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강원용목사/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란 (신 30:19-20/갈 6:11-17/눅 14:25-2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1. 12. 13:06

강원용목사/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란 (신 30:19-20/갈 6:11-17/눅 14:25-27)

 

오래간 만에 오늘 설교를 맡았는데, 비가 하도 많이 와서 아마 몇 사람 안 나오겠구나 생각하고 나왔는데, 이렇게 많이 나와서 반가운 마음입니다.
어저께 신문에 큰 광고가 실렸는데, 여러분도 보았겠지만, 우리 기독교계에서 언론인으로서 오래 수고한 한용상 씨가 쓴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어서 전국에서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다 하는 것입니다. 그 책 이름이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다 죽어버려야 예수가 산다는 겁니다. 아마도 지금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모든 좋지 못한 생각들을 샅샅이 들쳐서 썼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그 책을 읽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이 책에는 두 가지 큰 잘못이 있습니다. 하나는 교회는 다 죽어야 한다는 것인데,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그럴듯한 이유를 많이 열거하는데, 그걸 보니까 우리 경동교회는 죽어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겁니다. 그 책이 교회는 죽어야 한다고 내세우는 이유가 경동교회에는 하나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 교회뿐 아니라 내가 아는 교회 가운데에도 거기 해당되지 않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런데 다 몰아쳐서 죽어야 된다는 것은 잘못입니다.


둘째로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고 하면, 지금 예수는 교회 때문에 죽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따라서 교회가 죽고 나야 예수가 사는 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예수는 교회가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죽고 사는 예수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알파와 오메가로서, 영원히 살아 계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질타의 대상이 되는 교회의 모습은 과연 어디서 기인합니까? 예수를 열심히 믿으려고 하는데, 문제는 잘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구약성서 본문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는 죽음으로 가는 길과 생명으로 가는 길, 저주로 가는 길과 복락으로 가는 길, 이 두 가지 가운데서 한 가지를 택해야 하는데, 생명과 복락으로 나아가려면 율법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며, 그것을 못 지키면 저주와 죽음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구약의 말씀을 신약성서에서는 다르게 해석합니다. 그 저주와 죽음은 하나님이 직접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이 저주와 죽음의 세력은 끝장나 버립니다.
그리고 생명과 복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럼 도대체 예수를 믿는다는 건 뭐냐? 제자들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데, 예수님께서 오늘 읽은 누가복음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가 나를 믿으려면 너희 부모와 처자, 여기에 남편이란 얘기는 없지만 남편도 들어가는 거죠, 그리고 형제와 자매를 다 버려야 될 뿐만 아니라 자기 목숨까지도 버려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러지 않고는 제자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라면, 지금 설교하고 있는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 가운데에는 제대로 예수 믿는 사람 한 명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와 처자와 형제자매 그리고 자기 목숨까지 버린 사람은 없을 테니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예수님이 사시던 그때, 누가복음이 쓰여지던 그때, 그 시절로부터 삼 백 년 동안에는 사실 그렇게 안 하고는 예수를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예수를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당하고 사자 밥이 되었고 가족이 몰살당한 것을 우리가 압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예수를 믿기 위해서 처자도 버리고 아들딸도 버리고 목숨도 버려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똑바로 썼습니다. 그 당시에 특별히 유대인들로서 기독교인이 된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신앙인이라고 생각했고 또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나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죽음,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다. 이것만이 내 자랑이다."라고 합니다.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는 바로 기독교와, 예수를 죽인 유대교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임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예수를 죽인 유대교는 모든 사람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안 지키는 것은 죄가 되고, 죄는 형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죽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곧 율법과 죄와 죽음은 말하자면 부정(否定)세력입니다. 율법이란 것은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하며,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는 것이고, 죽음도 삶을 부정하는 것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러한 부정세력을 부정해버렸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해서 죽는, 심판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그는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폐기시켜 버립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죄를 용서한다는 말은 죄를 폐기시켜 버렸다는 말입니다. 예수의 부활이라는 것은,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대로, 죽는 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안고 있는 독가시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의 부활에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울에게는 믿음으로 산다는 말은 예수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본문에는 우리가 흔히 아무 생각 없이 읽고 지나가지만, 매우 놀라운 말씀이 나옵니다. 바울은 "할례를 받느냐 안 받느냐 하는 것은 하나도 문제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새로 지음 받은 존재가 되느냐 안 되느냐가 문제될 뿐이다."라고 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할례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데, 따라서 구원받는 데 절대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남자는 누구나 이것을 받습니다.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고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 당시 기독교 신자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건 해도 좋고 안 해도 관계없다. 문제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 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보기에는 쉽게 할 수 있는 말 같아 보이지만, 당시로서는 정말 심각한 문제여서, 사도 바울이 당한 많은 고통은 이 문제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이런 말을 했느냐? 그것은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사도 바울의 본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그는 아주 단 0.1%도 다른 민족의 피가 섞이지 않은 순수 유대인, 철두철미한 율법주의자였습니다. 또 율법을 철저히 지킨 사람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어기는 자들과 투쟁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죽은 그 예수를 따라 다니는 기독교 신도들을 그대로 둘 수 없었습니다. 이들을 박멸하는 것만이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라고 생각해서, 여러분이 잘 아는 대로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를 만납니다. 그때 눈에서 돌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는 보지 못하고 땅바닥에 엎드렸다고 합니다. 지금까지 사물을 보아왔던 모든 기준들이 비늘처럼 떨어지고 눈이 멀어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로는 거기서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름을 사울에서 바울로 바꿉니다. 이렇게 바뀐 사도 바울은 이제 십자가밖에 자랑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바울에게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갈라디아서 3장 28절에 보게 되면,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자유인 다시 말하면 로마의 시민이냐 노예냐, 남자냐 여자냐 이것은 분명히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이 둘 사이는 넘을 수 없는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는 이 모든 차별의 벽이 무너져버리고 없어졌다"고 합니다. 결국에 모든 율법과 죄의 세력이 끝났다 하는 것은 그것이 없어졌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느 인간이고 율법을 어기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은 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어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어볼 때 예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그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이 모든 죄, 사망의 세력이 이미 끝나 버린 것입니다. 이로 인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 집단과 집단 사이의 벽이 모두 무너져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이란 뭐냐. 로마서 5장 5절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들어와서 결국에 그 사랑이 우리 안에 머물러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얻는 복이요. 그 안에서는 모든 율법과 죄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모든 차별, 인간과 인간을 대립시키던 모든 벽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보는 예수를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을 바꿔 말하면 이렇습니다. 지금 설교하고 있는 나 자신은 틀림없이 한국사람입니다. 나는 남자입니다. 나의 종교는 기독교입니다. 직업은 목사입니다. 이것이 나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나에게 충실하게 되면, 나는 한국사람인 까닭에 일본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대한민국 사람인 까닭에 이북에 있는 인민공화국 사람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남자인 까닭에 여자는 나보다 못한 사람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불교니, 천도교니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닌, 없어져야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막힌 담들이 에베소서 2장 14절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 흘리심으로 허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갈라지고 대립된 것을 하나로 만드는 바로 그것이 예수님의 구원입니다.


몇 년 전에 우리 교회 장로님 딸이 불교 신자인 청년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그 자리에서도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두 사람이 일심동체로서 한 몸처럼 살자면 그 남자가 예수를 믿든지 이 신부가 불교도가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둘이 하나될 수 없지 않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결혼하여 한 몸이 되자면 여자나 남자 중에 하나가 성전환을 해서 같은 성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런데 서로가 결혼을 해서 한 몸이 된다고 해서 성전환 수술을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거잖아요. 남자는 남자 그대로, 여자는 여자 그대로입니다. 거기서 무엇이 차별을 넘어서게 하느냐 하면 바로 서로가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한 남자와 여자 사이의 문제만 아닙니다. 결국에 믿는 사람이란 주체성과 연대성을 갖추는 것입니다. 나 자신이 한국사람이란 것, 나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것, 남자라는 것 이것을 부끄러워 할 것 없습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넘어서야 할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한국사람인 까닭에 일본사람과는 대립해야 되고, 기독교인인 까닭에 불교인과는 대립하는 그런 것은 일반인들이 하는 일입니다.


"믿고 산다"는 것에 대해 요사이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심리학자 칼 융이라는 학자는 사람의 의식을 세 가지로 나눕니다. 표면의식, 잠재의식, 무의식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의식하는 표면의식이라는 건 굉장히 좁고 제한된 것입니다. 표면의식을 지나 잠재의식 밑에 있는 무의식에는 전 인류, 전 역사, 전 우주가 다 들어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구원이란, 성령이 우리의 무의식의 밑바닥에 들어와서 자아중심적이고 대립적이었던 모든 것을 사랑의 관계로 바꿔버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결국 믿는 사람이라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국교회가 병이 든 것 다 압니다. 그러나 진짜 살아있는 교회가 되려면 어찌해야 됩니까? 한용상 씨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도둑 공화국이라 했습니다. 이런 도둑 공화국에서 교회란 뭐냐? 교회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나도 동감입니다. 동감인데 그럼 어떻게 하느냐? 깃발을 들고 도둑놈들 앞에 나가 성명서를 발표하고 그대로 고함을 지르고 두드려 부수고 태워버리고 그래가지고 이 도둑놈들 다 몰아내 버리는 그런 투쟁을 해야 합니까? 분명해 보이지요? 그러나 그렇게 하면 결국 교회가 새로운 율법주의자, 새로운 바리새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만은 절대 신성하고, 다른 놈들은 다 썩어빠진 놈들이고, 교회만이 옳고 다른 것은 다 틀렸다고 하는 그런 독선을 가지고 대립적으로 나간다는 것은 얼른 보면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결코 예수를 믿는 사람, 교회가 할 역할이 아닌 것입니다. 중세기 시대의 십자군의 후예들일 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입니까? 나는 교회란 화해를 이루는 공동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화해를 만들어내고 벽을 무너뜨리는 것, 서로가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교회는 화해의 사절입니다. 위험한 이야기 한 마디 하면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 되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통해 율법이나 죄에서 해방 받은 사람들의 이미지를 어떻게 그립니까? 나는 저 사람 예수 믿는 사람 같다 하는 이미지가 뭐냐 늘 생각해 봅니다. 첫째로 아주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옹색하지 않은 사람! 얽매이는 율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열린 사람입니다. 편협하지 않고 독선적이지 않고 대립개념으로 모든 걸 보지 않습니다. 모든 벽을 넘어서서 인간의 가장 깊은 곳에 와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전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하늘과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바로 그분 안에서 구원의 약속을 받고 있다면, 그분을 믿는 사람이란 다른 민족이건 다른 종교건 모든 것의 차이점을 없애고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점을 넘어서 서로가 화해하는 관계를 가지고 열린 연대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바로 그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 가져야 할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설교를 듣고 여러분이 제게, 그럼 당신은 정말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느냐, 또 그렇게 살겠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면 내가 할 말은 분명합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 사실 그게 잘 안 된다. 그러니까 나는 아무리 세례 받고 목사가 되어도 여전히 죄인이다." 그렇지만 죄인이라는 것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해주고 사랑해주고 북돋우는 그 힘에 의해서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점은, 살다가 넘어지는 것은 마찬가지나 넘어지고 또 넘어지고 일곱 번에 일흔 번씩 넘어지더라도 넘어진 자리에서 십자가를 바라보는 때, 그 십자가에서 오는 힘을 받아서 또 일어나서 걸어가는 그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은 그 십자가를 바라보지 못하기 때문에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나는 그 말이 절대로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경동교회가 죽어야 할 교회에 들어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모든 것을 우리를 본받아라, 우리처럼 해라하고 스스로를 내세우는 자만에 떨어져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 시간이, 과연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믿는 사람으로서 산다는 것이 뭔지 그것을 확실하게 깨닫고, 그러한 믿음 안에서 정말 구원 얻었다 하는 신념을 가지고 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여러분과 내가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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