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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3. 31. 10:27

삼위일체에 대한 바른 이해

저는 삼위일체론을 전공한 조직신학자로서 위트니스 리의 글을 읽고 매우 놀랐습니다. 너무 심각한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조적으로 전통을 비판하고 그가 성경을 읽으면서 나름대로 이해하고 그의 체험에 근거한 매우 이상한 삼위일체론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오해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성경구절을 오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라는 성경구절을 인용하면서 삼위(three persons)이심을 부정하고 삼일설, 즉 "삼이일(三而一)"설을 주장하면서 사실상 일위(one person)설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가 오해한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삼위 하나님이 점진적으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제1위만 계시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를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성육신한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이 아버지의 명령을 받아 오신 것입니다.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은 다른 분입니다. 여기서 이위(two persons)가 계시되고, 이어서 오순절에 제3위인 성령님이 강림하심으로서 삼위(three persons)가 모두 계시되게 됩니다.

따라서 기독교는 유대교나 이슬람교와 달리 하나님이 one person이라고 믿지 않고 three persons라고 믿는 종교입니다. 따라서 삼위일체론(three persons in one nature)이 기독교 신앙의 대표적인 독특성과 기초가 된 것입니다. 대표적인 이단적 이해인 양태론이란 일위삼태론(one person in three modes)이며, 삼심론이란 삼위삼체론(three persons in three natures)를 의미합니다.

또 하나의 오해는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성구를 한 의미로만 이해한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말이 구약에서는 성부 하나님으로만 이해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분명한 언급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다릅니다. 어떤 경우는 포괄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제1위 성부 하나님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 하나 혹은 한 분이라고 말하지만, 동시에 주님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라고 말합니다.

즉, 이런 경우에는 제1위 성부는 하나님으로, 제2위 성자는 주님으로, 제3위는 성령으로 다르게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두 용례를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삼위 하나님이 성경에서 점진적으로 계시되기 때문에 성경 전체를 동시적 계시로 읽지 말아야 합니다.

둘째로, 그러한 오해의 결과, 나와 우리의 차이를 부정하게 되고 셋이 하나라는 뜻의 "삼이일(三而一)"이라는 이상한 이론을 주장하게 되었으며,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라거나 예수님이 성령이라는 그릇된 결론을 내리고, 따라서 동일한 한 분인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우리 안에 내주한다는 주장을 전개하게 되었다고 분석됩니다.우리 안에 내주하는 것은 오로지 성령님이며, 성부는 하늘에 계시고 성자도 승천하셔서 지금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며 재림시 다시 오시게 될 것입니다.
성부와 성자의 임재는 성령의 내주와 같이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됩니다.성경만을 따른다고 교회 2천년 역사도 부정하고 신학적 전통도 무시하면 독선주의에 빠지게 되며 결국 잘못되게 됩니다. 교파 신조는 상대화하더라도 세계교회가 모두 고백하는 세계교회신조(ecumenical creeds)를 부정하면 안됩니다. 교회는 성도의 교제이며, 이를 우주적으로 이해하면 교회들간의 교제, 교파들간의 교제, 시대교회들과의 교제 등을 의미합니다.

나의 성경 이해만을 절대화하지 말고 성경의 자기 이해를 겸손하게 객관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신 2천년 교회의 신학적 전통, 특히 세계교회가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신앙에 자기 이해를 비추어보고 배우며 고쳐나가는 신학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출처 : 이정석 교수 /
http://www.jsrhee.com/jboard/?p=detail&code=b1&id=5&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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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를 혼동 없이 명료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성부와 성자, 그리고 성령님이 다른 분이라는 사실을 수용해야 합니다.
성자는 성부와 다른 분입니다. 성육신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은 하늘에 그대로 계시는 성부와 다른 그의 아들입니다.
사람들과 함께 거하시며 하늘을 향하여 성부께 기도 드리고 그의 도움을 간청하셨던 분이 어떻게 같은 분이겠습니까?
성부와 성자가 같은 분이라면 왜 그러하셨으며, 왜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고 하셨겠습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달리시며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절규하신 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부활하여 내가 다시 아버지 집으로 돌아간다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그래서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성령과 성자도 다른 분입니다. 그는 요17장에서 구속사역을 마친 뒤 승천을 예기하면서, 지상에 있는 성도들을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고 [다른 보혜사]를 보내시겠다고 하였습니다.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은 성자가 다시 내려온 것이 아닙니다. 성자는 성부와 함께 그 우편에 계시다가 마지막에 재림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적 사변에 몰입됨으로서 방향을 상실하여 순수하고 단순한 사도신경적 신앙을 상실하거나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신학은 신앙을 돕고자 있는 것이지 신앙을 혼돈시키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을 혼란시키고 분열시키는 신학은 그릇된 신학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우리 가운데 내주하시는 분은 성령님이며 성부나 성자가 아닙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러한 실체적 골격에서 우리를 혼란시킬 수도 있는 상징적이나 영적인 언급들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시다는 말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하면 안 되며, 영적으로 이해하여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우리를 돌보는 성령님을 통하여 임재한다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가 내 안에, 내가 그리스도 안에]라는 구절이 있는데, 만일 그리스도가 실체적으로 내 안에 거하신다면, 우리도 실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주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성경의 언어들은 모두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언어용법을 이용하시는 것입니다. 즉, 누구 안에 있다는 표현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마음의 문제입니다. 실체로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먼 길을 떠나는 친구에게, 네가 어디를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말한다면, 무슨 뜻입니까? 실제로 같이 가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그 친구를 잊지않고 마음으로 같이 하겠다는 사랑과 결의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동시에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는 모순같이 보이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 말은 내가 실체적으로는 하늘로 올라가서 더 이상 너희와 함께 있을 수 없지만, 내 마음은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순을 결과합니다.

하나님의 편재도 기계론적으로 이해하여 항상 모든 것 속에 임재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범신론이 됩니다. 하나님은 임재하고 싶은 곳에 임재하시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나시는 자유로운 분입니다.

예수님은 인성과 연합되어 영원히 인간이 되셨으며, 따라서 장소적 제한성을 받습니다. 이것은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치르신 그의 큰 희생입니다.
부활이나 승천 후에 다시 성육신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성자는 오로지 성령을 통해서만 임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칼빈이 성찬론에서 주장한 신학적 근거입니다.

삼위 하나님이 인격적으로 분명히 서로 구별되는 다른 분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분리할 수 없다는 신학적 명제가 있습니다.
세 분은 모두 동일한 본질(호모우시아)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로 다른 신성이나 유사한 신성이 아니라 완전히 동일한 신성을 나누어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동일한 신성의 공유로 인해 삼위 하나님은 서로 다른 신들로 대립하거나 독존하지 않고 공존하며 하나로 활동합니다. 페리코레시스, 엠페리코레시스, 혹은 엔알레로스라고 불리는 신학적 개념은 삼위 하나님이 얼마나 친밀하게 연합되어 있는지를 설명하는데 사용되는데, 서로의 마음을 완전히 이해하고 서로의 마음 속에 깊이 들어가 있으며 서로가 완전히 한 마음이 되어 존재하며 활동한다는 뜻입니다.

만일 이 말이 혼동을 일으켜 세 분의 구별을 무효화시키고 세 분이 동일한 인격이나 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 신학적 개념을 아예 사용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시다고 하였을 때, 그 때 예수님은 실체적으로 어디에 계셨습니까?
그는 지상에 아버지는 천상에 계셨습니다.
그러면, 무슨 뜻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은 너무 사랑하셔서 항상 서로를 돌보고 생각하고 함께 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 하나 됨의 정도는 인간들의 어떤 친밀함도 추종할 수 없는 하나 됨입니다.

저는 신학자이지만, 신학의 폐해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신학이 좋은 의도를 가지고 성경적 신앙을 보다 더 쉽고 체계적으로 이해하도록 도우려고 시작하였지만, 후에는 오히려 많은 잘못된 신학들이 일어나고 또 신학을 성경 위에 두어 신학이 그 본연의 사명과 분수를 잊어버리고 그리스도인들의 단순하고 아름다운 성경적 신앙을 혼란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안타까우며, 그런 신학은 추종하지 말아야 합니다.
출처 : 이정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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