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패니 크로스비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 30. 10:19

1월의 묵상

 

그러나 사람이 무엇이기에 하나님께 감히 말대답을 합니까? 만들어진 것이 만드신 분에게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하고 말할 수 있습니까? -롬9:20-

 

패니 크로스비(1820-1915)는 19세기 말 미국의 선교자, 교사, 그리고 구원사역자로 특히 시인, 찬송가 저자로 크게 활동한 분입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새찬송가에는 ‘인애하신 구세주여(279)’,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 ‘저 죽어가는 자(498)’ 등 20 여곡이 실려 있습니다. 그녀는 전성기에 찬송시 청탁을 받을 때는 일주일에 6,7편의 찬송시도 쓴 일이 있다고 합니다. 너무 많이 발표하여 한 찬송가집에 같은 저자의 이름을 넣을 수가 없어 그녀가 가진 익명은 200개가 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불행한 일생을 보냈습니다. 태어난 지 6주 만에 감기로 눈에 염증이 생겼는데 겨자찜질을 하면 낫는다는 동내 의사의 말을 따랐다가 시신경 손상을 입어 맹인이 되었습니다. 거기다 그녀의 의붓아버지는 그 해에 돌아가셔서 어머니와 외할머니의 도움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5살 때 안과에 권위 있는 의사에게 진단을 받았는데 영원히 시력을 회복할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합니다.

 

외할머니는 엄격한 청교도 신자로 그녀가 8살 때부터 매주일 5장씩 성경을 암송하게 했는데 그녀가 15살 될 때에는 4복음과 모세의 오경, 잠언, 전도서, 그리고 대부분의 시편도 암송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5살에 그녀는 국비로 경영하는 미국맹인학교(NYIB; New York Institute of Blind)에 들어가 피아노, 오르간, 소프라노 보이스 레슨도 받았습니다. 18살 때 어머니는 재혼하고 그 남편은 크로스비가 24살 때 그녀의 부양을 포기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26살부터는 모교의 강사로 있게 되었습니다. 1858년(38세) 때 같은 학교의 맹인 교수와 결혼하고 이듬해 딸을 출산했는데 낳아서 얼마 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 때 지은 찬송이 ‘주 예수 넓은 품에(417)’입니다. 두 사람의 수입으로 편히 살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어려운 동내 셋집에서 살았으며 남을 돕는 일을 많이 했습니다. 60세 때부터는 서로 별거하고 지내다가 남편을 먼저 천국으로 보내고 자기도 95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떴습니다.

 

그녀는 세상을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할만한 많은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코 그러지를 않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맹인이 된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말했습니다. “만일 내일 내 시력이 회복된다 하더라도 나는 받아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세상의 아름다움에 현혹되었다면 나는 지금처럼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제가 천국에 가서 맨 먼저 보고 기뻐할 얼굴은 내 구주 예수의 얼굴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감사하게 받아 누리다가 우리 구주 예수의 얼굴을 대면하며 만나보는 기쁨으로 사는 것이 기독교인의 인생이 아닐까요?

 

기도:

하나님,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만들어진 대로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며 살다 가고 싶습니다. 아멘.

 

Fanny Crosby(1820.03.24.-1915.02.12.)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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