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22강) 사마리아 땅의 기적! (행 8:1-13)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24

(제22강)       사마리아 땅의 기적! (행 8:1-13)

 

  초대교회의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스데반이 7장에서 돌에 맞아 죽은 순교사건이 있은 후에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핍박과 박해의 돌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스데반 집사의 죽음 때문에 받은 충격과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엄청난 박해가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박해사건을 통해서 복음은 사마리아 지방까지 전파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운동을 위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은 그 누구도 막을 자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세계 선교운동은 예수님의 약속대로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확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쓴 '한국교회의 핍박'이란 책에 보면, 우리나라 초대교인들의 애국심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한국의 통치권이 일본에게 넘어간 이후에 나타난 국민성을 다섯 가지 유형으로 설명했습니다.
  ⑴공포형입니다. 이는 관청의 관리들을 두려워하는 사대주의 정신을 가진 민중들입니다. ⑵맹종형입니다. 일본인의 지시에 따라 노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⑶아부형입니다. 일본인의 심복이 되어 조선을 말살하는 일에 앞잡이 노릇을 하는 매국노들입니다. ⑷도피형입니다. 해외로 도피하여 위기를 모면하는 사람들입니다. ⑸애국형입니다. 일본 치하에 벼슬도 사양하고, 비밀히 돈을 주며 청탁을 해도 거절하고, 옥고를 치르면서도 조국을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부분이 다 예수쟁이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은 예수쟁이들이 가장 골치 아픈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갖가지로 핍박을 일삼았습니다. 그 중에 가장 악랄하게 강요한 것이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한 것입니다. 이때 수많은 주의 종들이 피를 흘렸으며,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것이 초기 한국교회의 환난의 바람이었습니다.
  당시 고문으로 죽은 자들이 많습니다. 초대교회사에 의하면 당시 72가지의 고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는 요즈음과 달라 고문하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그 중에 가장 참기 어려웠던 것이 굶기는 고문입니다. 이는 여러 날을 굶긴 후에 그 앞에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바라보게 합니다. 얼마나 참기 어려웠으면 자신의 의복 속에 있는 솜을 뜯어먹기도 하고, 문살에 붙어 있는 문 창호지를 씹어 먹기도 하고, 깔고 있는 멍석자리의 썩은 지푸라기를 씹어 먹기도 했다고 합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의 피 뿌림이 있었기에 오늘날 이 정도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 1-3절은 바로 새로운 선교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3절은 예루살렘의 박해가 일어나 검거 선풍이 불기 시작하자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교인들이 집과 재산을 포기하고 몸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기사이고, 또 4-13절은 흩어진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저곳을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파했다는 것과 빌립 집사가 사마리아에 내려가 복음을 전할 때 놀라운 기적들이 일어났다는 기록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사마리아 땅의 기적▶입니다.

 

  ▶1절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여기서 우리는 당시 초대교회 박해의 주동 인물이 누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울이 그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여기 '마땅히 여기더라.'는 '승인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사울은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으로써 스데반을 집행할 때 명령을 내린 자입니다. '돌로 치라'는 사울의 호령이 떨어지자 성난 유대인들이 주먹만 한 돌을 들어 사정없이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믿음의 사람, 스데반이 돌무더기 속에 생매장되는 비참한 순간이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천사처럼 빛이 났습니다. 스데반은 그의 영혼을 주님께 의탁하고 죄인들의 죄까지 용서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순교를 했습니다.
  본문의 더 깊은 뜻은 '사울이 스데반의 사형을 당연한 처사라 생각하고 기쁨으로 승낙했다'는 것입니다. 행26:10절에 보면 사울이 바울 되어 회개하면서 진술하기를 '자기가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다'고 회개했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의 순교의 모습과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 날에'는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하던 날을 말하고, '큰 핍박'은 유대인들의 대대적인 추격전, 혹은 사냥을 의미합니다. 지금 예루살렘 교회는 세 번째 큰 핍박이 일어난 것입니다.
  첫 번째는 4:1-3절에서와, 두 번째는 5:17-42절, 그리고 오늘 본문이 세 번째입니다. 이 세 번째가 가장 큰 핍박이었습니다. 교권주의자들은 스데반만 죽일 것이 아니라 스데반과 같이 예수 믿는 사람을 다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되자 사도 외에는 다 흩어져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시온산이 있는데 유대인들은 시온에 사는 것을 큰복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그들이 다른 곳으로 쫓겨갔다는 것은 당시 분위기가 얼마나 살벌했는지를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유대'는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도 이름인데 우리나라 경기도처럼 이해하면 됩니다. '사마리아'는 유대인들이 가장 멸시하고 천대하는 고장입니다. 오히려 이방 사람들보다 더 싫어했습니다. 이유는 혼혈 족이 살고 있었는데 유대인들이 앗수르 사람과 결혼하여 그 후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만 유대인들이 너무 미워하기 때문에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성도들이 각 처로 흩어진 것은 핍박을 피해 도망하기 위함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뜻이 작용한 것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성도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1:8) 복음을 전하라고 주님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지킨 것은 그곳이 기독교의 중심 공동체임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라고 하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자 하나님은 그곳에 핍박을 통하여 흩어지게 하십니다. 한마디로 그들이 안가니까 흩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의 원리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는데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행11:19절을 보면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는 우리나라도 6·25 전쟁 때문에 이북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이 전국에 흩어져 기도하고 전도하고 교회를 세웠던 것과 흡사합니다.
  본문을 통하여 우리는 초대교회가 최초로 세계 선교의 문을 여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2절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스데반을 죽인 악한 세력만 있는 것이 아니고, 스데반을 존경하고 좋게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누구입니까?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베드로의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한 사람들이 틀림이 없습니다.
  그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의 시체를 장사했습니다. 그들은 그 큰 핍박 중에서 자신들의 신문의 위험도 무릎 쓰고 생명을 내어놓고 스데반의 시체를 장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참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한 스데반의 장례는 참모습을 가진 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데반을 장사한 사람들을 경건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여기서 '경건'이라는 단어를 조심스럽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경건은 사실 유대인에게만 쓰는 용어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쓰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10장에서 로마의 군대 백부장 고넬료를 '경건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말로 칭찬을 들어야 합니까? 믿는 사람들끼리 말할 때 '송 집사는 참 똑똑하셔' 이 소리보다 '송 집사는 참 경건한 집사야' 이 소리가 더욱 칭찬인줄 믿습니다.
  성도는 자고로 '경건하다. 진실하다. 신실하다'라는 말이 최고의 칭찬입니다. 경건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을 대하면서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요, 가정 일이나 직장 일이나 언제나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경건한 마음입니다.
  교회에 와서도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좌우 사람을 먼저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보나 거울부터 보고 머리부터 매만지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기도하고 성경을 펼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까? 경건한 사람, 하나님을 먼저 바라보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크게 울더라" 유대인들의 장례식에서는 큰 소리로 애곡하는 것이 관습입니다(막5:38). 그러나 당시 산헤드린 법인 '미쉬나'에 의하면 산헤드린의 재판을 받고 돌에 맞아 죽거나 불에 타 죽거나 참수형을 당하거나 혹은 교살 당한 사람을 위해 공개적으로 통곡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크게 울었습니다.
  스데반의 생애는 여기에서 끝이 났습니다. 세상에 왔다가 이렇게 간단하게 끝을 맺는 것은 사람마다 비슷합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떤 영향력을 미치느냐 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느냐?'가 결정합니다.
  스데반은 죽음 앞에서도 초연하여 천사의 얼굴을 했습니다. 또 그는 죽음 앞에서도 자기를 죽이려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의 기도를 했습니다. 이 모습을 누가 보았습니까? 사울이 보았습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보여준 마지막 죽음의 모습에 큰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마 스데반의 모습에서 예수님을 보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죽음은 결국 사울을 바울되게 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죽음이 또 다른 위대한 전도자를 탄생시키는 그런 역사를 만들어 냈습니다. /믿/  

 

  ▶3절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사울은 다소 출신으로 당시 율법의 최고의 권위자인 가말리엘 밑에서 수업을 받은 최고의 엘리트였습니다. 그는 산헤드린 공회의 회원으로써 스데반을 죽일 때, '가'표를 던진 인물이었습니다(26:10). ▶사울이 무슨 짓을 했는가?
  ⑴교회를 '잔멸했다'고 합니다. '잔멸'은 산돼지가 포도원을 마구 파헤치는 것을 묘사한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뜻은 '모욕을 주다, 더럽히다, 파괴하다'라는 의미로 교회 기능을 완전히 마비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교회를 잔멸했다는 것은 교회를 '모욕하고 더립히고 파괴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교회를 잔멸하는 사울을 어떻게 하셨습니까? 방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행9:1-18절에 보면 주님이 사울을 다메섹 도상에서 붙잡아 교회를 영광스럽게 만들고 성결케하며 부흥케 만드는 주인공으로 변화시켰습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은 결코 당신의 몸 된 교회가 모욕당하고 더럽혀지고 망하게 되는 것을 방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기독교를 크게 핍박하는 정책을 편 로마제국의 황제들은 이상하게도 그 수명이 짧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병들어 일찍 죽었든지, 아니면 암살 당했든지, 그 수명이 짧았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잔멸하려는 자는 결코 그대로 내 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행22:4절 "내가 이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이기까지 하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겼노니" 여기 교회는 '에클레시아'로 건물 개념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를 뜻합니다. 사울은 그 뒤 교회 잔멸의 죄를 여러 번 회개했습니다(갈1:13,23/고전15:9/빌3:6/딤전1:13).
  ⑵각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성도의 집을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나 장애 없이 군대를 동원하여 수색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기독신자들의 집을 그렇게 불경한 박해자의 발굽아래 짓밟혔습니다. 

  ⑶남녀를 끌고 나와 투옥시켰습니다. 마치 수풀 속에 숨어있는 짐승을 사냥하듯이 성도들의 집에 들어가 남녀 신자들을 거리로 마구 끌고 나와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사울의 이러한 행패는 마치 피에 굶주린 맹수 같았습니다. 당시 핍박의 현장은 한마디로 비참했습니다.
  ▶1-3절까지는 예루살렘 교회의 '핍박상'입니다. 그래서 유대와 사마리아로 흩어지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행1:8절의 주님의 증인되라고 하신 말씀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라고 하셨는데 요나는 가기 싫었습니다. 왜 가기 싫었습니까? 당시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원수의 나라에 가서 복음 전하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않고는 견딜 수 없도록 간섭하셨고, 그는 항복하고 갔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4절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하나님은 왜 이렇게 교회가 핍박을 당하게 하셨을까요? 모든 사람들이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만일에 저들이 이와 같은 박해가 없었다면 저들은 예루살렘에 안주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주님이 당부하신 1:8절과 마28:10-20절의 지상명령은 까맣게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1절에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고 했는데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여기 '흩어지다'는 말은 '씨앗을 뿌리다'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크게 주목해야 할 말씀은 '박해에 쫓긴 그리스도인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도 '두루 다니셨다'고 했고, 제자들도 '두루 다니셨다'고 했으며, 사탄도 '두루 다녔다'고 했습니다.
  마4:23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9:35절 "예수께서 모든 성과 촌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이 두루 다니신 이유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기 위해서입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두루 다녔습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쌔'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적 원수 마귀는 왜 두루 다니는지 아십니까?
  벧전5:8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우린 여기서 두루 다니는 입장과 목적이 다 다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탄은 인간을 파멸시키고 삼킬 먹이를 찾기 위해서 두루 돌아다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를 삼키기 위해 먹이를 두루 찾는 마귀와 함께 어울려 돌아다니면 그 어느 날인가는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우리는 원수 마귀 사탄과 함께 어울려 두루 다니면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지키시고 보호해 주시는 주님과 함께 이곳저곳을 두루 다녀야 합니다. 본문의 초대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도 어디를 가나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내가 왜 사마리아에 왔는가? 하나님께서 왜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셨는가?'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사명감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디를 가든지 사명의식을 깨달아야 합니다.
  청교도들이 미국에 건너갈 때, 신앙의 자유를 찾아갔지만 그곳에 가서 신앙의 자유를 얻고 난 다음에 깨달은 것은 이렇게 중요한 땅에 우리를 보내신 것은 세계에 선교하라고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을 그렇게 많이 보냈던 것입니다.

 

  ▶5절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기서부터 빌립집사의 기사가 나옵니다. 빌립은 스데반과 함께 안수 받은 집사입니다. 빌립의 고향은 '가이사랴'입니다. 그런 그가 사마리아까지 내려간 첫 번째 선교사가 된 것입니다.
  모세의 바톤을 여호수아가, 다윗의 바톤을 솔로몬이, 엘리야의 바톤을 엘리사가 받았습니다. 이처럼 스데반 집사의 바톤을 빌립 집사가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가도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됩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는 절대로 중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항상 대행자를 예비해 두십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의 관계는 요4장에 나타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야곱의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했을 때, 그 여인은 깜짝 놀라면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써 어찌하여 사마리아인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십니까?'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이 여인의 대화에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4:9절에 보면, 당시 배경적 설명이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관계는 언제부터 이렇게 소원해졌습니까? 그것은 솔로몬이 죽고 르호보암이 즉위하면서부터입니다. 나라는 북이스라엘, 남 유다로 나뉘어져 갔습니다. 여로보암이 10지파와 함께 북 이스라엘왕국을 건설하고, 르호보암은 남은 두 지파를 거느리고 유다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북 왕국의 수도는 사마리아였습니다. 남 왕국은 그래도 형식적이니까 성전 중심의 신앙이 계속 되었으나 북 왕국은 처음부터 예루살렘에 대항하기 위해서 '단과 벧엘'에 금송아지를 섬기며 우상을 섬겨 왔습니다.
  북 왕국이 앗수르에게 멸망당하자 잡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남 왕국은 바벨론에게 멸망한 뒤에도 혈통의 순수성을 지켜왔습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유대인들은 북 왕국의 후손들과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고 천대하고 심지어는 상종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행8장의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는 역사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남북의 미움이 무너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전환점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 빌립의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평신도였다는 점입니다. 이방선교의 시작이 사도가 아닌 평신도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목자는 목자를 낳고, 양은 양을 낳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결국 교회 성장은 양들, 평신도에게 달려있습니다.

 

  ▶6절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여기 ⑴'무리'는 '사마리아 사람'들입니다. ⑵'빌립의 말도 듣고'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good news'로 복된 소식을 말합니다.
  여러분, 세상에 제일 기쁘고 복된 말이 무엇입니까?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길로 가야할 사람들에게 영원히 사는 길이 있다고 전하는 말씀입니다.
  행16: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요3: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무리들이 빌립의 전하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5절에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여기 '전파하니'는 선포자로서의 설교자를 의미합니다. 설교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만 전해야 하는가?
  행4:12절 "다른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그렇습니다. 예수 밖에는 구원이 없기 때문입니다. /믿/
  빌립의 설교(전도)의 주제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행8:14절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신앙은 말씀을 듣는 것이 귀한 것입니다.
  롬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복음은 들어야 구원을 받고 성령 세례를 받고 병이 낫고, 저주에서 벗어나 큰 기쁨을 누리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은 성령의 사역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해지는 곳에는 표적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⑶'행하는 표적을 보고' 표적에는 심령의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내적 열매와 더불어 병든 자가 고침을 받고 귀신이 도망가고 그리고 각종 이적이 동반하는 것입니다.
  복음에는 반드시 표적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설교는 성령의 능력이 역사하는 하나님의 사역의 현장이기 때문입니다.
  ⑷말씀을 깨닫고 능력의 증거로 표적을 볼 때, 성도들은 빌립을 쫓았습니다. '그의 말하는 것이 좋더라' 하나님의 말씀을 좇았다는 것입니다. 아주 귀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7-8절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한마디로 사마리아 땅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또 이 사건은 사마리아 성의 해방이라고도 합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빌립 집사가 전한 복음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가는 순간 사마리아 성에는 세 가지 해방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⑴더러운 귀신이 소리 지르며 쫓겨가는 영적 해방이 있었습니다.
  믿음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니까 소위 말하는 영권이 나타난 것입니다. 말씀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나면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러면 귀신들은 반드시 물러갑니다.
  흑암의 세계에는 귀신의 역사가 많다고 합니다. 아프리카에도 귀신의 역사가 그렇게 많다고 합니다. 빌립의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 귀신들이 소리를 지르며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귀신은 '음란, 탐욕, 거짓, 폭력, 기만' 따위를 가져다줍니다. 이런 것들은 다 귀신의 농간입니다. 그런데 이 귀신을 내 쫓는 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입니다. /믿/
  또 우리에게도 이 능력을 주셨습니다. 막16:17-18절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찌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빌립의 복음 선포는 귀신이 활개 치던 사마리아 땅에 영적 해방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그것은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간 사건입니다.
  ⑵육체의 해방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는 육체의 해방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⑶정신적 해방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그 성에 복음이 들어가자 그들을 짓누르고 있던 온갖 '걱정, 고민, 근심, 우울증, 좌절, 무기력, 긴장, 깊은 한숨'이 사라지고 그 성에 큰 기쁨이 넘치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1945년 8원 15일, 일본 압제 밑에서 민족의 정치적 해방이 된 날입니다. 그러나 그 해방이 영혼의 해방이나 절망과 좌절과 질병과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땅에 복음이 선포되자, 영적인 해방, 육신적인 해방, 정신적인 해방이 동시에 이루어졌습니다.
  그래서 8절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고 했습니다. 죄를 벗어버리고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사람들, 어찌 기쁨이 없겠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결과입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하늘의 기쁨, 영적인 기쁨, 영원한 기쁨을 의미합니다.
  요4:13-14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이 물을 먹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할/
  ▶이제 9-13절까지는 마술사 시몬이 빌립의 전도를 받아 세례를 받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건을 기록하였습니다.

 

  ▶9절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사마리아는 본래부터 미신과 우상과 이단들이 많은 도시입니다. 순교자 '저스틴'에 의하면 시몬은 사마리아의 '깃타' 출신으로써 애굽에 건너가 철학과 마술을 배웠던 사람이라고 합니다.
  여기 '놀라게 함'은 어떤 장소로부터 '뒤집어 놓다'는 의미로 황홀 상태를 유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마술을 통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자칭 능력자로 행세했습니다. 시몬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신적 존재였습니다.
  원래 '시몬'이란 이름의 뜻은 '듣는다.'는 뜻을 가진 좋은 이름입니다. 베드로의 이름도 원래는 '시몬'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시몬'이란 이름을 좋은 이름으로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말씀을 잘 듣는다는 뜻이니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그런 이름의 뜻을 가진 본문의 시몬은 마술사로 행세하면서 백성들 앞에서 군림하고 있었습니다. '터툴리안'은 시몬을 가리켜 '지극히 높은 아버지'로 추앙을 받았다고 증언했고, '제롬'도 역시 그가 자칭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백성들을 기만하고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 땅의 첫 번째 이단자는 바로 '시몬'이었습니다. 원래 요술이나 마술은 거짓된 속임수입니다. 세계 제일의 마술사라 불리우는 '후디니'라는 사람은 30년 마술을 연구하여 다른 마술사나 요술사를 흉내 낼 수조차 없는 기상천외의 마술들을 많이 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백하기를 '요술이나 마술은 사람을 속이는 것뿐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속는 것을 재미있게 여길뿐더러 나중에는 속는 거짓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고 합니다.

 

  ▶10-11절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러한 시몬의 거짓 마술에 놀라고 그를 신격화하고, 청종하고 그를 높였습니다. 한마디로 무지한 인간들은 귀신의 거짓된 능력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바로 시몬이 행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착각한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거짓 선지자들에게 너무도 잘 속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도 얼마나 잘 속는지 문선명에게 속고, 조회성이에게 속고, 또 많은 이단들에게 속습니다.
  조금만 색다른 소리를 하면 이것이 진리인 양 착각하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복음은 색다른 것이 없습니다. 4천년, 2천 년 전에 기록되어진 말씀을 조명해서 전하기 때문에 오히려 성경을 벗어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아멘!/

 

  ▶12절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진리를 깨닫는 계기가 왔습니다. 시몬이 행하는 마술과 성령의 사람, 빌립이 행하는 능력에서 차이를 발견한 것입니다. 마술은 속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은 능력으로 역사해서 '영적 해방, 육적 해방, 정신적 해방'이 일어납니다. /믿/
  한마디로 빌립이 복음을 전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고 그 모습을 보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한마디로 뽕 가버렸습니다. '아 저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능력자로구나!'
  여러분, 깨닫는 것이 축복입니다. 깨닫고 끝나버리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의 사마리아 사람들처럼 '전도함을 받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신앙은 아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믿고 바로 행하는데 있습니다. /할/

 

  ▶13절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여기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할/ 사람은 뭐니뭐니해도 자기가 자기를 잘 압니다. 시몬은 자기의 마술과 빌립의 능력을 비교해 보니 자기의 속임수와는 정반대인 것을 알았습니다.
  사기꾼은 사기꾼을 잘 압니다. 시몬은 자기가 잘못된 자임을 깨닫고 세례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때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이 복음을 너무 전하니 술집이 안 되어서 술집 연합회에서 작전을 짜 가지고 기생들을 집회 장소에 보내 거짓 회개하게 하고 어느 날 아파서 심방 오라고 해서 '엉뚱한 짓'으로 유혹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기겁을 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래서 기생들이 포기했다고 초대 기독교 사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시몬은 거짓으로 회개한 것이 아니고 진짜로 회개한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마귀의 능력으로 남을 놀라게 한 시몬이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서 스스로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믿음을 가져도 시시하게 가진 것이 아니라 '전심으로' 믿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할/
  우리는 시몬의 변화를 보면서 기독교의 참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는 변화의 능력을 받아 변화하는 종교입니다. /믿/
  우리 모두 스데반 처럼, 빌립처럼 복음의 능력자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