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후 주님의 입에 주목하라.
요 20;19-23
위대한 사람이 죽으면서 마지막 한 말은 인류 역사에 영워히 남게 됩니다.
큰 일을 하고 난 후 몰려 드는 신문 기자들 앞에서 첫 마디도 영원히 역사에 남아서 살아서 움직이게 됩니다.
우리나라 축구를 세계 4강에 올려 놓았던 히딩크는 몰려드는 기자들앞에서 말했습니다.
“아직도 배고프다.”
그러나 죽었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서 어떤 말을 했다면 그 말이 무슨 말인지 궁금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우리에게 네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예수님은 무서워서 숨어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제일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
제자들은 두려워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잡아 십자가에서 잔인하게 죽인 무리들이 자기들도 잡아 죽일 것을 두려워 하여 숨어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이 문이 잠겼는 데도 불구하고 들어오셨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육체를 초월한 영이었습니다. 두려워 하는 제자들에게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은 이것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아무리 폭풍이 불어도 굴속에 있는 개미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밖에 나와 있는 개미는 두렵습니다. 잘못하면 날라가 버리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믿으며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전쟁에 시달린 이들에게 물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한결같이 대답하였습니다.
“평화”
오늘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에게 평강이 있을 지어다.”
부활의 주님과 더불어 평강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어느 젊은이가 수도사가 되려고 수도원으로 올라갔습니다.
수도원 원장님과 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원장은 젊은이에게 뜻밖의 질문을 했습니다.
“자네는 수도원으로 올라오면서 무얼 보고 느꼈는가?”
젊은이가 말했습니다.
“원장님! 저는 수도사가 되려는 일념으로 바쁘게 뛰어오다 보니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수도원 원장은 젊은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렇게 쫓기는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은 수도사가 될 수 없네. 다시 내려가서 수도원으로 올라오는 길옆에 피어있는 꽃들을 보며, 흐르는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숲속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올라오게. 마음이 평화로운 사람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네.”
프랑스의 철학교수이자 수필가인 피에로 쌍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라는 책을 썼습니다. 현대인들은 할 일이 너무 많고 바빠서 꿈꿀 시간이 없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무엇엔가 쫓기는 생활을 하기에 마음에 평화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평화가 없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여유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평화가 마음에 강물처럼 넘치기를 바랍니다.
2. 성령을 받으라.
부활의 예수님께서 두 번째 하신 말씀은 성령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22)
예수를 믿고 따라 다닌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부활 후 첫 번 만난 제자들에게 성령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땅에 40일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하신 말씀도 성령받으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4-8)
예수를 믿는다는 것과 성령받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예수믿은 후 어느 날 성령 체험을 하여야 합니다. 사마리아 교인들은 다 예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령받은 이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이 가서 안수기도를 하였습니다. 사마리아 교인들은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행전이 이를 잘 증거하여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행 8;13-17)
지금까지는 나를 믿었지만 이제는 성령을 받고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평강한 마음에는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의 부탁이었습니다. 성령을 받은 이만이 하나님의 일을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환영하고 모시고 사는 사람들 영속에는 성령이 임재하여 있습니다. 개가 사는 집이 개집이고 돼지가 사는 집이 돼지우리입니다. 대통령이 사는 집이 청와대입니다. 성령이 사시는 집이 성전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모시고 살면 우리 마음은 성전이 되어 늘 성령께서 거하고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에게 때로는 영감을 주고 때로는 소원을 줍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받고 성령과 함께 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860년 대에 미국은 남북 전쟁이 치열하였습니다. 민족 상쟁의 625 전쟁같은 전쟁이었습니다. 북군 총사령관이 링컨이었습니다. 위기였습니다. 혼돈이었습니다. 이 때 링컨은 마차를 타고 볼코오린 동네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헨리 피셔 목사님 댁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전쟁에 성경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30분을 기도하고 돌아가곤 하였습니다. 전쟁을 성령께 맡기고 진행시킨 링컨 북군이 승리하였습니다.
성령을 모시고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이에게 승리가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3. 가라.
부활의 주님께서 세 번째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우리를 보낸다고 하셨습니다. 가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가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항상 연관성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면서 첫 번 하신 말씀도 전도하러 가라고 하시는 말씀이었습니다.
“또 산에 오르사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 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게 하며 귀신을 내어 쫓는 권세도 있게 하려 함이러라”(막 3;13-15)
마태가 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이러합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8-20)
마가가 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또 가라사대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定罪)를 받으리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 16;15-18)
누가가 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이러하였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예수님의 부활후 마지막 말씀은 선교 명령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마지막 명령은 우리의 최초의 관심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혼구원 때문에 이 땅에 오셨고 영혼구원 때문에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가서 전도하며 영혼을 구원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켜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16)
정말 양같은 제자들은 이리 떼속에서 모두 순교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순교의 피가 오늘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알고 믿고 구원받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리 가운데로>
이 말씀은 지역을 잘 알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여야 하는 지역은 이리의 지역입니다. 전도가 쉽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기에 성령받고 전도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후에 하신 말씀 <가라>하시는 말씀을 절대 명령으로 받고 일하는 교회로 만들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라는 곳은 없어도 갈 곳은 많아야 합니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불란서의 노(老) 시인이 아내도 세상을 떠나고 아들도 없고 오직 딸 하나를 데리고 사랑을 훔뻑 주며 여생을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 딸은 생명보다 귀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자기 생명보다 더 사랑하였습니다. 그 딸은 너무 너무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주님의 사랑의 감격하여 주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는 못 뱃길 정도로 불이 가슴에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버지에게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나겠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는 기절할 뻔하였습니다. 어떤 말로도 설득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어떤 말로도 딸의 의지를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그 시인은 곰곰히 생각하였습니다.
“무엇이 저렇게,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딸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가? 무엇이 내 사랑보다 강렬하게 저 가슴을 타오르게 하는 것일가?”
이런 생각에 잠겨 글을 썼습니다.
“로마 사형수 예수여! 그대는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죽은 사람인가? 산 사람인가? 내 심장보다 귀중한 것을, 내 생명보다 소중한 것을, 내 딸을 내 품에서 빼앗아 가는 그대는 죽은 사람인가? 산 사람인가? 하나님인가? 사람인가? 사랑의 약탈자여! 생명의 약탈자여!”
예수님의 명령은 아버지 사랑보다 강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아버지의 설득보다 강하였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에게 이리가 있는 곳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워도 가야 합니다.
지금 내 옆에 내가 복음을 전하여야 할 아내가 있습니다. 남편이 있습니다.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습니다. 친구가 있습니다. 이웃이 있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16:26)
부활의 주님은 영혼을 구원하러 가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라고 하셨으니 가야 합니다.
4. 사하면 사하여 질 것이요.
예수님이 네 번째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23)
이스라엘 유대인들의 교리문답이 있습니다.
<장소중에 가장 중요한 장소는 지성소입니다.
사람중에 가장 중요한 사람은 대제사장입니다.
날중에 가장 중요한 날은 대속죄일입니다.
일중에 가장 중요한 일은 죄사함받는 일입니다.>
이유가 분명합니다. 죄사함받지 못 하면 하나님 나라에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얼마 전에 대구 순복음 교회 집회를 인도하였습니다. 교도소 선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대구 교도소에 사형수와 장기수만 20명을 영적으로 잘 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사형수 한 명이 전도를 받았습니다. 언제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 몰라 안절부절하는 삶이 이어졌습니다.
<죄수 XXXX 번!>
이라고 부르는 날이면 마지막 날입니다. 그런 중에 주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죄를 사하여 준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깨달은 날부터 그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전도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죄수들은 목사라고 부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형무소 생활이 그렇게 달라질 수 없었습니다. 몸은 죽어도 영혼이 살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기뻤습니다. 그래서 오늘 당장 죽어도 하나님품에 갈 수 있다는 기쁨이 넘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항상 떠나지 않았습니다. 고 건일 목사님을 모셔다 부흥회도 하였습니다. 그에게 기적이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적이었습니다. 대통령 특사때 그는 무기로 감형되었습니다.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는 지금도 죄사함의 확신속에서 기쁨의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가 죄만 버리고 다시 부활하신 몸입니다. 그래서 죄사함을 외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중학교 다닐 때 등록금을 몇 기분이나 밀려서 담임 선생님 앞에 선 적이 있었습니다.이제 그만 집으로 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무실 칠판에는 각 반 별로 등록금 못 낸 아이들 수와 명단이 적혀 있었습니다. 일종의 등록금 통계표였습니다. 우리 반에는 나 하나였습니다.
학교에 가는 것이 지옥에 가는 것같았습니다. 그렇다고 결석할 용기는 갖지 못 하였습니다. 나는 장남입니다. 밑에 동생들이 4명이 있습니다. 그들도 이런 실정이었습니다. 그래서 등록금 재촉을 부모님에게 하지 못 하였습니다. 어떻게 할 수 없을 때였습니다. 어느 날 아침 조회시간에 선생님이 나에게 내미는 것이 있었습니다. 받고 보니 등록금 영수증이었습니다.
“이화여고 서 명학 교장선생님이 네 등록금을 대신 내 주었다.”
나는 그 분을 찾아가서 고마움을 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미국에 이민 가서 사시는 동안에도 한번 찾아가서 고마움의 인사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 분이 대신 내 주었기에 나는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이 다음에 심판대에서 하나님은 죄를 따지실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하여 준 사실을 하나님께 아뢸 것입니다. 죄사함의 영수증이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은 영수증을 지니고 다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주님은 죄사함의 역사를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1세기의 성자 제롬이 베들레헴에서 성경을 번역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기도하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제롬은 기뻐서 예수님께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 제가 주님께 무슨 선물을 드릴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이 다 내 것인데 네가 무슨 선물을 내게 주겠느냐?"
제롬이 말했습니다.
"이 성경을 다 번역해서 그것을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정말 나에게 선물을 주겠느냐? 그러면 한 가지만 다오."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죄와 고통을 다 내게 다오. 그것이 나에게 최고의 선물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하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죄사함받았고 서로 서로 용소하며 죄사함을 주어야 합니다. 사실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죄사함받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주님은 오늘 본문에서 네 말씀을 주셨습니다.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2. 성령을 받으라.
3.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4. 죄사함을 받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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