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목사/거룩한 목적 (골 1:9-12)
우리 모두가 이름을 들으면 다 아시는 분입니다. 문학평론가로서 지금까지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해왔던 어느 모 교수가 서울 시내에 있는 어느 교회에 초대를 받아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분은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분명히 공언하는 사람입니다. 그 날 초청을 받은 이유는 왜 예수를 믿지 않는지 그 이유를 듣기 위해 그 교회가 초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자신은 미션 스쿨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교수이고, 산상수훈도 나름대로 다 알고 있으며, 어떤 때는 연구도 해 본 적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참 놀랍게 생각하는 것은 산상수훈대로 사는 교인을 아직까지 만나지 못했고, 그것이 자기가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만 요란하게 떠들 뿐 실제 삶에서 예수 믿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주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마지막으로 아주 따끔한 말을 한마디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 중에 산상수훈대로 살고 있는 교회가 있다면 저에게 소개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예수 믿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가 이렇게 세상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면 우리보다도 더 악한 세상 사람들로부터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면서 망신을 당하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들이 흉내낼 수 없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세상 사람이 절대 범할 수 없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이 목적을 우리가 확인하고 이 목적대로 부응하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감히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향해서 이러쿵저러쿵 말을 하겠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수년동안 복음을 전할 때 골로새에서 온 에바브로라고 하는 훌륭한 청년이 복음을 듣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가 바울로부터 훈련을 받은 다음 자기 고향 골로새로 돌아가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가 아름답게 잘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서 수년 후,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입니다. 골로새 교회 지도자가인 에바브로가 감옥으로 사도 바울을 문안 왔습니다. 그리고는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상세하게 보고해 주었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면서 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감사했던지, 그 입에서는 끊임없이 감사가 나왔고, 하나님 앞에 기도가 나왔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 바울은 한가지를 작심했습니다. '나는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지금까지 여러 번 기도했지만 이제는 쉬지 않고 기도를 좀 해야 되겠다.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
9절입니다.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되 한두 번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해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기도 내용이 9절부터 12절까지 나와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기도 내용의 핵심은 10절에 있습니다. 10절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서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즉 '골로새 교인들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점점 자라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라는 기도를 이제는 쉬지 않고 해주기로 작심을 한 것입니다.
10절 내용을 순서적으로 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Key는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앞뒤로 우리가 3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에 나온 순서대로 할 필요는 없고 우리가 이해하기 쉬운 순서를 찾으면 됩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꼭 갖추어 순종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첫 번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꾸 자라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계속 풍성해져야 됩니다. 바울은 이것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두 번째로, 10절 처음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즉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 안 하면서 하나님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세 번째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놓고 바울이 지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골로새 교인들이 되게 하옵소서. 이것을 위해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매일 살게 해 주시고, 인생을 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열매를 남기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끝까지 쉬지 않겠다고 작심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 믿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가난하고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감옥에서 쉬지 않고 기도해야 된다면 우선적으로 '주여, 이들의 가난을 물리쳐 주시고 세상에서 좀 사람 대우 받을 수 있도록 이들의 신분을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 기도도 중요하겠지만 바울은 뒤로 미루었습니다. 그리고 '주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앞세웠습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여러 가지 여건에서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로부터 왕따 당하고, 어디서나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기가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신앙생활을 하며 예수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그들을 위해서 바울이 정말로 감옥에서 열심히 기도한다면 이런 기도가 먼저 절실히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여, 이들에게도 참 자유를 주옵소서. 신앙의 자유를 주시고, 사람대우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어려운 시험이나 핍박이 없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런 기도를 다 뒤로 돌렸습니다. 그러면 그 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무엇입니까? '주여, 가난해도 좋습니다. 천대받아도 좋습니다. 핍박당해도 좋습니다. 골로새 교인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비전입니다. 자기 비전이 아닌 하나님 비전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교회를 포함하여 오늘날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영적 질병 중의 하나는,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럽 교인이 한국을 몇 번 방문하고 나서 한국교회를 진단할 때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을 보니 딱 3가지만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고, 둘째는 자기이고, 셋째는 돈입니다." 제가 볼 때 바로 본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정곡을 치는 말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면 너무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 매달려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그치지 않겠다고 하는 열정과 의지가 부족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여, 하나님을 나는 더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라고 매달리지 않습니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하나님을 아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온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처음과 끝이시며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안다 해도 얼마나 알겠습니까? 결국 안다고 해봐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범위 안에서 그분을 아는 것인데, 성경 안에 계시된 하나님 자신도 너무나 광대하셔서 우리는 도무지 그 옷자락을 만지는 것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그렇게 원대하시고 강대하시고 거룩하시고 자존하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참 끝이 없는 일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알아도 조금 아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꾸 발전해야 됩니다.
바울이 기도할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여기에서 '자라게 한다'이 중요합니다. 한번에 하나님을 다 아는 사람은 없거니와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배우면서 계속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차오르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차오르는 거예요. 이렇게 차오르다 보면은 하나님을 조금 알았을 때보다도 하나님을 많이 알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더 밝히 분별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금방 찾아내지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나 하나님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입니까? 못하지요. 그러므로 바울이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골로새 교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얼마만큼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합니까? 2년 전에 비해서 금년에 하나님을 하는 지식이 얼마나 성장했습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더 가까이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리에 가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모든 신앙생활은 자기 중심에서 머무르고 맙니다.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주께 합당하게 행하는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안에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죽은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믿음이 죽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닙니다. 산 자의 믿음입니다. 산 자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한 말씀을 들거나 배워도 그대로 순종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믿음이 산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설교들을 때는 듣는 듯 하다가 교회 밖으로 다 귓전으로 흘려버리고는 옛날의 습관대로 제 맘대로 살다가 적당히 회개하면 되는 줄로 안다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슬프게 할 뿐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기도제목이 아닐 수가 있습니까? '주여, 어떻게 하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 기도가 안 나오겠습니까? 어떻게 이 기도를 멈출 수가 있겠습니까? 기도하지 않는 사람보다 기도하는 사람이 훨씬 순종 잘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마음에 그러한 소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기도를 멈추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간절함이 있으니까 문을 두드리기를 계속하는 것 아닙니까? 순종하고자 하는 소망이 있으니까 그 입에 기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어떻게 하면 주님의 뜻대로 순종해서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는 기도가 한 달에 한번도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이 기도가 여러분의 기도에서 사라져버렸다면,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은 이미 다른 데 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마다 슬퍼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요란하게 구름 떼와 같이 몰려나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 얼굴 돌리실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고 계신 분들은 알 것입니다. 말은 다 알아듣는 것 같은데 실제로 나가면 제 맘대로 하는 자식이 부모를 찾아와서 집안에 앉아 있으면 얼굴 마주 대하고 대화할 수 있습니까? 악한 우리 부모도 불순종하는 자식을 좋게 보지 않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어떻겠습니까?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 맺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은 한 생을 살다보면 열매를 남깁니다. 평생 술주정뱅이가 되어서 되는 데로 살다가 가는 아버지 뒤에는 구역질나는 술 냄새만 남습니다. 평생 삯바느질하면서 자식 하나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피눈물을 쏟으며 산 어머니의 뒤에는 세상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후손을 남기게 되는 열매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이라도 당장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난다고 할 때, 여러분의 삶의 흔적에 어떤 열매들이 맺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이 자기를 위해 날마다 '돈 돈' 하다가 재산 남겨두고 가겠습니까? '이 젊음 다 하기 전에 마음대로 한번 즐기면서 살아보자. 자, 인생 늙으면 다 소용 없느니라.' 하고는 실컷 즐기다가 골프채 몇 개 남겨두고 떠나겠습니까? 그것을 열매로 남겨두시겠습니까? 과연 무엇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열매로 남겨놓겠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고민하면서 진지하게 살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에게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실직을 당한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실직 후 몇 달이 지나자 가족을 위해서 아무데나 들어가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조바심을 내다가 어느 회사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 회사에서 판매원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거리를 헤매면서 무언가를 파는 세일즈맨 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딸,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수심이 서린 눈으로 아빠를 바라봅니다. 아빠는 집에 들어와서 절대 티를 내지 않고 명랑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눈여겨보면 매일 구두가 엉망인 채 집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구두에 먼지가 가득 앉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달도 안 되어 구두 앞창이 덜렁덜렁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본 자녀들이 매일같이 아빠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를 물어도, 아빠는 설명을 안 합니다. "나 일이 많아 열심히 뛰어서 이래." 이 정도로 대꾸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구두가 자꾸 망가져 한두 켤레 사다가 나중에는 돈이 없어 운동화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운동화도 한 달을 못 버티고 자꾸 낡아서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큰딸의 소원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 구두 한 켤레 사드릴까?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까?'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한 결과, 학교 갈 때 버스를 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먼 길인데도 부모 몰래 걸어서 학교를 다니면서 몇 백 원씩 저금통에 계속 넣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버스를 탈 수 없다는 생각에 덥고 힘든 것을 견디면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 동생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너 왜 버스 타지 않고 걸어가니?" 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 아빠 구두 사주고 싶어서 요즘 걸어 다녀. 누나도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 너 얼마 모았어?" 동생이 "나 이제 2000원 모았어. 누나는?" "나는 이제 5000원 됐어. 우리 조금만 더 모으면 아빠 구두도 사줄 수 있을 꺼야?" 실제로 자기를 낳고 키워주며 사랑해주는 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지 않고 힘겹게 학교에 걸어다니며 푼돈을 모으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오늘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보실 때마다 큰 꿈을 가지고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만약 그와 같은 거룩한 목적이 우리 가슴속에 있고, 그 거룩한 목적이 우리의 쉬지 않는 기도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만큼 은혜를 모르는 악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거룩한 목적을 지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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