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류영모목사/하나님의 사람의 낙심과 회복(1) (왕상 19:1-1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1. 11. 08:09

류영모목사/하나님의 사람의 낙심과 회복(1) (왕상 19:1-18)
 


I. 고독한 인생

성경에서 엘리야의 활약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한 편의 007영화를 보고 있는 것처럼 스릴이 넘칩니다. 그만큼 엘리야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스릴 넘치는 사역을 펼쳤던 사람이었습니다.


영화명: Mission Possible / 작전코드명: 갈멜산의 불 / 작전목적: 아합정권 축출


친미정책(여호와 신앙)을 펴던 한 중동국가(이란? 이라크?)의 원수 아합이라는 사람이 이세벨이라는 여인과 국제결혼을 하면서 극렬한 반미정책(반여호와 종교정책)으로 돌아섰습니다. 그러자 백악관(여호와)은 아합정권을 축출할 계획을 세우고 엘리야라는 007특수요원을 잠입시킵니다. 엘리야는 낙하산을 타고 아합의 상아궁(왕상22:39 - 성경에 상아궁은 아합왕이 최초 건축한 것으로 나옴)에 나타나 아합정권에 대한 미국과 전세계의 경제재제 조치를 통보한 후,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그 경제조치의 암호코드는 "가뭄"이었습니다. 중동지역 전역에 엘리야 체포 검거령이 내려지고 아합정권은 '친미세력'(여호와 선지자들)을 대대적으로 색출, 피의 잔치를 벌입니다. 그러나 이 와중에도 백악관은 아합 내각 깊숙이 심어 놓은 비밀요원 오바댜를 통해 100명의 ‘친미세력'을 피신시키도록 조치합니다.

3년 후, 백악관은 은신 중이던 엘리야 요원을 불러 유혈 대박해를 일으켰던 아합정권의 책임을 물어 반미세력 지도자들 즉, 바알정당과 아세라정당으로 알려진 자들을 갈멜산에서 제거하는 대반격작전을 펼칩니다. 이는 날이 갈수록 더욱 거세지는 반미정책의 흐름을 역류시키려는 조치입니다. 이러한 대작전을 펼치기 위해 미정부(여호와)는 CIA를 동원 미리 아합정권의 국민들(백성들)의 마음을 은밀히 돌려놓는 비밀 공작을 전개합니다. 3년간의 가뭄이라는 코드로 실천된 경제 피폐와 갈멜산 대복수전 앞에 이제 겁을 먹고 무릎을 꿇을줄 알았던 아합과 이세벨이 오히려 분기탱천, 엘리야의 목숨을 위협하자 엘리야는 그만 지치고 의기소침해 백악관의 지시도 없이 사막 깊숙한 곳 로뎀나무 아래로 도주합니다.

그러나 백악관은 인공위성을 동원 엘리야의 위치를 파악(여호와의 눈은 이처럼 피할 수 없다) 탈진해 있는 그에게 음식을 공수하며 전 감시체계를 동원 그를 보호하여 자신들의 한 해외 기지 호렙산까지 인도합니다. 백악관은 엘리야를 폐기처분하지 않고 그에게 새로운 임무(하사엘, 예후, 엘리사에게 기름 부음)를 부과하고 그를 격려합니다.(7천인의 비밀 지원자가 있다는 것을 알림) (중략)

엘리사를 CIA 중동책임 후임자로 세운 엘리야를 백악관은 헬기를 동원, 그를 구출한 후, 본국으로 귀환시킵니다. 이 작전의 비밀부호는 "회리바람을 타고 하늘나라로”였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엘리야 요원에 대한 비밀문건이 공개됩니다. 그 문건의 이름은 야고보서 - 거기 5장 17절에 기록합니다. ‘그는 육백만불의 사나이'와 같은 특수 인간이 아니었다 다만 ‘우리와 성정이 같은 자' 곧 우리처럼 평범한 자였다고.

이 멋진 007영화 가운데 오늘 본문은 주인공이 가장 큰 낙심에 빠져있는 한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금방 독약앰플이라도 깨물고 자살이라도 할 것만 같은 상황입니다. 주인공이 곤경에 처하기도 하고 다시 일어서기도 할 때 영화는 더욱 재미가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엘리야같은 사람도 고독에 빠져 죽고 싶을 때가 있었습니다.

심리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는 살고 싶은 본능이 있는 한편 죽고 싶은 본능도 있다고 합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가 하면, 동시에 죽으려하는 의지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 본래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아주 재미있는 하나의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아합의 왕후 이세벨이 대노하여 지금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합니다. 반드시 죽이겠다고 맹세까지 합니다. 이 사실을 통보받은 엘리야는 살기 위하여, 본문 3절에 쓰여있는 대로 분명히 '생명을 위하여' 도망합니다. 멀리 멀리 도망합니다. 그런데 천신만고 끝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자 이번에는 죽고싶어 합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살기 위하여 도망해 놓고, 이제 살게 되니까 죽고 싶어하는 이 심리 말입니다.

미국의 세계적인 소설가 헤밍웨이는 다음과 같은 유서를 써 놓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나는 전기의 흐름이 그치고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심히 고독하다.” 그는 훌륭한 소설로 뭇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높은 명성도 얻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라고 하는 존재에 대한 실존적 고민, 이 고독과 낙담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1. 고독하면 먼저 육체적인 고독을 생각하게 됩니다.

병든다는 것은 고독입니다. 건강할 때는 내가 나를 생각해도 내가 꼭 필요한 것 같고, 다른 사람한테도 내가 필요한 존재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자기 존재를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병들면, 그것도 중한 병이나 장기 환자가 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쓸모가 없구나, 모든 사람에게 나는 귀찮은 존재구나, 아주 지겨운 존재구나 자학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부인하고 고독에 빠져듭니다.

또한 늙는다는 것도 고독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는 듯이 느껴집니다. 목적을 잃어버렸습니다. 소외감을 느끼게 되고 고독을 느끼게 됩니다.


2. 다음은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무지함과 무능함을 느낄 때, 특히 나의 실패를 인정해야 할 때 고독이 찾아옵니다. 나는 인생을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가만히 돌이켜 보니 전부가 실패요, 완전한 실패임을 시인해야 하는 그 순간에 고독이 밀려옵니다. 아무도 나를 위로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의 상처와 고통 - 겉으로는 멀쩡한 것 같은데 남모르게 속이 썩어 들어갑니다. 나이가 들어가며 나는 다 빼앗기고 껍데기만 남았다는 우울증이 찾아옵니다. 모두 정신적인 고독입니다.


3. 육체적 고독, 정신적 고독과 더불어 영적 고독이 있습니다.

"주께서 어찌하여 얼굴을 가리우시고 나를 주의 대적으로 여기시나이까!" 욥의 부르짖음입니다(욥13:24).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오는 고독, 하나님께 버림 받았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고독이야 말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을 잃고, 가정을 잃고, 친구를 잃고, 명성을 잃고... 다 잃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인정이 있으면 외롭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마저 얼굴을 가리우고 나를 떠나신 것 같을 때, 무서운 낙심이 찾아 옵니다.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실까? 살아계시다고 해도 나같은 것을 사랑하실까? 이것이 영적인 고독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최근에 나온 Cast Away - ‘내던져진' 이라는 뜻의 영화가 있습니다. 항공기 추락사건으로 한 사나이가 무인도에 떨어집니다. 그곳에서 4년을 지내면서 미치도록 외로워합니다. 목숨을 연명해 나가는 일보다 고독과 외로움이 지독히 그를 괴롭힙니다. 그를 절망스럽게 만듭니다. 외롭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항공기에 싣고 가던 화물 중, 파도에 떠밀려온 배구공에 사람의 얼굴과 표정을 그려 넣고, 그것을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배구공을 향하여 말을 걸고 자기의 가슴을 털어놓고, 상의를 하고 하면서 외로움을 달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배구공을 제작한 회사 이름을 따서 그 가상 인물을 ‘윌슨'이라고 부르면서 그와 친구가 되어 지내던 어느 날, 주인공은 결단을 하고 뗏목에 윌슨을 태우고 육지를 찾아 나서는 대모험을 감행합니다. 그러나 항해 도중, 그가 지쳐 잠든 사이, 윌슨이 그만 파도에 쓸려 떠내려갑니다. 윌슨을 건지려고 갖은 애를 쓰다 결국 실패하고 그는 뗏목에 누워 그렇게도 슬피 통곡을 합니다. "윌슨. 미안해, 미안해!”를 연발하면서. 한 핏줄을 잃은 것처럼, 가족을 잃은 것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살 때, 사람들은 이웃의 고마움을 모릅니다. 서로를 '잉여 인간'- 남아 도는 인간으로 여기고 짐스러워 합니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소외되어 외톨이가 되어보아야 이웃의 소중함을, 함께 부딪기며 사는 고마움을 아는가 봅니다. 우리가 영적인 충만에 젖어 살다보면 자칫 그 행복을 모르고 살 수 있습니다.

묻습니다. 지금 여러분은 어디에 내던져져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이 느끼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독이 무엇입니까?

 

II. 엘리야의 낙심

오늘 본문에 엘리야가 우리에게 깊은 고독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엘리야의 모습은 너무 너무 멋있는 모습입니다. 아니 멋있다기 보다는 우리가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인물입니다. 어떻게 이런 믿음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이런 빛나는 인생이 있을 수 있을까? 선망의 대상입니다.

그런데 그런 엘리야가 크지 않은 한가지 문제 앞에서 하나님 앞에 죽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4절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가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여 주시옵소서"

오해하지 마십시오. 영광스런 순교의 장면이 아닙니다. 문제앞에서 실망하고 낙심하고 절망한 나머지 이젠 더 이상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자기 목숨을 끊을 순 없고 "하나님 이젠 나를 데려가 주시옵소서"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 자리에도 이런 체험을 한 두 번 해보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지금 이 순간에 이런 심정으로 이 자리에 나와 계신 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우리 대부분이 앞으로 이런 체험을 하게 될 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문제라는 것을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란을 당하나" 주님의 말씀입니다. 환란 많은 세상, 문제 투성이의 세상에서 우리는 언젠가 아니 반드시 이 문제를 만나게 됩니다.

엘리야가 이렇게 인생을 포기할 작정을 하고 이런 기도를 한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III. 첫째, 엉터리 협박 때문에

우선, 외부적인 문제로 이세벨의 협박이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는 정말 화려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싸워 한번 기도해서 하늘에서 불이 떨어짐으로써 온 백성들이 여호와께서 참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들 인정하게 되었고, 그 하나님 앞에 저들의 그 거짓된 모습들을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850명은 백성들에게 모두 떼 죽음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1절에 보니 아합이 그 사실을 다 이세벨에게 고합니다. 이 아합만큼 아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도 악영향을 받았습니다. 여기서도 제 생각엔 아합이 그 현장을 목격했으면, 그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았으면 하나님 앞에 두손들어 항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했어야 옳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고작하는 것이 집에 들어가서 "여보 여보, 글쎄 말이야..." 하면서 자기 아내에게 일어난 현상을 다 얘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얘기를 전해 듣고 이세벨이 분노합니다. 그리고는 사자를 보내어서 엘리야에게 협박 편지를 전합니다.

그 내용이 2절입니다. "이세벨이 사자를 엘리야에게 보내어 이르되, 내가 내일 이맘때에는 정녕 네 생명으로 저 사람들 중 한 사람의 생명과 같게 하리라"

850명 떼 죽음을 당한 자가 자기의 거짓 선지자들, 그 선지자들처럼 너도 죽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지 않으면 내가 섬기는 신들이 내게 벌위에 벌을 내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무서운 장담과 호언을 했습니다. "내가 너를 내일이면 죽이리라" 이 무서운 협박 공갈 앞에 엘리야는 그만 낙심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도망했습니다. 그리고 그 낙심과 절망속에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데려가 달라고 지금 자살 기도(prayer)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IV. 문제만 보고 그 문제를 해결하시는 하나님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우리가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고 본문에서 이 성경이 보여주는 엘리야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피상적이고 외부적인 원인보다도 훨씬 더 깊은 원인이 그 안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엘리야 자신의 문제였습니다. 아니 엘리야 자신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엘리야의 낙심, 이것은 엘리야만의 문제가 아니라 오늘 우리 인생의 모습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문제들을 겪을 때 그 문제들 앞에서 낙심하고, 낙심이 깊어져서 좌절로 바뀌고, 좌절이 바뀌어서 깊은 절망의 나락으로 우리를 떨어뜨리는 바로 이러한 문제들이 오늘 엘리야의 모습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사건의 핵심 메시지의 초점은 엘리야가 왜 낙심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야는 그 낙심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두 번에 나누어서 여러분에게 전해 드릴까 합니다.

오늘은 그 낙심의 원인만을 분석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다음주는 이 낙심을 해결했던 그 해결책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만 나오시고 다음주에 안나오시는 분들은 낙심하는 방법만 아시고 그 해결책은 모르게 되는 불상사가 생길 것 같습니다.

이세벨의 협박이라고 하는 외부적인 문제외에 내부적이며 더 실제적이고 중요한 엘리야의 낙심의 원인은 그의 잘못된 시각에 있었습니다.

자 3절을 보십시오. 이 말씀은 엘리야가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한 첫 번째 행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가 이 형편을 보고 일어나..." 본문이 지적하는 엘리야의 첫 번째 모습입니다. "저가 그 형편을 보았다" 지금 자기 앞에 발생한 그 문제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제 곧 이세벨에게 잡혀 죽게 될 것이라는 상황을 살펴 보았다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가 보기는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 보았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정말 죽게될 상황이 아니라 자기가 그렇게 본 것입니다. 자기가 그렇게 판단한 것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엘리야가 정말 죽을 상황입니까? 아닙니다. 갈멜산 싸움으로 인해서 모든 백성들은 결국 누구편이 되었습니까? 엘리야 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850명을 다 죽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는 민심을 잃어버리면 반란이 일어나서 왕을 쉽게 갈아 치워버리는 그런 때였습니다. 열왕기 상하를 보시면 이런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엘리야를 쉽게 해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상황은 엘리야에게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세벨이 더 불리한 입장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세벨은 지금 엘리야에게 협박 메시지만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정말 엘리야를 죽이길 원했다면 몰래 자객을 보내거나 군대를 파송하거나 하지 왜 죽이겠다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냅니까? 엘리야를 죽일 수는 없고 다만 협박 공갈로 엘리야가 멀리 떠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문제는 엘리야가 이것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엘리야가 보기는 보았어도 잘못 보았습니다. 이 잘못된 시각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특히 엘리야의 눈에는 마땅히보여야할 한 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누굽니까?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보았지만 하나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 하나님, 엘리야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3년동안 비를 내리지 아니하시고, 까마귀를 보내어 떡과 고기를 주시고,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 가루와 기름이 그치지 않게 하셨던 그 하나님, 갈멜산 꼭대기에서 기도 한 마디로 하늘에서 불을 내리셨던 그 하나님, 이적과 능력을 베푸시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를 가지신 그 하나님, 엘리야가 이제까지 믿었던 그 하나님이 정말 보여할 시점입니다. 그런데 문제에 부딪친 엘이야의 시각에서 그분 하나님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엘리야만 그렇습니까? 오늘 우리도 이런 모습 아닙니까? 하나님 잘 믿는다고 하다가 어느날 어떤 문제를 만날 때 갑자기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겁니다. 마치 안믿는 사람처럼 되버리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과 비교해 볼 때 이세벨이라고 하는 여자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는 상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엘리야의 눈에는 하나님은 보이지 아니하고 이 하찮은 여인의 허황된 협박만 눈에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 잘못된 시각, 오늘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정말 문제 자체가 해결하기 어려워서 그래서 내가 두려운 것이 아니라 내가 문제를 그렇게 보는 시각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는 이 시간 이 말씀을 듣는 여러분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나름대로 문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직장의 문제 때문에 이 자리에서 고민하는 분들 있습니다. 가정문제 때문에 갈등하는 분 계십니다. 부부간의 문제 때문에, 자녀들의 문제 때문에, 아니 신앙생활, 사회생활, 여러 가지 종류의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낙심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묻고 싶습니다. 여러분, 그 문제자체가 그렇게 여러분을 낙심하게 만들만큼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보는 것입니까?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모든 것을 달리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여기 만일 지금 큰 쥐 한 마리가 나타나서 성가대 석을 돌아다닌다면 제가 생각하기에 성가대석에 앉아계신 분들은 다 펄쩍펄쩍 뛰실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징그럽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는 것은 우리의 시각입니다.

월트 디즈니는 쥐를 징그럽게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주 귀엽게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미키 마우스를 만든 것입니다. 그 미키 마우스가 결국은 월트 디즈니 작품 전체입니다. 그의 시각은 우리의 시각과 달랐습니다. 아니 그 시각이 작품을 만든 것입니다.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가 결국 그를 만든 것입니다.

바퀴벌레 한 마리에 왜 놀라 안달하십니까? 바퀴벌레에 물려죽은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징그럽게 보고 있는 것입니다. 쥐 한 마리에 물려 죽은 사람 있습니까? 내가 그렇게 본 것 뿐입니다.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쥐 한 마리 - 사람 물러 다니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도망갑니다. 놀아야 할 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쥐입니다.

보십시오. 정작 두려워할 사람은 엘리야가 아닙니다. 이세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소위 우리가 문제라는 것을 만날 때, 문제 자체보다는 그 문제를 어떻게 볼 것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문제밖에 못 보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언제나 문제입니다.

인생 자체를 온통 문제로 보면, 우리가 사는 인생은 문제투성이입니다. 온통 문제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을 문제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해결할 때 찾아오는 놀라운 축복을 쟁취하는 도전의 현장으로 보면 신나는 것입니다. 인생사는 맛이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부정적인 시각, 그 시각이 문제입니다. 인생은 살만 합니다. 그까짓 밥 한그릇 없어도 멋을 부릴 수 있습니다. 스테이크 먹던 사람이 라면 한 그릇 먹어도 살만 합니다.

묻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그 상황을 올바른 눈을 가지고 바라보고 있는가? 특별히 그 가운데 보아야 될 한분, 하나님을 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좌절의 늪에서, 절망의 나락에서, 아무런 소망의 빛을 보지 못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바로 그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믿으십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앙망하는 사람, 하나님을 보는 그 사람은,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가는 것 같은 힘을 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V. 승리의 영광이 가져다 준 자기 중심적인 기준 때문에

엘리야의 낙심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갈멜산상의 체험 때문이었습니다.

4절을 보면 우리는 엘리야가 이 사건에서 딱 한번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4절을 보겠습니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나이다 하고"(왕상19:4)

자살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쉽게 한마디, 한 구절만 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 생각엔 땅을 치며 통곡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붙잡고 막 울부짖으며 매달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경의 기자가 이 한마디만 기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초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한 말씀 속에서 우리는 엘리야의 근본적인 문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께 말하는 그 말,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넉넉하오니, 이제 살만큼 살았다는 뜻입니다. 이제 일할만큼 일했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내 열조보다 나는 낫지 못하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가 자기 선조보다 더 나을 줄 알았는데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설정해 놓은 자기 중심적인 기준이 문제였습니다.

엘리야가 이러한 기준을 가지게 된 이유는 갈멜산의 승리의 영광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과연 그렇습니까? 일할만큼 일하고 살만큼 살았으니 이제는 죽어도 된다는 말입니까? 누구 맘대로 그럽니까? 누가 세워놓은 기준입니까? 누가 그 기준을 정했길래 갈멜산에서 그런일 하고 나면 그냥 끝난다는 것입니까? 그 기준은 누가 세웠습니까? 엘리야 자신이 기준을 세운 것입니다.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아니 누가 자기에게 자기 선조보다 나은 사람이라고 했습니까?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문제였습니다.

자기가 설정한 자기 중심적인 기준 그런 기준이 생기게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는 오늘을 살아가는 동시대인들 가운데서 뿐만 아니라 조상님들 가운데서도 나는 제일이어야 하는 것입니까? 갈멜산상에서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승리를 맛보았기 때문에 바로 이런 기준이 생긴 것입니다.

나는 김 집사 만큼도 못산다고? 누가 당신을 김 집사 보다 잘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까? 당신 자신입니다. 내가 저 김과장만 못할게 어디 있어? 누가 당신을 김 과장보다 낫다고 얘기했습니까? 당신 자신의 기준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한번 성공하고 나니까 성공의 축복을 체험하고 나니까 그 다음에 또 성공해야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한번 성공하고 나니까 내가 남보다도 나아야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업에 한번 성공하니까 항상 그 사업이 잘 될 것으로 돈을 한번 벌고 나면 항상 내가 부자여야 하는 줄로 생각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보면 이길 때도 있고, 질 때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세운 기준입니다. 승진할 때가 있으면 좌천될 때가 있으며 영예로운 입사를 할 때가 있으면 명예로운 퇴직을 할 때도 있습니다. 넓은 평수에 살며 평안하게 살 때가 있는가 하면 좁은 평수로 이사갈 때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50평짜리에 살다가 40평으로 이사가면 자살하려고 듭니까? 1등만 하다가 어쩌다 2등하면 왜 죽으려고 합니까?

실제로 얼마전에 뉴스에 이런 일이 보도가 되었습니다. 울산에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3년내내 1등만한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가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1등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금방 자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영광스러운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체험 때문에 잘못된 기준이, 자기 중심적인 기준이 세워진 것입니다. 항상 나는 부요하게 살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가난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항상 나는 건강할 줄로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불치의 병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기준을 따르면 그렇습니다.

당신을 실패의 나락으로 하나님께서 밀어 내셨다면 거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당신의 무엇을 하나님이 빼앗아 가셨다면 거기에도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이것이 바로 엘리야의 근본적인 문제였습니다. 참으로 어려웠던 그릿 시냇가에서도 이런 일이 없었습니다. 참으로 배가 고팠던 사르밧 과부의 집에서도 이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마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는 것처럼 상승궤도를 타고 올라갔던 엘리야, 어느날 갈멜산에서 그 절정의 경험을 했습니다. 그리고난 다음에 이세벨이 굴복할 줄 알았습니다. 이세벨이 자진해서 자기 앞에 와서 머리를 숙이고 엘리야를 받들어 줄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아니한 엄청난 협박 편지가 뜻밖에 그에게 다가온 것입니다. 그 순간 엘리야는 낙담이라는 수렁으로 빠져들고 만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인생입니다. 그게 인생입니다. 왜 그렇게 되느냐구요?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기준을 세우신 것입니다. 늘 칭찬만 듣던 사람은 항상 칭찬만 들어야 된다는 자기 중심적인 기준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누가 비판을 하거나 비난을 하게 되면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늘 일등만 하던 사람, 늘 부유하게만 살던 사람, 늘 건강하게만 살던 사람, 탄탄 대로만 걷던 사람은 어느날 하나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셔서 문제를 그에게 던질 때 자기 중심적인 기준을 가지고 있던 사람은 그 문제 앞에서 낙심하고 좌절하고 절망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중심적으로 살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면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 가운데서 우리 인생이 더 멋지게 빛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기준 앞에 굴복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청사진 앞에서 한 순간의 실패로 영원한 실패인 양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를 때도 있고 내려갈 때도 있습니다. 얻을 때도 있고 잃을 때도 있습니다. 깨끗하게 인정하고 용납하고 그 속에 숨은 인생의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VI. 로뎀 나무 아래서 로뎀 나무를 보십시요.

보십시오. 엘리야는 로뎀 나무 아래서 로뎀 나무를 보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로뎀 나무는 팔레스틴 사막지대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입니다. 로뎀 나무는 뿌리가 제일 깊은 나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사막에서도 죽지 않고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굳세게 자라나는 나무라고 합니다. 언제나 변함없이 뿌리깊은 나무 밑에서 상황에 흔들리는 엘리야의 나약한 모습은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꿋꿋하게 자라나는 로뎀 나무를 보며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 있으면서도 로뎀 나무를 보지 못하는 엘리야! 이 모습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실망하고 낙심한 그 자리에서 한번 주위를 둘러 보십시오. 멋지게 승리하고 있는 이웃의 모습이 보일 것입니다. 삭개오 곁에 오를 수 있는 뽕나무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마레이 장군은 적군에 패하여 도망하다가 자살하려고 하였습니다. 칼을 들어 자살하려고 할 때, 개미 한 마리가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조그만 먹이를 물고 가다가는 쓰러지고 가다가는 또 쓰러지는 것이었습니다. 다마레이는 재미있어 따라갔습니다. 69번을 떨어 뜨렸습니다. 그리고 70번째 개미굴로 들어갔습니다. 다마레이는 외쳤습니다. "나는 이제 겨우 한번 실패하지 않았느냐." 용기를 얻어 다시 나갔습니다. 그는 승리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낙심에 빠질 때 로뎀 나무를 보십시오. 위를 쳐다 보십시오. 당신은 이제 겨우 한번 실패했습니다. 지금까지 잘 승리해 오셨습니다. 또 앞으로도 승리할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낙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몇 가지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 홀로 있지 말라.

문제가 생겼을 때에 이것은 아무도 모른다고 혼자있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 이것은 병입니다. 혼자 있지 마십시오. 오히려 문제가 있을 때에는 더욱 열심히 성도들과 교제하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십시오.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마음을 한번 넓혀 보십시오.

2. 다른 사람의 도움을 청하라.

자신의 문제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도 다 겪은 이야기입니다. 나는 사랑에 실패해서 세상이 다 끝난 것처럼 심각한데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깨만 툭툭 쳐 주면서 별일 아니라고 미소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들도 다 경험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들도 나처럼 누구를 끔찍하게 사랑해 봤고 나처럼 실패도 해 보았으며 그러면서도 아무일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무슨 일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도 훨씬 시시한 일일수도 있습니다. 그런고로 마음을 넓혀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십시오. 도움을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3. 노래하고 음악을 즐기라.

하나님을 찬양하며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못 이룬 소원 때문에 울부짖지 말고 이미 받은 은혜를 하나 하나 헤아려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십시오. 그 감사로 고독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4.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그 깊이를 의존하라.

말씀의 능력을 깊이 상고하는 가운데 영감된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삭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모든 사건 하나 하나를 깊이 음미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나는 가를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늘 가까이 하라는 것입니다.

5.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라.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가 내 마음을 움직일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로부터 무서운 공격을 받았습니까? 성령님과 함께 하나님과 한 편이 되어서 이제 그 문제를 공격해 보십시오!

 

VII. 맺는 이야기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라는 책 제 2권에 나오는 짧은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면서 오늘의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나는 집 근처 공원에 잠시 차를 세웠습니다.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동네 꼬마들의 야구경기를 구경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루쪽 벤치에 앉으면서 나는 1루 수비를 보고 있는 아이에게 점수가 어떻게 되느냐고 소리쳐 물었습니다. 아이는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14대 0으로 지고 있어요." 내가 말했습니다. "그래? 그런데 넌 그다지 절망적이지 않아 보이는 구나." 그러자 아이는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 내게 말했습니다. "절망적이라구요? 왜 우리가 절망적이어야 하죠? 우린 아직 한번도 공격을 하지 않았는데요?"

실패라구요? 절망이라구요? 아닙니다. 이제부터 시작입니다. 일어나십시요.

♬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