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로마서·마태복음강해설교

[스크랩] (제48강)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17. 17:01

(제48강)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마 9:14-17)

 

  지금은 산골 두메 마을까지 전기가 들어갑니다만 옛날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전기 불은 도시에나 가야 볼 수가 있었습니다. 당시 등잔불을 켜고 살던 한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다고 마을 사람들은 환호성을 울리며 기뻐했습니다.
  그런데 한 고집쟁이 할아버지는 빛 귀신을 절대 집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우겨댔답니다. 결국 할아버지는 조상들이 쓰지 않던 전기를 무엇 때문에 내 대에 와서 써야 하느냐고 고집을 부리며 호롱불을 그대로 키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얼마 지났습니다. 집집마다 나무 대신 연탄을 사용하게 되었는데 또 고집쟁이 할아버지는 검은 귀신을 절대 집에 들여놓을 수 없다고 가슴을 치고 울면서 반대를 했습니다. 결국 고집쟁이 할아버지 때문에 죽어난 것은 그 집 며느리들이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아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으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우리에게도 너무나 익숙한 말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라는 말은 '새로운 것은 새로운 자세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그런 의미이기도 합니다.
  정치, 경제, 종교를 비롯한 모든 제도권에서 사람이 바뀌고 나면 이런 슬로건을 꼭 내걸게 됩니다. 그리고 새롭게 하자고 외치며 새로운 시작을 알립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이제 새로운 사람이 일을 시작합니다. 옛 제도는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사람이 옛 것을 버리고 새로운 방법으로, 새로운 목표로, 새롭게 출발하겠습니다. 옛날 습관과 생각은 아예 버리십시다.' 이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나오는 '새 포도주'는 '복음'을 말합니다. 16절에 나오는 생베 조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낡은 옷과 낡은 가죽 부대'는 '유대교'를 말합니다.
  좀더 자세하게 말하면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더불어 시작된 새로운 시대를 말합니다. '하늘 나라의 새로운 삶, 새로운 질서와 가치'를 말합니다. 더불어 '새 부대'는 이런 것들에 동참하기에 합당한 '새로운 마음'을 말합니다..
  낡은 가죽 부대는 세례 요한 때까지 계속된 옛 시대, 율법에 사로잡힌 낡은 질서와 가치, 낡은 삶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부대에 넣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새 부대에 넣어주기를 기다린다면 기쁨이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새 술을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신나고, 보람 있고, 행복해집니다.
  새 술은 새 영입니다. 지금은 성령시대입니다. 예수님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영이 새로워지는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사단은 '거짓의 영, 게으름의 영, 이기주의의 영'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영인 사단의 영에 잡히지 말고, 성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새 술은 새 마음입니다. 신앙생활은 마음공부입니다. 우리는 마음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결단을 잘하는 사람이 성공합니다.
  마음의 결단이 있을 때, 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바뀌고, 행동이 달라지고, 습관이 바뀌게 됩니다. 결국, 인생이 바뀌게 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사랑 받고 존경받는 명품인생이 됩니다. /할/
  새 술은 새 생활입니다. 일사각오로 결단했으면 실천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소년입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포로였습니다. 그런데 소년 다니엘은 뜻을 정했습니다(단1:8). 왕이 먹는 산해진미를 안 먹겠다고 했습니다. 환관 장이 반대했지만, 다니엘은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 뜻을 실천한 결과 그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더 건강해졌습니다(단1:15). 하나님의 은총이 그들에게 차고 넘쳤습니다. 단1:17절에 '하나님이 이 네 소년에게 지식을 얻게 하시며 모든 학문과 재주에 명철하게 하신 외에 다니엘은 또 모든 이상과 몽조를 깨달아 알더라' /할/ ◀제목 소개!▶

 

  본문은 세리 마태가 자신을 주님의 제자로 뽑아 주신 것에 대한 감사의 보답으로 예수님을 초대해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세리 마태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에 대한 기쁨의 잔치요, 친구들과는 이별의 잔치였습니다.

 

  ▶14절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 때에' 바로 세리 마태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을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그러니까 '왜 당신의 제자들은 먹기만 좋아하느냐? 왜 우리처럼 경건하게 금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정하신 금식일 외에도 자기들이 만들어서 종교적 열심히 여러 날을 금식일로 정했습니다. 하나님은 유대 달력으로 7월 10일 단 하루는 대 속죄일로 정하시고 금식하라고 명령하셨으나 바리새인들은 후대에 오면서 7월 금식, 8월 금식 이런 식으로 금식 일을 늘려서 했습니다.
  심지어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 번씩을 금식했습니다. 유대인들은 모세를 율법의 선지자로 생각하고 그가 시내산에 오르신 월요일과 내려오신 목요일을 금식일로 지킵니다.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보편화되었습니다(눅18:12).
  한 마디로 금식이 그들의 종교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때가 유대인들이 정해 놓은 금식 기간인 것 같습니다. 그 기간에 세리 마태 집에서 지금 예수님이 세리들과 여러 종류의 사람들이 모여 재미있게 식사를 나누며 얘기하고 있을 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들어 닥치면서 대뜸 '왜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않으냐?'고 시비를 걸고 따지고 있습니다.
  여기 나타난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요한을 알아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6개월 전에 태어난 사람, 그를 가리켜 예수님의 선구자라고 했습니다. 또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라고 불렸고, 입을 열어 불을 토하듯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외쳤습니다.
  세례요한은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보통 사람과는 달리 독특하게 살았습니다. 약대 털옷을 입고 지냈고, 그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당시 세상을 뒤흔드는 최고의 권력자, 헤롯대왕을 비판할 정도로 정의감이 강했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헤롯왕의 미움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고, 사형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이 세례요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들을 가리켜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푼 후에 그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인계했던 것입니다.
  요한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했고, 또 예수님을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라고 증거 했습니다. 안드레와 요한도 원래는 세례요한의 제자였으나 스승인 세례요한의 권유로 예수님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참으로 예수님을 바로 증거 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여인이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세례요한을 높였던 것입니다. /할/
  그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적 특징은 '기도와 구제와 금식'을 했는데 바리새인들은 얼마의 구제품을 준비해서 거리에 나가 나팔을 불고,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들면 그들에게 구제품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길 어귀에서 두 팔을 벌리고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최고의 고상한 말을 구사하면서 남이 듣게 크게 소리쳤습니다.
  또한 일주일에 두 번씩을 금식하는데 '슬픈 기색'을 하고 매우 초라하게 세수도 하지 않고 머리를 헝클어뜨려 누가 보더라도 금식하는 것을 금세 알아 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보이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신앙심과 선행 심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해서 그렇게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제할 때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셨고, 기도는 '골방에 들어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 하라'고 했고, 금식할 때에는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단정히 하고 금식하라'고 가르쳤습니다.
 
  ▶마6장에서 예수님은 신앙의 본질을 표현해 주는 세 가지 행위인 '기도와 구제와 금식'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①기도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구제는 이웃에게 하는 것입니다. 구제는 이웃과 나와의 신앙적 관계입니다.
  금식은 나 자신에 관한 문제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이웃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 나 자신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를 결정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중언부언하지 말라도 하시고,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히 보시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참된 기도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할/
  ②구제할 때는 나팔을 불지 말고 은밀하게 오른 손이 한 것, 왼 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이웃을 향한 신앙적인 태도라고 했습니다. 금식에 대하여는 '금식할 때 외식하는 자와 같이 슬픈 기색을 하거나 얼굴을 흉하게 하지 말라, 오히려 금식할 때는 머리에 더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이 씻으라, 몸을 단정하게 하여 사람들이 금식을 하는지 안 하는지 모르게 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은밀히 하라고 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종합해 주는 말씀이 바로 마6:1절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이것이 신앙의 요점입니다.
  주님은 금식도 어떤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를 더 중요하게 보십니다.
  최근에 이 금식에 관한 두 가지 극단주의가 있습니다.
  하나는 '금식 만능주의'자들이 있습니다. 마치 어린애들이 부모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사 주지 않으면 '엄마! 나 밥 안 먹어' 하듯이 자기의 어떤 소원이 있을 때 하나님은 굴복시키려고 금식을 무슨 만능 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정반대로 복음주의 시대에 무슨 금식이 필요 하느냐 하면서 금식 무용론을 주장하는 극단적인 자도 있습니다. 금식은 하나님께 내 자신을 정말로 드리는 심정으로 해야 합니다.
  본문의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 당신의 제자들은 왜 금식할 때 금식하지 않습니까?' 이 물음은 본질에 대한 질문이 아니고 형식에 대한 질문입니다.
  예수님은 신앙의 어떤 형식, 전통 그것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무엇이 있는가에 관심이 있습니다. /믿/
  ③금식의 목적입니다.
  ⑴겸비하게 회개하기 위해서입니다. 삼상7장 사무엘은 이스라엘을 미스바로 모이게 하고 금식하며 회개했습니다.
  ⑵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하여 금식합니다. '우리의 힘 가지고 우리의 지혜 가지고 할 수는 없으니 하나님! 우리에게 지혜를 주옵소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옵소서!'하며 주의 종들이 40일, 30일, 20일을 그래서 금식을 합니다.
  ⑶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하기 위해 금식했습니다. 이것이 참된 금식의 목적입니다.

 

  ▶그러면 금식은 언제 하는가?
  ①특수한 사명을 받을 때 합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을 때 40일간 금식했습니다(출34:8).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할 때 금식했습니다(마4:2).
  ②죄를 철저히 회개를 할 때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미스바에 모여서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삼상7:6). 니느웨 성이 요나의 복음을 듣고 굵은 베옷을 입고 금식하면서 통회했습니다(욘3:7).
  ③사단권세와 싸울 때 합니다. 하만이 유대인들을 죽이려 할 때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금식하면서 '내가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아하수에르 왕에게 나아갔습니다(에5:16).
  ④극한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합니다. 히스기야 왕이 죽을병에 들었을 때 그는 세상을 단절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왕하20:2).

 

  ▶세례요한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님은 세 가지의 비유를 들어 답변하셨습니다.
  ①혼인집 비유입니다. 혼인집 손님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하지 않습니다.
  ②생베조각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생베조작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는 것처럼 완전한 메시아를 만났는데 불완전한 율법에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③새 가죽부대 비유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부을 수 없는 것처럼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첫 번째 답변이 15절에 나옵니다.

 

  ▶15절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인간의 고통 중에서 최고의 고통이 금식의 고통입니다. 식욕은 하나님이 주신 최고의 본능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로 통해서 자신의 주권을 시험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먹고 마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언약을 좇아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습니다.
  그러나 잔치는 즐거운 축제입니다. 잔치는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으로서 아름다운 축제이지만 금식은 먹는 것을 금하는 고통과 괴로움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잔칫집에 비유했습니다. 주님은 지금 결혼식 비유를 들어 설명하고 계십니다. 당시 관계로는 금식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결혼식입니다. 금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죄를 슬퍼하는 것에 있고, 결혼식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기뻐하는데 있습니다.
  두 가지가 겹칠 때에는 금식보다는 결혼식이 우선하기 때문에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음식을 먹었습니다. 당시 결혼식은 일주일간입니다. 이 결혼 축제 기간에는 금식의 날이 와도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축하하기 위해서입니다.
  요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음식을 많이 먹었는지 포도주가 떨어지도록 먹었습니다. 결혼 축하기간 동안에는 금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축제가 끝나고 이제 신랑을 일단 신부에게 데려다 준 후에는 그 규례대로 금식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일상적인 경험을 적용해서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했습니다. 맞습니다. 성경은 주님에 우리의 사랑이요, 교회를 신부라고 했습니다.
  지금 예수님은 기독교를 잔치 집으로 비유하신 것입니다. 잔치 집은 음식도 풍성하고 웃음도 풍성해야 합니다. 또 기독교 신앙은 주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요, 즐거움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랑은 예수님은 가르치고 혼인집 손님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가르친 것입니다. 예수님의 요점은 이렇습니다. '나와 함께 있을 때는 금식할 필요가 없다.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감격하고 축제를 즐기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은 축제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축제의 자리입니다. /믿/ 주님이 내 안에 있는 한 기쁨이요, 감격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사실 그 자체가 정말 복입니다. /믿/
  그런데 참된 금식을 할 때가 옵니다. 그때는 신랑을 빼앗기는 때입니다. 제자들에게는 신랑 되신 주님을 빼앗길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날은 자동적으로 금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의 외식적인 금식을 책망했습니다.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마6:16) 참된 금식은 은밀한 중에 해야 합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면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여기서 '빼앗긴다.'의 원 뜻은 '갑작스럽게 잡혀감'의 개념이요, 더 나아가서 이것은 '폭력에 의해서 붙들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체포당함을 의미합니다.
  지금 예수님은 분명히 십자가의 고난을 내다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때에는 금식하라고 했습니다. 오늘날도 우리 심령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떨어지게 된다면 반드시 금식하면서 애통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은혜를 회복하고 주님과 함께 있어 축제의 기간이 되어야 합니다. /믿/
  고후3:17절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할/

 

  ▶16절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예수님의 두 번째 대답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독교는 새 생명 운동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새 믿음의 옷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낡은 옷에 생베조각을 붙여 바느질을 해서 물에 빨면 생베조각이 줄어들면서 헌옷이 쭈그러들어 못쓰게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헌옷에다가 새 옷감을 붙이면 헌옷도 버리고 새 옷감도 다 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헌옷이란 낡은 유대종교를 의미합니다. 새 옷감인 생베는 예수 그리스도의 새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제 금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님이 참 신앙의 문제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독교는 옛사람의 약점이나 잘못된 습관 혹은 인생관 등을 부분적으로 고쳐서 헌 옷에다 생베조각을 누더기처럼 기워서 만들듯이 만들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옛 것을 실오라기 하나라도 사용하지 아니하고 전적으로 새 옷을 창조하는 것임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기독교는 개선의 종교가 아니라 전적으로 새 생명운동입니다. 기독교는 옛것에다가 새 것을 부분적으로 붙이는 누더기 종교가 아니라 새롭게 피조 되는 종교입니다. /믿/ 복음은 복음이 아닌 것과 섞일 수가 없고 타협할 수도 없습니다.
  신22: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을 입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모세의 설교에도 '양털과 베실로 섞어 짠 것은 없지 말라'고 했고, 또 같은 밭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도 교훈을 했습니다.
  신앙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주의입니다.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섞이면 문제가 됩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인본주의와 신본주의가 섞어 있다고 뜻 있는 신앙 인들은 한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전5:7절에서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할/
  성경은 거듭난다는 것과 새롭게 된다는 것을 같은 뜻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해 아래 새 것은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솔로몬과 바울의 증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해 아래 있는 것들, 즉 역사든, 문화든, 교육이든, 예술이든, 새 것이 없다는 것이고, 새롭게 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찬송시인은 찬493장에서 '나 이제 주님의 새 생명 얻은 몸'이라고 찬양했습니다. /아멘!/

 

  ▶본문은 영적으로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①율법은 미완성이나 복음은 완성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요19:30)고 선언했습니다.
  ②율법은 불완전하나 복음은 온전합니다. 주님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예언을 온전히 이루었습니다.
  ③율법은 요동하나 복음은 견고합니다.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요동하나 십자가 붙들고 나가면 견고히 서게 됩니다(롬3:31).
  ④율법은 부자유하나 복음은 자유 합니다. 율법 아래 사는 삶은 언제나 부자유합니다. 그러나 사랑의 법 아래 있는 자는 항상 자 유합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17절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예수님의 세 번째 대답입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넣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아주 중요한 변화의 개념을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⑴새 포도주는 변하지 않는 새 것입니다. 포도주는 변하면 변질됩니다. 이 새 포도주는 변하면 안됩니다.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이 새 포도주에 가장 실체적 본질은 예수님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십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진리는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새 생명은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믿음은 변하지 않아야 새 것입니다. 변하지 않아야 새 것이 되는 이 본질, 그것이 바로 새 포도주입니다.
  ⑵새 부대는 변해야 새 것이 됩니다. 부대는 안 변하면 낡아집니다. 변해야만 새 것이 됩니다. 우리의 환경입니다. 환경은 변해야 새 것입니다. 지식은 변해야 새 것입니다. 방법은 변해야 새 것입니다. 인간의 행위는 변해야 됩니다.
  이 부대는 변해야 됩니다. 안 변하면 부대는 낡아집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새 것, 변하지 않아야 새 것이 되는 포도주와 변해야 새 것이 되는 부대가 절묘하게 만나는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변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라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진리, 우리가 믿는 이 복음, 내가 믿고 따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변하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되고, 새 부대는 변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쳐야 됩니다.
  그러니까 전자는 파수 적입니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몸부림침과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몸부림이 동시에 일어나야 됩니다.
  지키는 파수 적인 몸부림과 적극적으로 행하는 몸부림, 지키는 것과 행하는 것,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나야만 새 것이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변화가 오는데 두 가지입니다. /아멘!/
  ⑴내면의 변화입니다.
  롬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라고 했습니다. 중심의 축이 변하지 않으면 그 다음 것이 변화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엡4:22절에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의 의와 진리와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의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입으려면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변해야 됩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일은 인간의 의지로도 합니다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는 일은 중심이 변해야 됩니다.
  이 축이 안 변하면 변화가 없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양보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의 중심, 내면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의식의 변화입니다. 제자의식으로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⑵삶의 변화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본문에서 말씀하는 새 부대, 삶의 변화입니다. 이제는 행동이 변해야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추구하는 변화와 부흥의 요체입니다. 우리 교회뿐 아니라 지상교회가 이 도전을 다 받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변화되고 변화 받는 종교입니다. /아멘!/
  여기서 '새 부대'란 바로 거듭나서 새로 태어난 우리를 자신을 의미합니다. 새 술이 무엇입니까? 고전11:25절에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여기서 보면 새 술은 예수님의 피로 새운 새 언약입니다.
  요6:53-55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리고 행2:13절에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그렇습니다. 여기서 새 술이란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님의 영인 성령입니다. 이러한 새 언약은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세례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들은 거듭났는가? 당신들이 새로워졌는가?' 이것을 질문하고 계십니다. 그들뿐만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향하여 '당신들은 거듭난 사람인가?'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듭난 심령, 변화된 심령, 구원받은 심령, 성령 충만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옛 사람은 벗어버리고 새 사람으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생명은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그런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그릇에 담는 것입니다.
  주님은 금식을 거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40일을 금식하셨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신앙이란 어떤 전통이나 습관이나 형식이나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예수 안에 있을 때 기쁨의 축제요, 신앙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요, 새 마음에 새 술을 부어야 합니다. 새 술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영인 성령입니다. /아멘!/
  ▶유대인들은 여행 시 가죽부대를 매고 다닙니다. 가죽부대는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아십니까? 양을 잡아서 목 부분은 입구로 하고 네 발은 묶어서 줄을 매어 양어깨로 매면 좋은 부대가 됩니다.
  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어서 아직 완전히 발효가 덜된 새 포도주를 넣어도 이를 감당해 냅니다. 그러나 오래된 낡은 것은 신축성이 없어서 포도주를 담으면 찢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낡은 것은 주로 물을 담게 됩니다.
  바로 신축성이 없는 낡은 부대와 맛없는 물이 구약의 율법이라면 신축성이 강한 새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는 복음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새 포도주는 반드시 새 가죽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새 가죽부대의 영적인 의미는 이러합니다.
  ①가죽부대는 피 흘림으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습니다(히 9:22).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가 아니고는 우리의 죄를 사할 수 없습니다. 온 인류를 담아서 천국까지 가실 분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아담은 이러한 가죽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아멘!/
  ②가죽부대는 깨끗한 것입니다. 짐승을 잡아서 속에 있는 더러운 내장과 모든 것을 다 들어냅니다. 우리의 속에 더러운 죄악을 가지고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다 토설해 내야 합니다.
  ③새 가죽부대는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가죽부대에 담긴 포도주는 인생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줍니다. 가나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잔칫집에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그때 주님을 통해서 맛없는 맹물이 새로운 포도주가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요 2:9-10).


  ▶가죽부대는 복음입니다.
  ①가죽부대는 부드럽습니다. 딱딱하면 등에 베깁니다. 율법은 수많은 규례로 사람을 얽어매므로 딱딱합니다. 그러나 복음은 단순하고 부드럽습니다. 주님은 사랑이라는 새 계명 하나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었습니다.
  ②가죽부대는 질깁니다. 누르면 들어가나 찢어지지 않습니다. 복음은 영원한 것입니다. 시간과 공간과 상황 세계에도 변하지 않는 완전한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③새 가죽부대는 신축성이 있습니다. 진리는 불변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선포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신축성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융통성이 있습니다. 새 가죽부대는 발효되지 않은 것도 수용합니다.
  바울이 율법적인 사람일 때는 너무도 강직했습니다. 살기가 등등했습니다(행9:1). 그러나 그가 복음의 사람이 되고 난 이후에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고전9:19절 이하에 보면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이라고 했습니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새 부대란 바로 거듭나서 새로 태어난 우리 자신을 가리키며, 새 술은 영원한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생명을 우리가 헌 부대에 넣으면 그 깨끗한 물은 썩고 냄새나게 됩니다. /믿/ 변화 받지 않은 사람에게는 예수 그리스도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새 언약은 변화된 우리의 새 심령인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고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할/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거듭난 심령, 변화된 심령, 구원받은 심령, 성령 충만한 심령을 원하십니다.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예수님의 생명을 담기에 부족함이 없는 새로운 부대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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