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목사 창세기·사도행전강해설교

[스크랩] (제24강)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행 8:26-4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10. 25. 12:25

(제24강)    빌립과 에디오피아 내시! (행 8:26-40)

 

  '빅톨 위고'가 쓴 세계적인 명작인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배가 고파 빵 한 개를 훔친 것이 죄가 되어 무려 20년 동안이나 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옥중에서 온갖 고생을 다하다 출감하지만 전과자인 그를 환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해가 저물어도 갈 곳이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요즈음으로 말하면 어느 교회의 목사님 댁입니다. 목사님은 그가 전과자인줄 알면서도 그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잘 대접하여 재워줍니다. 이튿날 깨어난 장발장은 또 다시 하루 끼니를 걱정하다가 끝내 그 목사님 댁에 있는 값진 은(銀)식기를 훔쳐서 달아납니다.
  이를 수상히 여긴 경찰이 붙잡고 물어보자, 그는 "목사님이 주셔서 가지고 나왔다."고 거짓말을 합니다. 그래도 미심쩍었던 경찰은 결국 그를 끌고 목사님 댁까지 찾아가 목사님과 대질 신문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장발장을 보신 목사님은 뜻밖에도 "왜 은 식기만 가져갔소? 은촛대도 내가 자네에게 주었는데"
  예기치 못한 목사님의 변호와 사랑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 장발장의 마음이, 20년 동안 옥살이를 해도 변하지 않던 그 마음이 봄에 눈 녹듯 그렇게 녹아 내리고 이제 그는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그리고 몇 년 후에는 한 도시의 시장이 되어 존경과 명성을 한 몸에 받게 되는 인물로 거듭난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랑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이 사랑으로 우리 모두 하나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제목소개!▶

 

  본문은 초대교회 빌립 집사의 '초대선교사화'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스데반의 순교 사건 뒤에 더욱 박해가 심해져 도저히 그곳에서 살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만 남아 교회를 지키고 일곱 집사를 비롯하여 많은 성도들이 흩어져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빌립 집사를 사마리아에 보내어 그곳을 복음화 시켰습니다. 빌립은 '디아스포라'에서 돌아온 헬라파 유대인이기 때문에 쉽게 사마리아인과 접촉할 수 있었습니다.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복음을 전하게 되자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들 파견하여 빌립의 선교를 인정했으며 그들이 안수할 때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한번 무너지기 시작한 뚝은 아무도 막을 수 없듯이 사마리아로 흘려간 복음의 물결은 아프리카의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달됩니다.
  이 사건은 초대교회의 선교활동의 새로운 면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독교가 이제 이스라엘의 변방을 넘어서 세계를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은 최초의 아프리카 선교가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빌립이 한참 사마리아 땅에 전도의 열심을 내고 많은 성과를 내고 있을 때, 하나님의 천사가 빌립에게 명하기를 '사마리아를 떠나 가사로 가는 광야 길로 가라'는 명령을 합니다.
  그 길은 광야 길입니다. 빌립이 순종하여 달려갔더니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 때 성령이 빌립더러 그 병거로 가까이 가라고 지시하십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소리내어 일고있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라고 묻자 그의 대답이 '지도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냐?'고 합니다.
  그때 빌립이 병거에 올라 같이 성경을 보니 내시가 읽는 곳은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깍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내시가 빌립에게 물었습니다. '선지자의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라고 묻자, 빌립이 입을 열어 '그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게 되니 내시가 은혜를 충만히 받았습니다.
  천천히 말을 몰아 길을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라고 하자 빌립이 병거를 머물게 하고 둘이 물에 내려가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길을 떠났고 내시도 흔연히 길을 떠나 자기의 나라 에디오피아로 갔다는 내용입니다. 

 

  ▶26절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여기 '주의 사자'는 '하나님의 사자, 또는 천사'와 동일한 의미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직접적인 개입을 강조할 때 사용되는 용어로써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서 주의 사자는 '하나님의 뜻을 전달하는 메신저'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놀라운 것은 한 개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천사가 나타나 지시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오늘날도 한 영혼의 구원을 위해 천사는 지시를 하고 주의 종들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은 한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천사를 시켜 빌립을 광야로 내 몰고 있습니다.
  개인 전도는 우리 하나님의 방법이요, 기독교 선교의 핵심이 됩니다. 하나님은 대중 집회도 중요하게 여기시지만 때론 개인 전도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좋은 의사는 한 사람씩 진료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도할 때 일대 일 양육법이 있습니다.

  '가사'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남쪽으로 약 70여 Km 지점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창10:19절에 보면 가나안의 도시였습니다. 수15:47절에 보면 여호수아와 유다지파에게 분깃으로 나누어 준 땅입니다.
  그런데 유다지파가 그곳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여 그 이후 계속 블레셋의 성읍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지금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이지만, 삿16장을 보면 삼손이 이곳에서 성문을 메고 헤브론까지 가기도 했으며 또 드릴라의 꼬임에 넘어가 두 눈을 뽑힌 채 맷돌을 돌린 곳도 바로 이 가사입니다.
  '광야'는 아무도 없는 빈들을 말합니다. 세례 요한도 광야에서 복음을 외친 사람입니다.

 

  ▶27-28절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빌립이 천사의 지시를 받자마자 즉시 일어나 가사 광야로 갔습니다. 그곳으로 갔더니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고 본국으로 가는 길에 그냥 간 것이 아니라 성경 이사야서를 읽으면서 가고 있었습니다.
  에디오피아는 애굽의 남방지역으로써 나일강 유역을 중심으로 구스(사11:11)족속의 후예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스'란 '검은 피부, 혹은 흑인'이란 의미입니다. 당시 에디오피아에서는 모계의 왕통을 갖고 있었으며 '간다게'는 사람이름이 아니라 왕조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로마의 가이사와 애굽의 바로와 같은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스바'로 불리 우는 나라로써 왕상10장에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 왕국을 방문한 이래 계속해서 양국이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습니다.
  내시는 국고를 맡은 내무장관입니다. '국고'의 원어는 '가자'라는 말로, 원래 페르시아에서 유래된 말인데 '왕실의 보물 또는 국가의 재산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내시는 황실 또는 국가의 재무 관리를 담당한 사람입니다. 우리나라도 옛날에 왕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다 '내시'라고 불렀습니다.

  본문에서 우리는 빌립의 신앙과 내시의 신앙을 짚고 넘어가야 합니다.

 

  ▶먼저 빌립의 신앙을 보겠습니다.
  ①천사의 지시를 받는 신앙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들의 표현을 빌리면 주의 음성을 들은 신앙입니다. 누가 주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만이 주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의 성전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는데 사무엘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②절대 순종하는 신앙이었습니다.
  27절 "일어나 가니라" 빌립은 주저하거나 머뭇거리지 않았고, 곧바로 일어나 갔습니다. 영어 성경에는 뛰어갔다고 했습니다.
  이런 빌립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참으로 진실한 주의 일꾼의 모습을 봅니다. 빌립은 천사의 지시를 받고 요나 처럼 도망치지도 않았고, 모세처럼 가지 않겠다고 뱅글뱅글 맴돌지도 않았습니다. 빌립은 성령의 명령을 전적으로 아멘하고 순종한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도마를 '의심하는 도마'로 부릅니다. 그런데 그에 대하여 전해지는 이야기는 다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제자들은 각각 어디로 가서 복음을 전할 것인지를 정했습니다. 도마는 인도로 배정을 받았습니다. 도마는 쾌히 승낙을 했습니다.
  그는 '주님! 당신이 제게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가겠습니다.'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했습니다. 지금도 인도에는 '성 도마' 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주님은 요14:21절에서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하셨습니다.
  빌립은 지금 사마리아 성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고 있었기에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사자의 지시를 받자마자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처럼 일어나 갔다고 했습니다.
  순종하며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 맡은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이는 시68:31절의 "구스인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손을 신속히 들리로다."라고 하신 예언의 성취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할/

 

  ▶이번에는 국고를 맡은 내시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①예배를 귀하게 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온 것은 세상의 어떤 정치 문제나 경제문제, 사회문제로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앙을 위해서, 오직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것이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믿/ 하나님의 복은 예배를 통하여 내려옵니다. 예배를 통하지 않은 복은 절대로 없습니다.
  여기 내시는 여왕의 신임을 한 몸에 지닌 국고를 맡은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할 일이 얼마나 많고, 얼마나 분주하겠습니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배가 우선임을 알고 예배드리기 위해 온 것입니다.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그는 유대교를 입교한 자로 어떤 절기 예배를 참석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당시 에디오피아에서 예루살렘까지 거리는 7천리입니다. 애굽을 지나야 하고 험한 준령도 넘어야 하고 황망한 사막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길을 마다하지 않고 달려온 것입니다.
  요즘 성도들은 교회가 조금만 멀어도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오늘 내시는 7천리를 마차타고 달려왔습니다.
  ②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자였습니다.
  28절을 보세요! "병거를 타고 선지자 아사야의 글을 읽더라" '병거'란 마차 중에도 전쟁에 쓰는 아주 고급 마차입니다. 그가 읽은 성경은 사53:7-8절입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 바로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피곤하고 지치면 모든 것이 귀찮아집니다. 그러나 에디오피아 내시는 먼 여행을 하면서도 병거 위에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편안한 소파에서 읽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조용한 서재에서 읽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덜컹거리며 흔들리는 병거 위에서 그는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우리들은 바쁘다는 이유로, 피곤하다는 이유 때문에 말씀을 멀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여기 에디오피아 내시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신앙의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 내시의 모습을 보십시요! 얼마나 겸손합니까? 하나님을 찾는 사람, 진리를 찾는 사람은 겸손해야 합니다.
  뒤에 나옵니다만 빌립이 '읽은 것을 깨달았느냐?'고 물었을 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고 하면서 빌립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당시 이사야의 사본은 유대인들이 구하기가 힘들 때인데 이방인 내시가 이사야 사본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그만큼 그는 성경을 사모해서 얻어진 것입니다. 그는 또 사모한 성경을 길에 가면서도 읽고 있었습니다.
  합2:2절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성도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에디오피아 내시가 뜻을 확실히 깨닫지 못하면서도 성경을 부지런히 읽었습니다. 성경은 이해가 잘 안되어도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본문의 내시가 말씀을 사모하여 부지런히 읽고 상고하는 삶을 사므로 하나님이 귀히 보시고 그 먼 곳까지 빌립을 보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이 내시가 언제부터 하나님을 믿었습니까? 학자들의 견해를 보면 스바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워 돌아가 그때부터 궁중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내시도 내려오는 전통으로 하나님을 섬겼으며 일 년의 유월절이나 특별한 절기 때는 꼭 예루살렘에 가서 절기를 지켰다고 했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느낍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에 불과합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그 계획이나 진행과정은 모두 성령께서 주관하시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순간순간 성령님의 지시를 받고 순종하는 것만이 쓰임 받는 자세입니다.
  성령의 지시는 매우 구체적이고 세밀하게 언급되었습니다.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나님은 한 심령, 한 심령을 체크하고 계십니다.
  지금 내시가 읽는 성경은 어디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이사야서입니다. 그 글을 읽고 있었을 때, 얼마나 전도하기 좋은 환경입니까? 성령님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글을 읽는 그 사람에게 가까이 나아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고 가다보면 어느 때는 아주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를 봅니다. 지금 내시가 병거를 타고 갑니다. 현대 상황으로 설명해 보면 장관이 혼자 갈리 만무합니다. 많은 수행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수행원들이 접근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은 복음 전파의 난관을 극복하고 가깝게 나아갔습니다.

 

  ▶30절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여기서도 빌립은 성령의 지시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빌립이 달려가서" 마차에 가까이하려고 숨도 쉬지 않고 달려간 줄 믿습니다. 아마도 달리는 병거의 한쪽 발판에 뛰어 올랐을 것입니다.
  달려와 보니 이사야서를 읽고 있습니다. 빌립은 감탄했을 것입니다. 왜? 자신이 복음을 전하려 한 내용을 읽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시가 성경을 읽고 있는데 어떻게 읽고 있습니까? 큰 소리로 읽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은 큰소리를 내어 성경을 읽었습니다. 내시도 유대인의 습관에 따라 마차 속에서 큰 소리로 성경을 읽었을 것이며 이를 빌립이 들었을 것입니다.
  빌립은 내시에게 '지금 성경 말씀을 읽고 계시는데 참 귀합니다. 그런데 그 성경의 뜻을 알고 계십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내시가 만약 교만한 사람이었다면 '남이야 읽던 말든 당신이 무슨 상관이요?'라고 했다면 얼마나 민망했겠습니까? 그러나 내시는 읽기는 읽지만 그 의미를 몰라서 마음속에 답답한 차에 어떤 사람이 와서 '읽은 것을 깨달으냐?'고 물으니 솔직하게 말하게 된 것입니다.

 

  ▶31절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깨닫지는 못해서 답답해하고 있는 중이니 얼른 올라타서 가면서 좀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내시는 겸손하고 솔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체면 때문에 거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내시는 체면이고 뭐고 우선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함을 풀어야겠다는 심령이었습니다.
  이 심령이 가난한 심령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심령을 기뻐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이 가난한 자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에디오피아 내시는 세계의 보물을 맡아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보물이 참된 보물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보다 더 중요한 보물은 성경 속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왜 우리가 성경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까?
  ①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②구원의 복음이 성경 속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③한 개인의 심령이 변화되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빌립은 내시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묻자 내시는 두 가지 반응을 합니다.
  ①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을 바로 지도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공생애 중 가르치는 일을 중하게 여겼습니다. 우리가 바로 배워서 바로 가르칠 수 있는 신앙의 실력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믿/
  여기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를 직역하면 '지도해 주게 될'이란 의미입니다. 이 말은 '지금까지 지도해 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자신을 지도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피력한 말'입니다. 이는 내시가 성경을 사모하고 있음을 분명히 나타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함을 주십니다.
  ②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고 했습니다.
  갑자기 나타난 빌립으로부터 도전적인 질문을 받은 내시는 의외로 빌립을 자신의 마차에 오르라고 권유했습니다. 그에게는 배우고자 하는 열심과 깨닫고자 하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행10장에 보면 로마의 장교 고넬료도 시몬 베드로를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습니다.
  이제 빌립은 그가 읽고 있는 성경 속에 예언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시작했습니다.

 

  ▶32절 "읽는 성경 귀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7절의 말씀으로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으로써 가장 고통스럽고 억울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면서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동물들도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고 합니다. 개는 보신탕 집 앞에 가면 표정이 변하고 두발을 버티고 안간힘을 쓴다고 합니다. 소는 도살장으로 끌려갈 때, 순순히 따라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양은 죽을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따라간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자같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때, 아무 반항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700년 전에 예언한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은 눈을 감으면 기도의 입이 열려야 하고, 눈을 뜨면 감사 찬송의 입이 열려야 하고, 불쌍한 영혼들을 보면 전도의 입이 열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입이 제대로 안 열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는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는 입이 열리고 핑계하는 입이 열리고, 저주하는 입이 열립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입을 열지 맙시다. 주님은 십자가 앞에서도 어떤 핑계, 저주, 자랑,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의 재판 모습을 말씀드렸습니다.
  예수님은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과 같이 순순히 끌려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내시는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모르는 것은 언제나 물어보아야 합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아래 사람에게라도 묻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33절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사53:8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이 말은 메시야가 이 땅에서 사역하는 동안 그 사역에 대한 정당한 평가를 자기의 백성들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의미가 되며 또한 십자가를 지시기까지의 재판과정에서 공의로운 재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 됩니다.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으니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죄 때문에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고소되고 체포되었습니다.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받고 골고다로 끌려가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과 제자들까지 어느 한 사람도 예수님의 죽음을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백성들의 죄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34절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말 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예언서에 예언된 고난의 종이 누구인지를 묻는 내시의 질문에는 매우 진지하고 정중한 문장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여기 '청컨대'라는 말은, 부탁을 하기 전에 붙이는 '죄송합니다만'과 같은 의미입니다. 지금 내시는 십자가에 고난 받는 종이 이사야 선지자라고 알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사야는 므낫세 왕에 의해 고난을 받고 죽었다는 전설 때문에 이 내시는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여기서 내시는 '고난의 종'이 아리송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를 가리키는 말인지 아니면 다른 사람인지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내시의 물음에 빌립이 대답하여 가르쳐 줍니다.

 

  ▶35절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빌립은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가르쳤습니다. 아마도 사53:4-6절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았겠는가? 추측이 됩니다.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안고, 십자가를 지셨다'고 말씀합니다. '허물'은 모르고 범한 죄입니다. 이 죄를 용서해 주시려고 예수님이 가시관에 찔리시고 창과 못에 찔리셨습니다.
  그 다음 우리의 죄악 때문에 그분이 상했습니다. 죄와 죄악은 비슷한 말 같지만 다릅니다. 죄는 잘못인줄 알면서도 약하여 할 수 없이 짓는 것이고, 죄 인줄 알욕심을 채우려고 계획적으로 범하는 것이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죄악을 예수님께 담당시키셨습니다. 사53: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며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빌립은 내시에게 그분이 우리의 메시아임을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이 있다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내시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은 예수를 증거 하는 책입니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로다"(요5:39)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성경은 구속사(救贖史)를 다루는 책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어떻게 타락했으며,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하나님은 어떤 계획을 세우셨으며, 그 계획대로 이 땅에 오신 자가 누구이며, 어떻게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 내셨는가? 또한 우리가 그를 믿을 때 어떤 변화와 축복을 받게 되는가? 이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할/

 

  ▶36절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내시의 신앙이 얼마나 귀합니까? 내가 확실히 예수님을 믿으니 세례를 달라는 것입니다. "내가 세례를 받음이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빌립이 예수에 대한 설명을 마치고 세례에 대한 설명을 해 준 것 같습니다.
  여기서 세례를 받는다는 것은 그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의미가 됩니다. 내시는 구원의 확신이 왔음으로 세례 받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물 있는 곳'은 예루살렘 남쪽 헤브론에서 3Km정도 거리가 있는 '벧술'이라는 샘이라고 학자들은 주장합니다.

 

  ▶37절 (없음)
  <없음>하고 4자를 쓰고 그 밑에 보면, 어떤 사본에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줄을 믿노라'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내시가 바로 신앙의 고백을 드린 것이 분명합니다.

 

  ▶38절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초대교회 때는 목사가 없었을 때이므로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충만한 일곱 집사들도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씀을 두고 장로교와 침례교가 맞서고 있는 구절입니다. '침례다. 약식 세례다' 하고 맞서는 구절입니다.

  ▶39절 "둘이 물에서 올라갈 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더라" 여기 '이끌어 간다'는 말은 '빼앗아 간지라'라는 말입니다. 학자들은 하나님께서 빌립을 내시의 눈앞에서 근방 사라지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내시는 홀연히 길을 가므로" 구원의 감격 속에 기뻐하며 떠나가는 내시의 모습을 설명했습니다. 여기 '흔연히'라는 말은 'rejoice'라는 말로 '즐거워한다'는 표현입니다.
  구전에 의하면 이 내시는 자기 조국으로 돌아가서 죽는 날까지 복음을 전파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복음을 깨닫고 난 후 그 기쁨 안에서 감사함으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신앙의 기쁨이 있어야 실천이 뒤따라오며 그에 따른 열매를 맺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에디오피아 내시의 신앙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간절함을 가지고 복음을 깨닫는 즉시 기쁨으로 순종하며 열매맺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40절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아소도'는 빌립이 세 번째 찾아간 선교지 입니다. 가사에서 약 40Km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로써 삼상6:17절에 나오는 블레셋의 성읍인 '아스돗'입니다. '가이샤라'는 '아소도'에서 더욱 북쪽에 있는 해안 도시입니다.
  빌립은 가는 곳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스데반이 순교자라고 말한다면 빌립은 전도자라고 말해야 합니다. 그는 특별히 전도의 은사를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개인전도자였습니다.
  우리 모두 빌립의 이 열정을 탐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도, 최대의 관심도 오직 영혼 구원이십니다. /믿/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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