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 간 사람이 이 세상 사람에게 주는 절규
눅 16;19-31.
오늘 본문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값진 이야기입니다.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집 대문 앞에 나사로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거지였습니다. 병자였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먹고 개와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둘 다 죽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사가 영을 데리고 아브라함의 품으로 인도하였습니다.
부자도 죽었습니다.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불구덩이라 뜨거워 목마름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눈을 들어 보니 아브라함 품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부자는 그를 향하여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 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이 때 음부에 간 부자가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는 절규의 소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부자가 절규하는 목소리로 애원하였습니다.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오늘 본문 내용입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 대조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의식주입니다. 의식주가 대조적이었습니다.
옷이 대조적입니다.
거지는 누더기 옷을 입고 살았습니다. 거지 옷을 입었습니다. 거지옷을 입어서 거지가 아니라 거지이기에 거지 옷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자색옷과 고운 베옷을 입었습니다.
자색옷은 왕이 입는 옷입니다. 바클레이 주석가에 의하면 노동자 한 명이 445일 번돈을 모아야 자색옷 한 벌을 살 수 있었습니다. 하루 10만원이라면 4450만원되는 옷입니다. 자색 염색을 하려면 달팽이를 잡아 피를 뺐습니다. 12,000마리를 잡으면 겨우 1.4g의 자색 염료를 색출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운 베옷은 속 옷인데 이 옷도 비싼 옷입니다.
옷이 극에서 극이었습니다. 나는 3천만원짜리 옷만 입고 다니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정말 꼴불견이었습니다.
식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부자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였습니다. 대통령이 오셨을 때 차리는 음식을 연락이라고 합니다. 그런 음식은 날마다 먹었습니다. 최고로 먹었습니다. 그것도 호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사로 거지는 부자의 상에서 버리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나는 어려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꿀꿀이 죽을 먹고 자랐습니다. 먹는 것도 극에서 극이었습니다.
주택도 그렇습니다.
평민들은 대문이 없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부자는 대문이 있었습니다. 대문이 있다는 말은 정원이 있다는 말입니다. 나사로는 대문 땅바닥에서 먹고 자고 살았습니다. 개와 함께 살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는 주택도 극에서 극이었습니다. 서울역에서 노숙하는 이가 있습니다. 집이 얼마나 큰지 신호등이 있는 집을 본 적도 있습니다. 영화 감독 스필버그 집이 그렇습니다. 주택도 극에서 극이었습니다.
건강도 그렇습니다.
부자는 아픈 데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는 온 몸에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그래서 개들이 헌 데를 핥았습니다. 병원에 갈 돈이 없어서 골골 하면서 살았습니다. 개들이 피를 빨아 먹는 데 개를 쫓을 기력조차 없었습니다. 건강이 엉망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죽지 못 하여 살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건강하였습니다. 극에서 극이었습니다.
이것이 부자와 나사로의 이 세상에서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 다 죽었습니다. 부자도 죽고 가난한 자도 죽습니다. 건강한 사람도 죽고 병든 사람도 죽습니다. 잘 입고 산 사람도 죽고 헐벗고 산 사람도 죽습니다. 침대에서 잔 사람도 죽고 대문 땅에서 잔 사람도 죽습니다. 이 세상에 안 죽을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 영의 운명이 전혀 뒤바뀌었습니다.
부자는 음부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안으로 갔습니다. 지옥과 천국이었습니다. 사이에는 구렁텅이가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영계가 있습니다. 영계가 어떤 곳인지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1. 영계는 서로 보는 것이 가능합니다.
음부의 부자와 천국의 나사로는 서로 얼굴을 보았습니다. 부자는 나사로의 행복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나사로는 음부에서 부자가 불구덩이에서 목마름의 고통당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영계는 세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 그리고 가운데 구렁텅이입니다. 그런데 서로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기에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면 지옥에 간 형제 자매 그리고 집안 식구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간 이들은 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보며 고통속에서 지낼 것입니다.
차라리 서로 보지 말았으면 좋겠는 데 보입니다. 눈앞에서 예수 믿지 않은 자녀가 고통당하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비극중에 비극입니다.
2. 영계는 서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음부의 부자와 천국의 나사로가 서로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물을 한 모금 달라고 하였습니다. 갈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주 보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지 않고 죽어 음부에 간 이들과 안타까운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통신기기 없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가 가능한 곳이 영계입니다.
3. 죽은 후에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영계는 보는 것이 가능하고 대화가 가능하지만 불가능한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음부에서 천국으로, 천국에서 음부로 왕래가 서로 불가능합니다. 죽음 후에는 결코 구원이 없습니다. 천주교의 연옥설, 유대교의 중간설은 결코 성경적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진리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으면 그런 것입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으면 음부에서 예수님을 영접할 기회가 없습니다.
지옥에 간 부자의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부자는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아브라함에게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지옥에 간 부자에게는 형제가 5명 있었습니다. 성경에서 5이라는 수는 고통의 수입니다. 5이라는 수가 나오면 고통이 연상되고 있습니다.
야곱이 흉년을 피하여 애급으로 이민갈 때 말했습니다.
“아직도 흉년이 5년이 남았으니.”
솔로몬 행각에 온통 병자들이 모여 우굴거렸습니다. 행각이 5개가 있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점령하려고 할 때 다윗은 돌맹이 5개를 주워 가지고 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번제단에서 하루 수 백마리를 잡았습니다. 크기가 5규빗이었습니다. 형제가 이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갔습니다. 나사로를 학대하였다는 말은 한 마디도 없습니다. 지옥에 간 이유는 꼭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천국에 간 비결이 하나있습니다. 그런 생활을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였습니다.
천하에 구원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이름으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느 왕이 어느 사람에게 왕궁으로 오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죄를 지은 남자였습니다. 들어가면 붙잡혀서 틀림없이 재판을 받고 감옥 생활을 하여야 할 운명인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두려워서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세 친구를 찾아가서 동행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첫 번으로 가장 친한 친구를 찾았습니다. 그러나 그 친구는 같이 갈 수 없다고 냉정하게 잡아 떼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는 그 보다 조금 덜 친한 친구를 찾아 갔더니 그는 그 동안의 우정을 보아 왕궁 앞까지 동행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세번째 친구를 찾습니다. 그 친구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다가 한번 씩 만나는 친구였습니다. 별로 기대를 가질 수 없는 친구같았는 데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자네와 같이 왕앞에 가서 자네를 위하여 변호하여 주겠네. 죄를 지었지만 뉘우치고 있고 다시는 그러지 않을 터이고 내가 보증을 설 터이나 살려 달라고 요청하겠네.”
이 친구는 너무 기쁘고 놀랐습니다.
첫 친구는 돈과 재산이었습니다. 죽을 때 하나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고스란히 남겨 두고 가야 합니다. 돈으로는 영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영혼이 가는 곳에 재산을 같이 갈 수 없습니다.
두 번째 친구는 세상에서 같이 사랑하며 살던 사람들입니다. 아내나 남편, 그리고 자식 그리고 친지들입니다. 그들은 아무리 친하다고 하지만 대신 죽을 수 없습니다. 함께 살고 있지만 끝까지 함께 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세 번쩨 친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는 영원히 우리와 동행하여 주시는 분이십니다.죽음이후에도 같이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앞에 우리와 같이 서주시고 우리를 우리와 탄식하여 주시고 변호하여 주실 분입니다.
영국 켐브릿지 대학 총장을 지내다가 헨리 8세의 미움으로 사형에 처하게 된 죤 피셔의 간증입니다. 그는 목을 비틀어 죽이는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 형틀앞에서 그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요청이 한번 기도하고 성경 한번 보게 하여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기도를 하였습니다.
“주여! 이 무서운 상황에서 나를 붙들어 줄 수 있는 말씀을 주옵소서.”
그리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의 눈에 딱 뜨이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6장 32절이었습니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 그러나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느니라”(요 16;32)
부자가 예수님을 영접이 않았다는 말은 본문에 없습니다. 나사로가 예수를 영접하였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천국문입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들어 갈 수 없습니다.
부자는 땅에서 살 때 최상의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 부자의 5형제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자기가 한번 내려가서 5형제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지옥이 있다고 호소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옥문에 꽁꽁 잠겨서 들어 올 수는 있어도 나갈 수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부탁하는 장면이 애처로워 보입니다.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 지니라.”
이미 구원의 도리를 모세를 통하여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구원의 진리가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하여 충분히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서울에서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세계적으로 구원받지 못 하고 지옥으로 가는 사람들은 들을 수 있는 소리에 귀를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전도하는 소리를 외면하는 이들은 지옥에서 저런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족 중에 이 소리를 듣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될 것입니다. 농사야 한번 실패하면 다음에 다시 지으면 됩니다. 대학이야 한번 떨어지면 재수하면 됩니다. 사업도 한번 실패하여도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그러나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나올 출구가 없습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가본 적이 있습니다. 그 곳에 들어가면 첫 날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들은 수용소에 들어 왔다. 이 수용소를 나갈 수 있는 길이 하나가 있다. 죽어서 시신을 불태울 때 연기가 되어 굴뚝으로 나가는 것이다.”
그로나 지옥은 죽을 래야 죽을 수 없는 곳입니다. 나갈라고 하여보아야 영원히 나갈 수 없는 곳입니다.
모세와 선지자 말을 이 땅에서 듣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연세대학교 중앙 도서관 앞에는 오랫동안 연세대 총장으로 계시던 백낙준 박사의 동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백낙준 박사의 부친은 아주 유명한 무당이었습니다. 말하자면 박수무당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한창 무당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전도사 한 분이 그 옆을 지나가다가 그 꼴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당에게 복음을 전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전도사는 춤추고 있는 무당에게 인정사정 보지 않고 소리질렀습니다.
“박수무당이여, 이제는 멸망할 짓을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그 무당도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나 믿고 천당이든 백당이든 가라!”
그런데 그 후부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집에 돌아가서도 그 무당의 귀에서는 전도사의 그 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박수무당이여, 이제는 멸망할 짓을 그만하고 예수 믿고 천당 가시오!”
녹음기를 틀어 놓은 것처럼 이 소리가 계속 귀에서 들렸습니다. 박수무당의 정신이 혼란해졌습니다. 잠을 잘 수도 없고, 뭘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물론 더 이상 굿도 할 수가 없어졌습니다. 영이 파괴되어 버렸습니다. 그 박수무당은 너무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할 곳은 교회밖에 없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고, 결국은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박수무당에게서 백 낙준 박사가 태어났습니다.
이 땅의 모세와 선지자 그리고 전도자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 품안에 안길 수 있습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5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고 싶었습니다. 지옥이 있음을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저렇게 좋은 천국으로 가게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안타까워서 다시 말하였습니다.
“그렇지 아니 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죽은 자가 살아나서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말하면 회개하고 믿을 것이라고 부자가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믿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이 살아나서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말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적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습니다. 홍해가 갈라져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배반하였습니다. 매일 만나가 내려도 하나님을 의심하였습니다. 반석에 물이 나와도 그 때뿐이었습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서 말해도 믿지 않는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하는 강한 멧세지가 있습니다.
1. 이 세상이 모두가 아닙니다.
반드시 영원한 세계가 있습니다. 이 세상은 잠간입니다. 영원한 세상에 갈 준비를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부자는 이 세상에서 호화롭게 좋은 곳을 입고 살면서 행복을 누렸습니다. 거지 나사로를 돌보았다는 말이 한 마디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나사로가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것을 비관하였다는 말도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 비참하게 살면서도 오직 내세를 생각하였던 것같습니다. 마지막 웃음이 참 웃음이라고 생각하였던 것같습니다.
이 세상이 모두가 아닙니다.
하늘 나라에서 부자가 물 한 모금을 구걸하였습니다. 그 때 거절당한 이유가 두 가지 있습니다.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 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는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 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물 한 모금을 거절한 이유가 분명합니다.
하나는 세상에서 살 때 혼자만 잘 살았습니다. 대문앞에 고생하고 있는 나사로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유는 영계에는 둘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끼어 있어서 오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왕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세 형제가 살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왕은 궁전으로 삼 형제를 불렀습니다.
"세상을 살면서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이냐?"
왕은 여러 신하들 앞에서 지혜로운 형제들에게 물었습니다. 지혜로운 막내가 먼저 대답하였습니다.
"뭐니 뭐니해도 늙어서 가난하게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가난해도 상관없지만, 늙어서 가난해지면 참으로 비참합니다."
듣고 있던 신하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궁하였습니다. 지혜로운 둘째가 대답했습니다.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는데, 가장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 주어질 때에 그것에 한계를 느끼고 제일 괴로운 것입니다."
나이 많은 장관들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지혜로운 큰 형이 대답했습니다.
"아무 선행도 없이 임종을 맞는 것입니다."
왕은 그제야 비로소 "네 말이 맞다"라고 말했습니다. 부자는 선행없이 임종을 맞았습니다. 지옥에서 그는 고난을 받으면서 물 한 모금 구걸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세상이 다가 아닙니다. 또 세상이 있습니다.
2. 우리는 영적인 사람의 소리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모세와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생명의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를 들으면 영원한 천국에 가는 것이고 안 들으면 영원한 지옥에 가는 것임을 분명히 알려 주고 있습니다.
육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지 말고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웰빙도 중요하지만 웰다이닝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잘 사는 것은 잠간입니다. 잘 죽는 것은 영원입니다.
요즈음 행복론자들은 세 가지를 잘 하여야 인생이 인생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즈음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말은 Wellbeing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윌빙(Wellbeing)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 단어가 더 생겼습니다. 웰빙도 중요하지만 웰다잉(Welldying)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즈음은 한 단어가 더 생겼습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고, 잘 죽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이를 잘 먹는 것도 중요하다는 웰에이징(Wellaging)이라 말입니다. 웰에이징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윌빙(Wellbeing) 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죽은 것을 월다잉(Welldying)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월에이징(Wellaging) 이라고 합니다.
국민 일보 기사 하나를 소개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고척교회 김 춘희 권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이북에서 홀로 내려온 권사님은 정부 생계 보호자로 한 달에 38만원을 받으며 살았습니다. 고아들이 많은 전쟁후라 고아원에 들어가서 고아들을 자기 자녀처럼 사랑하며 살았습니다. 틈틈이 식당이나 공사장에 나가 일하며 돈을 모으고 또 모아서 모두 주는 일에 전념하였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니까 외롭지 않아요.”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 나누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모두 나누어 주었습니다. 죽을 때 단칸방 세 1500만원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신까지 모두 드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유명하지 않은 소박한 그의 죽음은 많은 사람을 울렸습니다. 성대한 장례가 치루어졌습니다. 국민일보 기사입니다.
우리는 부자처럼 잘 살지 말고 나사로처럼 잘 죽어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옥에 간 사람의 절규를 들을 수 있는 영성이 주어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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