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칼럼; 설교원고모음

[스크랩] 십리까지라도 동행할 사람이 있나요?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3. 25. 07:34

십리까지라도 동행할 사람이 있나요?

        

      마태복음 5장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다. 언뜻 보면 어느 누가 오리를 동행해 달라고 하면 십리까지 동행해주라는 말씀으로 들려온다. 요즘 바쁜 시대에 어느 누가 그렇게까지 배려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 수 있을까?

 

    만약에 그런 식의 내용이라고 한다면 과연 기독교인 중에 얼마나 이 말씀에 따라 준행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의문 속에 말씀을 접해보기로 하자. 단순히 길을 동행하는 차원에서 하는 말이라면 어느 고행도 아닐 것이며 원칙이 아닌 줄로 안다. 지켜도 되는 말씀이지만 그런 상황이 아닐 때는 안 지켜도 되는 말씀으로 구분 짓게 된다.

 

    그러나 한글의 문자적인 의미에서 본다면 원어의 상태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달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 누구든지 너에게 스스로(자원해서) 길 하나를 달라고 하면 그 사람에게 길 두 개를 주게 하라”는 말씀인데 이것을 영어성경에서는 one mail, two mail로 중국 성경은 한 척, 두 척으로 해석하여 한글 성경도 이에 따라 오리, 십리로 번역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원래적인 의미를 상실해 버리고 문자적인 개념에서만 성경을 번역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하나, 둘이란 단어를 그냥 단순히 숫자적인 개념에서만 인식하여 번역했기 때문에 전 세계 성경이 이런 식의 번역으로 퍼져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유의 성경 번역이 성경 안에 무수히 분포되어 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을 달라고 하면 주라는 식인데 예수 그리스도는 엄연히 한 분이시다. 그런데 둘이란 단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 길이신 예수를 인식하지 않고 단순히 길이란 단어에서 머물러 버린 것이다. 둘이란 단어에 히브리적인 개념은 반복하다. 연합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이신 한 분을 달라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 둘을 주라는 의미가 아니라 “자신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독생자로서 하나님의 아들, 한 분이심을 깨닫기를 원하는 그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어 연합하는 단계에 이르도록 동행해 주라”는 귀중한 말씀이다. 

 

    좀 더 풀이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기를 원하는 사모하는 영혼들에게 엉뚱한 말씀을 전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과 연합되어 한 몸이 된 것을(요한복음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깨닫기를 원하는 갈급한 사람에게 네 자신이 기뻐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에게 예수와 한 몸이 될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줄 뿐만 아니라 주님과 한 몸이 될 때까지 동행해 주라는 엄청난 내용의 말씀이다.

 

   이 말씀의 비밀이 이렇게 내포되어 있다면 그 앞서 나오는 말씀 중에 “누구든지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하는 말씀의 의미가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지 자문해 보라. 예수님께서 단순히 기독교 윤리적인 말씀을 하려고 기록된 책이 아닐 것이다.

 

    여기에 동감한다면 성경을 읽는 자세가 달라질 것이다. 아무리 큐티를 하고 말씀을 묵상을 해보지만 성경을 읽다가 보면 좌충우돌 맞아 떨어지는 것이 없다. 말씀을 대하다가 모르면 그냥 넘어가고 이해가 안 되면 그냥 지나쳐 버린다. 신약의 헬라어를 보다면 맥이 끊겨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신약마저 히브리어로 대하다보면 아주 쉽게 접근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헬라어로 보다보면 끊어지게 되는 경우를 만나게 된다. 하지만 아무리 원어적인 면을 분석했다고 할지라고 지식과 판단된 이성으로 접해서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성과 직관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글로 되어 있는 성경마저도 한글로 되어 있어 쉽게 이해할 것 같지만 성경 자체가 신앙의 모국어로 즉, 방언으로 되어 있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영으로 읽어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기도나 금식만 해서 얻어지는 영성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의 조명 아래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한다.

   아무리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능통하게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신학적인 식견이 많다고 해서 얻어지는 비결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단순히 한글로만 읽고도 그 속에 깊숙이 담긴 내용을 발견하는 평신도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글을 쓰는 필자도 그런 분들을 만나면 고개를 숙이며 경이를 표한다.

 

    많은 분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는 차원에서 끝나버리는 경우가 많다. 십자가에서 온전한 구원을 얻었다면 세상에서 수명이 다하는 그 날까지 살다가 천국가면 되는 줄 안다. 절대로 아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 몸 되어 살아가는 그 차원이 도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표현을 쓰면 어떠런지 모르지만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승천하는 차원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애급에 빠져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 40년을 거쳐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고 해서 다 된 것이 아니다. 땅의 존재로 있다가 하늘의 존재로 변하지 않으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음을 모세를 표본으로 보여준 것이다.

 

    율법의 상태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이 바로 모세의 상태에서는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며 하늘의 존재가 된 여호수아와 갈렙 만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출애굽기에서 여호수아까지 인 것이다. 이렇듯 교회를 나온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다.

 

    심지어 목사가 되었다고 해서 천국 가는 것이 아니다. 땅의 존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하늘의 존재로 전환된 가운데 낮아지고 낮아질 수밖에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애급에서 나온 수많은 사람 어른 장정 60만 명 중에 단 두 사람만이 들어갔던 것처럼 길 하나를 달라고 하면 길 두 개를 줄 수 있는 상황이 바로 이것이다.

 

     영적인 길도 주어야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길마저도 줘야 한다. 그런데 기독교가 영적인 길도 제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육적인 길마저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진정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단순히 믿음으로 가는 길이 아니다.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길을 보여줘야 한다.

 

    원어적인 의미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길을 달라고 하면 그 길도 마땅히 줘야 하지만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길까지도 제시해 주라는 말씀까지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언제까지 기존의 말씀에서 머물러 허우적거려야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길 하나를 달라고 하면 길 두 개를 줄 수 있도록 실천할 수 있는 말씀을 내가 가지려면 단순히 설교나 성경공부에서 끝나버리면 안 된다. 설교 속에 성경공부 속에 방향제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가운데 방향이 설정되어 버리면 하나님과 함께 나아갈 수 있는 목표가 생기는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오리를 가자는 사람이 생기고 만나게 된다. 그러면 십리까지 동행할 수 있는 사명과 사역이 발생된 것이다. 오늘도 이런 사람을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부탁하지 않아도 시기적절하게 부쳐 주신다. 그래서 오늘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까하는 기대감과 설렘이 나의 마음을 들뜨게 한다. 이런 마음으로 봄을 맞이하자.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 마라나타
글쓴이 : 엘리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