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칼럼; 설교원고모음

이태석 神父=사랑의 꽃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2. 7. 10:25

(울지마톤즈)故이태석신부님 울지마톤즈 감동적이야기

영화 <울지마 톤즈>의 주인공 이태석 神父의 참사랑

음악·문학적 재능 뛰어나

사제의 1년을 정리하면서, 최근 선종한 이태석 신부의 삶을 되돌아 봅니다.

이태석 신부의 영성과 삶을 돌아보는 작업은 신부의 친형인 이태영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가톨릭신문과 함께 사제직의 고귀함을 묵상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이태석 신부의 어린 시절

이태석 신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타고난 재능과 함께 어릴 때의 신앙교육과 가정교육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태석 신부가 수단 톤즈 마을 아이들에게 처음으로 음악을 가르치고 있다.

이태석 신부는 음악과 문학에 대한 재능이 뛰어났었다(특히 음악). 초등학생 때부터 쉬운 곡들을 작사 작곡 했으며,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부산시 교육청에서 해마다 갖는 음악경연대회에서 변성기 접어들기 전에는 성악부문에서 장려상을 받을 정도로 노래를 잘했으며, 변성기에 접어든 후에는 작곡부문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 초등학생 때에는 서정적인 (, )들을 썼으며, 중학생 때부터는 서정적인 ('아리랑 고개') 신앙적인 ('묵상'-청소년성가 참조)들을 썼다. 음악적 재능이 그를 하느님께로 깊이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님께서 성당에 열심히 다닐 것을 강조하셔서 첫영성체 후부터는 복사와 소년 레지오를 정도로 열심이었다. 형인 나를 비롯해서 이태석 신부와 밑의 막내 남동생이 어린이 미사 나는 해설을 하고, 이태석 신부는 반주를 하고, 막내 동생은 복사를 서기까지 정도였다.

어머님의 가정교육과 종교적 감성도 깊었지만, 그를 성당에 열심히 다니도록 이끈 것은 음악이었다. 피아노 소리를 처음 듣고는 아름다운 소리에 깊이 빠져버렸다. 너무나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했지만 10남매라는 가난한 가정형편 때문에 배울 수가 없자, 성당에 있는 오르간 앞에서 하루에도 시간씩 매달리곤 하여 나중에는 어린이 미사에 반주까지 하게 되었다.

이때 오르간 연습을 하면서 성체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께 자연스럽게 기도를 하게 되었다.(이때의 체험이 그가 '톤즈'에서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면서 하느님을 깊이 만나도록 이끄는 계기가 된다-이태석저,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참조) 또한 중학생 시절에 작사작곡했던 '묵상'(청소년성가 참조)이라는 곡을 보면 마치 자신의 삶을 예언이라도 듯이 깊은 기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종교적 심성과 음악적 재능 외에 어린 시절의 이태석 신부를 이끈 것은 어머님의 교육이었다. 어머님께서는 자녀들에게 성실과 정직, 그리고 예절을 강조하셨으며 또한 모범을 보이셨다. 물자가 귀하던 시절에 이태석 신부의 누나가 길에서 못을 주워 오자 훔친 것이 아닌 직접 확인하고자 주워온 장소까지 가서 자리에 못을 두고 정도로 철저히 가르치셨다.

타고난 음악적 재능, 종교적 심성, 어머님의 교육을 더욱 깊이 있게 만든 것은 이태석 신부의 기도가 아닐까 싶다.(그의 '묵상'곡을 보면 중학생의 곡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깊은 내용을 담고 있다)

이태영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이태석 신부 형)

[기사원문 보기]

[가톨릭신문  2010.06.13]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사제] 사제 이태석 (2)

부르심에 응답한 삶

이태석 신부는 음악적 재능도 타고났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쉬운 동요를 작곡했으며, 중학생 때에는 부산시에서 작곡부문 대상을 받기도 했었다. 그가 중학생 지은 '묵상'이라는 곡과 '슈쿠란 바바'(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곡은 이태석 신부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

묵상

십자가 앞에 꿇어 주께 물었네. ~~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이들,

총부리 앞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이들을 당신은 보고만 있냐고.
눈물을 흘리면서 주께 물었네.

세상엔 죄인들과 닫힌 감옥이 있어야만 하고,

인간은 고통 속에서 번민해야 하느냐고.

조용한 침묵 속에서 주님 말씀하셨지.

사랑, 사랑, 사랑 오직 서로 사랑하라고.

영원히 기도하리라. 세계평화 위해.

사랑하리라. 모든 바쳐.

자신의 기도였던 노래 가사처럼 이태석 신부는 의사이면서 신부가 바로 사랑의 삶을 위해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떠나가 마지막 남은 생을 투신하게 된다.

이태석 신부가 이처럼 하느님의 사랑 실천에 모든 것을 투신했던 것은 그의 성소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 그가 성소를 생각하게 것은 크게 가지이다.

하나는 마태복음 25장의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가장 보잘 없는 이들 하나에게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말씀을 그는 항상 기억하며 살았다고 한다. 다른 하나는 중학교 1학년이었을 무렵에 성당에서 보았던 '다미안 신부' 영화였다.

그가 신부가 아프리카 수단으로 가겠다고 가족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자 누나가 그에게 물었다.

"
한국에도 어려운 벽지가 많은데 아프리카로 가야만 하나?"
이태석 신부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
그곳에는 아무도 가려는 사람이 없기에 나라도 가야 한다."

수단의 톤즈에서 사목하던 20 동안이나 내전에 휩싸였던 남북 수단이 2005년에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에 싸여 '슈쿠란 바바'(하느님 감사합니다)라는 짧으면서도 매우 감동적인 곡을 짓게 된다.

자신이 살고, 또한 누리고 싶었던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 가장 장애물이었던 '전쟁' 일시적으로나마 멈췄다는 소식에 감격에 겨워 지었던 노래이다. 하느님 사랑에 투신했던 자신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에 감사의 찬미를 드렸던 것이다. 마치 감사로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것처럼.

이태석 신부의 삶이 아름답게 빛날 있었던 것은 의사이면서 신부였던 그의 신분보다도 하느님의 부르심에 단순하고 순수하게 응답함으로써 사람에게 봉사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프리카 수단 아이들로 구성된 브라스밴드와 이태석 신부.

 

 

 

이태영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이태석 신부 형)

[기사원문 보기]

[가톨릭신문  2010.06.13]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사제] 사제 이태석 (3)

자신의 투신·나눔 통해 사랑의 하느님 만나

 

이태석 신부가 수단 톤즈에서 아픈 어린이를 진료하고 있다.

 

이태석 신부가 우리에게 남기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십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투병기간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책을 전해 항상 직접 썼던 말이다. 가장 전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를 돌아보면 참으로 답답했던 순간이 많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마지막 남긴 글처럼 그는 사랑의 하느님을 깊게 체험했었으나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릴 기도와 노래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으며, '톤즈'에서의 실천적 삶에서도 하느님을 만났고, 투병 중에서도 하느님을 만났던 같다. 특히 사랑의 하느님을.

그는 사랑의 하느님을 자신의 투신과 나눔의 삶을 통해 깊이 만날 있었던 같다. 그의 저서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

"
피부색은 다르지만 아프리카 형제자매들의 삶의 고통을 아쉬워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를 해주며, 작은 것이나마 그들과 나누고 싶어하는 좋은 사람들, 행복의 원천이 무엇인지 아는 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모든 인간을 철저하게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하늘나라 수학' 배우기도 한다. 가진 하나를 열로 나누면 우리가 가진 것이 십분의 일로 줄어드는 속세의 수학과는 달리 가진 하나를 열로 나누었기에 그것이 ''이나 ''으로 부푼다는 하늘나라의 참된 수학, 끊임없는 나눔만이 행복의 원천이 있다는 행복정석을 그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그는 의사요, 음악가이며, 선생의 삶을 살았지만 무엇보다도 그는 선교사였다. 사람 사람 모두가 고귀한 영혼을 가진 인간이었음을 그는 항상 기억하고자 했다. 그는 진료시에도 환자와 1 정도 눈을 마주쳤다고 한다. 의사와 환자와의 관계를 넘어서 고귀한 영혼과 영혼이 교류하는 소중한 만남이었기에 그랬다. 그는 선교사로서 자신이 만나는 사람들의 영혼을 하느님께로 인도해야 함을 깨닫고 있었다.

"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영혼의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스쳐지나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무언가를 남기고 영혼을 움직이게 있는 그런 능력의 소유자 말이다. 사람들을 만날 우리가 만나는 것은 썩어 없어지는 육체가 아닌 영원히 남아 영생을 누릴 고귀한 영혼을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런 전문가가 되는 일이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리라. (중략…) 만나는 모든 사람들을 최선을 다해서 만나고 최선을 다해서 대화하고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다 보면 언젠가는 우리도 영혼의 전문가가 있지 않을까?" (이태석 ,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 )

사랑의 하느님은 인간의 삶과 떨어져 계시지 않고, 특히 고통 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직접 찾아와 섬기신다. 이태석 신부는 사랑의 하느님을 닮고 싶어 했고,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실천함으로써 사랑의 하느님을 전하고자 했다. 진정한 선교사였던 것이다.

이태영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이태석 신부 형)

[기사원문 보기]

[가톨릭신문  2010.06.25]

[사제의 해에 돌아보는 사제] 사제 이태석 (4)

사랑의 꽃이 가장 아름답습니다

 

이태석 신부가 나환자들에게 새 신발을 신겨주고 나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지난 1 14 이태석 신부가 숨을 거두었을 , 나는 슬픔과 함께 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했었다. 매일매일 기적을 바라던 가족으로서는 슬펐지만, 하느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앞에서는 같은 성직수도자로서 자신이 부끄러웠고 또한 그의 삶이 부러웠다. 어떻게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랑을 위해 쏟아부을 있을까! 부끄러웠고 또한 부러운 삶이었다.

그가 떠난 지금까지도 많은 이들이 아쉬워하는 것은 그의 신분(신부이면서 의사였던) 때문이 아닐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위해 전적으로 자신을 버린 삶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태석 신부가 군의관 제대를 앞두고 마지막 휴가 나를 찾아왔을 때의 일이다. 그는 수도원에 입회를 하겠다고 했고, 나는 의사로서 수도생활을 하겠다는 것을 반대했었다. 신부가 아니라 의사로서도 얼마든지 사회에 봉사할 있는 길이 있는데 그래도 수도생활을 선택하고 싶으면 의사직을 포기하라고 했었다. 그러자 이태석 신부는 과감히 의사직마저 포기를 하고 살레시오 수도회에 입회를 했었다(당시 그는 제대 레지던트 수련기간을 앞두고 있었다). 그는 하느님의 안에서 수도자로서 서원을 하고 신품을 받은 즉시 아프리카 수단의 톤즈로 떠나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벗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사랑은 없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그는 자신의 마지막까지 그의 선교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남긴 권의 '친구가 되어 주실래요'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야기 자체에만 이끌리지 말고 이야기 속에 숨겨진,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이 역동적으로 역사하심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말에서 우리는 그를 기억하고자 하는 이유를 찾아야 것이다. 단순히 아름다운 송이 꽃을 아름답다고만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까지 견디어 고통과 인내를 기억해야 하는 것처럼 이태석 신부를 통해 이룩하신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을 우리는 있어야 것이다. 매일 미사를 드리면서 그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닮아 있고, 성체성사의 바로 그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친 그의 삶은 성체성사였다. 아마 하느님께서도 천상에서 이태석 신부를 보고 "너는 나를 닮았다" 하시지 않았을까?

지난 4 11일에 방영되었던 KBS 스페셜의 '울지마 톤즈' 담당 PD 이태석 신부 100 추모제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 프로를 통해 사람이 사람에게 아름다운 꽃이 있었음을 확인할 있었다. 그리고 그동안 자신은 사회의 비리를 고발함으로써 세상을 바꾸려 노력해 왔으나, 프로를 통해서는 아름다운 삶을 통해서 감동을 있었음을 깨달았다".

세상을 이겨낼 가장 힘은 하느님의 사랑에 있음을 이태석 신부의 삶을 통해 우리 신앙인들이 깨닫기를 기도드립니다.

이태영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이태석 신부 형)

[기사원문 보기]

[가톨릭신문  2010.07.02]

[출처] http://blog.daum.net/logosw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