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한흠목사/전쟁을 모르는 세대를 위하여 (삿 3:1-6)
오늘은 1919년 자주 독립을 외치며 궐기했던 3·1운동 다음날로 올해 84주년을 맞이하게 되
었습니다.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는 장엄한 말로 낭독된 이 독립선언문을 기억하실 것
입니다. 우리는 전국에 만세 삼창 소리가 퍼지던 그때를 기억하고 기념하면서 그 위대한 선
배들 앞에 다시 한번 머리를 숙이는 중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배포하며 만세를 부를 때만해도 우리 민족은 하나였습니다. 거기에
영남, 호남이 따로 없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니, 디지털 시대니 하는 세대간의 차이도 없었
습니다. 잘 사는 사람, 못 사는 사람이라는 계층간의 갈등도 없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
한 33인을 보면 기독교에서 16명, 천도교에서 15명, 불교에서 2명이 대표로 서명했습니다.
그들은 끌려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옥살이를 하기도 하고, 죽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우리 모
두가 하나였습니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누구도 너와 나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사분오열이라는 말이 실감날 정도의 현실을 눈 앞에 두
면서 살고 있습니다. 지역간, 계층간, 세대간의 균열은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입니다. 대선에
서 드러난 세대간의 갈등은 점점 더 증폭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미국의 사회학자 잉그하트
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전세계에서 세대별 가치관의 격차가 가장 심한 나라가 한국이다."
조금 쉽게 말하면 세계에서 한국만큼 세대간의 거리가 먼 나라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부모와 자식 사이가 이렇게 먼 나라가 없고, 선배 세대와 후배 세대 사이가 이렇게 먼 나라
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이나 하듯 이 세대차이를 표현하는 단어나 용어들이
점점 더 난폭해지고 살벌해지는 것을 봅니다. '세대차이'라는 말을 시작으로 이제는 '세대갈
등', '세대불신', '세대분열', '세대대립', '세대전쟁', '세대혁명'이라는 말로 발전하기에 이르
렀고 이런 말들을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정도로 살벌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누가 이 기막힌 현실을 책임져야 합니까? 저는 교회가 우선적으로 책임져야 된다고 생각합
니다. 이 나라 국민의 1/4이 기독교인이고, 이 나라의 중심문화가 기독교이기 때문입니다.
새로 들어선 정부를 보아도 대통령만 빼놓고 국무총리가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외교를 담
당한 장관도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경제를 담당한 부총리도 신실한 크리스천입니다. 우리
교회의 신실한 집사님 한 분도 경제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기독교가 이 나라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사분오열되어서 세대간에 날카
로운 대립을 하고 있는 이 현실을 놓고 누가 먼저 가슴을 쳐야겠습니까? 바로 예수 믿는 우
리가 먼저 가슴을 쳐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옷을 찢어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사기서는 우리에게 한줄기 빛을 던져줍니다. 우리가 처한 모든 문제에 대
해 세밀하게 다 대답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주목해야 될 가치 있는 진리가 있다고 생각합
니다. 사사기 시대는 이스라엘 나라가 아직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기 전, 약 400년 동안 하나
님께서 사사, 요즘 말로 재판관이라 불리는 지도자를 세워 나라를 다스리던 과도기적인 한
때를 말합니다. 그리고 그때 있었던 일을 기록한 것이 사사기서입니다.
사사기 초반에는 서로 상의한 두 세대가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세대'로 명명합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는 기성세대를 말합니
다. 요즘 말로 하면 오프라인(off-line) 세대로, 그들은 광야에서 태어나 길게는 40년 이상
광야훈련을 받았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직접 통치하시는 신정국가의 정치, 경제, 문화를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들었
습니다. 그리고 많은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이것이 광야 세대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들이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던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정
복하기 위해 들어왔을 때, 손에 칼을 들고 제일 앞장 서서 전투를 했던 젊은이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대부분 20, 30대였던 그들은 전쟁을 아는 세대였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정복하면
서 수년 동안 전쟁의 긴장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정도 그 땅을 평
정하자마자 그들은 나라의 기초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만 한
사람입니다. 그들이 일하고 싸우면서 흘린 땀과 피의 대가로 어느 정도 삶이 안정되기 시작
했고, 나라의 기틀도 잡혀졌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꿈이 있었다면, '강한 나라, 잘사는 나라
를 만들어서 후손에게 전해주는 자랑스러운 선조가 되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전쟁을 아는 세대는 한마디로 일과 전쟁만 하다가 인생을 다 보낸 세대입니다. 이
런 독특한 그들이 경험과 배경 때문에 그들의 정치관은 자연히 보수주의였습니다. 전통을
중시하는 대신 변화나 개혁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 보수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종교관은 유일신 사상이었고, 그들의 문화는 폐쇄주의였습니다. 선민의 문화 외에는
별로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문을 닫아 놓는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전쟁을 아는 세
대들의 특징입니다. 우리 나라의 기성세대와 비슷한 점이 있음을 인정할 것입니다.
반면에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새로운 세대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일컬어서 전
쟁을 모르는 세대라고 말합니다. 4, 50년이 지나자 그들이 그 나라의 오피니언 그룹(opinion
group)이 되었고, 주도 세력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살벌한 생활을 경험하지 못했습니
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만나를 먹어 본 일이 없습니다. 바위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구경한 일
도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도 못했습
니다. 그들은 기적다운 기적을 체험한 일도 없습니다. 모든 초자연적인 현상들은 전쟁을 아
는 세대인 그들의 부모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안정
된 생활을 했습니다.
농사를 짓고 양을 치는 평화로운 목가적인 분위기에 젖어 아름다운 꿈을 먹으면서 자란 세
대였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땀과 피를 흘려 뿌린 씨앗을 거두면서 행복하게 자라고, 신나게
젊음을 구가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속으로 이런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와 틀려. 아버지 세대는 아버지 세대고, 우
리 세대는 우리 세대야.' 이들이 전쟁을 모르는 세대였습니다. 오늘 우리 나라의 전쟁을 모
르는 세대들의 의식세계와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을 것입니다.
이렇게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을 모르는 두 세대가 중복되는 50여 년 동안은 두 세대간의
갈등과 대립이 대단했습니다. 그래서 기성 세대들이 보기에 신세대야말로 정말 위험하고 불
안한 존재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반대로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보기에 기성 세대야
말로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대상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서로 보이지 않는 갈
등과 대립을 계속 이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신세대 편에 있었습니다. 종종"우리가
광야에 살 때는 말이야....", "우리가 가나안 전쟁을 한창 할 때는 말이야...그렇지 않았는
데...." 하고 귀가 아플 정도로 말하던 구세대는 이제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이 나라의 중심이 되어서 새로운 역사를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시대가 2, 3백 년 흐르면서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백성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
든 큰 일을 본 자의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를 섬겼더라."(2:7) 그들이 다 죽고 나자 결국은
하나님 없는 역사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세대 사람도 다 그 열조에게로 돌아갔고,
그 후에 일어난 다른 세대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일도 알지 못하였더라."(2:10)
사사기의 역사는 패배와 수치, 부패의 역사입니다. 속된 말로 하나님을 모르는 세대가 나라
를 말아먹은 것입니다. 이런 역사를 우리는 사사기서를 통해 보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앞
에 놓고 우리는 몇 가지 역사적인 교훈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와 전쟁
을 모르는 세대가 함께 공존하는 사회에서 배우고 생각해야 될 진리가 있다고 믿습니다.
첫째로 사사기 시대에 전쟁을 아는 시대는 나중에 가나안 정복을 거의 끝내고 손에서 칼을
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조금씩 누리게 되자 자기도 모르게 변
질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다음 세대에게 모범이 되지 못했고 감동을 주지 못했습니다.
신앙은 자꾸 희미해지기 시작했고, 신앙과 삶이 일치하지 못하는 모순을 드러내기 시작했습
니다. 사는 즐거움을 조금씩 맛보면서 그들 자신도 주변에 있는 잡족들과 별로 다름이 없는
수준으로 신앙과 도덕성, 선민의식이 낮아지고 있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여호수아는 110세까지 살았습니다. 여호수아는 애굽에서 태어나
40년간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나올 때 거의 40세에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진두에서 지휘할 때에는 거의
85세에 가까운 노인이었습니다. 이 노인이 가나안 정복을 끝내고 세상을 떠날 때가 110세이
므로 가나안에 들어온 지 약 2, 30년 정도 됩니다. 그렇다면 광야에서 태어나 광야에서 2,
30여년 살던 사람은 가나안 전쟁을 치를 때 20대, 30대의 전사들이었을 것입니다. 손에 칼을
들고 선두에 서서 나라를 위해 싸우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제 여호수아가 110세가 된 시점
이므로 약 30년이 지났습니다. 손에 칼을 들고 싸우던 20대, 30대가 이제는 50대, 60대로 다
접어 들었습니다. 기성세대가 된 것입니다. 전쟁을 아는 세대가 이제 그 나라의 중심이 된
것입니다.
그들을 앞에 놓고 여호수아는 죽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
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언약을 범하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하면 여호
와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리니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망하리라."(수
23:16) 지금 숨을 거두어야 하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지도자가 마지막으로 후손들에게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말을 하지 않고 왜 이런 불길한 말을 할까요? 거기엔 이유가 있습니
다. 여호수아가 볼 때 전쟁을 아는 기성세대가 영적으로 병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벌써 삶이
해이해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해서 냄새를 피우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대로 가다가는 나라가 망하겠기에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는 불안이 여호수아의 마음에 있
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이제 너희 중에 있는 이방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너
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수24:23) 기성세대가 집안에 우상을 갖다
놓고 살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의 눈이 파랗게 살아있는데도, 주변에 있는 잡족들이 섬기는
신들을 받아 자기 집에 갖다 놓았던 것입니다. 옛날에 광야에서 전쟁을 한참 치르는 긴장된
상황에서는 그런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살만하자, 배가
부르자, 돈이 많아지자 점점 해이해져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떠났습니다. 그래서 다른 신을
받아들여 우상을 집안에 갖다 놓고 남몰래 섬기며 가나안 잡족들이 하는 대로 부패한 행동
을 모방했던 것입니다.
이 정도로 순수성이 변질되고 세상과 타협하는 이중태도를 보이는 선배를 모범으로 생각할
후배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부모를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는 자손도 없습니다. 모범
이 없으면 감동이 따라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사기에 있던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이런 어
려움을 당했습니다. 앞서가는 세대로부터 감동을 받지 못했습니다. 계속되는 회의와 갈등 속
에서 비판 의식이 생기고, 그 다음에 그들을 거부하는 의식들이 계속 발전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어떻습니까? 오늘날 전쟁을 아는 기성세대는 참혹한 전
쟁을 치른 세대입니다. 극심한 가난을 딛고 일어나 그래도 세계에서 15위 안에 들어가는 경
제대국으로 발돋움을 할 수 있도록 한 썩는 밀알과 같은 세대였습니다. "잘 살아보세!"를 외
치면서 일만했을 뿐 여가가 없었습니다. 언제 취미생활을 했습니까? 언제 세계를 호흡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까? 일만하며 지금까지 살아온 세대입니다. 그러나 이 세대도 2, 30년
전부터 살만하고 여유가 생기고 사는 재미를 맛보자 변질되었다는 것을 우리는 시인합니다.
신앙이 삶을 지배하는 유일한 원칙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쟁할 때에는 신앙이 유일한 원칙
이었습니다. 가난할 때에는 오직 하나님만 믿고, 하나님의 영광만 위하겠다는 일념을 가지고
사는 어떤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가용을 타고 다니면서, 큰 집을 짓고, 여유 있게 살
고, 여가를 즐기며, 재산을 축재하면서 오직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만이 나의 삶을 유지한다
는 원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신앙과 생활이 따로 노는 모순을 보이기 시작했
습니다. 전쟁을 모르는 2세들이 볼 때 이것은 이중인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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