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수 목사 설교집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기독교의 독선,배타성,도덕성) / 장영수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0. 7. 31. 14:20

080127 오묘한 일과 나타난 일 ( 29:24~29)

성경본문

열방 사람들도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이 땅에 이같이 행하셨느뇨 이같이 크고 열렬하게 노하심은 무슨 뜻이뇨 하면 그 때에 사람이 대답하기를 그 무리가 자기의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조상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실 때에 더불어 세우신 언약을 버리고 가서 자기들이 알지도 못하고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시지도 아니한 다른 신들을 섬겨 그에게 절한 까닭이라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을 향하여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여호와께서 또 진노와 분한과 크게 통한하심으로 그들을 이 땅에서 뽑아내사 다른 나라에 던져 보내심이 오늘날과 같다 하리라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작년에 아프간에 갔던 선교 봉사팀이 인질로 붙들리고 또 그것이 온 국민의 염려와 관심과 주목거리가 된 이후에 본격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인터넷을 중심으로 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반기독교 시민운동연합이라는 모임도 결성 되었습니다. 작년 말에 교회 연합회에서 그 대표를 초청해서 강연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무엇인가.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집니다.

첫째,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허구라는 것이죠. 구약성경은 중동의 히브리인들의 종교의식의 산물일 뿐이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가지고 있는 신화를 역사적 사실인양 미화한 것이다. 그 좋은 예로 아담은 언제 사람이냐. 궁금하죠. 성경에 나와있는 연대를 역산 한다면 대략 기원전 4,000년경 이런 답이 나오죠. 과연 그러하겠느냐. 그럼, 노아의 홍수는 언제냐. 이것도 계산해 보면 기원전 2,400년경, 그렇다면 고등학교에서 세계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갈등이 일어나지 않을 수 없죠. 허구라고 하는 것이죠.

두 번째, 기독교의 독선과 배타성을 지적합니다. 교리에 관한 문제죠. 다른 종교, 다른 문화를 우상숭배라고 얘기하고 사단의 역사라고 단정 짓는 것과 또 역사 속의 십자군 전쟁이라든지 과거 서구 제국주의의 앞잡이로 나왔던 수많은 선교 활동들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에서 종종 일어나고 있는 불상이나 단군상이나 장승을 훼손하는 행위에 대해서 기독교의 배타성을 지적합니다.

세 번째로는 기독교의 도덕성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일부라도 이미 거대한 기업이 되었다는 거죠. 그리고 강단에서 나가는 말씀이 사람들에게 영합해서 세상에서의 물질 축복만을 강조하는 것과 교회가 커가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얘기하는 성장 지상주의, 또 거대한 건축물과 그것을 위한 헌금 강요, 그 중심에 서 있는 목회자들의 부패와 타락의 현실, 이것은 천민 자본주의다. 기독교의 도덕성을 비판하는 것이죠.

이렇게 결론을 내려요. 기독교의 개혁은 불가능하다. 왜 그러냐. 그것은 원초적으로 허구이기 때문이다. 개혁 자체가 있을 수 없다. 그건 종교 사기극이고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고 하는 것은 독단이고 헛된 교리다. 오늘날 기독교는 목사들의 생계수단이요, 성공의 도구로 전락했다 이렇게 비판합니다.

아마 여러분 마음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많으실 거예요. 저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세가지 대목에 대해서 하나하나 정리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는 과연 구약 성경은 허구인가.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여러분, 성경에는 역사가 기록되어 있고 과학적인 내용도 있어요. 그렇지만 성경은 역사책이 아니에요. 과학책이 아니에요. 성경은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 내가 하나님을 만났노라고 고백하는 간증집 이라고 볼 수 있어요. 내가 만난 하나님이에요.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나를 만나주신 하나님이에요.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 인간을 만나주신 하나님이 주체가 되어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을 통해서 기록이 되었어요. 그래서 오류가 있어요. 연대와 이름이 틀리기도 하구요, 같은 내용이 중복돼서 나오는 본문을 비교해 보면 많은 오류가 있음을 알 수 있어요. 또 원본에는 오류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사본으로 계속 복사될 때, 빠뜨리기도 하고 중복해서 넣기도 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어요? 인간의 손으로 기록되었기에 오류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목적은 어떻게 내가 하나님을 만났는가 하는 구원을 고백하는 책이기에 내가 구원을 받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어요. 연대가 조금 틀리고 숫자가 좀 틀렸다고 문제가 되지 않아요.

남자분들이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마는 제가 평생 저희 아버님에게 편지를 딱 한 번 받아 봤습니다. 군대 갔을 때. 모처럼 어머님의 성화에 아들에게 편지를 쓰셨겠죠. 편지를 받아 봤는데 옛날 분이어서 그랬나요, 맞춤법이 많이 틀려요. 그러나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실히 느낄 수 있었어요. 성경은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고 하는 고백이에요. 맞춤법은 틀릴 수 있어요. 연대는 틀릴 수 있어요. 혹 이름은 틀릴 수 있어요. 그러나 나를 사랑하는 그분의 마음은 하나도 훼손되지 않은 채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성경 창세기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세계사를 넘어서는 부분이 있어요. 특별히 창세기 천지창조나, 아담의 이야기나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거 어떻게 해석해야 되겠습니까.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모세의 출애굽 사건은 대체로 기원전 1,200년 경 당시 이집트  왕의 이름과 서로 연결해서 흔적을 찾아냅니다. 거기까지는 세계사의 역사와 일대일 대응을 시킬 수 있어요.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사건부터는 정확한 고증과 연대를 측정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그들의 신앙고백과 전승으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래서 창세기의 천지장조의 예를 들면 칠일간 창조했다, 그 칠일을 정말로 칠일로 해석할 것이냐. 여러분, 성경에 나와 있는 연대 중에는 세계사와 일치하는 부분까지는 문자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그 다음부터는 구체적인 사실이라기 보다는 거기에 의미를 담아서 설명하는 거예요.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빠지는 결정적인 오류는 성경에 나와있는 연대를 오늘의 시간 계산방식대로 계산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면 많은 오류가 일어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시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어떻게 HOW라고 하는 물음보다 WHY 왜 이것을 말씀하셨는가, 왜 이 사건을 일으키셨는가 하는 그 의미를 찾아야 되는 거죠. 성경에서 의도하는 것은 그 역사적 연대를 정확하게 밝히려고 하는데 있지 않아요. 하나님이 이런 사건을 일으키셔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의미와 목적을 찾아야 하는 거죠.

20세기에 으뜸가는 신학자 칼 바르트의 해석을 빌린다면 창세기의 사건은 사화(史話)라고 얘기했습니다. 역사적 사건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들어보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벨론에서 돌아 옵니다. 그들이 가나안을 정복하면서 자기 나름의 왕국을 건설했어요. 다윗과 솔로몬 왕국을 건설했어요. 그것을 자랑했어요. 뽐냈어요. 그러나 그렇게 자기 만족에 빠질 때에 하나님이 그들을 치시기 시작했어요. 예루살렘성이 무너지고 성전도 무너지고 그들은 다 포로로 끌려갑니다. 바벨론이라는 세계 제일의 강대국에 붙들려 노예로 살면서 하나님을 새롭게 해석하기 시작해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기 시작해요. 그러면서 우리 민족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온 우주를 창조하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앙 고백을 새롭게 가지게 돼요. 창세기 천지창조의 지리적 역사적 배경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데스 강 사이에서 늘 홍수의 위협 속에 살던 바벨론이지요. 그들의 창조 신화, 다신교 사회의 신들끼리의 전쟁, 해와 달과 별을 신으로 모시는 그들의 신앙을 거부하면서 해와 달과 별을 말씀으로 만드신 하나님, 원초적인 빛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 외에 그 어떤 것도 신이 될 수 없는 그런 신앙고백을 하는 거죠. 특별히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물을 나누지 않습니까. 궁창을 만들어 물을 나누고, 물을 모아서 바다라고 하는 것은 늘 홍수에 시달렸던 바벨론 사람들의 염려와 근심을 넘어서서 그 모든 만물을 다스릴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을 고백하는 거예요. 칼 바르트는 아주 중요한 말을 합니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신다.’ God waits for us in the Bible. 물론 성경의 기록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성경 그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라기보다는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말씀이 있는 것이죠. 그건 뭐예요. 인간의 오류를 인정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 속에 내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고 만남이 있다고 하는 고백을 분명히 하는 말씀이에요.

성경을 어떻게 볼 것인가. 성경 안에는 오묘한 일이 있어요. 우리의 이성으로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성을 넘어서는 사건이 있어요. 그거는 하나님 손 안에 있는 거예요. 그거는 인간들이 노력하면서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고 밝혀지겠죠. 그러나 우리가 죽는 그 날까지 다 밝혀질 수는 없을 겁니다. 성경에 있는 신비한 일들을 우리가 아는 것 보다는 모르는 것이 훨씬 많은 채로 어느 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실 것입니다. 오묘한 일은 하나님 손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분명히 드러낸 일이 있어요. 그 일은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하나님이 주셨다고 했어요. 그 말씀들은 의심할 바 없어요. 말씀을 받아 들여서 순종하고 살아가라고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에요.

두 번째는 흔히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렇게 전도하죠. 표현은 거칠어요. 그리고 독단적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그렇다면 왜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 교리적인 문제예요. 요한복음 5 39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성경은 곧 나를 증거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드셨어요.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탕자의 비유’(누가복음 15:11-32).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었어요. 첫째는 아버지의 말을 잘 들었어요. 그런데 둘째가 좀 망나니였어요.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있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나에게 나눠줄 유산을 미리 나눠 주십시오.’ 그런데 아버지가 아무 말하지 아니하고 한 몫을 나눠줍니다. 그걸 가지고 아버지와는 연락도 되지 않는 먼 나라로 가서 그것을 가지고 자기 멋대로 살다가 다 털어 먹고 거지가 돼서 돼지 치는 자가 되고 고생을 하다가 다 죽게 되었을 때 아버지를 기억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오면서 내가 이제 아버지께 가서 용서를 빌리라.’ 그리고 이제는 내가 아들이 아니라 그저 나를 아버지 집의 수많은 품꾼 중 하나로 써 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리라하고 돌아 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아들이 저 멀리 희미한 모습을 나타내는 순간 반갑게 뛰어 나옵니다. 아들이 나갔던 그 날부터 기다렸던 거죠. 그 아들을 끌어 안습니다. 목욕을 시킵니다. 새 옷을 입힙니다. 새 신을 신깁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웁니다. 그리고 송아지를 잡으래요. 잔치하는 거예요. 돌아온 탕자예요. 그런데 이 풍악이 울릴 때 밭에 나가 일하던 큰아들이 돌아오다가 이 소리를 듣습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종에게 묻습니다. 그랬더니 당신의 동생이 돌아 왔는데 아버지가 너무너무 기뻐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그만 꼭지가 돌았어요. 너무 화가 났어요. 아버지에게 가서 따집니다. ‘아버지 재산을 절반이나 가지고 나가서 창녀와 다 털어 먹은 저 놈이 돌아 왔는데 벌을 주지 아니하고 어찌 저 놈을 위하여 잔치를 베푸십니까. 이 날까지 나는 열심히 일했건만 아버지 밑에서 나와 내 친구들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하나 잡지 않으시더니 어떻게 저런 못된 놈을 위하여 이런 사랑을 베풉니까. 이거 너무 불공평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의도는 돌아온 탕자 얘기를 하자는 게 아니에요. 집에 남아 있는 큰 아들 탕자를 얘기하는 거예요. 큰 아들도 탕자에요. 둘째는 밖에 나가서 길 헤매다가 털어먹고 온 탕자지만 그보다 더 큰 탕자는 집 안에 있었던 탕자에요. 그게 뭐예요. 율법주의자를 말하는 거예요. 아버지 앞에서 나는 이만큼 내 동생과는 근본이 다르다. 이만큼 성실하고 이만큼 열심히 노력하노라 이것이 자기의 의가 됐어요. 나는 다르다. 그러나 여러분, 아버지의 뜻은 그게 아니에요. 너나 네 동생이나 내가 생명으로 너를 낳았노라. 예수님의 의도는 율법주의자야말로 천국 문을 가로막는 사람이다 라고 말한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공로로 구원 받는 것 아니에요. 오직 그리스도 십자가, 그 생명을 내어 놓으시는 그 은총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거예요. 그러므로 구원은 생명이에요. 그래서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다른 종교들은 인간의 노력을 강조합니다. 도를 닦고 마음을 비우고 수련을 하고 심지어는 고행을 하고 금식을 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신에게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거예요. 큰 아들과 같은 거예요. 그러나 원초적으로 그것은 불가능해요. 인간의 생각으로 하나님을 다 알 수도 없어요. 인간의 모습과 행위로 하나님을 즐겁고 기쁘게 할 수 없어요. 하나님은 그걸 아셨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낳으셨어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내어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어요. 그러기에 예수만 믿어야 한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거예요. 그거는 생명의 사건이기 때문이에요. 그걸 놓쳐서는 안돼요.

그래서 사단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일을 하시려고 할 때에 시험하지 않습니까.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보라인간이 가장 매이는 문제가 먹고 사는 문제이니까. 그럴 때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 ‘저 높은 성전 꼭대기에서 한번 뛰어 내려 보아라.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그 이적을 보고 당신을 높이지 않겠는가라고 말할 때 뭐라고 이야기 합니까. ‘자기의 욕망을 위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나님께 우리는 순종할 뿐이지 하나님을 내 멋대로 시험해서 안 되는 것이지요. 또 온 천하를 줄 터이니 내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라고 말할 때 사단아 물러가라. 오직 우리의 예배와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여러분, 간혹 우리 주위에 무당을 비롯해서 귀신 들린 사람들을 봐요. 그게 우리의 영적 현실이에요. 그러나 더 무서운 사단의 역사가 있어요. 예수님이 받으셨던 시험 가운데 나타나 있어요. 멀쩡하게 공부했습니다. 자기 의지도 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일합니다. 그런데 그 인생의 목적이 빗나갔어요. 하나님이 지은 인생이건만 하나님을 알지 못해요. 그저 떡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말씀 속에 있건만 알지 못하게 해요. 속이는 역사죠. 왜 예수만 믿어야 하는가를 성경은 분명히 증언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교회의 도덕성이에요. 선행은 구원의 조건은 아니에요. 그러나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은 선하게 살아야 돼요. 의롭게 살아야 돼요. 거룩하게 살아야 돼요. 깨끗하게 살아야 돼요. 그래서 교회의 도덕성에 대해서 비난하는 모든 비난은 우리 모두가 책임져야 돼요. 그 사람들의 비난이 근거가 없는 게 아니에요. 목사를 비롯해서 모든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 부분에는 뼈를 깎는 회개를 하면서 받아들여야 해요. 상식을 지켜야 해요.

감사하게도 우리 교회 식구들은 시간을 잘 지켜요. 남의 시간을 빼앗는 거는 남의 목숨을 빼앗는 거잖아요. 사람을 한 시간씩 기다리게 하면 어떻게 해요. 더구나 공적인 약속들은 철저하게 지켜야죠. 그래서 예배도 시작도 지키고 끝도 지켜야죠. 또 다른 종교를 존중해야 돼요. 사실은 우리보다 더 성실하고 진지한 모습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좋은 것은 다 배워야 해요. 존중해야 돼요.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올바로 가기 위해서 직분대로 각자 최선을 다해야 돼요. 목사도 월권하지 말고 직분에 맞는 일을 하면 돼요. 말씀과 기도에 집중하는 게 목사의 일이에요. 교회가 하는 구제와 여러 가지 많은 일들은 장로와 집사와 권사, 많은 분들이 역할대로 은사대로 나누어서 하면 되는 것이죠.

이제 상식을 지킬 뿐만 아니라 그 상식을 넘어서서 거룩한 낭비가 필요해요. 많은 수고가 필요해요. 한 생명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는데 한 두 마디 말로 되는 거 아니에요. 기도가 있어야 되고 섬김이 있어야 되는 거죠.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어요. 남편 없이 아이를 홀로 기르는 어느 젊은 엄마가 있었습니다. 구겨진 4달러를 들고는 아기 분유를 사러 왔어요. ‘하나 주세요.’ 했는데 그만 그게 7달러 60센트에요. 살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힘없이 돌아섭니다. 주인이 그것을 제자리에 올려놓다가 슬쩍 떨어뜨렸어요. 분유 통이 떨어 졌어요. 한쪽이 찌그러졌어요. 그때 주인이 말합니다. ‘이런 거는 반값이에요.’ 그리고 4달러를 받고 오히려 거스름돈을 20센트 내줍니다. 아이 엄마는 자존심에 상처 받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분유를 한 통 가져갑니다. 그러나 그 가게 아저씨는 3달러 80센트로 천국을 샀다는 거예요.

여러분, 베풀어야 돼요. 예수 믿는 사람은 좀 손해 볼 줄 알아야 해요. 거룩한 낭비에요. 성경 말씀은 한마디로 압축됩니다. ‘敬天愛人하나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섬기고 이웃을 사랑하라. 이 한마디에 말씀의 모든 뜻이 다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다. 나누고 베푸는 삶.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내셨다. 이것은 우리와 우리 자손의 몫이다.’ 우리가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때 그게 건강한 신앙이에요. 예수 잘 믿는 사람이에요. 창세기가 어떻게 됐느냐 아는 것도 필요하죠. 우리는 이성적 존재니까. 그러나 공부해도 모르는 부분은 하나님께 속한 부분이에요. 나중에 천국 가서 하나님께 직접 물어 보세요. 그리고 오늘은 뚜렷하게 나타나 있는 말씀,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 될 것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교회가 우리의 허물과 불신앙과 불순종과 방종으로 인하여 세상에서 욕을 먹고 있는 이 안타까운 현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음을 고백합니다. 참으로 오묘한 일은 하나님께 맡기고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 앞에 드러내신 그 말씀은 나와 내 자손들이 마음에 새기고 말씀을 좇아 사랑을 나누고 베풀며 살게 하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