'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관을 지나가시다가 그곳에 앉아 있는 세무직원인 마태를 발견하셨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태를 조명해 보아야 합니다.
  ①마태의 이름은 무엇인가? 본문은 막2장, 눅5장에서 똑같이 취급하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시몬은 베드로라고 개명해 주신 것처럼 레위에게 마태라는 이름을 주면서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입니다.
  성경은 이름의 뜻을 귀하게 다룹니다.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태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을 의인 삼아주신 것이 하나님의 선물'인줄 믿습니다. 마태는 알패오의 아들로써 레위지파에 속한 아브라함의 후손입니다.
  여기서 마태는 마태복음의 제자 명단에서 자신이 세리였음을 일부러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의 전직을 밝히지 않으면서 유독 자기 자신의 이름 앞에는 세리였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10:3절에서도 '빌립과 바돌로매, 도마와 세리 마태,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되었음은 이미 밝혔습니다. 이 마태복음의 독자인 유대인들에게 세리라는 직업은 혐오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들은 유대민족을 부끄럽게 만드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마태가 굳이 자신의 자랑스럽지 못한 과거를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은 자신이 예수 안에서 얼마나 변화된 사람인지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할/
  ②그의 직업은 세리입니다. 로마 정부 밑에서 세금 징수의 임무를 띠고 자기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징수하여 로마에 충성스럽게 바치는 직업이 세리입니다. 한마디로 동족의 피를 빨아먹는 기생충과 같은 존재입니다.
  로마의 세법대로라면 세액의 1할 5푼을 차지하도록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할, 3할, 5푼까지 높게 초과 부과하여 그 차액을 착복했습니다. 세리는 로마 권력의 막강한 비호 아래 불법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로부터 로마의 관리나 군인들 보다 더 나쁜 민족 반역자로 증오와 멸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부자에게는 뇌물을 받고 세금을 감해 주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추가해서 세금을 뜯어냄으로 더욱 증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하나님 외에 인간에게 세금을 바친다는 것을 하나님의 권위를 모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세리를 더더욱 증오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 의하면 세리는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당했습니다. 그들은 불결한 짐승이나 부정한 물건으로 취급되었고, 어느 경우에도 증인으로 설 수 없으며 강도, 살인자와 세리는 한 종류로 인정했습니다. 이런 죄인을 우리 주님이 찾아오셔서 불러 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할/
  그렇다면 마태가 앉았던 이 자리는 어떤 자리인가? 죄악과 탐욕의 자리입니다. 여기 이 자리는 돈을 잘 벌 수 있는 자리입니다. 민족을 배반하고 양심을 버리고라도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그런 자리였습니다.
  바로 그런 자리에 앉아 있는 마태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런 자리에 주저앉아 주어진 이익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마태에게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좇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마태에게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음성입니다. 우리들은 지금 어떤 자리에 앉아 있습니까? 누구와 함께 앉아 무엇을 추구하고 있습니까? 지금 내가 앉은 그 자리가 과연 우리 주님이 기뻐하실 자리인지 생각합시다. 비록 내게 많은 이익을 가져다주어도 주님이 보고 기뻐하실 자리인지 분별합시다.
  비록 내게 많은 이익을 안겨주는 자리라도 주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자리라면 빨리 자리를 옮겨 앉읍시다. 잘못된 자리에 앉아 있다보면 또 다른 함정에 빠질 수 있습니다. /믿/
  베드로를 보세요! 마26:58절에 '베드로가 멀찍이 예수를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에까지 가서 그 결국을 보려고 안에 들어가 하속들과 함께 앉았더라'
  여러분, 지금 베드로가 함께 앉아야 할 자리는 주님이 서신 바로 그 자리입니다. 그 십자가의 자리에 그는 앉아야 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을 죽이는데 내어주는 것을 보고 즐기는 사람 가운데 앉았다가 엄청난 함정에 빠져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하는 어처구니없는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은 어디에 누구와 함께 앉아 있습니까? 주님과 떠나있다면 빨리 옮겨야 합니다. 여기서 '주님과 함께 앉는 자리'란 어떤 자리인가?
  내 이익 보다 진리를 생각하는 자리입니다.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버리는 자리입니다. 또한 소외된 자들을 품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형식적인 거룩함이 아닌 내면적 거룩함을 가지고 소외된 사람들 곁에서 그들을 품고 위로하는 자리가 우리들이 앉아야 할 자리입니다.
  우리는 누구와 함께 앉고 있습니까? 내 욕심 때문에 앉아서는 안될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않습니까? 세속적 욕심 때문에 주님 곁에 앉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모습입니다. 지금 주님은 마태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소명'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일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시는 것은 세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은 학벌을 보고 집안을 보고 용모를 보고 사람을 뽑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 사람의 학벌, 집안, 용모를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버림받은 자를 불러 당신의 자녀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은 아무나 불러주시지 않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선택받은 자를 불러서 당신의 자녀 삼으시고 일꾼을 세우십니다.
  '나를 좇으라' 우리 모두 주님이 불러 주셨습니다. 구약의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출발했습니다.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지시를 받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속에서 모세를 불렀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고 하시고는 '너는 애굽으로 내려가서 내 백성을 해방시켜라!'는 사명을 주었습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모든 제자들을 하나님이 부르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이제부터는 사랑 잡는 어부가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사도바울 같은 사람은 처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날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체포하려고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의 주님의 부름을 받아 주님의 종이 된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을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름이라는 것은, 소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시작이 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불러주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온 것은 자기 발로 온 것 같지만 친구에게 이끌러 온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불러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주시고 믿음을 주셨기에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셨다는 이 소명의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일개 대통령이 불러준 것도 평생 잊지 못할 사건인데 천국의 주제가 되신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것은 사건 중에 사건이요,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이 불러 주신 소명의식을 깨닫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베드로는 이 소명의식이 없었을 때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러나 이 소명의식이 분명할 때 십자가를 거꾸로 지고 순교까지 당했습니다. /할/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예배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소명의식이 없는 사람은 조건 따라, 환경 따라 자기의 감정 따라 치우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소명의식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깁니다. 예배를 생명처럼 지킵니다. 봉사, 헌신, 충성을 누가 시키지 않아도 불러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하는 것입니다.
  요15:16절에서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 이는 너희로 가서 과실을 맺게 하고 또 너희 과실이 항상 있게 하여 내 이름으로 아버지께 무엇을 구하든지 다 받게 하려 함이니라' /할/
  여러분, 부름을 받았기에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본문에 마태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 일어나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야 되고 충성해야 합니다.


  ▶여기서 몇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①'나를 좇으라'고 한 뜻은 '다른 것은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결혼해서 한 남자를 선택하고 한 여자를 선택했다는 것은 인류 70억의 반이 넘는 다른 남자와 여자를 포기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부인보다 더 똑똑하고 더 예쁘고 더 잘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남편보다 더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한 남자를 택하고, 한 여자를 택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모든 남자를, 다른 모든 여자를 포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 남자도 좋고, 저 남자도 좋고, 그러다가 청부살인까지 합니다. 이 여인도 좋고, 여 여인도 좋다고 하는 사람,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선택은 거절을 의미하는 것, 포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나를 좇으라'고 하신 것은 다른 것을 포기하라는 의미입니다.
  ②나를 좇으라는 말씀 속에는 확실한 보장을 약속하시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결과의 책임을 지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어떤 결과라도 책임져 주십니다. 보상해 주십니다. 죄인을 의인으로, 병든 자를 건강한 자로, 실패자를 성공 자로 악한 자를 선한 자로 변화시키십니다. /할/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따르는 일은 당장은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따르다가도 중간에서 포기하고 떨어져 나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따라야 합니다.
  신앙은 인내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희생과 헌신과 충성에 보상이 꼭 따릅니다.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아멘!/
  ③'나를 따르라'는 말씀 속에는 또 한 가지가 깊은 뜻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답은 주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좇으라, 나를 따르라'고 한 것입니다. 주님은 인생살이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10-11절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 제 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과 바리새인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①예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음을 발견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멸시와 천대를 받았던 세리 마태에게 유난히 관심을 가지시고 그가 제자가 되겠다고 요청하지도 안았는데 그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그 집까지 심방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마태의 친구들, 그러니까 세리들과 율법대로 살지 않는 죄인들까지도 함께 있었습니다.
  ②예수님의 행적은 어떤 형식적이고, 의식적이고, 공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이고, 개인적입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영적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어떤 형식은 취하지 아니하시고 의식도 취하지 아니하시고 한 생명, 한 생명 만나서 문제를 해결해 주시고 불러서 당신의 일꾼으로 세우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③예수님의 식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교회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그 식탁에는 마태의 친구들과 여러 명의 죄인들도 있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반 율법적이거나 비도덕적인 사람들을 가리켜 죄인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본문에서 죄인이라고 지칭한 사람들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니까 세리, 창녀, 이방인들, 살인자, 범법자들입니다. 그리고 그곳에는 예수님이 계셨고 예수님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모여진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을 선택해서 초청하지 않습니다.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지금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이 서로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교회 안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란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무식한 사람, 유식한 사람, 믿음이 있는 사람, 믿음이 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과거가 복잡한 사람, 과거가 깨끗한 사람, 남녀노소가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천대받았던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과 격식 없이 대화하며 자유롭게 식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교회는 이런 곳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는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가 예수님만 바라보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십니다.


  ▶바리새인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감격을 잃어버리고 비판을 일삼고 불평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①근본적으로 마음속에 감사가 없고 불평과 비판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을 보았고, 말씀을 들었고, 예수님을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예수님을 따라 다니긴 다녔지만 예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시기하고 질투하기 위해서 따라다녔습니다.
  ②죄인이 구원받는데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 자들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만이 의롭고 경건하다고 믿는 자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만을 생각합니다. 교회의 공동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예수님도 중요하게 생각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입니다. 언제나 자기 자랑, 자기 과시, 그리고 결론도 자기가 내려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지금 비판하고 있습니다.
  ③바리새인들은 용서와 긍휼보다는 정죄와 비판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착각합니다. 용서, 사랑, 긍휼 이런 것들도 감상적이고 아무 쓸데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율법이라는 자를 가지고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판하고 무시하는데 평생을 보낸 자들입니다. 참 불생한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무지해도 한참 무지했습니다.
  ④여기서 주님을 따랐던 세리 마태가 무엇을 먼저 누렸을까요? 마음의 평화와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전에는 가슴에 응어리가 있어서 답답하고 한이 있었습니다.
  왜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기쁨이 옵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요15:11절에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할/
  우리가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음에 걱정이 생기고 두려움이 생깁니다. 짜증이 나고 갈등이 생기고, 죄를 짓게 되고 막 부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즐겁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마음에 평안이 생깁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입니다. 시4:7절에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그래서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주와 같이 길가는 것 즐거운 일 아닌가?' 하며 찬양합니다. /아멘!/
  주님은 바리새인들의 반응에 보시고 12-13절에서 깊은 교훈을 주십니다.

 

  ▶12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여기서 주님은 자신을 '의사'라고 표현 해 주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의사가 되어서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을 고쳐주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보고 '이편이냐, 저편이냐'를 따졌는데, 주님은 '누가 옳은 사람이다' 그렇게 한 쪽 편의 손을 들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재판관으로 나서지 않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다. 죄인들의 편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는 잘못 들으면 마치 사회에서 죄를 짖고 잘못 살아가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의롭고 의리 있는 사람이고,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처럼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죄를 지었다고 주님이 더 사랑하실 리가 있습니까?
  주님은 한 번도 죄인과 세리들이 '옳다'고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그들은 절대로 옳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보고도 옳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의 고통까지도 아시고 그들을 하나님의 품으로 안아주시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마태를 부르시고 이들과 함께 식사하셨다는 것은 이제 이들을 용서하시고 용납하셨다는 것이고, 또 이들도 역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그렇습니다. 병든 사람이 병원을 찾지 건강한 사람을 병원에 갈 일이 만무합니다. 의사란 환자에게 절대적인 존재이지 건강한 사람에게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예수님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는 별로 의미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자기가 죽은 죄인이라고 생각하며 느끼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영혼의 의사이십니다. 그것을 바리새인들은 깨닫지 못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영혼이 병든 자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롬3:24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할/ 깊은 병이 몸에서 자라고 있는 것도 모르고 술 먹고 방탕하게 사는 사람이 있듯이, 죽음이 코앞에 있는 데도 죄인인줄 모르고 교만하고 방자하게 경거망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병중에 가장 큰 병이 영혼의 병이 죄인데,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보혈밖에 없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자기의 죄를 인정하지 않고 '나는 죄가 없다. 나는 안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예수가 필요 없다.'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이 지구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이 지구상에 의인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죄인입니다. 이 사실이 먼저 고백되어야 하나님 앞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는 때 주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만약 우리 주님이 '나는 죄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의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다면 누가 주님 앞에 당당히 설 자가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할/

 

  ▶13절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성경의 호6:6절을 인용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호세아는 자기 부인 고멜이 정부과 타락하는 현장에서도 용서해 주고 사랑으로 감싸 않았습니다. 본문의 의미는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요, 은혜의 하나님이라는 이 사실을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께 번제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이 속성을 바로 아는 것이 하나님께 번제 드리는 것보다 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식이 귀합니다. 여러분, 신앙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 그 영혼들은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롬3:10절에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고,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은 구하시는 것은 상한 심령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올 때에는 상한 심령을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시51:17절에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아멘!/
  '하나님! 저는 죄인입니다.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런 심령이 되어야 합니다. 전설에 의하면 베드로는 새벽에 닭이 울 때마다 '하나님! 저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죄인입니다.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며 애통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이 애통이 그를 예수의 수제자의 자리에 않게 했습니다. /믿/


  ▶왜 주님이 우리를 불렀습니까?
  ①우리를 친구 삼으려고 부르셨습니다. /할/ 요15:13-15절에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 당시 세리들은 그 사회에서 죄인으로 따돌림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이라면 누구도 그들과 친구가 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세리 가운데 한 사람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셨고, 그의 집에서 세리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신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을 더러운 죄인으로 취급하여 함께 식사는 물론이거니와 서로 얼굴을 마주하여 이야기조차 하지 않으려 했는데, 예수님은 그들과 어울려 밥상을 함께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의 비난에 대하여 떳떳하게 대답하셨던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면서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귀한 신분을 가지신 분임에도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기는 쉽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천한 이 땅의 죄인들과 사귐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요 간단한 일도 아닙니다. 이것은 놀라운 은총이며 큰사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사귀어 친구가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사귀는 것은 그래도 비교적 간단한 편입니다. 그런데 자기보다 수준이 낮다고 생각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바울은 고전9장에서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다'고 하면서 '유대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과 같이 되었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과 같이 되었으며,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율법 안에서 사는 사람이지만, 역시 그 사람들을 얻으려고 율법이 없이 사는 사람과 같이 되었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얻으려고 약한 사람이 되었다'고 했습니다(고전9:19-22). 그러니까 바울은 자신의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상황에 따라 자신을 낮추어 사람들과 어울렸고, 그래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좋은 친구가 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②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시려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낳음에서가 아니라 부르심에서 되어집니다.' /할/ 요1:12-13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부름에 응답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로서 난자라고 하는 특권'을 부여받게 됩니다. 부르심에 응답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됩니다. 비록 이 세상에 가진 것 없어도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면 이 세상 어떠한 것과도 비교 할 수 없는 축복입니다. /믿/    
  ③우리가 부리심을 받았다는 그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할/ 기독교는 부름의 종교입니다. 우리를 불러주신 은혜에 감사해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님 앞에 나오게 됩니다. 왕의 왕이신 주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주님이 불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름 받은 삶입니다. 부름 받음의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아, 야곱아, 모세야, 사무엘아, 사무엘아, 기도하던 이사야를 부르셨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를 부르시고,  열 두 제자를 주님이 친히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를 부르심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한없는 사랑의 동기를 가지고 불러주셨습니다. 우리는 부름 받지 않으면 아무 쓸모 없는 인생이 됩니다. 우리의 앞날은 우리를 불러 주신 하나님에 의해서 결정될 것이고 그가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의 부름은 참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입니다. 인생은 얼마나 짧습니까? 허무합니까? 구름이 흘러가듯 흘러가면 그만인데, 불러 주지 아니하시면, 우리는 영원히 멸망 받을 수밖에 없는데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이 은혜에 감사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때마다 큰 기쁨과 감격으로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아멘입니까?/
  본문에 세리 마태는 부르심을 받고 순종함으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예수님 만나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어두움에 살던 자들, 죽을 수밖에 없던 자들이 예수의 부르심을 받아 변화를 받아 새사람이 되는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버림받고 멸시받고 천대받던 세리 마태를 제사 삼으시고 그를 통하여 마태복음의 저자로 사용하신 것은 하나님 그 분의 절대적인 은혜요 선물인 줄 믿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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