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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배우 송채환의 새벽과 골방의 눈물 이야기 - 간절히, 전심으로 주를 바람으로써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 31. 07:40

 

배우 송채환의 새벽과 골방의 눈물 이야기

 

간절히, 전심으로 주를 바람으로써

 

 

 

 

기독영화 ‘소명 4 - 하늘의 별’(감독 신현원)의 내레이션을 녹음하던 날, 스튜디오 안의 송채환은 틈만 나면 울었다. 송채환의 흐느낌은 스튜디오 바깥의 감독이 큐(cue)와 오케이(ok) 사인을 번갈아 던지는 이 틈과 저 틈 사이에서 봄비처럼 촉촉하였다. 만화영화 주인공 캔디를 닮은 눈망울 속에 그렁그렁 그득하던 눈물은 둑을 넘는 물처럼 결국 넘쳐흘렀고, "아멘, 오 주여" 하는 영적 화답의 감탄사도 봇물이었다. 필리핀 빈민촌에서 선교하던 중 괴한의 총탄에 순교한 고 조태환 선교사와 그 가족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에서, 소천한 남편을 대신해 강단에 선 사모가 격정을 견디지 못하고 오열하며 주저앉을 때, 송채환의 눈물은 절정이었다.

 

다만 내레이터 송채환의 흐느낌과 감탄사는 영화에는 편집돼, 마침 현장에 있던 기자와 신 감독과 몇몇 스태프만 보고 들을 수 있었다(송채환의 스튜디오 눈물 장면은 소명 4 블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울어본 사람만이 우는 사람의 심정을 아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울음의 색깔이 다름을 보고, 때마다 간기가 다른 눈물을 맛본 사람이라야 눈물마다의 근원과 이유를 헤아리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은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본 사람이라야 인생을 안다고 하는 것일까. 어려서 많이 가난했고, 이미 다섯 살 때 병상의 엄마를 잃을까봐 운 기억을 가진 송채환은 그런 면에서 인생을 아는 배우다. 나아가 그녀는, 자라서 주님을 깊이 만나 맛본 심령의 가난 덕분에 인생보다 큰 천국을 알고 소유하였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게 가난한 자의 것이기 때문이니까(마 5:3).

 

글 이한민 / 사진 도성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3).

 

오직 이 말씀 붙잡고 울부짖는데, 그 비밀한 일은 영적으로 순결한 신부만이 신랑이신 예수님께 들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1968년 5월생으로 서울예대 연극과를 나왔고, 1991년 임권택 감독의 영화 ‘장군의 아들 2’에 출연할 신인 주연 여배우 공개 모집에 무려 2314대 1로 뽑혀 신데렐라처럼 배우의 꿈을 이룬 송채환은, 시청자에게 서민 연기를 특히 잘하는 tv 연기자로 오래 기억돼 왔다. 그 중 대표 출연작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1996년에 65.8퍼센트라는 놀라운 시청율을 기록했던 드라마 ‘첫사랑’일 것이다. 배용준(성찬우)과 최수종(성찬혁)의 누나 찬옥 역을 맡은 송채환이 두 남동생의 밥을 차리고 생선살을 발라준 다음, 동생들이 다 먹고 방을 나가자 살 한 조각 남지 않은 생선뼈를 쭉쭉 빨던 장면에서 숨죽여 흐느꼈다는 시청자가 무척 많았다. 이후 1년간 송채환은 가는 식당마다 밥값을 면제(?)받았고, 방송국엔 방방곡곡의 생선박스가 답지했다고 한다.

 

그건 사실 10대 시절 송채환 가정의 실제 풍경이었고, 그래서 연기라기보다 삶의 재현에 가까웠던 것인데, 사람들은 생닭의 목을 비틀고 요리하는 장면까지 직접 해내는 그녀의 생생 연기에 놀라고 감동하였다. 어려웠던 시절, 여유보다 가난을 먼저 경험한 세대에게 공감과 위로가 된 까닭이었다.

 

소명 영화 내레이션을 녹음하며 흘린 눈물도 그녀에게는 역시 실제 삶이고 신앙이었다. 새벽마다 쌓은 기도이자 몸으로 경험한 성령님 사랑의 용해액이었다. 1988년에 결혼한 박진오(영화감독) 사이에 딸 소울(10살)과 아들 예성(8살)을 낳고, 친정부모님을 한 집에 모시고 산다는 송채환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묻고 들었다.

 

어릴 때 처음 크게 운 적은 언제 어디서였는지요?

 

서울 은평구 응암동에서 나서 자랐고 2남 2녀 4남매 중 위로 오빠 둘, 제가 셋째, 여동생이 있는데요, 지리산 산청 출신 아버지는 아버지 일찍 여의고 배고파 해병대 지원을 하셨대요. 운전병으로 근무한 게 평생 버스 운전을 하신 계기가 됐죠.

 

제가 다섯 살 때, 심장수술을 한 어머니가 속에서 피가 터져 죽을 것 같으니까, 평소 예뻐하던 딸을 엄마 죽기 전에 보여줘야겠다, 아버지가 생각하셨대요. 그래서 부랴부랴 집에서 저를 병원으로 데려와 우겨서 중환자실에 데리고 들어갔는데, 제가 본 병상이 흰색이 아니라 온통 빨간색이었어요. 엄마 피였던 거죠. 집에 돌아올 때까지 엄마 엄마 소리 지르며 울던 기억이 나요. 지금 나이 50 된 큰오빠가 엄마 생일 같은 날 모여 그때 일 다시 말할 때 "소연이 어릴 땐데, 기억이 맞다"고 신기해해요. 그리고 "우리 예쁜 엄마 살아줘서 고마워요"라며 엄마 품에 아기처럼 기대거든요. 아, 소연이가 누군가 하면, 제 본명이에요. 권소연. 송채환은 예명이고. 예명 누가 준 건진 나중에 이야기하죠.

 

서울 출신인데, 말투는 부산 사람 같습니다.

 

아빠가 사고로 1년간 여러 번 피부이식수술로 고생하고 엄마도 계속 아프고 하니까 서울이 지긋지긋해지셨나 봐요. 이듬해 아는 사람 없는 부산으로 이사 갔기 때문인 거죠. 범일동 방죽에 똥물 흐른다고 똥천강으로 부른 동천강 옆 마을이었어요. 그것도 지대가 낮아 가난한 사람이 몰려 사는 판자촌. 지그재그로 누워야 4명 자는 방인데다, 자식 둘이라 속였다고 주인이 하도 성화라 진주 사시는 친할머니 집에 저만 남기고 보내기도 하고….

 

저는 어려서부터 ‘소연아’ 부르면 금세 ‘네’ 하고 대답 잘 답하고, 한밤중에도 "소연아, 끙" 하고 엄마가 깨면 따라 일어나 "어디 아파" 하고 물 갖다드리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조물조물 주물러주니까 저 예쁘다고 데리고 계셨던 거죠. 열 손가락 물면 다 아프지만 강도는 좀 다른 것 같죠? 엄마 몸이 좀 나아지면 제첩국 장사하고 남의 집살이하고, 아빠는 배운 게 운전뿐이라 경남버스 기사가 되어 새벽에 나가면 새벽에 들어오곤 하셨죠. 엄마가 수구레 장사도 했는데, 수구레가 뭐냐면 소고기 겉가죽 벗기고 남는 질긴 부위 푹 고아서 먹는 거예요.

 

모친이 여러 번 아프셨다고요.

 

평생 배를 네 번 가르셨어요.

제가 10살 무렵, 어머니가 특히 아프셨어요.

 

신장이 나빠지고 후두는 붓고 물도 못 넘기는데, 이 병원 저 병원 다녀도 병명이 안 나와요. 병원에선 힘들 것 같다는 진단 떨어지고 서울 외할머니 내려오고, 진주 친할머니도 며느리 죽는다고 보러 왔어요. 보니까 기가 막혔겠죠? 그때 15, 12, 10, 8살짜리 네 자식 놔두고 며느리 죽으면 혼자 지방 운전 다니는 아들 어쩌나 싶으셨는지, 친할머니가 엄마 죽기도 전인데 새엄마라고 구해 보냈어요. 집에 어떤 여자가 기웃대던 기억이 나요.

 

수구레 장사 하던 아줌마들이 저를 불러요.

"야야, 소연아, 너그 엄마 죽는다꼬 너그 친할매가 새엄마 데꼬 온다 아이가. 퍼뜩 병원 가가 엄마 데꼬 온나! 안 그라모 너 새엄마랑 산데이."

 

나는 새엄마랑 살기 싫다고, 울며불며 엄마 팔에 링거 주사 꼽은 채로 집에 모시고 왔어요.

어차피 병원에서도 손 더 쓸 거 없다고 했으니까, 엄마도 집에서 죽고 싶다 그래서.

그리고 엄마 살린다고 집에 무당 불러 굿을 했어요. 굿할 때 무당 시키는 대로 줄 붙잡고 있으라면 밤새 붙잡고 있고. 그게 엄마 목숨줄이라나?

집 온 구석에 부적 붙이고 만 가지 민간요법 써봤는데 다 안 돼요.

 

그러던 어느 날, "소연아!" 엄마가 불러요.

"집에 있는 부적 다 떼가 아궁이에 태워버리라."

그러더니 기가 막힌 말씀을 하세요.

"나 교회 데리고 가도."

 

 

 

누가 어머니를 전도했던 겁니까

 

아뇨. 사실은 제가 모태신앙이에요. 저희 친가가 죄다 불교라 엄마가 시집 와서 핍박 많이 받았대요. 저 뱃속에 있을 때 서울 응암동 어느 교회 다니셨는데, 시집 살다 교회 떠나고 믿음 다 잃고, 아프고 고생하던 그 무렵에 동네 교회 종소리가 들리더래요. 수요일 저녁에도 주일 아침에도, 새벽마다 종소리는 울리는 거예요. 잊었던 신앙이 살아나셨던 거죠.

 

교회는 왜 가냐고 처음엔 반대하던 큰오빠랑, 저야 무조건 엄마 하자는 대로 했으니까 링거 바늘 꼽은 채로 엄마 모시고, 처음 교회 들어간 때가 새벽이었어요. 주일이 아니었던 것이죠. 지금도 그 동네 교회 건물은 그대로인데, 본당 뒤에 큰 기둥 2개가 있거든요.

 

기둥 한 쪽 뒤에 몸 가리고 담요 두르고, 제가 링거 들고 있으면 엄마는 울며 기도했어요.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저 좀 살려주세요!"

그러면 저도 울면서 따라 했지요.

 

"울 엄마가 잘몬했다 안캅니까?! 그라이까네 하나님! 우리 엄마 좀 고마 살려주이소!"

 

그리고 한 반년 지났나? 하나님이 살려주시더라고요. 그 어머니, 지금도 저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새벽 3시 반, 4시면 눈이 떠집니다. 엄마에게 기가 막힌 유산을 받은 것이죠. 새벽기도는 그래서 지금도 제가 사는 생명줄이에요. 제 기도는 그 새벽에 시작되었거든요.

 

집이 일산 파주에 있는데, 용산에 있는 출석 교회까지 차 몰고 왔다, 다시 가서 아이들 밥 먹이고 학교 보내고 그래요. 엄마 처음 새벽기도, 철야예배 할 때도 제가 식구들 밥 해먹였는데, 병원도 식구도 남편도 포기했지만, 하나님께선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말씀하시고 생명 연장시켜주셨거든요. 그 하나님이 저도 우리도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연기자 되려고 서울 유학을 왔어요?

 

그때 부산 가난한 집 여자애들은 고등학생 되면 운동화 공장 취직하는 분위기에요. 전 싫더라고요. 배우되고 싶어서요.가족 다 반대하는데 엄마만 기도해주겠다는 말에 힘내고 외할머니 있는 서울 난곡 외삼촌 집에서 눈치보고 몇 달 살다가, 이문동 휘경역 삼천리연탄 공장 부근에서 자취하고 고등학교 다녔어요. 그때 키가 160, 지금 제 키인데, 방 높이는 140센티미터. 그래도 감사해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동네 교회 찾아 등록하고, 대학 갈 때까지 새벽기도 나갔죠. 라면 하나를 반으로 쪼개 몇 년을아침저녁 죽처럼 끓여먹으면서도 배우 되겠다는 꿈만은 쪼개지 않았거든요.

 

남산 서울예대 들어가, 출근길에 호암아트홀 전단지 뿌리면 5천 원, 수업 후 명동에 포스터 붙이면 8천 원. 그렇게 번 돈으로 대학 다니는데, 학교에서는 사투리 빼면 연기는 잘한다고 저 많이 밀어주셨어요. 졸업 앞두고 mbc 19기 탤런트 공채 최종 면접 앞두고 엄마 아버지 부천 지하방으로 올라오시라 했어요.

 

교수님이나 저나 ‘당근’ 될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떨어졌어요. 발표하던 날 학교 갔다가 불합격인 거 알고, 수업 포기하고 20미터 채 안 되는 교문 벗어나기가 왜 그리 먼지. 영락교회 강대상 밑에서 혼자 데굴데굴 굴렀어요. 이럴 거면 왜 배우 될 믿음 주셨는가 하면서.

 

 

배우 된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졌습니까

 

공채 보기 전 겨울, 고등부 교사 하면서 아이들 여덟 명 데리고 전도사님이 봉고차 운전하고 2박3일 한얼산 기도원 갔어요. 전 죽기살기였어요. "배우 시키시려면 살려 보내시고, 안 시키실 거면 여기서 데꼬 가이소!" 하고.

 

주일 새벽 3시쯤 됐나? 난 더 기도하고 싶은데 전도사님이 눈 내리기 시작하니 쌓이면 못 내려간다고 빨리 가재요. 애들 소집해 태우고 전도사님 운전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는데 "어, 권 선생, 브레이크가 말을 안 듣네!" 그러시는 거예요! 헤드라이트 불빛 끝에 낭떠러지가 보여요. "오 주님, 저 이제 갑니데이!" 누가 봤음 미쳤다 했겠지요. 그런데 덜커덕, 바퀴 하나가 벼랑 끝에 걸려 다 살았어요. 저는 배우 되는 게 확실해진 거죠! 그런데 떨어졌으니….

 

당장 할 일이 없더라고요. 시청앞 직업소개소를 찾아갔어요. 돈 벌어야 하니까, 부잣집 가정부로 들어가 살면 가장 좋겠더라고요. 소개소에선 "아가씨 같은 사람은 이런 데 오면 안 돼" 하더니 "때밀이로 아파트 산 처녀가 있다는데 가서 배워볼 테냐" 하며 미아리 삼양시장 꼭대기 청수탕 연락처를 주더군요. 나라고 못할 게 뭐 있어요? 갔지요.

 

한 달쯤 지났나? 선배 언니가 신문을 보여줘요.

"소연이 너 배우가 꿈이었다매? ‘장군의 아들 2’ 여배우 뽑는다고 광고 났네. 가봐라."

빽 없고 돈 없어 포기했다니까 등 떠밀어요. 1차에서 3차까지, 이력서 주소란에 목욕탕 주소 쓰고 목욕탕에서 합격통지서를 다 받았어요. 제 수험번호가 2055번. 힐튼호텔에서 방송국 신문사 기자 다 있는 데서 최종 면접 보는데, 저는 성경책 들고 가서 읽으며 기다렸어요. 어차피 이제는 다 내려놓고 주님만 바라보는 상태가 된 거니까. ‘2055번 송채환!’ 부르는데, ‘송채환이 됐나 보네. 나는 역시 아닌가봐. 그런데 번호는 같네.’ 무심코 낙심하려는데 진행자가 뛰어와요. 빨리 올라오라고, 너 이제부터 송채환이라고. 임권택 감독님이 권소연 이름 배우로는 안 좋다고 방금 지어주신 거라고!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니었던 모양이네요.

 

하루아침에 세상이 바뀌는데, 영화 나오고 d전자 광고 몇 편 찍고 지하집을 지상으로 옮겼어요. 십수년간 이상한 일 안 하고 오직 드라마와 광고만으로 수십 억을 주시더라고요. 조연이라도 주연급 개런티 받고 일주일에 여섯 편 찍은 적도 있고, tv 틀면 어디나 송채환 나온다는 말 들었으니까. ‘올인’ 찍을 때 제주도 가면 이병현 송혜교 있는데 저 먼저 찍고 돌아가게 해주고. 그래서 저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말 계시나보다 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삶의 목표가 예수 아닌 돈이 되어버렸고, 신앙은 주일에 교회 가면 그만이라는 식이 되더라고요. 그러다 어떤 계기로 일순간에 그게 모두 사라지니까 우울증으로 실제 자살 시도까지 했어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가장 우선인데, 그 관계가 없어지니 그 자리에 돈이 들어오고 교만해진 결과였지요.

 

그런 점에서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cbs 새롭게 하소서 진행을 할 때 다시 하나님을 만날 기회를 놓친 것이었어요. 믿음 좋은 분들, 훌륭한 목사님들 만나 이야기 들으면 저까지 그런 사람이 된 것 마냥 착각하는 것이죠. 지나고 보니까 물질 주시면 주님 위해 어찌 쓰겠다 서원한 것도 말뿐이었고, 제가 다 거짓말쟁이였어요. 정말 골방에서 친밀하게 주님 만나고 성령 안에서 예배자 되고, 내가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이 나를 위한 게 아니라 주님 위한 것이 돼야 하는데, 그러지 않으니 마치 나의 열심이 실제 나의 신앙인 것처럼 포장되고, 주님은 핑계일 뿐 사실은 나를 위하다보니, 상황 나빠지니까 와르르 무너졌던 거예요.

 

광야에서 어떻게 다시 주님을 만나게 되었을까요

 

다시 새벽을 깨우는 것이었어요. 주님이 신앙 멘토를 붙여주셔서 깊은 우울증에 사로잡힌 저를 날마다 찾아와 기도해주시고, 그 분도 부자는 아닌데 기름 넣으라고 제게 돈을 주셨어요. 그 돈으로 차 몰고 새벽기도를 왔다니까요. 이른 새벽부터 고래고래 "주여 주여 살려주세요" 목쉬도록 외치니까, 목사님이 깨서 제 뒤에서 기도하곤 하셨거든요. 주님 부를 일밖에 정말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이라"(렘 33:3). 오직 이 말씀 붙잡고 울부짖는데, 그 비밀한 일은 영적으로 순결한 신부만이 신랑이신 예수님께 들을 수 있는 것임을 깨달았어요. 몇 달을 그렇게 울고 회개하고 얼마나 기도에 매달렸는지 몰라요.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진짜 제 귀에 성령님 음성이 들려왔어요.

 

"채환아, 내가 너를 사랑한단다."

"정말요? 이 쓰레기 같은 저를요"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물으니까 답을 주셔요.

 

"네 딸과 아들, 소울이와 예성이를 네가 사랑하지 않느냐? 네가 그 아이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너를 더 사랑한단다."

 

그러시고 저를 뒤에서 꼭 안아주시는데요, 정말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그 아무도 없는 새벽 예배당에서 누군가 저를 그렇게 안아주시는 걸 체험했어요. 성령님, 하나님이셨죠.

그건 저 말고는 아무도 몰라요.

 

우울증이 너무 심할 때는 마귀가 제 아이들 죽이고 너도 죽으라고,

구체적으로 베개로 입 틀어막으라고 귀에다 말할 정도로 치사하고 간사하게 저를 묶던 사탄이 떠나가고, 주님이 저를 살리시고 승리하셨어요!

 

 

 

주님 붙잡고 사는 길은 역시 골방의 기도였군요.

 

기도는 하면 돼요. 안 해서 문제인 거예요. 낙담하고 쓰러져 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아무것도 할 게 없어도, 기도를 통해 살고자 하는 영으로 전환되면, ‘그러므로’ 이겨요. 우리가 포기하면 주님이 도와주고 싶어도 안 되거든요. 하지만 기도로 살면, 우리 영이 성령님으로 충만하면 골짜기 지하에 들어가도 살아요. 그런데 그냥 지하에 머물면서 금 나와라 뚝딱? 그거 안돼요. 착각이죠. 주님 앞으로 한 걸음 나와야 하더라고요.

 

기도제목을 말씀하신다면

 

예수님 잘 믿고 살다 주님 부르실 때 잘 가는 것이죠. 아이들도 어차피 제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하나님께 올려놓고 가는 건데, 가족과 엄마는 물론 아빠도 엄마 따라 예수 잘 믿다가 하나님 나라 부르실 때 잘 가시게 되는 게 기도제목인 거죠. 덧붙이면, 주님을 더욱 사랑한다면, 정말 이 마지막 때에 골방에서 기도하는 시간을 늘리는 거예요. 삶의 현장에서 마귀 역사가 크면 주님 역사는 더 크시니까, 그런 믿음으로 주님 다시 오실 날 기다리니까 불안해할 필요도 없고, 마라나타, 주님 빨리 오실 날 소원하며 헌신하는 것이죠.

 

출처 : 삶과 신앙
글쓴이 : 스티그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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