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모목사/항상 기뻐하라! (빌 4:5-8)
“하나님이 돌리는 역사의 맷돌은 비록 천천히 돌아가지만 정확하게 돌아간다.” 고 외쳤던 역사학자 챨스 비어드의 말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그 대답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지난 주간 우리는 너무도 엄청나고 끔찍한 테러사태를 보았습니다. 미국 아니 전세계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뉴욕과 워싱턴에서 일어난 초유의 테러 참사는 미국인은 물론 전세계인들에게 커다란 충격과 분노를 안겨주었습니다.
하버드 대학 정치학부 사무엘 헌틴팅 교수는 「문명의 충돌」이라는 책에서 21세기가 되면 기독교와 이슬람의 무서운 충돌이 일어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한 바가 있습니다.
지난 화요일(2001.9.11) - 이 날은 사람들은 피의 화요일이라고 부릅니다. 진주만 이후 60년 만에 미국 본토가 공격을 당했습니다. 지금까지 테러는 해외공관, 군사시설 등 외곽을 치는 전술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이번 테러는 미국의 심장부를 직접 강타했습니다. 미국을 버티고 있는 두 기둥이 있다고 한다면, 군사력과 경제력 일 것입니다. 뉴욕에 있었던 세계무역센터는 경제의 상징이었습니다. 워싱턴의 펜터군은 세계최강 군사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들이 무너지면서 수많은 시민들이 함께 죽어갔습니다. 미국은 이번 사태를 전쟁으로 선포하고 국력을 총동원하여 범인을 색출하고 비호세력과 국가들과 무차별 보복을 할 것이라고 공헌을 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사태를 바라보며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 것인가? 이런 국제정세를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할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인가? 막막하기만 합니다. 링에서 강타 당하고 의식을 잃어버린 권수선수처럼 우리는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의 원인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인간의 죄악성입니다. 증오가 낳은 비극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테러"는 비인간화의 극한 산물입니다. 지금세계 모든 국가에서 무서운 비인간화의 자태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생명 경시 풍조, 인간이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는 그래서 모든 것이 이념과 물질이 인간성을 앞지르는 무서운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이유라도 정당화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잔혹성과 위험성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 것인가를 단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극한의 테러리스트들이 생겨나고 있는 이유를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냉전체제 해체이후 미국 중심의 정치 경제 군사체계는 철저히 미국 중심, 미국주의로 재편되고 있습니다. WTO 출범과 더불어 미국이 주도한 세계관은 수많은 경제적인 약소국가들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더 이상 저들은 아무리 발버둥하더라도 선진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희망이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부시 정부이후 소외된 많은 국가들로부터 극도의 분노를 사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너무나 많은 적을 만들고 있다 하는 두려움도 우리에게 있었지요.
이번 사태 밑바닥에 흐르는 죄는 두 가지 입니다. 이 두 가지 죄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서로 다른 것 같지만 엄밀히 따지면 하나의 죄입니다. ① 우선은, 테러리즘이라는 사탄적인 폭력성입니다. ② 이 죄악성과 더불어 힘있는 나라들의 교만성 - 인간이 하나님의 위치에 앉아 있는 이 죄를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의 말씀과 신앙위에 세워진 참 좋은 나라입니다. 메리 플라워호를 타고 오직 신앙의 자유만을 위해서 죽음을 무릅쓰고 저들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고, 그 터전 위에 나라를 세웠습니다. 대통령이 취임할 때면 하나님의 말씀 위에 손을 얹고 이 말씀에 근거하여 나라를 섬기고 인류에 봉사할 것을 다짐하는 장면을 보면 부럽기까지 합니다. 그러한 나라가 진리와 복음,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군사력과 경제력, 과학과 기술을 의지하면 미국의 힘은 분명 바벨론입니다.
마지막 때에 힘을 자랑하던 바벨론이 무너지고 상고들이 통곡하는 그 날이 오면, 그리고 요한계시록 19장 종말의 문이 열려지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행여나 그런 시작이 아닌가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치 미국이 지구의 주인처럼 행세하는 일들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창조주이십니다. 역사를 시작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역사를 마치실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이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서 지금 이 지구의 역사는, 온 우주의 역사는 펼쳐져 가고 있음을 인간은 겸손히 시인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종말의 주인이십니다. 힘있는 사람도 연약한 자도 심판대 앞에, 그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이번 사태는 테러리즘과 패권주의의 대결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을 정당화 할 수는 없습니다. 얼굴없는 폭력이 이토록 무고한 인간의 생명을 노리는 것은 그 이유가 아무리 명분 있다 해도 결단코 모든 인류의 적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는 미국 자신의 초국제적인 패권주의가 미국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도록 만드는 여운을 축적해 오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정확히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테러리즘 자체에 대한 대응과 예방도 중요하지만 누군가 테러리즘이라는 방식으로 미국과 대치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몰리고 있다면 그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테러의 발생원인을 제거하는 유일한 길이 될 것입니다. 쥐도 고양이에게 쫓겨 막다른골목에 몰리다 보면 고양이를 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쪽에서는 테러리즘이라고 부르는 행위가, 저쪽에서는 더 이상 물러설 여지가 없어진 자들의 죽음을 불사한 비정규적 저항이라고 한다면, 바로 이 폭력적 악순환을 가져오는 보다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문제를 파고드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저쪽에서는 당하고 당한 끝에 결행한 목숨을 건 저항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다면 이러한 현실을 바로 풀지 않고서는 테러의 중단은 무망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뉴욕주의 별명이 엠파이어 스테이츠 - 바로 제국 주입니다. 이 제국주의 무서운 자존심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미국의 자존심이 무너졌고, 그 자존심을 위해 보복을 강행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경쟁을 통해서 바로 잡혀지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고도의 인내를 바탕으로한 평화의 추구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평화는 약자가 폭력과 빈곤의 악순환에 갇혀 지내는 한 결코 확보될 수가 없습니다. 강자들이 안전한 곳에서 편안하게 지내는 동안 울부짖는 약자들의 현실은 마침내 테러리즘이라는 마지막 수단에 호소할 수밖에 없게 된다면 세상은 어디도 안전해지지 못하며 끊임없이 전쟁의 위기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미국은 테러리즘의 보복과 응징에만 주력할 것이 아니라, 테러리즘이라고 하는 가장 야만적인 폭력의 방식으로 미국에게 도전하지 않고서는 자신들의 생존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고 믿는 사람들의 절박한 현실에도 깊이 주목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류는 모두가 모두에게 적이 되는 무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항시 전시상태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지구의 종말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제국은 전쟁을 통해서 등장했지만 전쟁을 통해서 사라졌다는 역사의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칼로 선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교훈에 겸손히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이번 사태 밑바닥에 흐르는 두 가지 죄악, 테러리즘의 야만성과 패권주의의 폭력성 - 모두 인류에게 공적입니다. 테러리즘과 패권주의의 대결은 인류사들을 공멸의 자리로 끌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부디 미국은 이번 사태의 깊은 교훈을 직시하고 테러리즘에 대한 응징 못지않게 패권주의의 독선과 오만이 어떤 결과를 도처에서 낳고 있을 것인지 깨달아 인류에 대한 평화를 위한 새로운 질서를 마련하는 역사적인 사명에 겸손히 고개를 숙였으면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미국을 바라보는 우리의 솔직한 기도제목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가 전쟁을 보게 되었을 때 유가는 급등하게 될 것이고, 회복기미에 돌아섰던 세계 경제는 무서운 추락을 보게 될 것입니다. 21세기는 행여나 평화의 세기, 희망의 세기가 아닐까 기대를 가지고 지켜보던 세계 모든 사람들은 뉴욕과 워싱턴이 무너짐과 함께 그 기대감과 희망들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어떻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번 사태를 바라보며 기도해야 할 것인가? 어떻게 이번 사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폭력성을 바라보며 감정적인 대응을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 조차도 이런 폭력성을 부채질하는 성명들을 잇따라 발표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우리는 겸손히 고개를 숙여야 합니다. 기독교적인 역사관과 현실감을 냉철하게 성경을 펼쳐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꿇어 하나님 앞에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미국, 이스라엘 하면 우리편 같고, 중동 국가들 하면 괜히 원수국가들처럼 정서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단세포적인 사고요 느낌에 불과한 것입니다. 물론 극악무도하고 반인류적인 테러는 하늘과 땅의 심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마땅히 응징의 방법이 동원 될 것이고 동원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응징이 무력적이고 폭력적이어서는 아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무고한 희생자들을 달래기 위해 또 다른 무고한 희생자들을 양산해서는 안됩니다. 살인자 처벌을 위해 또 다른 살인극을 벌인다면 그건 정당화 될 수도 없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그것은 함무라비 법전은 되어도 성경의 원리는 아닙니다. 철저히 반기독교적인 가치관이요, 삶의 원리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모든 신문들이 분노한 시민들의 감정어린 목소리를 싣고 있을 때에 한 유일한 신문 - 크리스챤 샤이언스 모티너 지는 용기 있는 논조를 실었습니다. 미국 시민들의 거룩한 인내를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테러범들을 죽이기 위해 중동 국가 하나를 공격함으로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고 호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이 신문은 전미국 시민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고개를 돌려 줄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 정치세력까지 동원된 악의 집단에 의해 예수님은 테러를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힘이 있으신 분이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분이셨습니다. 땅과 하늘의 왕이셨습니다. 하늘의 12군단을 불러서 로마를 무찌를 수 있었고, 그를 십자가에 못박을 수 있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무찌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그분은 십자가를 지고 언덕에 오르셨습니다.
미국은 분명히 중동 국가 몇 나라쯤이야 단번에 굴복시킬 수 있는 무서운 힘이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이 지구의 시민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언제나 칼이 날카로울 수록 칼집이 좋아야 합니다. 부드럽고 든든해야 합니다. 아프카니스탄 초전박살 시킬 때에 세계시민들이 미국에게 박수를 보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뽑아든 칼은 무섭지가 않습니다. 이왕 죽을 바에 항거하고 죽겠다는 사람들이 생겨났을 때에 칼은 하나도 무섭지 않은 것입니다. 칼집에 꽂혀있는 칼이 훨씬 더 무섭습니다.
미국과 함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자유 우방국가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문제해결의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미국에게 그만한 힘을 주신 것은 그 힘을 아무렇게나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그 힘을 통하여 세계 인류를 가슴에 품고 이 지구를 잘 지키라는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과학의 발달과 정치, 기술의 개발보다는 그것들을 관리하고 조율하고 조화시키는 화해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이제는 무서운 무기를 개발하기보다는 개발된 무기를 잘 조화 있게 관리하는 지혜를 겸손히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 모두 무릎을 꿇고 그분의 동의를 구할 때가 되었습니다. 영원한 나라는 하나님 나라, 하나밖에 없음을 우리 모두 겸손히 인정해야 한단 말입니다.
미국 교회의 목사님들이 분노한 시민과 교인들 앞에서 울며 호소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내하십시다. 그래도 인내하십시다. 미국의 수많은 시민들이 죽어갔습니다. 인재들이 죽어갔습니다. 무서운 빌딩 콘크리트 더미에 깔려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끄집어내 사랑하는 가족들과 통화하는 장면을 들었을 때에 시민들은 피가 거꾸로 역류하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지요. 전시민들이 달려가 단번에 박살내고 싶은 것이 그들의 심정일 것입니다. 인내할 수없는 극한 상황에 그들은 도달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래도 참아라.
칼을 뽑아든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끝까지 참아라. 그래도 참아라. 그들의 죄악성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습니까? 무너져 내리는 110층의 쌍둥이 빌딩을 바라보며 누가 누구를 용서할 수 있단 말입니까?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일들이 그 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래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정말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될 것인지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그래도 기도해라.
빌립보서는 기쁨을 주제로 한 편지입니다. 4장 밖에 되지않는 짤막한 편지 가운데 "기쁨"이란 단어가 명사형과 동사형을 합쳐서 20여번씩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좋을 때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두 번만 기뻐하는 것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기뻐하는데 항상 기뻐하라. 그래도 기뻐하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여기 "항상"이란 단어 속에는 기뻐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라는 말이 암시되어져 있습니다.
선한 일을 했다는 이유 때문에 바울은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건 억울한 일이 아닙니다. 분통이 터지는 일입니다. 어떻게 기뻐할 수 있었습니까? 교회는 무서운 핍박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악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선한 사람들이 억울한 일에 수없이 빠져 들어갑니다. 그때 빌립보서를 기록하며 사도 바울은 그래도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번 사태는 복음적인 차원에서, 선교적인 차원에서 두 눈을 뜨고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혹자들 가운데서는 이번 사태를 신들의 전쟁으로 이해하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적인 개념에서 야훼신과 알라신의 대결로 보고 가나안을 진멸시켰 듯이 악의 씨를 진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성을 모조리 불태웠듯이 이번에 악을 모두 불태울 수 있었으면 하고 기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위험한 해석이요 위험한 발상입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으로 이런 사건들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합니다.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기도하며 바라보아야 합니다. 지금은 원방의 딸들이 주님 앞에 돌아올 때란 말입니다. 수많은 이단족속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세주 되심을 인정하고 주님의 품으로 이 구원의 반열로 참여해야 할 때란 말입니다.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 땅 끝은 분명 이슬람 국가들이 될 것입니다. 이제는 광야에서 울부짖던 하달과 이스마엘의 통곡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복음 들고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달려가야 할 마지막 종말의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야곱의 지혜를 예찬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에서의 통곡을 달리며 하나님 앞으로 그들을 인도해야 할 때란 말입니다.
그들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이스마엘과 에서의 후예라는 열등감에 사로잡혀져 있습니다. 불쌍한 민족들입니다. 그들을 구원하는 일에 온세계 시민이 가슴을 열어야 합니다. 지금도 이슬람권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름을 숨기고 들어간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모든 영광을 버리고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벗어 던지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슬람권에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많은 선교사들이 그 이슬람권을 빠져 나왔지만 그래도 끝까지 거기서 죽음을 무릅쓰고 이슬람권에 피를 묻겠다는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미국이 무차별 이스람 국가들에게 공격을 퍼부었을 때에 선교의 문은 점점 좁아지게 될 것이고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점점 멀어져만 갈는지도 모릅니다. 많은 사람들이 철옹성이 무너지는 불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나님 이 땅에 왜 악을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영원한 인류의 질문이었던 이 질문을 새롭게 끄집어내 하나님 앞에 묻고 있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쌓아 두었던 부가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욥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이 죽어갔습니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모든 종들이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가족처럼 소중하게 여겼던 우단떼가 적들의 손에 끌려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땅에 악을 왜 허용하시는 것입니까? 제 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몸부림할 때에 하나님은 이 질문에 전혀 대답하시지 않았습니다. 욥을 조용히 빈들로 끌고 가 하늘의 뭇별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욥은 그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며 하나님을 높이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바라볼 때에 이 땅의 악이 왜 허용되어지는 것입니까? 허탄한 질문을 벗어 던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욥은 마지막에 이해할 수 없어도 당신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삶의 환경 속에 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은 은혜로우신 분이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욥은 마지막 장에서 그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주었던 친구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용서를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원수들을 가슴에 끌어안고 중보기도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욥이 그 벗들을 위하여 빌매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욥에게 그전 소유보다 갑절이나" 복 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류가 시작되어 지금까지 언제나 이 땅에는 악이 존재했습니다. 가끔은 하나님의 백성을 치는 지팡이로 이 악을 사용하기도 하셨습니다. 돌아오지 않을 때에 이 지팡이는 점점 더 강해졌던 것을 우리는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될 때에, 사랑스런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될 때에, 두 손 들고 항복하고 용서를 구하게 될 때에, 그 지팡이를 꺾어서 불쏘시개 삼아 불 속에 집어 던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미국이 원수를 용서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기도를 시작할 때에 쌍둥이 빌딩이 아니라 네 쌍둥이 열 쌍둥이 빌딩도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 가운데도 무서운 고난에 직면하신 분도 계신 줄로 압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억울한 일에 부딪힌 분이 계신 줄로 압니다. 누구도 용서할 수 없는 황폐하게 된 마음을 가지고 이 시간 주님 앞에 찾아오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조심스럽게 우리 내면의 세계를 들여다보면 내 안에도 패권주의가 있습니다. 가졌을 때 더 가지고 싶고 오를 때 더 오르고 싶은 무서운 교만의 죄가 우리 내면 깊숙이 도사리고 있음을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내 안에도 테러리즘이 있습니다. 억울하다고 생각되어질 때에 복수심에 이글거리고, 내 속에 있는 무서운 악마적인 잔인성이 불타는 모습을 우리가 냉철히 직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특별히 이유를 알 수 없는 고난과 상처와 아픔에 부딪혔을 때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손해가 커다란 피해를 입었을 때에,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원수와 마주하고 있을 때에 이러한 악이 내 속에서 이글거리고 있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너, 그래도 용서할 수 있느냐? 미국으로 하여금 그 테러 리스트들을 용서하라고 요구하기 전에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 정말 용서할 수 있느냐. 이 시간 여러분에게 결정적인 아픔을 주고 있는 분들의 그 얼굴을 떠 올리십시오. 주님 앞에 선언하십시다. 하나님 용서합니다. 순종하겠습니다. 내 힘으로 할 수 없지만 성령이 내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 주님 사랑주시면 주님의 사랑으로 용서하겠습니다. 용서를 선포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너 그래도 기도할 수 있느냐?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되는지 알지 못하고,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절망하며 고독에 외로워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 부딪힌 분이 계십니까? 하나님 그래도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만이 대답이십니다. 주께만 길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주께만 희락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원망과 불평의 가슴을 안고 주님 전에 달려나오신 분이 계십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습니다. 너 그래도 감사할 수 있느냐? 네. 이해할 수 없어도 감사하겠습니다. 네. 용납이 안되어도 감사하겠습니다. 그래도 하나님 감사하겠습니다. 주님 앞에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무너진 빌딩을 바라보면 용서도 기뻐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고개를 들고 주님을 바라보면 그래도 우리는 기뻐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이 시간 주께서 여러분에게 하늘의 힘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기로 작정할 때에, 하나님만을 가슴에 끌어안고 그래도 주님을 기뻐하겠습니다. 그래도 즐거워하겠습니다. 그래도 희망 가운데 일어나겠습니다. 주님 앞에 결단할 때에 주께서 하늘의 능력과 힘을 여러분들에게 더하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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