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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잘못된 구원론 지옥심판 받는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3. 19. 10:14

작성자 조봉상
제목 잘못된 구원론 지옥심판 받는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을 것인지'에 대해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구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교회나 지도자들이

구원에 대해 명확하게 이해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고,

또 한 부분만 강조해서 가르친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에 대한 분명한 이해도 부족했고,

'믿음과 행위'의 관계에 대해서도 명확하질 못했다.

칼빈주의의 '예정론'과 '견인교리' 등도

올바른 구원을 이해하는데 장애물이 아닐 수 없었고,

각 교파의 교리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 부분도 있다.

구원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았다가도 다시 지옥에 떨어질 수가 있다.

최보라 목사님과 김민선 전도사님의 간증을 통해

얼마나 많은 목사님들, 성도님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성경에 나온 구원에 대해 전체적으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히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제로는 구원에서 떨어진 경우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다시는 구원으로 갈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다.

이 땅에 있을 때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아서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것이 복이다.

바로 이런 잘못된 구원관에서 벗어나

성경이 말씀하는 올바른 구원관을 정립하여

모두가 다 천국 가는데 약간의 도움이 될까 해서

이 글을 썼다.

그리고 '지옥의 소리'를 듣고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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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된 구원론 지옥심판 받는다!

조봉상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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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예수 믿는 궁극적 목적은 죄에서 구원받아 천국 들어가는 것이다. 천국 들어가지 못한다면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세상에서 죄짓고 살다가 지옥가는 편이 훨씬 낫다. 예수 믿고도 지옥 떨어지는 것만큼 억울함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천국도 들어가지 못할 껍데기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유가 무엇일까? 구원에 대해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 지도자들이 구원에 대해 잘못 이해하기 때문에 양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켰듯이 지금은 우리가 잘못 믿고 있는 이 구원에 대해 종교개혁이라도 일으켜야 할 때다. 그 잘못된 가르침이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가르침이다. 이것은 루터가 종교개혁의 모토로 삼았던 말씀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17).

물론 이 말씀은 맞는 말씀이다. 우리는 믿음이 아니고선 구원받을 길이 없다. 행위로 의롭게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오직 믿음만 외치고 그 다음에 따르는 행위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구원을 시작해 놓고 완성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마치 건물을 짓기 위해 땅을 파고 기초를 놓고 어느 정도 쌓다가 돈이 없어 공사를 중단하는 것과 같이 된다.

오늘 교회가 착각하고 있는 것은 구원회심의 사건혹은 중생의 사건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예수 믿는 그 순간에 일어나게 되고, 그것으로 구원이 완성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며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3:5)고 했듯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그 사건이 있으면 마치 구원이 다 이루어진 것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의 시작이지 아직도 구원을 이루어가야 할 과정은 남아 있는 것이다. 사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사건보다 거듭난 후에 넘어야 할 시련과 어려움, 십자가가 더 크게 버티고 있다. 그런 것들을 다 넘어서고, 자신이 온전히 예수님처럼 변화되었을 때, 구원의 완성이 되는 것인데, 그 뒤엣 것을 성화라고 하면서 별로 중요시 않게 취급해 왔다. 혹은 상급에 문제로 성도들의 선택에 맡기는 편을 택해 왔다.

그렇지 않다. 아무리 물과 성령으로 중생했더라도 구원의 과정을 제대로 밟아가지 못한다면 그 구원을 완성하지 못하게 된다.

완성되지 못한 믿음은 지옥의 형벌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럼 왜 이런 잘못된 구원관이 교회 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그것이 마치 진리인 것처럼 성도들이 믿고 있는가?

거기에 큰 공헌을 한 것이 칼빈주의의 예정론견인교리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은 그 사람의 의지와 관계없이 부르시고, 믿음을 주시고, 천국 들어갈 때까지 보호해 주신다는 가르침이다. 언뜻 보기엔 맞는 것처럼 보인다.

사실 또한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사도 바울같은 자도 하나님이 선택해서 불러서 은혜주시고 주의 사도로 사용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여기에 큰 함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구원은 믿음으로만받지만, 그 믿음이 주님 원하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구원은 취소된다는 사실이다.

 

물론 칼빈주의자들은 그렇지 못할 경우, 최소한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을 수 있다고 하고, 우리의 행위는 오로지 상급심판’(공력심판)과 관련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심판 기준을 보면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믿음보다도 그 믿음에 따르는 행위의 결과를 더 중시한다.

아무리 믿음이 있더라도, 말씀을 받고 중생을 했더라도 온전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찍어 불에 던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7:19, 20).

 

한번 구원을 받게 되면 절대 취소될 수 없고 영원히 구원받는다고 하는 칼빈주의의 구원론은 50%는 맞지만 50%는 틀린다. 하나님 편에서는 맞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한번 선택하시고, 구원받아 자녀되면 절대로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요, 절대로 변덕부리지 않는 분임에 틀림이 없다.

문제는 인간편이다.

우리 인간이 예수를 배신하고 믿음을 져버리고 세상길로 가 버릴 경우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하나님은 탕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 심정으로 기다리신다. 하지만 끝내 돌아오지 않을 경우엔 부득이 버릴 수 밖에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칼빈주의자들은 이 경우에도 강제로 회개 시켜서라도 천국에 들여보내 준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사단의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분명히 주셨다. 그래서 선과 악이 있을때 그것을 선택할 의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하나님이 대신 그 의지에 역사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번에 얻은 구원이라 할지라도 그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4:1,2).

 

오늘 우리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구원관에 심각한 문제는 바울신학에 너무 치우쳐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고 했는데, 너무 바울신학에 치우친 나머지 바울이 한 말이 전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이다. 죄인이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데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서신의 말씀이 다른 경우를 너무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바울서신과 야고보서가 서로 다른 것을 주장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가?

바울도 구원의 한 면을 강조하고, 예수님도 구원의 한 면을 강조하고,

야고보도 구원의 한 면을 강조한다는 말씀이다.

구원이라는 큰 과정이 있는데, 바울이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고, 예수님이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고, 야고보가 강조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말씀이다.

바울은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강조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부인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예수님은 믿음의 결과, 행위에 따라 심판할 것이라 하신다.

심판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것이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니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25:45)

 

야고보는 행함이 없다면 믿음도 헛것이라고 한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2:14, 22)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그 강조하는 부분들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전체적으로 받아 들여서 우리의 지식으로 삼아야 한다.

바울서신에만 치중할 것이 아니라 사복음서와 야고보서를 균형있게 보면서 믿음은 행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야 한다.

믿음의 대한 잘못된 이해를 고치고 행함이 수반되는 믿음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이런 도식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믿음으로 구원이 시작되고, 행위의 결과로 심판받는>

 

 

2. 바울의 구원관: “오직 믿음으로

 

바울은 철저하게 이신칭의를 고집한다.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받는 것이지 거기에 우리의 의로운 행위가 첨가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이 우리를 구원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천주교의 선행사상을 배격한다. 천주교는 예수님의 공로 50%와 우리의 선행 50%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 공로 100%만으로 천국들어간도 본다. 칼빈주의는 바울의 이 사상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고 할 수 있다.

 

1)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을 자는 단 한 사람도 없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바울의 변함없는 주장이다. 이것은 율법주의자들을 향한 엄중한 경고요, 그들에겐 절대 구원이 없음을 분명히 하는 말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게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2:16)

 

2)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로만 받는다

 

우리의 행위가 구원에 절대 개입할 수 없다고 단언한 것은 칼빈주의자들의 주장과 일치한다. 오직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고, 100%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한 마디로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2:8,9)

 

3) 따라서 구원을 받는데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댓가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3:24)

 

4) 더 놀라운 사실은 이렇게 값없이 의롭게 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만세 전에 자기 백성들을 선택했다는 주장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1:3-6)

 

바울은 하나님의 예정을 철저히 믿는다. 하나님이 창세 전에 미리 구원받을 자들을 택하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게 되는데는 어떤 댓가도 지불되지 않았고, 그래서 은혜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구속받은 성도들은 거저 주시는 은혜를 영원토록 찬미하게 되는데, 이것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이유라고 믿는다.

 

5) 우리를 정죄하는 율법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폐하셨다

 

바울은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는 강하게 거부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를 죄로 묶는 율법을 폐하셨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 죄로 인해 원수되었던 우리를 화목하게 한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4-16)

 

6) 율법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필요한 법이었다

 

율법의 기능에 대해 바울은 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 기능은 예수님이 오심으로 끝이 난다는 것이다. 예수와 하나가 되고, 예수로 세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로 옷입어 버릴 때, 더 이상 율법은 효력이 없음을 말한다.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3:19)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가 율법 아래 매인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몽학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입었느니라.”(3:23-27)

 

7) 그렇다면 구원 얻은 성도들에게 율법은 더 이상 필요없는 것인가?

 

오늘 많은 교회와 성도들이 율법에 대해 부정적이다. 우리가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더 이상 우리는 율법에 종노릇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안식일나 절기에 대해 매일 필요도 없고, 그런 것은 오히려 천한 초등학문에 지나지 않는다고 가르친다. 물론 이런 율법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다. 구약의 의식법이나 절기법, 제사법, 결례법, 토지법, 형사취수법 등과 같은 법은 더 이상 지킬 필요가 없어졌다.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뿐더러 하나님의 아신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4:9-11)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둔 것이니라.”(9:9,10)

제사장마다 매일 서서 섬기며 자주 같은 제사를 드리되 이 제사는 언제든지 죄를 없게 하지 못하거니와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그 후에 자기 원수들로 자기 발등상이 되게 하실 때까지 기다리시나니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10:11-14)

 

그렇다고 해서 영원법에 관한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했을 때, 그 법들은 영원법이다.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원수갚음’, ‘자선’, ‘기도’, ‘금식,’ ‘판단,’ ‘용서’, ‘사랑등에 관한 것은 폐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시켜야 할 법들이다. 이것을 오해함으로써 구원을 상실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이다.

3. 바울의 구원관에 대한 사람들의 오해

 

 

1) 율법은 폐해졌기에 중요시할 필요가 없다는 오해

 

지금은 신약시대이고, 은혜시대이기 때문에 구약의 율법은 이미 폐해졌기에 더 이상 중요시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십계명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계명이므로 현대에서는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할 부분이 아니라 생각한다. 그래서 십계명 설교를 거의 하지 않고 있고, 성도들은 십계명을 꼭 지켜야 한다는 강한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가 또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말한 의도를 오해하면 안된다. 바울은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폐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완전히 폐해졌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음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율법을 다 곧게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폐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바울은 더 이상 율법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할례를 받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구약의 율법을 더 이상 따라가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매지 말라.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5:1,2)

 

물론 여기서 자유케 하였다는 것은 구약의 할례법이나 제사법, 절기법 같은 것이다. 그런 법들은 구약 당시에만 필요했던 것이고, 예수님이 오심으로 다 폐하여질 법들이었다. 그러나 영원법은 폐하여지지 않았다. 예를 들면, 십계명은 영원히 폐하여지지 않을 법들이다. 예수님이 율법의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을 때, 그것은 영원법을 두고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말씀을 잘못 들으면, 율법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으니 이젠 자유롭게 마음대로 적당히 죄와 타협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유혹에 직면하게 된다. 그렇게 될 것을 염려해서 바울은 다시 이렇게 권고한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5:13)

 

우리 성도들은 비록 율법으로부터 자유하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히려 그것을 죄 지을 기회로 삼아사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젠 주님의 사랑을 입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에, 더욱 사랑으로 율법을 준수해 나가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구원얻은 성도들에게 천국까지 안전하게 갈 수 있는 보호막과 같은 역할을 해 주는 것이다.

 

2) 율법은 천하고 온전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좋지 못한 것이라는 오해

 

율법의 기능은 정죄하는 것이다. 율법이 없을 때는 죄가 죄인줄 모르고 있다고 율법이 옴으로 인해 죄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죄인들에게는 율법은 언제나 환영을 받지 못한다. 그러나 율법이 없다면 어떻게 죄인인 것을 깨닫고, 회개할 것인가? 율법은 우리를 회개해서 생명으로 갈 수 있도록 해 주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7:10, 12)

 

바울은 율법도 거룩하다고 본다.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때문이다. 의롭고 선한 것이다. 다만 죄인에게 그 선한 율법이 다가갈 때, 죄들이 드러나기 때문에 죄인들이 싫어할 뿐이다. 그러나 정말 천국을 사모하는 자라면, 자기의 죄를 드러내주는 율법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그 율법을 드려다 보면 볼수록 자신의 죄가 드러나기에 회개할 수 있고, 회개하면 할수록 주님 앞에 더 거룩한 자로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 강단에서는 율법을 통해 죄를 지적하고, 성도들로 하여금 회개의 바람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3) 구원받은 자는 더 이상 율법이나 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오해

 

안식일 규정을 제대로 지키는 교회들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물론 지금은 주의날이라 해서 일요일을 주일로 바꾸어 지키기는 하지만, 문자 그대로 지키는 교회들은 거의 없는 실정이다. 급한 일이 있거나 여행 중에 있을 때는 주일을 정확하게 지키지 않아도 하나님이 관대하게 봐 주실 거라는 생각을 한다. 왜 이렇게 되어 버렸을까? 그것은 바로 바울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율법이 폐해졌기에 더 이상 안식일법은 지금 교회에 적용되지 않는다고 결론 내렸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안식일에 밀이삭을 잘라 먹고, 병든 자를 고치면서 유대인들과 안식일 문제를 놓고 싸우셨다. 그런 과정을 보면서 현대 교회들은 안식일에 대한 율법적으로 지키는 것은 더 이상 무의미하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이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은 생명을 구하는 일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 자체를 무시하거나 지키지 말라는 의도는 전혀 아닌데도 사람들은 아전인수식으로 자기 편한대로 해석해 버린 것이다.

안식일에 생명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이 율법대로 안식일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했지, 안식일 자체를 폐하거나 그 날에 일을 하거나 마음대로 시간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은 아니질 않는가?

안식일을 문자적으로 지키면서 동시에 생명을 살리고, 전도하고, 영혼을 돌보는 일을 하라는 뜻으로 받아 들여야 정확한 것이다.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함으로써 현대교회는 급속히 타락하고 있고, 주일성수가 되지 않으므로 신앙 자체가 허물어 지고 있질 않는가? 만약 우리가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거짓말쟁이요, 진리가 없는 자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요일 2:3, 4)

 

4) 구약의 율법을 지키면 은혜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오해

 

중국 선교지에서 장로교 고신측출신의 평신도 선교사 부부를 만나 구원에 관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으며, 율법을 지키거나 우리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흠이 가기 때문에 절대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은혜로만 구원받지 우리의 행위는 우리의 구원에 전혀 영향력을 미칠 수 없고 다만 상급에만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하였다.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자로다.”(5:3, 4)

 

이렇게 바울이 말씀하니까 혼동이 생긴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잘못되었구나! 율법은 보지도 말아야 되겠구나! 그저 은혜가 최고구나! 율법은 버려야 될 폐기물 같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할례를 버리라 했지, 율법 가운데 영원법을 버리라는 말씀은 아니다. 할례를 받음으로 의롭게 되려는 그 행위가 잘못된 것이지, 다른 율법의 선행들이나 죄악으로 빠지게 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들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지키지 않으면 지옥에 떨어진다.

 

5) 구약의 율법의 종류에 대한 오해

 

신약에서 율법이라고 할 때, 때로는 모세오경에 나오는 전체 율법을 말할 때도 있고, 때로는 어느 특정한 법을 말할 때도 있다. 구약의 율법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그 가운데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폐하여진 법도 있고,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법도 있다. 예를 들면, 구약의 제사법은 예수님 오실 때까지만 필요한 법이다. 예수님이 유월절 어린양으로 오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성만찬을 하시면서 유월절을 마지막으로 지킨 것이 끝이다. 더 이상 유월절을 지킬 필요도 없고, 구약의 제사법대로 제사 드릴 필요가 없다. 히브리서에 이른 바 대로, 예수님은 제사를 완성시킨 대제사장이시기 때문이다. 문둥병 결례법이나 음식법도 다 폐하여 진 법들이다. 토지법도 더 이상 우리에겐 유효하지 않다. 대천덕 신부가 성경의 토지법을 가지고 운운한 적이 있는데 현대에 와서는 적절하지가 않다. 형사취수제도 현대사회에 어떻게 가능한가? 형의 아내가 죽으면 동생이 그 형수를 취하는 법은 구약 유대 사회에 필요했던 것이고, 지금은 그 법이 유효할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십계명은 영원법에 속한다. 그 법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까지 유효하다. 그러므로 그 법은 폐하여진 것이 아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어찌 구약에만 유효하겠는가? 신약에도 유효하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으로 불완전하던 율법이 완전한 율법으로 된 것이 있다. 바로 산상수훈(5-7)에 나오는 내용들이 그것이다. 형제를 미워하기만 해도 살인죄에 속하는 것은 구약에 살인하지 말라는 불완전한 법을 예수님이 오셔서 완성시킨 것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것부터가 살인죄에 속하므로, 내 몸처럼 사랑함으로 구약의 율법을 완성시킨 것이다.

이렇게 구약의 율법이 복잡한데 그것을 하나의 뜻으로만 이해하면 바울이 쓴 율법이라는 말을 이해하는데 문제가 생긴다.

 

다음은 구약의 율법을 대충 나누어 보았다.

1) 십계명

2) 제사법

3) 도덕법(윤리법)

4) 예식법

5) 절기법

6) 민법

7) 상법(상거래, 손해배상)

8) 형법

9) 건강법(음식법)

10) 전쟁법

등등

이 외에도 더 많은 종류로 율법을 분류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그 당시에 필요했던 법이 있는가 하면, 지금까지 필요한 법이 있고, 더 완성시켜야 할 법도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6) 바울서신의 배경에 대한 불충분한 이해

 

바울서신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언급했지만 바울이 서신들을 쓰게 된 배경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대율법주의자들, 행위로 거룩하게 되려는 바리새인들이 바울과 교회를 공격해 왔기 때문에 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같은 서신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바울이 율법이나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당시 바리새인들이 구원의 수단이라고 믿었던 할례안식일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지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십계명을 폐하였다거나 영원법을 없앴다는 말씀은 아님을 알아야 바울 서신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4. 왜 구원론에서 바울서신에 치중하고 있는가?

 

1) ‘이신칭의로 대변되는 바울신학이 종교개혁의 근간이 되었기 때문

 

바울의 오직 믿음으로는 종교개혁의 뿌리가 된다. 중세 카톨릭은 선행사상을 강조하면서 고행면죄부판매성인숭배’, ‘성물숭배와 같은 행위를 강조하였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런 행위에 대해 강력히 저항하였고, 그것을 뒷받침해 주는 성경은 로마서, 갈라디아서를 비롯한 바울서신들이었다. 하지만 바울서신에만 치중하게 되면, 사복음서를 통해 예수님이 말씀해 주시는 구원과 심판을 놓칠 수가 있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믿음은 행위가 수반될 때 살아있는 믿음이라는 것도 간과할 수 있다.

 

2) 바울서신만 볼 때 오는 오해의 요소

 

바울 서신을 보면 마치 율법은 아주 나쁜 것이고, 그래서 폐해진 것처럼 보이고, 믿음과 은혜만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구원을 받는데 우리의 행위도 필요없는 것 같고, 행위가 있다해도 그것은 그저 보조 수단이지, 그것 때문에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바울 서신에만 빠지면, 한쪽으로 치우쳐져서 칼빈주의에 빠지기 쉽다. 왜냐하면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주의에 항거해서 싸웠던 것처럼, 칼빈은 천주교의 선행사상과 싸웠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바울신학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 사실이다.

 

3) 사복음서의 구원관과 균형을 이루라!

 

바울 서신들은 그 당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쓴 편지들임을 기억해야 한다. 이런 배경을 모른 채 바울서신을 대할 경우, 많은 오해를 살 수 있다. 바울은 당시 율법주의자들의 공격을 받았고, 그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때문에 바울은 율법주의자들이 그들의 선행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주장했어야만 했다. 오직 예수만이 구원이요, 그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율법의 행위에 대해선 부정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현대 신학자들은 이런 바울서신을 가지고 바울 신학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체 기독교의 교리인 것처럼 강조해 왔고, 교회에 가르쳐 왔다.

 

그러나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을 보라! 구원에 관한 내용이 바울과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율법에 대해서 예수님은 부정적이지 않다. 오히려 율법의 잘못된 해석을 바로 잡고, 그 율법을 사랑으로서 완성하도록 촉구한다. 예수님은 구원을 행위심판으로 연결한다.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에 합당한 행위가 수반되지 않을 때는 그 구원은 무효가 되고,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 것을 경고한다.

 

4)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율법과 복음, 믿음과 행위의 관계를 다룰 때, 바울서신만 보면 편향적일 수 있다. 사복음서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 그래서 구원을 성경의 어느 한 단편만 가지고 논할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를 가지고 논해야 더 안전하다. 특히 사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서신을 잘 종합하고, 더 나아가 야고보서를 함께 놓고 비교할 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정한 구원론을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도 바울서신도 야고보서도 모두가 성경이요, 일점일획이라도 잘못이 없는 정경으로 믿는다. 그러므로 그 안에 나타난 내용들은 서로 대립되고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작용 한다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물론이고 교회 성도들도 성경 전체를 통해 정확한 성경적 구원론을 정립해야 하는 것이 과제로 남을 것이다.

 

5. 예수님의 구원관: “심판의 기준은 행위와 열매

 

예수님의 구원관은 바울과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먼저 율법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바울은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성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5:17)

 

그러나 바울의 율법에 대한 생각은 다르다. 율법의 폐하여 진 것이라고 본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2:14-16)

따라서 바울은 율법의 종으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반면에 예수님은 율법을 완전히 지켜야 함을 주장한다. 바울의 주장을 따르는 자들에겐 여기서 혼동을 하게 된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인가, 아니면 지키라는 것인가?

 

1) 예수님은 율법을 반드시 지키라고 요구한다

 

예수님은 분명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다. 완성시키기 위해 오신 분이다. 때문에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 함은 당연한 요구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5:19)

영생을 얻고자 하는 한 부자 청년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19:17)

바울은 분명 구원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했는데, 예수님은 계명들을 지켜야만 구원에 이른다고 하신다. 서로 상반된 주장이다.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7:19)

 

2) 계명을 지키지 않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증거이다

 

만약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된다. 계명을 지킬 때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증거이다.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15:10)

예수님도 성부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다고 한다. 그로 인해 성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게 되었는데, 우리도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면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고 한다.

 

3)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대접함으로 율법을 완성시켜라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7:12)

 

4) 서기관, 바리새인들보다 더 의인이 되라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외식을 지적하면서 본받지 말라고 하셨다. 천국 시민이 되려면 그런 외식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의 행위 자체를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동기로 십일조도 하고 예배도 드리라는 것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23:23)

5) 율법은 세례 요한 때까지임을 분명히 밝힌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의 없어짐이 쉬우리라.”(16:16, 17).

 

6) 모든 율법은 사랑으로 요약된다

 

예수님이 주신 새계명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율법도 결국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다. 사랑이 율법을 지키는 동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키긴 지키되 그것이 사랑으로 연결이 되어야 하고, 사랑의 열매로 나타나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태복음 22:37-40).

 

7) 예수님이 오심은 율법을 폐함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함이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5:17)

 

8)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천국 들어갈 자들의 기준

 

1) 심령이 가난한 자

2) 애통하는 자

3) 온유한 자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5) 긍휼히 여기는 자

6) 마음이 청결한 자

7) 화평케 하는 자

8)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

9)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으나 나중까지 견디는 자(10:22)

10)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11:12)

11) 천국 보화를 위해 자기 소유를 다 파는 사람(13:44)

12) 예수님을 살아가게쓴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16:16)

13) 천국열쇠를 받는 자(16:19)

14)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자(16:24)

15)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좇는 자(19:27-29)

16)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21:43)

17)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을 실천하는 자(22:36-40)

18) 충성되고 지혜있는 종이되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자(24:45,46)

19) 달란트를 남긴 종들(2514-23)

20) 이 땅에서 고통받는 자들을 먹이고 입힌 자(25:34-40)

21) 주님을 위해 값비싼 향유를 부어 드리는 자(26:7-12)

22) 예수님을 배신했어도 회개하는 자(26:75)

23)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자(1:15)

8) 지옥판결 받을 자의 기준

1) 소금이 맛을 잃을 경우, 지옥이다(5:13)

2) 너희 의가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5:26)

3) 형제에게 라가,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

4) 형제와 화목하지 못한 자

5) 여자를 보고 음욕 품는 자

6) 눈으로 범죄한 자

7) 손으로 범죄한 자

8) 음행한 연고없이 이혼한 자

9) 하나님 이름으로 함부로 맹세한 자

10) 원수를 갚은 자

11) 악한 자를 대적한 자

12) 원수를 사랑하지 못하고, 기도해 주지 못한 자

13) 하나님 처럼 온전하지 못한 자

14) 사람 앞에서 보이려고 의를 행한 자

15) 남에게 보이려고 구제한 자

16) 외식으로 기도한 자

17) 남의 죄를 사해주지 못한 자

18) 보물을 땅에 쌓아둔 자

19) 두 주인을 섬긴 자

20) 비판한 자

21)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지 못하는 자

22)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 않는 자(7:13)

23) 거짓 선지자에게 넘어간 자(7:15)

24) 나쁜 열매를 맺은 자(7:19)

25)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면서 하나님 뜻대로 하지 않는 자(7:21)

26) 불법을 행하는 자(7:23)

27)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자(7:26)

28) 불순종하는 나라의 본 자손들(8:12)

29) 자기를 죄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자(9:13)

30)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10:33)

31) 예수님보다 가족을 더 사랑하는 자(10:37)

32) 예수님보다 자기 목숨을 더 사랑하는 자(10:39)

33) 예수님의 권능을 보고도 회개치 않은 자(11;20)

34) 예수님의 권능을 귀신이 한다고 성령훼방한 자(12:27)

35) 마음에 악을 쌓은 자(12:35)

36) 평소에 말을 잘못한 자(12:36)

37)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치 않는 자(12:41)

38) 길가 같은 마음을 가진 자(13:4)

39) 말씀을 듣고도 마귀에게 빼앗기는 자

40) 돌밭과 같은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자

41) 가시떨기 같은 마음을 가진 자

42) 복음을 듣고도 깨닫지 못하는 자(13:13)

43) 교회 안에 가라지 성도로 사는 자(13:25, 40)

44) 넘어지게 하는 자들과 불법을 행하는 자들(13:42)

45) 예수님을 배척하는 자(13:57)

46) 입술로만 존경하고 마음이 먼 자(15:8)

47) 사람의 계명으로 헛되이 경배하는 자(15:9)

48)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 따라가는 자(15:14)

49) 마음에 살인, 악한 생각,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 증거, 훼방이 가득한 자(15:19)

50) 이 시대를 분별하지 못하는 자(16:3)

51)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누룩, 교훈을 따라가는 자(16:12)

52)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자(16:23)

53) 자기 목숨을 구원코자 하는 자(16:24)

54)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18:3)

55) 예수 믿는 소자 하나를 실족하는 자(18:6)

56) 예수 믿는 소자 하나 업신 여기는 자(18:10)

57) 죄를 짓고도 교회의 권고를 듣지 않는 자(18:15-18)

58) 자기에게 빚을 진 자를 끝까지 탕감해 주지 않고 감옥에 넣는 자(18:23-35)

59) 자기 형제를 중심으로 용서해 주지 못한 자(18:35)

60) 하나님이 짝지어준 것을 나눈 자(19:6)

61) 자기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주님을 따르지 못하는 자(19:21, 22)

62)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19:23)

63) 성전에서 매매하고 장사하는 자(21:12)

64) 열매 맺지 못하는 자(21:19)

65) 말로만 믿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자(21:29)

66) , 직장, 일 때문에 예수님의 초청을 거부한 자들(22:5-7)

67) 예복을 입지 않은 자(22:11-13)

68) 청함을 받았으나 택함을 입지 못한 자(22:14)

69)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고 오해하는 자(22:29)

70) 부활을 믿지 않는 자(22:23-28)

71)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말로만 믿는 자들(23:2-7)

72) 자기를 높이는 자(23:12)

73) 천국을 닫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23:13)

74) 외식하는 자들(23)

75) 과부의 가산을 삼키며 외식으로 길게 기도하는 자들(23:14)

76) 소경된 인도자들, 잘못 가르치는 설교자들(23:16-22)

77) 율법의 핵심인 의와 인과 신을 버린 자들

78)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게 하되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 자(23:25)

79)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속은 온갖 더러운 것들로 가득찬 자(23:27)

80)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 서기관들을 죽이고 못박고 채찍질하고 피흘리게 한 자들(23:34)

81) 주님의 요구에 불응한 자들(23:37)

82) 미혹에 넘어진 자들(24:4-5)

83) 환난 때에 재물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는 자(24:17, 18)

84) 홍수가 나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24:38,39)

85) 주의 재림을 예비하지 못한 자(24:43)

86) 주의 재림을 앞두고 술친구로 더불어 먹고 마시는 자(24:48-51)

87) 등은 준비했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한 자(25:1-13)

88) 달란트를 받고도 남기지 못한 자(25:26-30)

89) 이 땅에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을 돌보지 않은 자(25:41-45)

90) 예수님을 배신하고 판 자(26:23)

91) 예수님을 배신하고 자살하는 자(27:5)

92) 예수님을 조롱한 자들(27:41)

이상에서 볼 때, 예수님의 심판은 '행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 '믿음, 믿음' 하면서도 행위가 나쁜 열매로 나타나거나, 행함이 없다면 지옥의 심판을 면할 길이 없게 된다. 바울서신만 치중하면 안된다. 예수님의 사복음서를 동시에 보면서 율법과 행위, 믿음에 관한 상관관계를 잘 이해해야 할 것이다.

 

9) 예수님의 구원관: 행위와 열매로 심판함

 

예수님의 구원관은 단지 믿음으로만이 아니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7:21).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7:19)

아무리 구원을 받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더라도 중간에 불법으로 나아가면 지옥형벌이다. 불법이란 하나님의 계명, 율법을 어기는 행위이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리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2, 23)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믿음만 아니라 그 믿음에 행위가 수반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아무리 믿음으로 구원받았다 하더라도 행함이 없고, 또 그 행함이 좋은 열매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결국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일단 구원시킨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이라도 받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착각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지 않는 불법자가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단 말인가?

 

오늘 교회들이 이런 예수님의 구원관을 바로 이해해야지만 천국을 소유할 수 있다. 바울이 율법의 행위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말하지만 아니다. 오직 믿음이 전제가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9,10)

하지만 믿음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믿음 없이도 절대 천국 들어갈 수 없지만,

믿는다면 그 열매도 반드시 나타나야 한다. 믿는다면 계명대로 살아야 하고,

열매가 맺혀져야 하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나타나야 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심같이 온전해져야 구원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16:27)

이런 예수님의 견해에 대해 바울도 동의하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함을 받으리니”(2:13)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늘 아버지처럼 온전해 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그렇게 온전하게 되기 위해서는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 완전히 지켜 나가야 한다. 행함과 결단, 헌신이 따라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19:21)

 

6. 야고보서의 구원관: “믿음 +행위

 

1) 야고보서는 철저하게 행위를 강조한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었기 때문에 논할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믿음이라고 할 때,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냐 죽은 믿음이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2:15). 믿음에 행함이 수반될 때, 그것으로 인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1:25)

경건하게 되는 것도 입술로 고백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선행을 통해서 가능해 진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1:27)

 

2) 이웃 사랑 실천함으로 율법을 완성해야 한다.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2:8)

 

3) ‘믿음행함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했을 때, ’행함을 택하라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2:18, 26).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 없다. 입술로 고백하고, 머리로 인식하는 차원의 믿음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몸을 통해 행동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그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이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3:18)

바울이 오직 믿음만 강조하고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말에 오해하는 자들을 위해서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한다. 야고보의 주장은 바울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하는 차원에서 행위를 강조하는 것이다.

 

7. 맺는 말

 

1) 구원받기 전에 요구되는 의

구원받기 전의 우리 인간의 상태는 죄인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과 같이 모든 인간의 죄 아래 갇혀 있다. 이것을 알 수 있는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 율법은 죄에 무감각한 인간들에게 죄가 죄인 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 인간의 자력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지옥 형벌이 불가피한 상태이다. 누가 죄에 빠진 이 인류를 구원할 것인가?

이런 상태에서 죄인들을 대신할 한 다른 의가 필요하다. 그 의는 완전한 의요, 하나님의 요구와 율법의 요구를 다 충족해 주는 의인이라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성육신하여 인간 세상에 오신 것이다. 우리를 대신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오셨다. 죄가 없었지만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 흘리신 피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놓으셨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 어떤 것으로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10:7-9).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4:12)

 

그러므로 구원받기 전 상태에서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인간의 그 어떤 선행이나 노력, 행위도 필요없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에 이르려하는 율법주의자들은 실로 어리석다. 절대로 그 방법으로는 구원에 도달할 수 없다. 구원을 위해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고, 그 예수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게 된다. 이렇게 구원을 받게 되면 천국시민으로서 삶이 시작이 된다. 그러나 이것이 구원의 완성은 아니다. 구원의 완성을 구원받은 영혼이 천국에 들어갈 때, 비로소 가능하다. 그 전까지는 안심할 수 없다.

마귀는 그 받은 구원을 천국 들어가기 전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빼앗으려고 한다. 안타깝게도 한번 얻은 구원을 빼앗기는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지옥간증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불신자만 아니라 믿던 자들까지도 지옥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해서 절대 안심할 것이 못된다는 것이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2:12)는 말씀을 기억하고, 구원받았기에 더 힘써 나아가야 한다.

 

2) 구원받은 후 요구되는 의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면, 그 후로는 율법대로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진다. 이것은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아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천국시민이 되었다는 증표인데, 그렇다면 천국시민의 법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다. 그 천국시민의 법이 바로 율법이다.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의 의로 의롭게 된 자들은 그 의를 지켜 나가기 위해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의 공로로 의롭게 되었다 해서 율법을 어긴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이 곧 죄이기 때문에 다시 죄인이 되는 것이다. 만약 그 죄를 회개치 않는다면 받았던 구원도 결국에는 잃어 버리게 된다.

 

구원받은 자가 율법대로 사는 것은 바리새인들이 율법대로 사는 것과 차원이 다르다. 구원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마지 못해, 의무적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의 기쁨과 감격 때문에 계명대로 사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율법대로 사는 것이다. 얼마든지 자유롭게 살 수 있지만 구원해 주신 주님의 은혜가 너무 감격스러워서 율법대로,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지키는 율법은 제사법이나 의식법, 혹은 당시 유대민족에 적용되었던 그런 법이 아니라 영원법이다.

 

3) 완전한 의를 이루라!

 

성경은 우리의 노력이나 힘으로 율법을 다 지킬 수도 없고, 그로 인해 의롭게 될 수도 없다고 선언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하라’ ‘거룩하라고 요구하신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5, 16)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38)

 

오늘 많은 성도들이 이 말씀을 놓치고 있다. 이 땅에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했고, 우리의 행실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고 했기에 우리는 완전한 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선을 그어 놓고 있다. 완전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신데 우리가 어떻게 의로와질 수 있느냐, 그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못박아 놓고 있다. 이런 생각이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완전하지 못하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예수님도 하늘의 아버지처럼 온전해 지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하나님이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인간은 하나님처럼 완전하거나 거룩하게 될 수 없다. 그건 불가능하고, 죽어서 천국가면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할 것인가?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소돔과 고모라성을 멸망하기로 정하여 재가 되게 하사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으셨느니라.”(벧후 2:4-6)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이젠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어야 한다. 주님처럼 거룩함에 이르러야 하고, 완전함에 나아가야 한다. 베드로의 고백처럼 신의 성품에 참예’(벧후 1:4)하는 자가 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 오실 때, ‘흠도 티도 없이 보존되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믿음의 초보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된다. 더 완전한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베드로는 믿음으로 시작한 성도의 삶을 어떻게 완전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이렇게 말씀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소경이라. 원시치 못하고 그의 옛 죄를 깨끗케 하심을 잊었느니라.”(벧전 5:5-9)

 

구원은 중생을 체험하는 일회적 사건인 동시에, 기나긴 여정을 달리며 이루어가야 하는 과정이다. 마치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길을 걸어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비록 출애굽은 했지만(구원받음) 광야에서 불순종함으로 인해 20세 이상의 남자들이 죽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구원에 관한 거울이다.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불순종하고 죄를 회개하지 않고 끝까지 고집부린다면 지옥에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에 더 조심해야 한다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육체로 마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구원을 잃어 버리지 않도록 해야된다.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서도 안되고, 개가 토했던 것처럼 옛 죄로 돌아가서도 안된다. 오직 푯대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그러면서 온전히 예수님처럼 변화되어야 하고, 성자가 되어 나가야 한다.

완전한 의에 이르도록 자신을 쳐 복종하고, 회개하고, 좋은 열매를 많이 맺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될 때, 천국시민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될 것이다.

천국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완전한 구원을 이루기 위해 더 열심히 노력하고 기도하고 회개하고 열매맺는 삶을 살아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오직 예수님께 영광을!

 

bongsang9@hotmail.com

 

"네 주인은 누구인가?"


사랑하는 자여!

 

어떻게 당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주인님)이 아니라

단지 구주(구출자)이실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어떻게 당신은 우리의 주권자이신 주(主)께 순종하지 않고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가르칠 수 있는가?


나는 성경 전체가 순종을 가르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준엄하게 요구되는 것이

순종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성경은 순종 없는 구원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

왜냐하면 순종 없는 구원은 모순된 것으로서 그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권위에 반역하는 것이 죄의 본질이다.

누군가 현대인들에게 “당신은 순종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면 그들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그들에게 “당신은 누구에게 속했습니까?”

또는 “당신은 누구에게 순종해야 합니까?”라고 물으면, 그들은 즉시 “나는 나 자신에게 속했습니다.

아무도 내게 순종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사랑하는 자여!


당신이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

“나는 주님의 이것은 취하지만 저것은 취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영악한 짓은 허락되지 않는다.

집에 들여놓을 가구를 구입할 때

“나는 이 식탁은 원하지만 저 의자는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듯이 주님을 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결코 주께 나아갈 수 없다.

자기 입맛대로 고르는 것은 허락되지 않는다!

당신에게 있는 유일한 권리는 당신의 의지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의지에 따르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고 우리는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순종하라고 명령할 권리를 갖고 계신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주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 11:30)라고 말씀하신다.

당신은 누구에게 ‘순종’하는가? '하나님’이라고 외치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에게 더 순종하고 살지 않는가


진짜 주인님께 빼앗은 주인의 왕관을 다시 돌려드려라!

주인님께 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

 

이 책에서 토저는 현대 크리스천들이 ‘반쪽 예수’만을 믿어나가는 것을 통박한다.

즉, 구주(구출자, Savior)로서의 예수는 받아들이지만 주님(주인님, Lord)으로서의 예수는 거부한다는 것이다.

인생의 위기 상황에서 나를 건져주시는 구출자 예수는 좋아하지만,

나의 순종을 요구하시는 주인으로서의 예수는 배척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현대 크리스천들의 만병의 근원이라고 지적한다.

토저는 단호히 말한다.   순종 없는 구원은 없다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한 유명 인사가 기독교 방송의 간증 프로그램에 나와 이렇게 자신의 과거를 회고했다.

 

“나는 그때 하나님을 ‘반창고’처럼 생각했습니다. 그걸 믿는 거라고 착각한 것이지요.”

상처가 생긴 부위에 반창고를 붙여 지혈하고 아물게 하듯이,

이 유명 인사처럼 인생의 위기에서 구조를 받기 위해 예수의 이름을 부르고 영접하는 것을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예수님은 죄에 빠져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을 살리는 구출자(Savior)이시므로

그런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것 자체는 틀린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창고가 아니시다!

 

예수님은 주(主), 곧 주인님(Lord)이시다!

 

토저는 이 책에서 현대 크리스천들이 예수를 구출자로만 생각하여 ‘반쪽 예수’로 만들어버리고,

그것을 예수 믿는 것으로 착각하는 현실을 통탄한다.

주인님으로 모셔야 할 예수님을 그저 ‘입술로 영접한다고 말하면 그만’이라는 수준으로

격하시켰다는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는 것(듣고 순종하는 것)이 숫양의 기름을 쏟아

부어드리는 것보다 나으니이는 (듣고도)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주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고집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 삼상 15: 22-24 -

 

-<네 주인은 누구인가?> A.W. 토저 저/이용복 역 | 규장

출처 : 주님이 곧 오십니다.여호와를 경외하라.
글쓴이 : Jesus사랑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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