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호 목사 설교

[스크랩] 다시 얽매인 죄 (벧후 2;20-22)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4. 4. 08:26

다시 얽매인 죄

 

                                                                                        벧후 2;20-22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 하더니”(롬 3;23)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것이 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죄의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선 이런 이야기로 오늘 말씀을 열려고 합니다.

 

탈무드에 보면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는 토라 공부에 열중하는 랍비였습니다. 경건하기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그는 늘 해처럼 빛났고, 얼굴은 천사처럼 찬란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여자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사단이 시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를 어떻게 보십니까?”

“진짜 성인이다.”

“그러면 내가 이성으로 유혹하여 보아도 되겠습니까?”

“너는 실패할 것이다.”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단은 창조이래 가장 어여쁜 여자의 모습으로 분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에게 나타났습니다. 헤레쉬 랍비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불과 화젓가락을 가지고 오라.”

갖다 주자 시뻘겋게 달려서 자기 눈을 찔러 지져 버렸습니다. 사단은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라파엘 천사를 보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 눈을 고쳐 주거라.”

헤레쉬 랍비는 라파엘 천사를 보자 말했습니다.

“나는 이대로 살겠습니다.”

라파엘이 하나님께 보고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장하여 주셨습니다.

“절대로 너를 유혹하지 못 하게 할 터이니 눈을 고치고 살거라.”

이 말을 듣고서 그는 눈고치기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죄를 피한다는 것은 위대한 것입니다. 유혹을 이긴다는 것은 정말 장한 행동입니다. 더러운 데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진실로 박수할만한 결단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그것으로 끝입니까? 아니면 다시 그 죄에 얽매이게 됩니까?

지었던 죄를 또 다시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얽매이지 말아야 합니다. 죄를 다시 짓는 것과 얽매이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다시 얽매이게 되면 그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여 진다고 베드로는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20)

 

심지어는 베드로는 이렇게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받은 후 지키다가 그 말씀을 저버리면 차라리 하나님을 알지 못 하였던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21)

이런 자들은 개나 돼지와 같은 존재라고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22)

 

우리는 죄의 정체를 알아야 합니다.

죄란 불과 같습니다. 그 사람의 인생을 태우고 망치게 됩니다.

죄란 녹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아무런 쓸모없는 사람으로 부폐시킵니다.

죄란 마취제같습니다. 그 사람의 양심을 마취시켜 버립니다.

죄란 독과 같습니다. 그 사람을 병들어 죽게 합니다.

죄란 검은 구름과 같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곧 비를 내리게 합니다.

죄란 썩은 사과같 습니다. 겉으로는 먹음직하나 깨물면 씁니다.

죄란 함정과 같습니다. 한번 밟으면 떨어져 갇히게 됩니다.

죄란 화산과 같습니다. 언제 폭팔할지 모릅니다.

죄란 필림과 같습니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현상하게 되면 다 나타납니다.

죄란 마약과 같습니다. 한번 습관에 들면 고치기 어렵습니다.

죄란 빙산 일각과 같습니다. 드러난 부분보다 숨기고 있는 부분이 더 많습니다.

 

그러면 지었던 죄에 다시 얽매이는 상태란 어떤 상태를 말합니까?

 

1. 그 죄에 지는 죄입니다.

죄에 지면 그 죄에 얽매이게 됩니다.

얽매인다는 말은 <엠플라켄테스>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그 죄에 정복당한 상태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제는 그 죄를 이길 수 없는 형편에 처한 죄입니다.

위암에 걸린 이가 수술하여 병을 고쳤습니다. 그런데 재발하였습니다. 수술하여 고침받았습니다. 건강 관리를 잘 하여야 암 세포를 이길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또 위암이 발병하였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세 번째 위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서 누군가와 전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 3발이야.”

그는 그 때부터 병을 이기지 못 하였습니다. 결국 그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극복하고 극복하다가 극복 못 하는 경계가 있습니다. 그 죄를 이깁니다. 또 이깁니다. 또 이깁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도저히 더 이상 이기지 못 하는 상태를 엠플라켄테스라고 합니다.이런 상태가 된 이는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상태로 가기 전에 알아 차리고 막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 12;43-45)

 

귀신을 내쫓고 나서 다시 받아 드린 마음은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라고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말을 예수님에게 배운 것같습니다.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죄짓는 것이 인간이요 용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죄를 짓더라도 죄에 지면 안 됩니다. 이길 수 없는 한계에 이르기까지 끌려 다녀서는 안 됩니다. 이런 죄가 얽매인 죄입니다

 

2. 그 죄에 능숙하여 진 죄입니다.

죄에 능숙하면 그 죄에 얽매이에 됩니다.

그래서 그 죄에 문둥병자가 됩니다. 모든 행동은 21번 반복하면 습관화된다고 합니다. 여러분이 지은 죄중에 21번 이상 지은 죄는 모두 습관화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쁜 습관을 고치면서 좋은 행동을 21일만 반복하면 습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밤늦게까지 있기를 좋아 하던 성격이었습니다. 그러나 목회하면서 새벽기도를 시작하였습니다. 21일만 정확하게 반복하면 습관화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어느 은행원이 온 종일 돈을 만지기를 수 십년하였습니다. 이제는 돈만 집으면 세지 않아도 얼마인지 정확하게 맞추는 것을 보았습니다. 돈에 능숙하여 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같은 죄를 반복하기에 그 죄를 짓는 데 능숙하여 진 이가 있습니다. 완전히 그 죄에 얽매인 자입니다.

 

어느 도둑놈이 성전에서 촛대를 훔쳤습니다. 잡혔습니다. 사람들이 말했습니다.

“그 촛대는 성전에서 하나님께 너무나 귀한 것이니 도로 갖다 놓고 다른 것을 가지고 가시오.”

그 도둑이 말했습니다.

“나는 차라리 한번 도둑질하는 것이 낫지요. 도로 갖다 놓고 또 도둑질하면 두 번 도둑질이라 하나님께 혼나요.”

이렇게 죄에 문둥병자가 된 이가 죄에 얽매인 자입니다. 그 죄에서 도저히 벗어 날 수 없는 지경까지 간 자입니다. 죄 짓는 데 능숙하면 그 죄에 얽매이게 됩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방 청소를 하는 데 방 구석에 거미줄이 있었습니다. 거두어 버렸습니다. 다음 날 청소하면서 보니 또 거미줄이 있었습니다. 또 제거하였습니다. 계속 되었습니다. 그 때서야 방청소하는 이가 깨달았습니다.

“거미를 잡자.” 거미를 찾아 보았습니다. 방구석 어두운 곳에 거미가 웅크리고 숨어 있었습니다. 잡아 죽였습니다. 그 후 방에 거미줄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죄의 근원을 버려야 합니다.

 

오스트로 왕국의 왕중에 데오도리이라는 유명한 왕이 있습니다.

30년 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말년에 교만으로 혈기를 자주 부렸습니다. 그 혈기가 많은 죄를 짓게 하였습니다. 자주 반복되었습니다. 보에디오스 신하와 디메커스 신하 두 명이 조금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습니다.

목을 메어 비참하게 죽였습니다. 혈기의 절정이었습니다.

어느날 요리사가 생선 요리를 멋지게 하였습니다. 왕은 생선 눈을 보는 순간 두 신하 눈으로 보였습니다. 눈이 튀어나와 자기를 위협하는 것같았습니다. 벌려진 입 속에 이빨들이 신하 이빨같이 보이며 자기를 물어 뜯을 것같이 보였습니다. 왕은 갑자기 수저를 놓으며 말했습니다.

“몸이 불편하여 저녁을 못 먹겠다.”

그는 침대로 가서 누웠습니다. 몸이 떨려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그 침상에서 일어나지 못 하고 3일만에 죽었습니다.

죄짓는 데 능숙하면 그 죄에 얽매이게 되어 결국 죽음을 초래하고 맙니다.

 

3. 그 죄로 인하여 지옥가는 죄입니다.

죄에 얽매이게 되면 그 죄로 인하여 결국 지옥에 가게 됩니다.

병들어도 죽을 병이 있고 죽지 않을 병이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병들었습니다. 고침받았다가 15년만에 죽었습니다. 그러나 나사로가 병에 들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함이라 하시더라”(요 11;4)

죽음에 이르는 병이 있고 생명에 이르는 병이 있습니다.

문제도 문제가 되는 문제가 있고 축복이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자녀를 번제로 바친 이가 성경에 두 명 나타나고 있습니다.입다는 딸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문제였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무남독녀를 죽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 것은 축복이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죄도 천국갈 수 있는 죄가 있고 지옥가는 죄가 있습니다.

 

어느 성도가 하나님앞에 지은 죄가 많았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추잡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기를 버린 것같다고 생각하고 수도사에게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 때 수도사가 물었습니다.

“당신은 비싼 옷을 입고 있다가 찢어지면 버립니까?”

“아니요. 고쳐서 입습니다.”

수도사가 말했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보다 귀한 영혼 한 분 한 분이 찢어지는 심정을 가지고 있을 때마다 고쳐서 쓰시는 분이십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죄에 얽매여 멸망받게 된 이를 가르켜 이렇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22)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싫어 하는 동물이 있습니다. 개와 돼지입니다.

증권을 사고 파는 이들이 싫어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새우랍니다. 새우처럼 하향곡선을 그릴가 두려워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시험보는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음식은 미역국입니다.미끄러질가 두려워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좋아 하는 음식이 있습니다. 무교병과 삶은 달걀입니다. 무교병은 죄없는 순수한 떡이라는 의미입니다. 삶은 달걀은 불에 구울수록 단단해 지기에 자기들은 시련이 오면 더욱 강해진다는 상징으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싫어하는 동물이 바로 개와 돼지입니다. 개는 토한 것을 또 먹는 동물입니다. 돼지는 닦아 놓으면 또 딩굴며 살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같은 더러움에 빠지는 이들입니다. 자꾸만 죄에 얽매이는 자들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싫어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런 비유로 말씀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보라 네 눈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보고 형제의 눈속에서 티를 빼리라.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저희가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할까 염려하라”(마 7;4-6)

 

이같이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를 개와 돼지같은 이와 동격시하였습니다. 이런 이들이 바로 죄에 얽매인 자들입니다.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본문에서 “만일 저희가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20)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죄가 얽매인 죄입니까?

1. 그 죄에 지는 죄입니다.

2. 그 죄에 능숙하여 진 죄입니다.

3. 그 죄로 인하여 지옥가는 죄입니다.

죄에는 반드시 보응이 있습니다.

어느 부흥 강사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부흥회를 설교를 하고 났을 때 한 사람이 돌아가면서 편지를 주었습니다. 자세히 읽어 보고 기도하여 달라는 부탁을 하였습니다. 숙소로 돌아와 편지를 읽었습니다. 내용은 대략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는 젊어서 방탕하였습니다. 부도덕한 생활을 무질서하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습니다. 아주 훌륭한 처녀였습니다. 아내 덕분에 모든 과거를 다 버리고 이제는 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아파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정밀 검사를 마친 의사가 조용히 물었습니다.

“결혼 전에 생활이 어떠하였습니까?”

그는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습니다.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직하게 방탕하고 무질서하였던 과거 이야기를 솔직히 말했습니다. 의사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당신 방탕의 결과가 아들에게 나타났습니다. 고치지 못 할 병입니다. 만일 고친다고 할 지라도 평생 척추가 뒤틀려서 정신을 잃은 채 식물인간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사연을 적고 편지 끝에는 이런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목사님! 내 죄 값이 아들에게 지불될 줄을 몰랐습니다. 내가 뿌린 씨앗을 아들이 거두게 될 줄 몰랐습니다. 내가 던진 돌을 아들이 맞게 될 줄 몰랐습니다.”

부모가 던진 부메랑을 자녀가 받아 피해를 보았습니다.

죄는 용서받아도 보응은 용서받지 못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에서 멀어져야 합니다. 죄와 멀리 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방법이 있습니다.

성령충만입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창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엡 5;18)

 

1999년 5월 신문기사가 있습니다.

세계 최고의 대학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국 하버드 대학입니다. 그 대학대에 신과대학이 있습니다. 신과대학 학장 로널드 쉬만이 파면되었습니다. 그가 파면된 이유는 학교 내에서 그의 사무실을 옮겨야 할 일이 생겼습니다. 컴퓨터 기사가 컴퓨터를 옮기면서 보니까 음란 싸이트를 정기적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학장 사무실에서 늘 음란 싸이크를 접하고 있는 것이 발각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공회 신령한 목사였습니다. 예일 대학을 졸업하였습니다. 그의 논문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논문입니다. 제목은 <종교와 도덕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격으로도 죄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 가능합니다.

죄에 지면 죄에 얽매이게 됩니다.

 

우리는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하여야 합니다. 그래서 쉬지 말고 기도하고 항상 성령의 충만함을 입도록 신앙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이미 말씀드린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여야 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얻지 못하고 이에 가로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소제되고 수리 되었거늘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마 12;43-45)

 

죄를 버리고 마음을 비웠는 데 물을 채우지 않으면 다시 귀신이 들어와 전보다 더 악해집니다. 물은 성령입니다.

회개하고 성령받고, 성령받고 뜨겁게 기도하며 사는 이에게 마귀는 한 길로 왔다 일곱길로 도망칩니다.

항상 성령충만하여야 합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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