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강원용목사/열린교회 (말 3:1-2/계 3:7-8,11/마 16:18-1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1. 10. 19:03

강원용목사/열린교회 (말 3:1-2/계 3:7-8,11/마 16:18-19)

 

지금부터 56년 전, 그러니까 1945년 경동교회가 창립되던 그때도 오늘처럼 12월 2일이었습니다. 저는 28살의 청년으로 첫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 동안 창립기념일마다 많은 얘기를 했습니다만, 박종화 목사께서, 죽기 전에 얘기 좀 더 하라고 오늘 설교를 시킨 줄 압니다. 저는 큰 욕심은 없고, 창립기념 60회, 4년 남았는데, 그 예배를 여러분과 함께 드릴 수만 있다면 큰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창립기념 주일은 언제나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첫 주일에 있습니다. 오늘 강대에 놓인 첫 번째 촛불을 켰는데, 크리스마스가 되면 저 다섯 개의 촛불이 모두 켜질 것입니다. 다섯 번째 촛불이 켜지는 날을 기다리면서, 예수님의 탄생의 참 뜻을 되새겨 보는 계절입니다. 구약성서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겪고, 억울함을 당하고 하면서도, 희망을 가지고 산 것은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세상에 보내겠다. 메시아가 오는 날 하나님의 백성을 높이 들어서 온 세상을 통치하는 왕으로 삼을 것이다.” 하는 약속 때문이었습니다.


그 메시아를 고대하는 글들이 구약의 예언서에 많이 나옵니다. 그 중에 말라기 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가 오래 기다리던 내 사자, 즉 메시아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시는데, 그런데 그분이 오실 때에는 문득 나타날 것이라고 합니다. 문득 어디에 나타나느냐 하면 궁궐에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개역 성서에는 성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태어나면, 그를 기다리던 모든 백성들이 다 즐거워하겠지만, 그분 앞에서 살아남을 자가 몇이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이, 메시아가 세상에 오셔서 인류와 세상을 구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기다린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얻었고, 그것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문제가 생겼습니다. 첫째는, 그분은 오시되, 문득 궁궐에 나타나겠다, 성전에 나타나겠다 하셨는데, 우리가 믿는 예수는 오시기는 오셨지만, 궁궐에 나타나지 않고 베들레헴 말구유에 나타났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그 날에 살아남을 사람이 몇 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라기 3장의 말씀에서 보듯이, 율법을 잘 지킨 사람, 그리고 성전을 빠짐없이 다니고 그 규례를 다 지킨 사람, 그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그날은 심판의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는 예수는 세상에 와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구원을 한정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은, 유대나라의 율법학자가 “영생을 얻을 사람이 누구이겠습니까?” 할 때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은 다 심판 받는다는데, 예수님 자신이 율법을 어겼습니다. 안식일도 범했고, 십계명도 많이 어겼습니다. 부모를 버리고 열두 살에 성전에 가서 부모를 속상하게 한 것부터 그렇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같은 계명은 범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예수는 유대인들이 생각했던 그런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모든 인간, 유대인들만이 아닌, 선택받지 아니한 전 세계의 사람들, 율법을 범하고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벗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별명이 죄인들의 벗이었습니다. 창녀, 세리들의 벗이었습니다. 그러한 예수에게는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의 모습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성전을 가리키며 “이것은 무너질 것이다.” 했습니다. 말구유에 태어나고 십자가에서 죽은 그분을 우리는 메시아라고 믿고 있지만, 유대인들은 그렇게 믿지 않습니다. 아직 메시아가 오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메시아가 오기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와 우리 기독교가 근본적으로 다른 점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깊이 든 병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혼동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구 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왜 유대인들에게는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까? 유대인들이 생각하는 메시아와 정반대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결국 정통 유대교 신자들의 입장에서는 없애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결국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메시아가 오면 상을 받으리라고 확실히 믿고 있던 유대인들에 의해서 죽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요약하면 소위 유대교 신자들, 율법주의자들의 종교는 닫힌 종교였다는 것입니다. 오그라들고 배타적이고, 이방인들은 다 배척해버리고, 외곬으로만 나가는 닫힌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활짝 열린 사람입니다. 배타성이 전혀 없습니다. 심지어 “구약성서는 이웃은 사랑하되 원수는 미워하라고 했으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네 원수까지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분의 열린 가슴 안에는 못 들어갈 존재가 없었습니다. “나는 세상의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다. 나는 병자를 고치러 왔다.” 이렇듯 활짝 열린 자세였습니다. 그래서 마지막에 남긴 말씀도 “하늘과 땅, 모든 것이 나에게 들어와 있다. 모두 내 품에 안고 있다. 너희들은 땅 끝까지 가서 나를 증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메시아가 세상에 와서 열린 자세로 살다가, 곧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을 불러서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믿느냐?” 하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는 우리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란 메시아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옳다. 하나님이 네게 알려 준 것이다. 됐다. 내가 바로 그 신앙 위에다가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곁을 떠난 뒤에 성령의 역사로 교회가 섰습니다.
이 교회는 세워진 날부터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이 죽고 도망하고 박해를 받는데, 그 중에 신학자 요한이라는 사람은 밧모 섬에 유폐되었습니다. 그때 소아시아에는 일곱 군데에 교회가 서 있었습니다. 요한은 이곳에서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읽어 드린 요한계시록 본문은 그 교회들 중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낸 편지입니다. 필라델피아에 보낸 편지를 오늘 창립주일에 본문으로 삼은 것은, 경동교회는 필라델피아 교회를 모델로 삼은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필라델피아라는 말은 헬라어로,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의 처음 이름은 여러분이 아는 대로 선린형제단입니다. “이웃을 형제 자매처럼 사랑하자.” 필라델피아입니다.


그런데 필라델피아 교회의 가장 큰 특징은, 신학자 요한의 말을 보면,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네 앞에 이 문을 열어놓으니, 이 문은 세상 어느 누구도 닫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열린 문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당시 소아시아 지역의 여러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소화시킨 교회였습니다. 이러한 필라델피아 교회의 모습 속에서 저는 경동교회의 모습을 찾습니다.
물론 56년 동안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56년 전 오늘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땅은 장충동 1가 26번지, 지금과 같은 장소였지만, 교회당은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거기에 모였던 사람들이 지금 여기에 한사람도 없습니다. 나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때는 스팀을 때고 이런 것 없었습니다. 하도 추우니까, 남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꺾어다가 불을 피우고 둘러앉아 예배드렸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서른 살 이상인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경동교회의 변하지 않는 이미지, 경동교회 하면 딱 떠오르는 이미지, 나는 그것을 “열린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수 차례 제가 얘기한 것이지만, 확실히 기억해 주시기를 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그때 당시 온 나라가, 우리나라 인구가 3000만이라고 했는데, 그 십분지 일인 300만을 신자로 만들자는 운동이 전 교회에 퍼졌습니다. 여기에 젊은 청년들이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 군데에서 큰 모임을 가졌습니다. 함석헌 씨를 중심으로 하는 무교회파들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신상욱 씨를 중심으로 하는, 이 세상은 다 썩었으므로 새싹을 키워야 되겠다는 새싹교회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문제는 보수적인 기성교회나, 무교회나, 새싹교회나 모두 닫힌 집단이라는 것입니다. 자기들만 옳고, 그 외에는 다 틀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누구나 올 수 있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볼 수 있는 교회를 만들어 보자는 것이 우리 교회의 설립 이유였습니다. 교회를 하나 더 세우자는 생각은 털끝만큼도 없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56년 동안 열린 교회가 되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제가 세 가지만 간단하게 이야기하겠습니다. 첫째로 위로 향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위로 향할 때 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늘을 향하여 늘 열려 있어 성령을 받는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그런데 꼭 하고 싶은 얘기는, 한국에 하늘을 향해 열려 있지 않은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다 열심히 하늘을 향해 기도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열심히 믿으면 믿을수록 세상과는 멀어지고, 편협해지고, 독선적으로 되어, 하나님을 신학적으로 도그마 시킵니다. 그리고 경직된 도그마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배타적인, 독선적인 행동을 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신학자가 만들어놓은 도그마가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한 분이시지, 피조물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상대적인 분이 아니시고 절대적인 존재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초월해 계시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우리 눈으로 볼 수도 없고, 우리가 만질 수도 없는 분입니다. 이런 분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내 머리만으로 판단해서 이건 틀렸고, 저건 틀렸고, 저건 이단이고,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입니다. 다른 종교를 믿는 이들을 보면 우상숭배자이고 야훼 하나님의 원수라고 외치고, 무신론자들을 보면 저것들은 지옥 갈 놈들이라고 단죄하는, 편협하고 닫힌 태도를 벗으려고 우리 교회는 애를 썼습니다.


하나님은 완전히 초월해 계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절대화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그야말로 절대자이므로 우리 존재는 그분을 알 수도, 얘기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아는 것은 예수님의 아버지인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은 예수의 말씀대로 선한 사람, 악한 사람들에게 햇빛과 비를 똑같이 내려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심지어 길가에 피어 있는 풀 한 포기도 사랑하게 되는, 그런 활짝 열린 교회를 형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두 번째로 세상을 향해 열려있는 교회입니다. 그 당시 유명했던 기독교 지도자 한사람이 돌아다니면서, 경동교회는 기독교를 가치 절하시키고, 세속화시켜 버리고 있다고 떠들었습니다. 왜? 사회가 어떻고, 이웃이 어떻고, 피난민 학생들이 어떻고, 좌익이 어떻고, 우익이 어떻고 얘기한다고! 우리는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를 교회 품안에 안고 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것들을 속된 세계의 것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습니다.


바로 이 장소 위에 있던 바람개비 집에서 좌익, 우익의 투쟁이 매일 계속되고, 사람 죽이는 소리가 늘 들려왔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느 한편에 서서 저 놈은 없애 버려야 된다고 하는 그런 경직되고 배타적인 태도를 전혀 안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배보는 도중에 테러범이 오는데, 그들이 좌익인지 우익인지 알 수가 없었어요. 양쪽에서 다 오니까. 그러한 열린 자세로 열린 이 사회를 향해서, 세상을 향해서 나간 것이 경동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세 번째로 미래를 향해서 열린 교회입니다. 과거 창립기념일 주보에는 꼭 표지에다 빌립보서 3장 13절을 썼습니다. “뒤의 것을 잊어버리고 목표를 향하여 앞을 향하여 달음질치자.” 그래서 우리 교회당 지었을 때, 우리 교회에서 행사가 있을 때, 그럴 때 신문에 기사가 실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기사의 타이틀이 뭐냐 하면, “항상 앞서가는 경동교회”였습니다. 늘 이렇게 앞을 향해 가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반발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앞을 향해서 열려 있는, 종말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지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열린 자세로 왔습니다만, 우리가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과연 우리 교회는 열린 교회였습니까? 1부 예배, 2부 예배 모인 모든 사람들은 전부 비슷한 계급의 사람들입니다. 교육으로 말하면, 대학 이상을 나온 인텔리들이고, 생활로는 중산층의 부르주아들이고, 별로 나쁜 일도 안 하고 그렇다고 좋은 일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도 아닌 그런 사람들입니다. 사회적으로 멸시받는 깡패들, 또는 창녀들, 장애자들이 이 자리에 나왔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교회이어야 할텐데, 그렇지는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열린 교회로서 가려고 했지만, 그대로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반성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예수님을 만나면 무슨 일이 생겨야 되느냐? 이사야서 35장 1절 이하의 말씀, 누가복음 4장 16절 이하의 말씀은 메시아가 오면 눈먼 사람은 보게 되고, 말을 알아듣지 못하던 귀가 열려서 말을 알아듣게 되고, 벙어리가 입을 열고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에파타” 열려라, 열려라 하면, 모든 것이 열렸습니다. 소경의 눈이 열리고, 귀머거리의 귀가 열렸습니다. 그것이 우리들이 받는 구원입니다. 내가 정말 볼 것을 보고 있습니까? 내가 정말 들을 것을 듣고 있습니까? 할 말을 하고 있습니까? 구원은 이 닫혀버린 귀가, 닫혀버린 눈이, 닫혀버린 입이 열리고 닫힌 가슴이 열리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현실은 꽉 막혀 있습니다. 지난 30일에도 여당과 야당이 서로 문을 조금 열 듯하더니, 끝내 굳어져서 열지 않습니다. 남과 북이 화해를 하자고 하지만, 딱 마주앉으면 열리지 않습니다. 닫혀버렸습니다. 대단히 걱정되는 것은 저 아프가니스탄 전쟁입니다. 저 전쟁이 이 세상을 끝장내 버릴지 모릅니다. 저 전쟁은 제 눈에는 닫힌 종교의 전쟁입니다. 이슬람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만, 그 중 원리주의자 빈 라덴 같은 사람의 종교, 이것은 닫힌 종교입니다. 기독교 가운데 제일 닫힌 기독교가 미국의 퓨리턴입니다. 그런 미국의 퓨리턴 문화! 그리고 가장 닫힌 종교가 유대교입니다. 이스라엘이죠. 이들이 벌이고 있는 전쟁입니다.


다만 제가 희망을 가지는 것은 미국 안에도 열린 교회가 있다, 열린 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그겁니다. 미국 안에 있는 열린 교회, 열린 지성인들, 또 이슬람 안에 있는 열린 사람들, 이 사람들이 이제 부시 이론을 반대해야 합니다. 전쟁을 반대해야 합니다. 테러를 반대하며, 또 테러 박멸을 내세우며 전쟁을 벌이는 것을 옳지 않다고 해야 합니다.


이제 열린 종교와 열린 지성인들이 나와서 평화를 만들어야 합니다. 평화라는 것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닫혀버린 세계를 열어버려야 평화가 가능합니다. 크리스마스는 평화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의 의미는 막혀버린 것, 배타적인 것을 바로잡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얘기한들, 우리의 힘은 미약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어둠 속에서 한 대의 촛불에서 시작하여 다섯 개의 촛불이 켜지는데, 이 빛이 결국 어둠이 꽉 찬 세상을 밝히어, 정말 꽁꽁 막혀버리고 닫혀버린 인간, 종교, 민족, 닫혀버린 문화를 활짝 열린 인간, 열린 교회, 열린 문화로 바꾸어 놓을 것입니다. 이런 열린 세계가, 평화가 이루어진 세계가 십자가에서 달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다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할 수 있는 신도들의 세계라고 생각합니다. 아멘.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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