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사람속에 있는 부활
롬 7;17-8;2.
오늘 예수님이 무덤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가셔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하신 것처럼 주님의 평강이 강물처럼 흐르는 부활절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 아들과 아버지가 골동품 가게에 들렀습니다. 아버지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성화가 걸려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끔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처음 보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에게 이 그림은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아들이 주인 말을 가로채면서 아버지에게 설명을 하였습니다.
“아버지! 저 분이 내가 믿는 예수님이예요.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짊어 지고 죽으시는 장면이예요. 그 옆에 칼과 창을 든 사람들은 로마 병정이구요, 십자가 밑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막달라 마리아예요. 그리고 저 군중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던 이들이예요.”
열심히 설명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간단히 대답하였습니다.
“알았다.”
그리고 둘이는 손을 잡고 골통품 가게 밖으로 나왔습니다. 한참을 걸어 갔습니다. 그 때 아들이 갑자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다시 갈 데가 있어요.”
그리고 아버지 손목을 잡고 다시 골통품 가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요. 아버지! 아까 중요한 한 마디 설명을 빠뜨렸어요. 저 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3일만에 부활하셨어요.”
한국의 지성이라고 말하는 이 어령 박사님이 쓴 책이 있습니다.
“지성에서 영성으로” 이란 책입니다. 딸이 얼마 전에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암으로 사경을 헤메던 딸이 의학적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데 하나님께서 고쳐 주시는 체험을 하였습니다. 딸은 지성으로 꽉 차 있는 아버지 머리에 신앙이 들어 가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가 죽어가는 딸이 살아나는 것을 보고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높은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꿈을 꾸면서 키가 컸듯이 영성의 키는 죽음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악몽을 통해서 성장해가는가 봅니다.”
“죽음이 내 곁에 있다는 것을 눈치챈 그 때부터 나의 곁에는 늘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런 고백도 하였습니다.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의 기저귀를 차고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부드러운 요로 감싸도 수의의 까칠한 촉감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는 결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그는 이제 지성을 넘어 영성으로 들어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이성적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던 성경의 진리가 믿어진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에 인간에게는 소망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육에 육성이고 있고, 혼에 지성이 있고, 영에 영성이 있는 데 영성을 보지 못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공산주의를 창설한 니콜라이 레닌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걸어다니는 빵이다.”
미국 고레스 박사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물주머니다. 몸에 90% 물이다.”
몸에서 물만 보았지, 지성과 영성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플라톤은 말했습니다.
“짐승중에 털없는 짐승이 인간이다.”
파스칼은 말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아리스토 텔레스는 말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이런 분들은 모두 사람속에 들어 있는 영성을 보지 못 한 말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인간의 최대 발견은 자기 발견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안에 거하는 것을 알지 못 하느뇨?”(고전 3;16)
바울은 가브리엘 문하에 공부한 최고 석학이었지만 지성만 보지 않고 영성의 세계를 보았습니다. 성령의 세계를 알았습니다. 어느 날 공자 제자가 공자를 찾아가서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떤 사람이 이사가면서 막대기까지 모두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아내를 잃어버리고 갔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나요?”
이 말을 듣고 공자가 말했습니다.
“그보다 더 한 사람이 많으니라. 자기를 잃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그런 사람이다.”
맹자도 탄식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고는 혈안이 되어 찾으려고 한다. 그러나 자기를 잃어 버리고는 찾지 않고 가만히 있다.”
희랍 아테네시에 소크라테스가 살고 있었습니다. 소위 소피스트들이 비단옷을 입고 활보하며 다녔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으시댔습니다.
“감히 누가 철학적으로 우리를 따라 올 것인가? 우리 지혜를 누가 능가할 것인가?”
이 때 소크라테스는 델포이 맞은 편 높은 벽에 <네 자신을 알라>라고 크게 써놓고 이들을 비웃었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알았습니다.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속사람의 정체를 알았습니다. 바울은 자기 속사람이 어떤 사람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일가요?
1. 속사람은 알고보니 죄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사람들은 속사람이 있고 겉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속사람이 참 사람입니다. 겉사람은 참 사람이 아닙니다. 속사람으로 겉사람을 보니 자기는 죄인이었습니다. 바울은 알고보니 자기 속에는 죄가 들어 있었습니다.
내가 행하려는 바 선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치 않는 바 악을 행하고 있는 자기 모순의 사람을 발견하고 곤고해 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속사람은 선을 행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부패한 악이 악을 행하게 만듭니다. 이를 <육신이 연약함> 또는 <육신의 한계>라고 말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원죄가 흐르고 있기에 항상 우리 마음은 선악의 영적 전쟁터입니다. 선과 악사이를 왕래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떤이는 그네뛰기 같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시소게임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이는 시계추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영을 몰랐습니다. 그들은 혼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페르시아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좋은 혼이 나를 지배하면 나는 선해지고 안 좋은 혼이 나를 지배하면 나는 악이 된다.”
바울은 사람이란 모두 <원함>과 <행함>이 다를 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했습니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마 26;41)
그래서 나타나는 결과는 <곤고>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사람들은 곤고합니다. 곤고하다는 말의 원어는 <비참하다> <불쌍하다>는 의미입니다. 선악이 동시에 지배하는 사람은 비참합니다. 불쌍합니다.
어느 심리학 교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가 목사입니다. 어릴 때 아버지를 본받아 목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가 목회하는 것을 보니 목회가 곤고하였습니다. 그래서 교수가 되기로 작정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습니다.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심리학 상담 교수가 되었습니다. 상담을 하러 오는 사람들마다 귀신이 밤에 출몰하여 곤고한 이야기만 들었습니다.
밤새 귀신에게 쫓겨다니면서 피흘리는 이야기, 매일 죽은 남편이 칼을 입에 물고 나타나서 괴롭히는 이야기,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총을 들고 나타나서 죽이려고 하는 이야기등 곤고한 상담만 하였습니다. 그 교수 역시 악몽에 시달리다가 다른 상담한 교수를 찾아가서 상담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울같이 영적으로 뛰어난 사람도 곤고하다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이런 상황에서 누가 건져 내주겠느냐고 몸부림쳤습니다.
네빈.C 하너가 <청년과 신앙>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무엇이냐? 죄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다.”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먹고 사는 어부였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헐몬산 눈이 녹아 사막을 통과한 물이기에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반드시 낮에 잡아야 합니다. 반드시 얕은 곳에서 잡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그 날도 밤에 고기잡이를 나갔습니다.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습니다.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그 날따라 단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새벽이 되었습니다. 한 마리도 잡히지 않는 밤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었습니다. 베드로의 끈기가 돋보이는 밤이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수 없는 아침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할 수 없이 그물을 씻으며 고기 잡이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한 밤이다. 오늘은 공친 날이다. 돌아가서 푹 자고 저녁에 다시 나오리라.” 그 때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처음 본 베드로에게 배를 빌려 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에게 배를 빌려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배에 올라 서서 사람들에게 말씀 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귀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피곤한 몸으로 그물을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말씀을 마치신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선생이여. 우리들이 밤이 맞도록 수고를 하였으되 얻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그리고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렸습니다. 얼마나 고기가 많이 잡혔는 지 그물이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두 배에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습니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나를 따르라.”
베드로는 자기가 죄인임을 보았습니다. 속사람을 보았습니다. 속사람은 알고 보니 죄인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렇게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한 적이 없었습니다.
속사람을 알고 보면 죄인입니다. 바울은 이런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2. 속사람은 알고보니 죽을 몸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 7;24)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내린 최초의 형벌은 죽음이었습니다.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나님의 선고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지구상에 안 죽을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킬케콜 실존주의 철학자가 말했습니다.
“세상은 창살없는 사형수 감옥이고, 온 세상 사람들은 창살없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형수들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명 한 명 끌려 나가서 사형을 당하고 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1963년 6월 5일 사상 최대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일본 오호쿠라 헤이안 소에서 있었습니다. 결혼식 비용이 1억엔 1000억원이었습니다. 2000명 손님들에게 기념품으로 600만원짜리 보석상자를 하나씩 주었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도미를 비행기로 실어 날랐습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역도산이었습니다. 결혼하고 1년 후 39세에 일본 청년이 찌르는 단도로 죽었습니다.
우리는 내일 죽을 것처럼 경건하고 100년 살 것처럼 꿈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속사람을 발견하고 보니 죄로 말미암아 죄의 값은 사망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3. 속사람은 알고 보니 부활이었습니다.
바울은 속사람을 발견하고 나서 부활을 찾았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부활임을 알고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감사하리로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나라에서 옛날에 시신을 메고 갈 때 부르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이제 가면 언제 오나. 죽은 나무 꽃이 필 때 서쪽에서 해가 뜰 때 어허야.”
영영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멕시코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별나라로 간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오스트렐리아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섬으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통하여 죽으면 어디로 가는 지 확실히 압니다. 죽으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집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음을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사선에서>(In the line of Fine)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습니다. 케네디를 비롯한 대통령 비밀 경호원 호리건(Frank Horrigan) 이야기입니다. 그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할 때 옆에 있었던 경호원이었습니다. 그는 그 영화에서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대통령 경호원이다. 총알이 날라 올 때 정말 내가 대통령대신에 맞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대신 죽을 수는 없다.”
그는 솔직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우리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우리 대신 죽으셨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죽기 직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어느 날 신문에 무디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이 신문 기사를 믿지 마십시오. 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지금보다 더 좋은 곳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바울은 속사람을 발견한 후 죄와 죽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발견하고 소망을 가졌습니다.
파스칼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짓말로 예수님이 부활하였다고 전했다면 어떤 일이 생겼을 가요? 시간이 흐르면서 11명 제자중에 한 명이라고 사실이 아니라고 양심선언을 하는 사건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벌써 붕괴되어 버렸고 이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11명 제자들이 모두 주님의 부활을 전하다가 순교하였습니다. 거짓을 위하여 순교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들은 자랑스럽게 단두대 앞에서 부활을 전하다가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죽으셨고,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히틀러 학정 밑에서 순교당한 본 회퍼 목사님 이야기를 드리고 마치려고 합니다.
독재자 히틀러에게 항거하다가 본 회퍼 목사님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서 그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이제 나의 신앙에 관하여 완전히 확신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신앙은 무거운 짐 아래서도 깨어지지 않고 항거한다. 주저하거나 절망하는 일은 없게 되었다. 좀 이상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감옥 안에서 기뻐하는 것을 배웠다."
처형당하는 날 간수가 그를 불러 냈습니다. 그 때 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이제 끝이다. 그리고 생명의 시작이다."
그렇습니다. 죽음은 부활의 시작입니다. 부활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승리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음을 믿기만 하면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됩니다.
죄와 죽음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대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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