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訴訟]=자유 평등 정의

[시론] 정치의 사법화, 그 속된 권력 / 한상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2. 15. 12:50

 

[시론] 정치의 사법화, 그 속된 권력 / 한상희

경향신문 등록 : 2014.02.13 19:08수정 : 2014.02.14 16:45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한국에서 정치는 유독 법원에서 춤춘다. 정작 정치의 장이어야 할 국회에서는 정국경색, 날치기, 장외투쟁 등 힘의 논리가 이미 상식이 되었으되, 법원에서는 오히려 타협과 조절과 임기응변의 정치술이 기막힐 정도로 성행한다. 주역은 검찰이며 조역은 법관이다. 김용판 사건 판결이 내뱉은 “아쉽지만”이라는 단어가 잘 보여주듯 그들에게 법은 믿음과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 조작하고 상황에 따라 가공하는 정치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법이라는 고행과 절제의 성역을 떠나 속계의 욕망으로 환속한 그들은 권력을 새로운 숭배 대상으로 삼아 끊임없이 법의 제단을 모독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진행중인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내란음모 혐의 사건은 그 대표 격이 된다. 실제 이 사건은 제대로 된 사회라면 국민 모두가 공유하는 정치의 세계에서 공적으로 해소되어야 할 일이었다. ‘평화주의자들의 반전평화를 위한 강연회’였든 ‘주사파가 판치는 경기동부 일파의 만용’이었든 국민들이 사려 깊은 변별력으로 처리했어야 할 사건이었다. 하지만 국정원의 오른편에 서 있는 검찰은 이 사건을 법적인 사건으로 조작하는 억지를 부려 법정으로 끌어들였다. 국민들의 정치적 판단권을 빼앗아 자신들이 독점하는 자신들만의 사건으로 변질시키고, 이를 통해 그들이 봉사하는 속된 권력을 최대한으로 확장한다.

 

흔히 정치의 사법화 현상을 개탄하지만, 그 폐해가 극명해지는 것이 이 지점이다. 국민주권의 체제에서 정치는 국민의 것이다. 모든 국민이 공유하고 모든 국민이 참여하며 이루어지는 것이 민주사회의 정치다. 하지만 정치의 사법화는 이런 정치를 소수의 법률관료들의 수중에 전속시켜 버린다. 정당 강제해산의 세계기록을 세우며 ‘정당의 무덤’이라 불리는 터키가 그 예가 된다. 터키의 현 집권당은 헌법까지 개정해서 대학에서의 히잡 착용을 허용하였다. 실제 히잡 착용이 터키의 국가이념인 세속주의와 어떻게 관련되는가는 정치적 판단 대상이다. 그러나 군부의 지지를 받는 터키 검찰총장은 그 집권당을 헌법재판소에 위헌정당으로 제소하였다. 순간 정치의 문제는 그대로 법의 문제로 변질되어 버렸다. 선거과정에서 결집되었던 국민들의 의사와 헌법개정을 통해 형성된 정치적 결단은 그대로 ‘법’의 세계에 파묻히고, 그 법의 제단에서 춤추는 몇몇 법률관료들의 권력이 국민의 주권적 판단을 대체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중소기업을 중심으로 한 신흥자본과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받던 집권당을 제치고 법률관료들과 군부와 정경유착의 대자본이 연합하여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이석기 의원 등에 대한 이 사건을 새삼 주목해야 할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조악한 법정치다. 어떤 판결이 나건 그것은 법의 명령이 아니라 법의 제단 아래 숨어 은밀히 진행되는 그들만의 정치가 내린 결론에 불과하다. 거기에는 그들의 정치로써 우리 모두의 정치를 뒤엎으려는 폭력이 내장되어 있다. 그들은 이미 수사와 재판이라는 협박을 통해 진보 혹은 변혁의 문제나 통일의 문제를 국민들의 귀와 눈과 입으로부터 차폐되어야 하는 절대 금기로 설정하였다. 국정원이 주도하여 만든 소위 종북담론 혹은 “반대세”(대한민국을 반대하는 세력)의 프레임은 이 부분에서 힘을 얻는다. 국민과 비국민을 구분하던 일제의 통치술을 이 시대에 재생함으로써 그들은 영구집권의 꿈을 현실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진정 필요한 것은 법원에서 춤추는 그들의 정치와 그들의 권력욕망을 직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을 극복하는 우리의 정치를 조직해 내는 일이다. 이제 곧 이 사건의 제1심 판결이 나오게 된다. 유죄든 무죄든 그들을 향한 가장 강력한 항의와 저항의 목소리가 나와야 한다. 우리들의 분노와 함성이 그 판결문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말이다.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