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주는 것이 복이 있다(신앙이란삶의주도권을하나님에게맡기는것)/장영수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7. 31. 14:45

2009 10 18 주일예배

주는 것이 복이 있다

( 20:31-35)

  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2. 지금 내가 여러분을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에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여러분을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
  3.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
  4. 여러분이 아는 바와 같이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이 쓰는 것을 충당하여
  5.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30년 가까이 된 일입니다. 제가 제대하고 복학해서 정신차려서 공부 좀 해야되겠다. 그러면서 영어회화를 공부하다가 `영화를 한번 봐야 되겠다. 얼마나 공부했는지.' 그때 서울 변두리에 살 때라 굳이 시내 좋은 영화관 찾을 것 없이 동네 근처에서 영화관을 찾다 보니 의외로 없더라구요. 청량리 근처에 있는 한 자그마한 영화관에 들어갔습니다. 그때 본 영화가 <더 라스트 콘서트> 였어요. 그런데 공교롭게 그 영화는 별로 대사가 없어요. 시작부터 끝까지 음악이에요. 그래서 제가 `, 모처럼 실력을 뽐내려고 했는데 기회가 없구나'했어요. 알아들은 말은 딱 두 마디였어요. `to be frank with you' 솔직히 말하면. 또 한마디 생각나더라구요. 간단히 말해서, `to make a long story short'. 

   그런데 아주 감동적인 영화였어요. 거기 40대 중년의 음악가가 나옵니다. 한때 잘 나갔는데 지금은 시세가 없어요. 그래서 절망하고 있는 한 남자가 있어요. 그런데 이제 스물도 안 된 아가씨를 만나요. 얼마나 밝고 쾌활한지 여행길에서 만났다가 동무가 됐어요. 이렇게 저렇게 얘기를 나누면서 마음을 열게 돼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백혈병에 걸려서 이제 얼마 안 남은 아가씨예요. 그것을 알게 됐어요.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무엇을 해주면 좋을까.' 그런데 이 아가씨가 그 음악가에게 이야기합니다. `다시 재기하세요. 재기한 당신의 연주를 듣는 것, 그게 나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그는 다시 연습을 해요. 스텔라를 위한 곡을 쓰는 거예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 곡을 연주할 때 그 아가씨는 청중석에서 음악을 듣다가 숨을 거두는 거예요. 너무나 뻔한 전형적인 멜로였습니다마는 왜 그렇게 안타까운지 모르겠어요. 여러분, 이 긴 얘기를 그야말로 간단히 얘기했습니다만 한번 솔직히 물어 봅시다. 여러분은 얼마나 더 살 것 같습니까? 나의 마지막을 항상 준비해야 되죠.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본문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교인들, 특별히 교회를 섬기는 장로들을 만나는 이야기예요. 사도 바울이 세 번에 걸친 선교여행을 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에 있는 교회 리더들을 만나는데 일정이 바쁘기 때문에 에베소에 가서 만나지 못하고 불러내어서 잠깐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제까지 자기의 삶을 회고하고 또 전망해요. 이제까지 예수를 알고 나서의 삶을 회고해 볼 때 그것은 시험과 눈물의 연속이었고 그로 인해 겸손해지고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해요. 우리가 예수 믿으면 성공하고 모든 일이 잘 되기를 기대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또 앞으로의 일을 전망할 때 지금 예루살렘에 가는 것은 승리의 행진을 하기 위해서 가는 게 아니에요. 거기서 나를 기다리는 것은 환란과 핍박이에요. 그걸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가 가야 할 길이다. 그래서 가는 거예요. 그렇게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는 비밀을 얘기해요. 돌아보면 시험과 눈물과 겸손이었고 앞을 내다보면 환란과 결박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곳으로 나를 이끌어가는 부르심이 있어요. 사명이 있단 말이에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내 생명을 내어놓는 것도 아끼지 않겠노라, 이렇게 고백해요.

   여러분, 오늘 내가 왜 살고 있는가 하는 물음에 스스로 답할 수 없다면 그는 방황하는 사람이에요. 제가 오래 전에 일본을 여행할 때 어느 화산지대를 갔더니 스카이 리프트를 타고 산을 넘어가야 되는 거예요. 그걸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사람들을 태워주는 청년 직원을 봤는데요. 어쩜 그럴까요. 제자리에 서 있다가 손님이 오면 맞아서 태우고 문을 닫아주고 하는 그 자세가 꼭 로봇 같더라구요. `어떻게 저렇게 철저하게 할까? 사명일까? 직업의식일까?'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진정한 프로라는 것은 하기 싫은 일을 하기 싫은 때라도 의연하게 해내는 사람, 그 사람이 프로예요. 자기 기분대로 했다가 말았다 하는 사람은 결코 프로가 될 수 없죠. 오늘 우리 삶 속에 내가 바라고 원하는 대로 다 되리라고 기대하는 건 철부지예요. 어려움과 고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연하게 버티고 나갈 수 있는 것. 특별히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부르심과 사명이 있단 말이에요.

   그 사명을 오늘 사도 바울이 두 가지로 얘기합니다. 이제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교회 지도자들에게 유언합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께 여러분을 부탁합니다. 그 은혜의 말씀이 여러분을 세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예요. 두 번째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그런데 아주 놀라운 말씀을 했어요. `친히 예수님이 하신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오늘까지 예수님이 실제로 하셨을 법한 말씀들을 몇 주째 골라서 말씀을 나누고 있어요. `아바 아버지여', 하나님을 아바라고 부르셨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멘이라는 용어를 아주 독특하게 쓰셨다. 그리고 죄사함을 선포하는 놀라운 권세를 행사하셨다. 이게 예수님의 특징인데. 오늘 사도 바울이 정작 복음서에는 실려 있지 않은 아주 재미있는 표현을 했어요. `예수님이 직접 하신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거는 사람과의 관계죠.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 은혜의 말씀이 너희를 세우시리라. 여러분, 신앙이 뭡니까? 신앙이란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내가 원하고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 그건 미성숙한 신앙이에요. 그게 꼭 있어야 되겠지만 그걸 넘어서서 연단과 고난까지도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은혜라고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 이게 성숙한 신앙이에요.

   일을 하다가 식사를 거를 때가 있어요. 일에 빠져들고 있으면 식사 거르는 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 그런데 금식한다 그러면 이상하게 얘기가 달라져요. 평소에 끼니 거르는 걸 밥 먹듯 하던 사람들도 금식이라고 하면 부담이 되는 거예요. 밥 한 끼 안 먹어서 그럴까요? 이상하게 금식하라고 그러면 더 배고프고 더 신경 쓰이고 밥이 떠오르고 빵이 떠오르죠. 왜 그럴까요? 나의 주도권을 잠깐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에게 뭔가 부담감을 주는 거예요. 우리의 자아, 내 인생은 나의 것,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결정권을 내어놓는다는 게 이만큼 힘든 거예요.

   사실 우리가 자유를 가지고 있고 자유의지가 있습니다마는 이미 그 한계를 잘 알고 있어요. 내 뜻대로 내 맘대로 산다고 하는 것이 성공을 보장하지 못해요. 그 한계를 너무나 잘 알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연약한 자유조차 내어 놓는 것은 꼭 내가 죽는 것만큼이나 두려워하고 거부한다는 거죠.

   서만수 목사님이 돌아가신 지 벌써 한 달이 됐습니다. 오늘이 장례식 치른 지 정확히 한 달이잖아요. 제가 장례식 영상물을 부탁해서 하나 받았어요. 보존하고 싶어서요. 그걸 보니까 마지막 대목에 그분의 마지막 모습을 담아 놨더라구요. 돌아가시기 한 달 전인 지난 8월에 그 분이 속한 교단에서 서만수 목사님의 40년 선교사역을 기념하기 위해서 공로선교사 추대예배가 있었는데 본인은 몸이 아파서 움직일 수 없으므로 대신 영상물을 만들어서 그 분들에게 보여드리는 장면이에요. 거기에 그분의 선교의 출발과 오늘까지의 일을 짤막하게 담아놨어요.

   그분이 나이 서른에 이곳에 파송 받아 나오실 때 그를 보내신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너는 이제 인도네시아에 가서 혹 그곳이 어렵다고 도망가지 말고 유학가지 말고 다른 나라 가지 말고 거기서 뼈를 묻겠느냐.' 이분이 `' 라고 대답을 못했어요. 그 얼마나 무서운 얘기예요. `내가 가서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하는 것하고 `너는 거기 가서 죽어라' 하는 것하고는 전혀 다른 이야기지요. 죽을 때 죽더라도 내가 결정하게 해줘야지. 내 인생을 못 박는다는 게 얼마나 두려워요. `' 라고 대답을 못하셨대요. 마음으로만 다짐하고 들어오신 거예요.

   나중에 84년도에 많은 선교사 중에서 아마 그 분의 수고를 이 정부에서 인정을 했는지 국적을 주겠다고 제의를 해서 서류를 준비하기 위해서 목사님을 만나서 말씀을 드렸더니 `그럼, 어서 수속을 해라.' 그런데 그 말이 너무너무 냉정하고 매정했다는 거예요. 눈물을 흘리며 들어왔대요. 이 땅에서 죽겠다는 것을 결국 서명하라는 거 아니에요. 약속하라는 거 아니에요. 국적을 취득한다는 의미를 그렇게 받아드린 거예요.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생명을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필름을 보면서 `, 그렇구나.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분의 마지막을 저렇게 아름답고 복되게 하셨구나.'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실망에 빠져 고기잡이 어부로 되돌아간 베드로를 찾아오셨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거듭 물으셨어요. 베드로가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시지 않습니까. 드러난 행위로는 하나도 온전한 것이 없지만 그러나 내겐 작지만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라고 얘기할 때 그 베드로의 마음을 받으시면서 `너는 나를 따르라'고 하시고는 이런 말씀을 하셔요. `이제까지는 네가 네 허리에 띠를 띠고 네 마음대로 다녔지만 이제부터는 남이 너에게 띠를 띠우고 이끌어 갈 것이다. 너는 거기에 끌려가게 될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무슨 말이에요? 신앙은 내가 내 마음대로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 나를 이끌어 가시는 것을 받아드리는 거예요. 내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만큼 맛보고 알았기에 이제는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기는 거예요. 내 인생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는가. 그게 신앙의 수준을 결정하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가 예수님 옆에 있는 동생 같은 젊은 요한을 보면서 묻습니다. `예수님, 저 친구는 어떻게 될까요?' 그랬더니 예수님이 말씀하시죠. `내가 저를 내가 돌아오는 그날까지 살려둔다 할지라도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 그건 내게 맡기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제는 내 문제예요. 내가 어떻게 주님을 따를까. 어느 교회가 어떻고 누가 어떻고, 사람 사는데 대화가 필요하니까 그런 수준에서는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마는 다 부질없는 얘기예요. 나는 어떻게 할 거냐.

  `너는 나를 따르라'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립되면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성경에는 `주라' 그랬어요.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고 하늘 문을 열고 후하게 복을 넘치게 주시리라. 물질을 잘 나누고 베푸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물질을 채워 주세요. , 물질을 바르게 쓰고 있기 때문에. 그에게 더 많이 맡기셔요. 그게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여러분, 내가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마는 엄격하게 말하면 먹은 것만 내 것이에요. 죽으면 다 놓고 가야 돼요. 또 남에게 준 것만 내 것 이예요. 그것만 기억되기 때문이에요.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냉수 한 그릇이라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다.' 뭐 요란하게 큰 것으로가 아니잖아요. 말 한마디로도 사람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거잖아요.

   심리적으로 조사를 해보니까 사람들이 자리를 선택할 때 구석이나 창가에 앉기를 좋아한대요. 자기 상사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리를 좋아한대요. 왜 그러냐, 인간을 동물로 생각할 때 동물의 먹이사슬 구조에서 인간은 한 중간쯤 간대요. 우리가 호랑이를 만나면 잡혀 죽는 수밖에 없죠. 도구가 없는 맨몸으로서의 인간은 중간밖에 안돼요. 그러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힘센 자로부터 피하려 하고, 벽이나 기둥 같은 것은 일단 유사시 불이 나가거나 무슨 일이 있을 때 빨리 위치를 파악하고 몸을 기댈 수 있고 탈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니까 벽이나 기둥을 찾는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인간의 본능이에요. 그러니까 나누기는 커녕 움켜쥐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나 오늘 주님은 완전히 새로운 삶의 방식을 얘기해요. 그렇게 구석 자리에 앉지 말고 기둥 뒤에 숨지 말고 은혜의 자리로 나오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풍성한 사람은 열려있는 공간에 나올 수 있는 거예요.

   구석에 앉는 사람은 심리적으로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거예요. 근데 이건 단순히 심리적인 문제가 아니에요. 성경적으로 말하면 그 사람이 죄인이에요.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 때 나무 그늘 밑으로 숨어 들어갔잖아요. 날이 더울 때 그늘 들어가는 건 용납하지만 멀쩡한 날에도 그늘을 찾는 건 죄인의 본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거예요. 은혜의 자리로 나와야 돼요.

   며칠 전에 TV프로에서 소록도 탐방 프로를 봤어요. 소록도가 뭐예요? 우리가 흔히 나병이라고 얘기하는 한센병에 걸린 사람들 수용하는 곳이죠. 1916년 일본 사람들이 강제로 한센환자들을 수용하면서부터 오늘까지 거기는 고립된 섬이 됐죠. 생각해 보세요. 부모형제가 다 내버린 사람들이에요. 거기에 갇혀 살다가 결국은 거기서 죽는 거예요. 보통 장례가 나면 연락할 사람도 없어서 그날로 묻는대요. 어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 그를 20년 섬겨주던 자원 봉사 아줌마가 왔더라구요. 그러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합니다.“아니, 어떻게 20년씩이나 이 분을 섬겼습니까?”그랬더니“아니에요. 저는 자그마한 걸 주었지만 이분이야말로 저를 누구보다도 사랑해 주셨어요.”자그마한 물품이지만 그분들이 쓰는 건 다 나라에서 공급하잖아요. 뭐 하나 받으면 잘 두었다가 봉사자에게 다 주는 거예요. 너무 고맙다고. 작은 것이지만 어렵고 힘들수록 서로 나누는 거예요. 여러분, 뭐 큰 걸 하려고 하지 마세요. 자그마한 것부터 시작하세요.

   이건 비밀입니다. 여러분만 알고 계세요. 뉴욕시에서 출발하는 아침저녁 통근 열차에는 이런 비밀이 숨겨져 있대요. 기차 시각표보다 1분 후에 출발한대요. 1분은 은총의 1분이래요. 생각해 보세요. 샐러리맨들 통근하는 사람들이 기차 타려고 하는 마지막 1분이 얼마나 숨가쁜 1분이에요. 저도 옛날에 통학해봤지만 때로는 숨이 넘어 갈듯이 뛰어가야 합니다. 1. 그거 놓치면 어떻게 되느냐. 저녁에 집에 들어가서 가족과 함께 따뜻한 음식을 먹느냐, 아니면 찬 음식을 렌지에 데워 먹어야 되고 마누라의 눈총을 받느냐 하는 운명의 갈림길이란 말이에요. 이거는 뉴욕의 철도원들만 아는 비밀이래요. 무려 1870년부터 이제까지 지켜오는 그들의 비밀이래요. 은총이 우리의 삶을 넉넉하고 풍성하게 해요.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셔요. `주는 것이 받는 것 보다 복이 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