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류영모목사/타작 마당 (대하 3:1-2/마 3:1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1. 12. 17:28

류영모목사/타작 마당 (대하 3:1-2/마 3:12)
 


I. 타작마당 - 심판의 터

봄은 씨를 뿌리는 계절입니다. 여름은 가꾸는 계절입니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입니다. 봄에 씨를 뿌리고 여름내 곡식을 가꾸었던 농부는 가을이 오면 열매를 거두는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모든 농부에게 가을은 기쁨의 계절이요 은혜의 계절이요 풍성한 복의 계절입니다. 그러나 가을이 와도 거둘 열매가 없고 쌓을 곡식이 없다면 그는 불행한 농부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점에서 가을은 모든 사람에게 심판의 계절입니다. 하루에도 반드시 저녁이 있고 한해는 반드시 가을이 있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인생의 가을이 있습니다. 역사에도 가을이 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저는 타작을 하는 날이면 눈물을 흘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별로 살림이 넉넉하지 못했던 저희 집은 보릿고개를 넘기려면 동네 부잣집에서 쌀 빚을 얻어야 했습니다. 저희들은 이것을 장내쌀이라고 불렀습니다. 봄에 열 말 쌀 빚을 먹고 나면 가을 추수 때에 열 다섯말, 심한 흉년에는 스무말을 갚아야 했습니다. 추수를 마치고 나면 어머니는 쌀 빚을 갚기위해 쌀을 한 말 두 말 담습니다. 영문을 알길 없었던 저는 실컷 농사지어 놓고 왜 남에게 다 퍼주느냐고 우리는 뭘 먹고 사느냐고 됫박에 되어논 쌀을 엎으며 철없이 울던 기억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웃음이 나는 일이지만 그때 그 모습을 지켜 보는 누군가 있었다면 아마 처량하고 불쌍했을 겝니다.

생각해 보십시다. 역사의 낙엽이 지고 예수님께서 우리의 생을 타작하시는 그 날, 내 생을 쓸어 담고 담아도 하늘 곡간에 쌓을 것이 없다면 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다. 이 땅에서 낭비하다 끝낸 인생들과 하늘 곡간에 소중히 쌓았던 인생, 선악간에 반드시 하나님은 심판하십니다. 개인의 타작마당, 한 국가의 타작마당, 공동체의 타장마당, 역사의 타작마당이 반드시 우리앞에 다가옵니다.

오늘 설교 제목을 [타작마당]이라고 했습니다. 설교를 준비하기 전에 내 인생과 나의 목회가 지금 이 시간 주님의 타작마당에 선다면 나는 어떤 열매를 거둘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 이 시간 내가 주님앞에 선다면 어떤 열매를 가지고 주님 앞에 설 수 있을 것인가? 제가 목회했던 그리고 살아왔던 모든 인생을 전부 다 가마솥에 넣고 펄펄 끓여 진액으로 만들어 보았습니다. 오늘이 여러분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떤 열매를 들고 천국에 들어설 수 있을까요?

여기 타작마당이란 곡식을 추수하는 일정한 장소를 말합니다. 농부는 타작마당에서 알곡과 쭉정이를 골라냅니다. 알곡은 곡간에 쭉정이는 불에 태우기도하고 썩혀 거름으로 쓰기도 합니다. 모래가 많은 이스라엘 나라에서는 동구 밖에 땅을 다지고 또 다져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쓸 수 있는 타작마당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넓고 평평한 바위를 발견하면 그것을 타작마당으로 쓰기도 했습니다. 혹 농사가 많은 집에서는 개인 타작마당이 있기도 했습니다.

 

II. 구약의 타작마당 - 예루살렘 성전터

오늘 마태복음 3: 본문은 세례 요한의 말입니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어 불에 던지 우리라 내 뒤에 한분이 오실텐데 그분은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줄 것이고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케 하시리라 그러므로 기억하여 너희들은 회개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이 예수님을 각기 다른 모습으로 예언하고 소개해 줍니다만 여기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타작마당의 주인이라고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역대하 본문에 의하면 타작마당의 의미를 알려주는 구약의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울왕 시대에 소년 다윗은 블레셋의 명장 골리앗을 죽인 일로 단숨에 백성들의 주목을 끌게 됩니다. 길거리에서 아이들과 여인들이 노래를 하는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 왕권이 다윗에게로 넘어가는 것이 두려웠던 사울은 못내 견딜 수 없어 다윗을 몇 번이고 죽이려 합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호하시고 보호하여 마침내 왕위를 그에게 넘겨주십니다. 왕이 된 후에도 고난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 번은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이때 충복으로 알았던 아히도벨이 반란에 가담을 합니다. 시므이라는 사람이 도망가는 다윗을 조롱하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광야를 지나 감람산으로 도망가며 부끄럽고 부끄러워 머리를 가리고 맨발로 울며 울며 피난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 고난의 시절 다윗의 신앙은 순수하기만 했습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몹시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다윗은 성전이 그리워 울었고 하나님의 말씀이 듣고 싶어 울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모든 어려움과 역경의 세월이 끝나고 유대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루게 됩니다. 나라가 통일되고 왕권이 절정에 오르자 다윗의 마음에 교만이 생겼습니다. 급기야 다윗은 백성의 수를 계수하여 보고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이 일을 기뻐하지 아니하셨습니다. 나라를 다스리자면 인구조사는 필수불가결이란 일이지요. 또 인구조사는 광야에서는 이미 하나님이 명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인구조사를 몹시도 싫어하셨을까요? 인구조사를 했다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조사하게 된 다윗의 마음 깊은 곳, 동기가 문제였다는 말입니다.

어느날 다윗은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아 보라. 내 왕국이 얼마나 넓고 큰 왕국이 되었는가. 나는 이 엄청난 왕국을 만들지 않았는가. 내 나라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가 세상 사람들아 보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다윗,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고 살았던 다윗, 고난의 시간에도 행복의 시간에도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줄로 믿고 하나님 한 분에게 시선을 맞추고 살았던 다윗. 어느새 그 시선은 자기 백성에게 집중하기 시작했고 넓은 땅에 집중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대신 백성을 의지하고 싶었던 유혹이 생겼던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다윗의 위기요 문제요 범죄라고 성경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왕국을 내가 세우고 백성을 내가 낳은 양 교만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는 자신의 왕권을 의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다윗의 이야기 이전에 우리 자신의 이야기요 우리교회의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복음의 열정 하나로 시작되고 부흥되고 성장해 왔습니다. 오직 복음을 자랑하고 예수님만을 자랑하던 우리가 언젠가부터 교회의 규모를 자랑하고 급성장을 자랑하고 예배당을 자랑하고 있지는 않나 싶습니다.

여전히 복음 전도의 열정이 식지 않고 펄펄 끓고 있는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의 가슴에서 전도의 열정이 식었습니다. 전도지 한 장을 돌려도 내가 먼저, 돈을 없지만 건강한 내 몸둥아리 있다. 내 몸으로 뛰었습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내가 하지 않아도 잘들 돌아간다. 안일주의에 빠졌습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빈껍데기만 남았구나. 열매가 사라졌구나.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이는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난할 때 눈물로 기도하며 무릎으로 기고기며 주님을 섬기던 성도들 가운데 때로 밥술이나 먹고 집채나 가지고 있게 되자 신앙생활이 나태해지고 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어려울 때 진실하던 성도가 소위 출세하고 명예를 얻자 교만하고 거만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건 분명히 신앙생활의 위기요 확실한 범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타락한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선지자 갓을 보내어 세 가지 환란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했습니다. "왕이여 칠년 기근을 경험하시겠나이까 삼년동안 적에게 쫓기는 삶을 사시겠나이까 아니면 삼일동안 온역이 온 땅에 번져서 백성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겠나이까"(삼하24:13)

이때 다윗이 울며 회개하고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는 긍휼이 크시니 우리가 여호와의 손에 빠지고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원하나이다"

이 일로 온 이스라엘에 삼일동안 재앙이 내리고 칠만명이 죽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장로들과 더불어 굵은 베옷을 입고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하나님 범죄한 것은 이 못난 임금이 아니었습니까? 범죄한 것은 나 다윗이 아니었습니까? 주여 내 나라 백성에게는 제발 재앙을 내리지 마시옵소서"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는 천사에게 재앙을 멈추도록 합니다. 이때 여호와의 사자가 오르난의 타작마당 곁에 서서 말씀하십니다. "이 타작마당에서 여호와 앞에 단을 쌓아라" 그리하여 다윗은 오르난에게 상당한 값을 주고 타자작마당을 삽니다. 제사를 드렸더니 하늘에서 불이 떨어져 그 제물을 살라 받으십니다.

그 곳은 바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바친 모리아산 언덕이었습니다. 그 곳이 오르난의 타작마당이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바로 이 타작마당에 하나님의 사자가 임했습니다. 다윗은 고백합니다. "이곳은 여호와의 전이요 이스라엘의 번제단이로다" 고백함으로 바로 이곳이 예루살렘 성전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만 인간의 죄를 걸머지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하오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몸부림했던 자리가 바로 오늘날의 타작마당 모리아산 언덕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기서 자손만대의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곳을 하나님의 성전터로 삼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알곡과 쭉정이를 갈라놓는 타작마당이 되게 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을 만났고 눈물로 회개하고 용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제단을 쌓고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자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III. 신약의 타작마당 - 그것은 오늘의 교회

여기 타작마당은 구원의 장소입니다. 심판의 자리입니다. 예배가 있는 곳입니다. 하나님이 임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우리가 함께 맛보는 곳입니다. 회개하고 용서받는 곳입니다. 이제 결론은 자명해졌습니다. 타작마당은 바로 오늘의 교회를 의미합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 예배를 드리는 예배의 자리가 타작마당입니다.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한소망교회가 타작마당입니다. 여기서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집니다. 이 교회를 어떻게 섬겼느냐 하는 것이 하늘 곡간 수확과 열매의 바로메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될 일이 있다면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까지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교회는 언제나 미래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교회, 가장 순수한 교회, 가장 영광스런 임재를 맛보는 예배, 주님이 기뻐하는 가장 아름다운 교회는 주님 오시는 그 시간까지 만들어지지 않는다. 끝까지 아름다운 교회를 만들라는 얘기가 아닐런지요?

주일은 타작하는 시간입니다. 일주일동안 사는 것을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나 안믿는 사람이나 별로 크게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주일 아침이 되면 갈라집니다. 교회 가는 사람과 세상으로 가는 발걸음이 갈라집니다. 천국과 지옥이 갈라집니다. 그래서 주일은 갈라지는 시간, 타작하는 시간입니다.

예배하는 이 자리가 하나님이 타작하는 시간입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쭉정이로 버림받는 사람이 있고 알곡으로 천국으로 거둠받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면서 한 가지 결단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서는 그 시간까지 타작마당되는 교회를 내가 해치지 않을 것이다. 교회를 해하는 일은 바로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니만큼 교회를 언제나 유익하게하는 자리에 서리라. 나는 내 인생의 신앙의 주사위를 예수 편에 서리라 교회 편에 서리라" 여러분 결단하시기를 부탁합니다.

오늘 본문 역대하 3장 1절 2절을 보십시오. "솔로몬이 예루살렘 모리아산에 여호와의 전 건축하기를 시작하니 그곳은 전에 여호와께서 그 아비 다윗에게 나타나신 곳이요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 다윗이 정한 곳이라" 그랬습니다.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던 모리아 산과 다윗이 회개하고 재단을 쌓던 타작마당과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진 장소가 꼭 같은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교회, 하나님의 성전은 -
* 주님이 피흘려 자신을 바친 자리에 세워집니다.
* 회개하고 용서받은 감격에 울고 구원받은 감격에 울며 쌓는 제단위에 세워집니다.
* 가장 소중한 이삭을 바치는 성도들의 희생위에 세워집니다.
* 다윗의 헌신과 솔로몬의 지혜로 세워집니다.

그래서 그곳은 하나님의 사람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는 타작마당이 됩니다.

 

IV. 심판의 타작마당 - 구원과 심판의 갈래 길

이 타작마당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타작마당 주인으로 오셨습니다. 다시 타작하시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실 것입니다. 그런점에서 교회는 구원의 장소인 동시에 심판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농부가 타작마당에서 일꾼들에게 말합니다. "가라지 먼저 거두어 불 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어라" 지금은 가라지도 자라고 곡식도 자랍니다. 그러나 타작마당 주인이 오시면 가라지는 불구덩이에 알곡은 천국 곡간에 모아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타작마당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때까지 때로 교회를 섬기기가 힘이 들 것입니다. 그래도 견뎌야 합니다. 가라지를 속히 뽑아 버리고 싶은 열망이 있어도 참아야 합니다. 마지막 때 추수 때는 갈라지는 때입니다. 양과 염소가 갈라지고 알곡과 쭉정이가 갈라지고 기름 등에 넉넉히 준비한 사람과 등잔만 들고 따라다녔던 껍데기 신앙인들 종교인들이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학자들은 종말의 때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난다고 그랬습니다. 경제만 봐도 그렇습니다. 지구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가난에 굶주리고 있습니까? 부를 축적할 모든 기회를 지금 박탈당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또 한편에서는 눈만 뜨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기회를 창출해 가고 있습니다. 국가도 갈라집니다. 잘사는 나라와 못사는 나라가 선명하게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교회도 갈라지고 있습니다. 놀라운 부흥을 체험하는 교회들이 세계도처에 지금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교회들은 무서운 침체를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에 부흥의 불길을 일으킬 것인지 침체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며 신앙생활할 것인지 우리가 주님앞에 기도하고 결단하고 소원해야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들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아름답게 쓰임받는 성직자들과 주님으로부터 버림받는 성직자들이 지금 갈라지고 있습니다. 교회 중직자들이 장로들이 갈라지고 있습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겸손히 섬기는 순수한 장로님들과 세속에 오염되어지고 물들은 장로님으로 갈라지고 있습니다. 알곡 성도들과 쭉정이 성도들이 나누어지는 때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추수 때는 갈라지는 때입니다.

타작마당이 펼쳐질 날이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농부는 키를 가지고 악곡과 쭉정이를 갈라놓습니다. 이 타작마당에서 가인과 아벨이 갈라졌고 에서와 야곱이 갈라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영접한 사람들과 형식적으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이 선명하게 갈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알곡은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 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바람부는대로 물결치는대로 세상욕심을 따라 살아갑니다. 자기 고개들고 살아갑니다. 아름다운 열매맺지 아니하는 자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 열매가 있으면 알곡이요 열매가 없으면 쭉정이지요. 등에 기름준비되어 있으면 알곡이요 등에 기름준비되어 있지 못하면 쭉정이지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사와 환경가지고 맡은 달란트를 가지고 열매를 남기면 알곡이요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고 세상에 끊임없이 욕망에 이끌려 살아가면 쭉정이지요.

쭉정이는 가라지와 또 다른면이 있습니다. 가라지는 뿌리부터 출발부터 다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쭉정이는 그렇지 않습니다. 알곡과 같은 뿌리 같은 나무 같은 줄기에 달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야할 알이 차지 못해서 속이 차지 못해서 쭉정이가 되고 만 것입니다.

깊이 명심하십시오. 똑같이 신앙생활하고 똑같은 교회를 다녔지만 주님의 타작마당에서 버림받는 쭉정이 신자가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자신은 열매라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열매, 좋지 못한 열매가 있습니다. 이런 열매들은 대게 성도 공동체에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때로 몸된 교회를 해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전도에 방해가 됩니다. 빛이 되지 못하고 소금이 되지 못합니다. 구원에 열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단에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라지, 쭉정이, 못된 열매, 이것들은 타작마당에서 한결같이 버림을 받습니다. 이것들을 타작하는 키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 하나만 의지하고 십자가를 가슴에 품고 예수만을 신뢰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알곡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 내 몫의 십자가 버리면 쭉정이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몸된 교회를 유익하게 할 수록 알찬 알곡이 되는 것이지요.

옛날 시골에서 어머니들이 키질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타작 다 끝내놓고 난 다음에도 한 톨 알곡이라도 버림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키에다 껍데기를 다 담습니다. 그리고 흔들어요 그것을 높이 치켜들었다가 바람을 일으키고 다시 흔들고 다시 바람을 일으키고 바람을 일으키면 일으킬수록 흔들면 흔들수록 알곡은 주인의 가슴으로 자꾸 파고 들어옵니다. 그런데 쭉정이는 자꾸 날아가요. 한 번 흔들면 하나 날아가고 바람 한 번 일으키면 두 개 날아가요. 고난을 키 삼아 하나님이 흔들어 보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직분으로 흔드십니다. 세상 유혹이 나를 흔듭니다. 교회생활로 흔듭니다. 시련이 강하면 강할수록 교회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성령의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알곡은 주인의 가슴으로 파고 들어옵니다. 교회 중심자리로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쭉정이는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난의 바람이 한 번 불어오면 날라가는 쭉정이들 교회 신앙생활에 조그마한 유혹과 시험이 있으면 날라가는 쭉정이들 하나님 앞에 버림받습니다.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아라.

본문의 결론이 무엇입니까? 쭉정이 신앙 회개하라. 잘못된 열매 회개하라. 열매맺지 못한 신앙 회개하라는 얘기가 아닌지요.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처럼 자기 마음을 가볍게 하는 것은 없다." 여러분 고집부리지 마세요. "제가 잘못했어요 하나님" 간단히 인정하세요. 깨끗하게 인정하세요. 여러분의 마음이 하늘을 향하여 날아가게 될 것입니다. "너희가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너희가 유쾌함을 얻게 되리라" 할렐루야.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미루지 마세요. "밤 11시까지 기다렸다가 열매맺어 보겠다는 사람은 10시 반에 죽는다. 인생 종착점 12시에 회개하겠다는 사람은 11시 반에 죽더라" 그랬습니다.

과거정권의 한 대통령에게 조찬기도회 때마다 목사님들이 전도를 했더랍니다. "어릴 때 주일학교 나가셨다죠. 각하 이제 예수믿으십시오. 교회 나가십시다.” 그럴때 마다 대통령은 "그렇지 않아도 내가 대통령 자리에서 내려오면 교회 나갈려고 마음을 먹고 있다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부하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가시더라구요.

우리 주님 오십니다. 반드시 오십니다. 그 날이 역사의 타작마당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와서 내가 은혜받고 좋은 말씀듣고 기도하여 응답받고 기쁘고 행복하게 신앙생활했다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잎사귀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합니다. 잎사귀는 맛난 열매를 맺기위해, 건강한 나무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뿐입니다. 타작마당에서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은 열매입니다.

 

V. 전도 - 타작마당에서 셈하는 열매

성경에 보면 입술의 열매가 있습니다. 입으로 저주하고 원망하고 불평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해치면 악한 열매가 맺혀지게 되는 것입니다. 복음전하고 칭찬하고 격려하고 찬양하면 선한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손의 열매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손으로 하는 일들에 봉사의 열매가 있습니다. 의의 열매가 있고 빛의 열매가 있고 마음의 열매가 있고 긍휼의 열매가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 보면 성령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 모든 열매 중 천국에서 가장 소중한 열매 영광스런 열매는 "전도의 열매"입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전도의 열매가 천국에서 우리가 쓰게 될 면류관이라고 애기했습니다.

전도의 열매는 천국을 행복하게 하는 열매입니다.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천국에서는 잔치가 벌어진다고 했습니다. 끊임없이 천국을 행복하게 하는 열매가 전도의 열매입니다.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살리는 열매가 전도의 열매입니다. 교회의 성장없이 하나님 나라의 성장없습니다. 교회성장을 위해서 여러분들이 공헌했다고 하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열매가 전도의 열매입니다. 전도해 보십시오. 구원의 감격이 회복되어집니다. 침체된 신앙이 되살아납니다. 이 교회가 내 교회가 되고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이 교회를 통하여 열매를 맺게되는 것입니다.

전도의 열매가 풍성해지면 예배가 새로워집니다. 여러분 오늘 전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만 전도한 사람들 옆에 함께 앉아 예배 드려보면 그 시간에 전에없는 은혜가 넘치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 예배를 통하여 영광스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배시간 때마다 방문자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오면 이 교회가 새로워집니다. 그 자리에 성령이 불로 임하여 재물로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이 가을에 알찬 열매가 되라 말씀하십니다. 너만을 위한 신앙생활 말고 남을 이롭게하는 열매 신앙인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풍성히 생명을 거두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명령이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VI. 맺으며

얘기 하나로 말씀을 맺습니다.
OOO저 「부요한 구원 가난한 구원」이란 책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에 선 사람들 앞에 저마다의 커다란 짚더미가 있더랍니다. 모든 짚더미에 불이 붙습니다.

● 이 땅에서 큰 부자로 살고 남다른 명예를 누리며 부럽잖은 권세를 누린 어떤 사람의 짚더미는 대단히 컸습니다. 그러나 불이 붙자 부귀영화가 모두 불에 타 버리고 남은 것이라곤 재 밖에 없었습니다. 설사 그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가난한 구원, 부끄러운 구원을 받은 사람이지요.

● 또 어떤 사람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은 짚더미였지만 잠시 불이 붙는듯 했으나 그의 더미는 금은 보석으로 가득차 있어 심판의 불이 그것들을 사를 수 없었습니다. 교회를 섬기고 이웃을 섬긴 보석 - 복음을 위해 수고하고 핍박을 받았던 금과 같은 믿음, 그의 최후의 타작 마당은 부요한 구원, 영광스런 구원이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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