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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스펄전은 어떻게 청중을 사로잡았는가?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3. 31. 10:37

스펄전은 어떻게 청중을 사로잡았는가? 

 


 

 보이지 않는 전쟁


오래전부터 회자되어왔던 설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어느 주일 아침 한 목사님이 열심히 설교를 하고 있었다. 잠시 후 앞자리에 앉은 청년 하나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더니 설교가 종반에 이르기까지 깊은 잠에서 전혀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참다못한 목사님은 버럭 화를 내며 청년 옆에서 열심히 설교를 듣고 있던 할머니 권사님께 말했다. “아, 권사님. 자고 있는 그 청년 좀 깨우세요.” 그러자 애꿎게 야단맞았다고 생각한 권사님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재우긴 자기가 재워 놓고 왜 날 보고 깨우라 난리여!”


서재에서 잘 준비된 설교를 가지고 강단으로 올라갔을 때 많은 설교자들이 부딪히는 실제적인 문제 중 한 가지는 청중의 주의를 설교 내내 어떻게 확보하는가다. 모든 설교자는 앞의 이야기의 설교자처럼 청중들이 자신이 정성껏 준비한 설교를 경청하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설교자의 기대와 강단 아래의 현실은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모든 청중이 설교자의 설교를 사모하며 기다리는 것도 아니며, 더러 어떤 성도는 한 주간의 직장생활로 피곤한 몸을 설교 시간에 보충하기 위해 설교가 시작되기도 전에 잠을 청하기도 한다. 따라서 청중들이 졸음에 빠질 경우 그것은 반드시 설교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앤드류 풀러(A. Fuller)가 말한 것처럼 그 시점에 따라 그것은 설교자의 잘못이 되기도 한다.


18세기 설교자였던 앤드류 풀러는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이미 졸음에 빠진 것을 보고 그들에게 이렇게 호소했다. “여러분, 여러분,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 안 됩니다. 때때로 여러분이 졸음에 빠질 때면 저는 그것이 제 잘못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설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졸고 계시니, 이것은 분명 여러분의 잘못입니다. 여러분, 깨어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에게 유익을 끼칠 기회를 제게 주십시오.” 그가 재치 있게 말했던 것처럼, 만약 설교가 시작되기 전 청중들이 졸고 있다면 그것은 회중의 잘못이지만 만약 설교 중 회중이 잠든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책임이 크다.


어떤 설교자는 본문의 분석과 그것이 담고 있는 심오한 진리를 이끌어 내는 데 탁월하지만 청중의 주의를 확보하는 이 지점에서 종종 뼈아픈 실패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러한 실패는 부분적으로 설교에 대한 우리의 불완전한 이해에서 기인하는 듯하다. 곧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해설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그것의 기본적 성격이 말함과 들음이라는 것을 간과한 까닭이다. 곧 정인교 교수가 말하듯 “입을 통해 말로 선포된 설교란 회중에게 ‘들려야 하는’ 커뮤니케이션이다.”1


설교할 때 청중의 주의를 확보하는 문제는 스펄전 당시에도 예외 없이 간과되곤 하는 주제 중 하나였다. 그러나 스펄전은 당시의 많은 설교자들과 달리 이를 설교의 임무를 온전히 수행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로 인식했다. 스펄전은 말한다. “청중의 주목은 필수적입니다. 그것을 얻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청중의 주목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말을 계속해도 아무런 유익도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스펄전에 따르면 설교자의 임무는 말씀을 강해하는 것뿐 아니라 그것의 전달까지 포함한다. 스펄전은 청중이 자신의 설교를 듣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관해 별로 개의치 않는 설교자나 혹은 천사들의 주의를 끌려는 듯 천장의 환기구를 바라보며 말하거나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책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설교자를 가리켜 “차라리 광활한 초원으로 나가 별들에게 설교하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조소했다.


물론 어떤 경우 졸음에 빠져드는 청중의 문제는 강대상보다 강대상 아래 청중 그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다. 그 청중이 설교 자체에 아예 흥미나 관심이 없거나 혹은 여러 가지 일상생활의 근심과 걱정들로 인해 설교에 쉽게 집중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중의 설교 집중의 실패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설교자에게 있다고 스펄전은 믿었다. “고기가 오지 않으면 그 책임은 고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낚시꾼에게 있습니다. 그들을 사로잡아 잠시 동안 그대로 서 있게 하고 주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듣게 해야 합니다.” 따라서 현명한 설교자는 생명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청중의 귀에 들리도록 하기 위해 부단히 경주한다. 그렇다면 설교자는 실제 설교에서 어떻게 청중의 주의를 확보할 수 있는가?

들을 가치가 있는 것을 설교하라


스펄전에 따르면 청중의 주의를 확보하기 위한 첫 번째 원칙은 설교의 전달 원리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하는 내용에 있다. 이는 청중의 주의 확보를 위해 설교의 전달 방식에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현대 설교학의 경향을 고려할 때 특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스펄전이 믿기에 회중들의 주의 확보를 위한 ‘황금 같은 원리’는 ‘언제나 들을 가치가 있는 말’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개 청중들은 그저 말뿐인 별 가치 없는 설교에는 귀를 닫지만 참으로 중요한 교훈들은 귀 기울여 듣고자 하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말한다. “무언가 청중들이 귀하게 새기고 기억할 수 있는 것을 주십시오. 그들에게 유익이 될 만한 것, 가장 좋은 곳에서 취한 가장 좋은 것을 주십시오. 하늘에서 새롭게 내리는 만나를 주십시오. 마치 빵 공장에서 일 년 내내 똑같은 형태로 빵을 잘라내듯이 그렇게 항상 똑같은 것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무언가 충격적인 것을, 밤중에 자다가도 깜짝 놀라 깨어날 그런 것을 주십시오. 50마일을 걸어서라도 와서 듣고자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을 주십시오.”

 

그러나 이러한 가치 있는 진리를 전할 때 주의할 것은 그것을 분명하게 정리된 방식으로 청중에게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록 설교의 주제와 내용이 가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산만한 방식으로 전달할 경우 그것은 청중에게 온전히 전달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펄전은 이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한다. “사람들 앞에 진리를 제시하되, 논리적이며, 질서 있는 방식으로 제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기억하기 쉽고 그래서 더 잘 받아들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스펄전은 설교의 구성과 구조에 특별한 관심과 주의를 기울였다.

 

“설교에서는 모든 것이 각기 제자리가 있습니다. 진리가 아무렇게나 마구 쏟아져 나오도록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여러분의 생각들이 마치 폭도들처럼 마구 돌진하게 하지 마십시오. 가지런히 정렬된 군대처럼 행진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하늘의 첫째가는 법칙이 바로 질서입니다. 그러니 하늘의 설교자들이 이 법칙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스펄전은 설교의 구조란 마치 잘 구성된 건축물처럼, 그 배열과 진행에 있어서 ‘사고 구조’(mental architecture)를 따라 주제들이 잘 정렬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를 위해 스펄전은 그의 설교 구조를 전통적인 대지설교의 형태로 구성했다. 스펄전의 설교는 대체로 삼대지로 이루어지지만, 필요에 따라 오대지 이상이나 혹은 이대지로 구성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 대지의 숫자와 관계없이 스펄전은 각각의 대지와 그것을 구성하는 각각의 소대지가 일관된 논리적 관계를 갖는 방식으로 구성하고자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스펄전의 설교 구조를 “체계적인 순서와 대지들로 이루어진 그 자체로서 설교의 요약”이라고 말했던 호턴 데이비즈(H. Davies)의 평가는 적절하다.2


또한 그 가치 있는 내용은 명확한 방식으로 전달되어야 한다. 어떤 설교자의 메시지와 설교 언어는 심오하며 전문적이다. 그래서 어떤 청중도 이해하지 못한다. 스펄전이 믿기에 만약 평균적인 수준의 청중이 설교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책임이다. 그런 까닭에 스펄전은 그의 학생들에게 메시지가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방식으로 전달할 것을 역설했다. 스펄전은 설교의 메시지를 철학이나 과학, 혹은 모호한 자료들로부터 끌어오던 당시의 강단의 풍조에 관해 이렇게 조소했다.

 

“추상적인 궤변과 형이상학적인 논문으로 구성된 아무런 열정이 없는 사람들을 ‘지적인 설교자’라고 부르는 것이 유행이 되어왔다. 그들은 지독하게 무감각한 회중들을 흥분시키는 설교자들에게 충격을 받는 반면 그들의 장황한 설교가 단지 소수의 청중들만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에 우쭐해서 기뻐하는 자들이다.”3

 

반면 스펄전은 효과적인 전달을 위한 모범으로 우리 주님의 방법을 제시한다. “우리 주님은 설교자들의 왕이셨으며, 그의 말씀의 내용은 위엄이 넘치고 영광스러워서 사람들이 감당키 어려웠던 것은 사실이지만 청중이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신 일은 한 번도 없습니다. 그는 마치 ‘거룩한 아기 예수’처럼 그렇게 설교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이 그러하신 것처럼 설교자는 청중에게 낯선 말과 그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표현을 피해야 한다. 스펄전은 광부와 석탄 장수들에게 전문적인 신학 용어와 상류 사회의 언어를 사용하는 설교자를 ‘바보 같은 사람’으로 여겼으며 설교자는 시장 언어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행상들이 대학의 언어를 배울 수 없기 때문이다.


스펄전의 이러한 강조는 그의 회심 사건과 부분적으로 연관 있다. 곧 회심 전에 들었던 어려운 구원 설교들이 그로 하여금, 사역 내내 가장 명료하며 이해하기 쉬운 방식으로 설교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스펄전은 이것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강조한다. “만약 그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그의 수준으로 내려가고, 그가 교육받은 사람이라면 그의 수준으로 올라가십시오.”

 

구름·번개·비로 청중을 깨우라

 

둘째, 청중의 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즉흥적인 전달 방식이 효과적이다. 스펄전에 따르면 강단에서 설교자가 피해야 할 전달 방식은 원고를 읽어 내려가는 방식이다. 물론 교회사에 이러한 방법으로도 큰 감동을 끼친 설교자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이러한 방법은 설교자와 청중과의 상호작용의 결여로 청중의 주의 확보가 용이하지 않다. 따라서 스펄전은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는 방식으로 즉흥적인 전달법을 제시한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즉흥적인 전달법이란 사전에 아무런 준비 없이 강단에 올라가 머리에 떠오르는 대로 말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펄전에 따르면 아무런 준비 없이 강단에서 떠오르는 것들은 대체로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 또한 이러한 행위는 설교자의 양심에도 위배된다. “일주일 내내 이리저리 다니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그런 다음 성령의 도우심 앞에 우리를 내어 던진다는 것은 사악하고 뻔뻔스러운 짓이요, 주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게으름과 자기 탐닉을 도우시도록 만들려는 시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설교 방식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지극히 피해야 하는 방법이다. 오히려 설교자는 오랜 시간 기도하며 철저하게 준비된 내용을 설교해야 한다. 여기에서 스펄전의 주된 강조점은 준비된 설교의 전달 방식에 있다. 곧 내용은 즉흥적으로 제시하지 않으면서 표현은 즉흥적으로 하는 것이다. 스펄전은 말한다.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여러분의 정신을 설교의 주제로 가득 채우는 것이요, 그 다음에 현장에서 가장 적절한 언어로 그것을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이것은 즉흥설교가 아닙니다. 언어는 즉흥적이지만 그 내용은 연구와 조사의 결과입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은 이것이 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가장 수고가 많이 들어가고 가장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셋째, 청중의 주목을 확보하기 위해서 목소리의 사용에도 유의해야 한다. 곧 목소리에 다양한 변화를 주어야 한다. 이것의 정당성에 관해 스펄전은 이렇게 대변한다. “인간 본성이 변화를 갈망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섭리로 은혜로 본성적으로 허락하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설교에서도 그것이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대화를 하듯 말을 하는 톤을 유지할지라도 음성이 단조로워서는 안 되며, 말의 속도나 강약, 높낮이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목소리의 변화가 청중을 속이는 인위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자연스러움과 진실함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스펄전은 강단에서 작위적인 기교를 혐오했다. “정말 진지하게 말씀드립니다만, 소위 ‘효과’라는 것은 혐오스런 것입니다. 그것은 진실되지 못하고 인위적이며 속기 쉬운 것이므로 경멸해야 할 것입니다. 절대로 효과를 바라고 무슨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 동부의 농부들에게 메뚜기 떼들이 역겨운 존재인 것처럼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참된 사역자들에게 역겨운 존재들입니다.”


스펄전은 그의 설교에서 설교의 분위기에 따라 목소리를 다양하게 구사했는데, 조셉 파커(J. Parker)는 스펄전의 목소리를 자신이 들었던 가장 강력한 목소리로 묘사하며 그것은 폭풍에게 명령하며, 급류를 가로질러 고요한 길에 이르는 목소리라고 증언한다.4 댈리모어(A. Dallimore)는 보다 구체적으로 “스펄전은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완벽하게 구사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어떤 때는 놀라운 힘을 가진 거대한 소리가 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가장 감동적이고 부드러운 어조로 변하기도 했다”고 말한다. 반면 윌리암 윌킨슨(W. Wilkinson)은 스펄전의 목소리를 음악적 요소로 이렇게 잘 비유했다. “스펄전의 목소리! 그것은 플루트 같으며, 은종 같으며, 트럼펫 같으며, 오르간 같다. 아, 이 얼마나 위대한 입술의 악기인가”.5


넷째, 청중의 주목을 위해서는 서론을 너무 길게 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한다. 스펄전은 이를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조그만 집을 지으면서 현관을 크게 만드는 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스펄전에 따르면 서론은 사람들로 하여금 설교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유발하는 것을 우선적인 목표로 해야 한다. 따라서 가급적 ‘공격 개시를 알리는 신호탄처럼 깜짝 놀랄만한 한 방’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처음부터 지나치게 화려하게 장식함으로 본론에서 나오는 내용을 무색하게 만들지 말고 본론으로 나아가기 위한 한 걸음정도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섯째, 회중의 주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내용을 반복해서는 안 된다. 반복은 이따금씩 하면 좋은 학습의 방편이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청중의 주의를 잃게 만든다. 왜냐하면 그것이 잠시 후에 다시 반복될 것을 아는 청중은 처음 말할 때에 귀담아 듣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한 걸음 나아가, 문장이나 내용의 반복을 지양하고 문장마다 신선한 것이 있게 하는 것이 유용하다.
여섯째, 설교를 지나치게 길게 해서도 안 된다. 스펄전은 설교의 길이는 가급적 45분을 넘지 않을 것을 강조한다. “그 시간 안에 말할 것을 다 말하지 못한다면 대체 얼마동안 말을 해야 할 말을 다하겠습니까?” 이는 무엇보다도 청중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된다. 이를 위해 청중의 편에서 스펄전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현대 설교자가 귀 기울일 가치가 있다. 곧 시골에서 정한 시간에 소의 젖을 짜야 하는 한 농부는 설교를 원래보다 훨씬 길게 하곤 하는 한 젊은 목사에 관해 이렇게 불평했다. “목사님, 네 시가 되면 끝마쳐야 되는데, 아니 네 시 반이 되어도 우리를 놓아줄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습니까? 내 소들이 모두 젖을 짜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말입니다. 만일 자기가 소라면 그런 것을 좋아했겠습니까?”


스펄전은 설교에서의 시간의 준수를 설교자와 회중 간의 일종의 ‘도덕적인 계약’으로 규정한다. 스펄전은 말한다. “만일 여러분이 45분 이상 붙잡아 둔다면 그것은 계약을 위반하는 것이요, 여러분이 책임을 져야 할 하나의 실제적인 부정직한 행위가 됩니다.” 그렇다면 설교를 줄일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스펄전은 이를 위해 설교 내용을 더 잘 연구하라고 조언한다. “서재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십시오. 그러면 강단에서 시간이 덜 필요하게 될 것입니다.”


일곱째, 설교자 스스로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청중은 중요한 내용을 설교하고 있다고 느껴지지 않는 설교자의 설교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따라서 설교자가 전하는 메지시가 갖는 중요성은 설교자의 모습 속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청중의 주목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 스펄전은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이 다루는 내용이 여러분 자신에게 너무나도 중요한 것으로 와 닿은 나머지 여러분의 모든 것을 쏟아서 그것을 전달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주제가 여러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것을 청중이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그들도 거기에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


여덟 번째, 풍부한 예화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이러한 모범적인 예는 우리 주님의 설교에서 발견할 수 있다. 스펄전은 말한다.

“예수님은 그의 설교들에 ‘많은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다. 그는 반복해서 ‘천국은 이와 같다, 천국은 이와 같다’(The Kingdom of Heaven is LIKE)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비유가 아니면 그 분은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으셨다.’ 평범한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기꺼이 즐겨 들었는데, 그것은 그 분의 설교가 상징과 비유(emblem and simile)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6


따라서 청중의 주의를 확보하기 위해 과거의 위대한 설교자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직유·은유·일화 등 다양한 종류의 예화를 사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예화 사용에 있어서 주의할 점은 그것이 아무런 교훈이나 의미가 없는 ‘사소한 이야기들’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특히 그것이 케케묵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라면 더욱 피해야 한다. 스펄전은 말한다. “일화를 이야기 하려면 어느 정도 신선함과 독창성이 있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언젠가 빌 하이벨스 목사가 자신의 소원 중 한 가지는 스펄전이 사용했던 예화를 자신의 설교에서 사용하지 않고도 설교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혹자는 스펄전의 설교에 지나치게 예화가 많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본문 해설을 주로 관심하는 소위 정통적인 강해설교를 지향하는 분들에게는 더욱 그러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스펄전의 회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존 스토트가 런던의 중심가, 리젠트 스트리트(Regent Street)에 자리한 올 소울즈교회(All Souls Church)에서 주로 영국의 지성인들을 상대로 설교했다면, 크루파가 말한 것처럼 스펄전은 ‘런던에서 가장 가난한 노동자 계층 지역 중 한 곳’7인 뉴잉턴 버츠(Newington Butts)의 엘리펀트 앤 캐슬(Elephant and Castle)에서 주로 교육받지 못한 이들을 위해 설교했다. 따라서 그의 회중적 고려와 함께 쉬운 이해, 그리고 주의 확보를 위해서 나름대로 적절한 방식을 선택했다 할 수 있다.


아홉 번째, 청중의 주의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설교에 ‘의외성’이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청중의 주의를 얻기 위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설교하는 것과 틀에 박힌 진부한 문장을 사용하는 것을 지양해야 한다. 동일한 문장, 동일한 의미라 할지라도 청중이 전혀 예측하지 못한 신선한 방식으로 청중들의 주의를 환기시켜야 한다. 스펄전은 말한다. “맑은 대낮에 천둥 번개가 내리치게 하십시오. 모든 것이 고요하고 환할 때에 갑자기 광풍이 몰아치게 해서 큰 놀라움을 일으키십시오.”

 

한 예로 스펄전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의 관계를 독특하게도 “태양과 유성”에 비유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태양이신 그리스도를 모시고 계신다면 여러분이 받은 그 빛을 반사하십시오. 그는 태양이시고 여러분은 유성입니다. 모든 유성은 빛을 발하는데 그 빛은 태양에서 온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빛을 사람에게 비추십시오.” 그리고 또 다른 설교에서 성경의 역할을 설명하여 청중이 예상치 못한 비유로 그들의 관심을 획득한다. 스펄전은 말한다. “성경은 밤에 집을 지키는 개와 같습니다. 개는 강도가 침입해서 여러분의 재산을 훔쳐가지 못하도록 막아줍니다. 또한 성경은 갑판에서 사방을 살피는 배의 망대지기와 같습니다. 망대지기는 배가 충돌하려 할 때에 미리 큰소리로 경고해 줍니다. 성경은 미국에 대홍수가 일어났을 때 백마를 타고 이곳저곳에 다니면서 ‘언덕으로 가라, 언덕으로 가라’라고 외치는 사람의 역할과 같습니다.” 이와 같이 스펄전은 청중의 주목을 위해 고루한 표현들을 피하고 의외적이며 신선한 방식으로 전달하고자 했다.


열 번째, 스펄전이 제시하는 청중의 주목을 획득하는 손쉬운 방법 중 하나는 설교 중간에 잠시 말을 멈추는 것이다. 스펄전은 이것이 가지는 효과를 인간의 심리와 연결하여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물방아가 계속 돌아가는 동안 주인은 졸음에 빠집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서 물방아가 돌지 않으면 금방 깨어나서 ‘이게 어찌 된 거야?’라고 소리칩니다.” 따라서 약간의 휴지(pause)는 청중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데 유용한 방법 중 하나이다. 스펄전은 말한다. “말하는 것은 은과도 같습니다. 그러나 청중이 무관심할 때는 침묵이 금입니다.”

 

성령의 옷을 입으라


앞에서 제시된 다양한 방법들 중 스펄전은 특히 언제나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청중의 주의를 획득하는 ‘황금과도 같은 법칙’으로 역설한다. 반면 그가 제시하는 그것보다 중요한 ‘다아이몬드 같은 법칙’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옷 입는 것’이다. 설교에서 이것이 갖는 의미를 스펄전은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지 못하면 좋은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는 연주자나 깨끗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성악가처럼 귀는 즐겁게 하되 마음 깊은 곳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귀도 곧바로 지치고 맙니다.’ 스펄전의 성령에 대한 이러한 통찰은 청중의 귀를 사로잡기 위하여 효과적인 설교 전달을 강조하는 현대 설교학에서 종종 간과되는 부분이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가치가 있다.


그렇다면 성령은 이를 위해 어떻게 설교 가운데서 역사하시는가? 성령은 강단과 회중석 쌍방향에서 일하신다. 먼저 회중석과 관련하여 성령께서는 청중의 마음을 경건하고 진지한 상태에 이르도록 도우신다. 성령께서 회중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다면 회중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나아올 때, 설교자의 말씀을 사모할 것이며 한 말씀 한 말씀 주의 깊게 들을 것이다. 반면 강단과 관련하여 성령께서는 거룩한 영으로 충만한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의 주의를 환기시키신다. 스펄전은 말한다.

 

“여러분이 성령으로 옷 입으면 청중들의 주의를 끄는 일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골방에서 하나님과 교통 가운데 있는 상태 그대로 신선하게 나아와 하나님을 위하여 여러분의 마음과 힘을 다하여 말씀을 전하십시오. 그러면 청중을 압도할 능력이 여러분에게 임할 것입니다. 황금 사슬이 여러분의 입 속에 있어서 그들을 완전히 묶어 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사람들은 반드시 듣게 되어 있습니다. 그저 비천하고 연약한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해도 진리의 위엄이 그들을 사로잡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깨닫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능력이야말로 여러분이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청중을 사로잡아라


이와 같이 위에서 본 것처럼 청중의 귀를 사로잡기 위해 스펄전이 의존했던 참된 능력은 무엇보다도 살았고 운동력이 있는 진리의 말씀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성령의 능력에 있다. 그리고 어찌하든지 청중들로 주의 말씀을 듣게 하기 위하여 몸부림치는 설교자의 노력에도 기인한다. 그래함 존스톤(G. Johnston)은 이것이 가지는 상호적 관계에 관하여 이렇게 잘 서술한다.

“하나님의 능력주심과 훌륭한 의사소통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다. 의사소통 기술과 성령의 능력주시는 역사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에 관한 해결책은 좀 더 나은 의사소통 기술에 관한 과도한 의존에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공허감으로 되돌려 보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지나친 의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의 가장 좋은 해결책은 이 두 가지를 분별력을 가지고 조화롭고 균형 있게 발전시키는 데에 있다.”8

 

얼마 전 소천하신 장두만 교수께서는 약 150년 전 스펄전이 그토록 강조했던 이러한 원리의 중요성을 오늘 현대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다시 잘 역설했다.

 

“청중이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설교를 하라’는 말은 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해서 또는 청중의 기호에 영합하거나 청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서 진리의 말씀을 함부로 왜곡하는 삯꾼 목자가 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 복음은 마땅히 복음되게 해야 한다. … 어떤 경우에도 진리의 말씀이 코미디나 심리학, 상담학, 성공철학, 마케팅 같은 것으로 대체되어서는 안 된다. 진리는 항상 진리로 남아 있어야 하고 반드시 가감 없는 진리 그대로 순수하게 전해져야 한다. 그러나 아무리 진리를 바로 전하는 참 목자라 할지라도 청중이 알아듣지 못하는 설교만 계속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변화될 수 있겠는가? 언제든지 진리의 내용에는 변함이 없어야 하지만 진리를 전하는 방법은 청중의 특성과 그 시대의 특성을 잘 감안해야 효과적일 것이다.”9

 

동일한 맥락에서 설교의 왕자라고 칭함 받았던 이 설교자의 이 모든 것들의 행함이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그리스도의 강권적인 사랑에 근거한 영혼에 대한 깊은 사랑에서 기인한 것임을 잊지 않아야 한다. 스펄전은 말한다. “만약 죄인들이 저주를 받아야 한다면 최소한 그들로 하여금 우리의 몸을 밟고 지옥에 가게 하자. 만약 그들이 멸망해야 한다면 그들의 무릎을 잡고 그들이 지옥에 가는 것에 애통해하는 우리의 기도를 지나 그렇게 하도록 하자. 만약 지옥이 가득차야 한다면 우리의 말의 수고도 함께 차도록 하자. 어느 누구도 어떤 경고나 기도 없이 그곳에 가지 않도록 하자.”

 

1. 정인교, 「청중의 눈과 귀를 열어주는 특수설교」(서울: 두란노아카데미, 2007), 17.
2. Horton Davies, Worship and Theology in England: Book 2 (Cambridge: Eerdmans, 1996), 338.
3. C. H. Spurgeon, Saint and His Saviour (New York: Sheldon, Blakemna & Co, 1858), 310.
4. J. C. Carlile, C. H. Spurgeon: An Interpretative Biography (London: Religious Tract Society, 1933), 209.
5. W. C. Wilkinson, Modern Masters of Pulpit Discourse (NewYork and London: Funk&Wagnalls, 1905), 195.
6. Spurgeon, C H Spurgeon Autobiography 2: The Full Harvest 1860-1892, eds. Susannah Spurgeon and Joseph Harrald (Edinburgh: Banner of Truth, 1973), 138.
7. P. S. Kruppa, Charles Haddon Spurgeon: A Preachers Progress (New York: Garland, 1982). 134.
8. G. Johnston, Preaching to a Postmodern World: A Guide to Reaching Twenty-first Century Listeners (Leicester: IVP, 2001), 12.
9. 장두만, 「청중이 귀를 기울이는 설교」(서울: 요단출판사, 2009), 10~11.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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