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크리스천을 향한 두 가지의 질문? (빌 3:17-21)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5. 18. 08:16

크리스천을 향한 두 가지의 질문? (빌 3:17-21)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늘 세 가지를 살피며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첫째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나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참된 지식은 나를 바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하나님을 아는 자만이 나를 알 수 있고, 나를 아는 자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를 알면 겸손해집니다. 또 괜한 열등의식에 빠지지도 않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성경은 한 마디로 말합니다. '나는 하늘 나라 백성입니다.' '나는 하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할/
  둘째로, '내 나이 몇 살인가?' 하는 질문입니다. '자기 나이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실제로 제 나이에 걸맞게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나이를 안다는 것이 뭡니까? 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 가질 수 있는 것과 가칠 수 없는 것, 추구해야 할 것과 포기해야 할 것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나이를 바로 알면 기회를 상실하지 않습니다. 또 과욕과 허욕에 눈멀지도 않습니다.
  셋째로,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하는 질문입니다. 10년 후, 20년 후 나는 무엇을 할 것인지, 인생의 황혼기에 나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리고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인지, 죽음 이후에는 어떤 일이 있는지를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할/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물입니다. 그리고 '하늘 나라 백성입니다.' '하늘 나라 시민권을 가진 사람입니다.' /아멘!/
  내 나이는 몇 살입니까? 이것은 각자 스스로 생각해야할 문제입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겠습니까? 출세 할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날 반드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 후가 더 중요합니다.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가기 때문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알고 싶어하면서도 가장 알기 힘든 것이 있다면 죽음 이후 곧 내세의 문제입니다. 누구나 한번은 죽어 세상을 떠나 내세로 가야하기에 정말 내세를 알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죽음 너머 저 내세에서 이 현세로 온 사람이 없기에 내세를 알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공자의 제자인 자로가 스승인 공자에게 물었답니다. '죽은 후의 세상은 어떤 것입니까?' 공자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내일의 일도 잘 모르는데 죽은 후의 일을 어찌 알겠는가?' 참 정직한 답변입니다. 사람이 지금 살고 있는 현세의 일도 잘 모르는데 어찌 죽음 너머 저 내세를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합니다.
  그래도 그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매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내세를 설명하는 답을 내 놓았습니다. 수많은 종교, 철학, 그리고 민속이 제시하는 설명들을 정리해 보면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내세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종이가 타 없어지는 것처럼 소멸되어 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 이후의 세계는 없다는 것입니다. 많은 철학자들이 이에 동조해 왔습니다.
  둘째는, '영혼불멸설'입니다. 대표적으로 헬라 철학자 플라톤은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소멸되지만 영혼은 그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져 저 영원한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우리나라 무속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간다고 주장합니다. 때로 억울하게 죽은 원혼은 이승을 떠돌며 복수를 하기 때문에 그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굿을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주장은 여러 종교 여러 민족무속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윤회설입니다. 대표적으로 인도의 종교들은 '사람이 죽으면 현세의 행위에 따라 내세에 다양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합니다. 때로 이 지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때로 저 천상에 다시 태어날 수도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 번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연결되면서 끊임없이 이어져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輪廻)한다고 봅니다. 불교도 인도에서 시작된 종교이기 때문에 여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입장은 무엇일까요? 한 마디로 내세는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5:1절에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여기서 사도 바울은 집으로 비유해서 설명합니다. 그러니까 현세는 사람이 지은 집에서 사는 것 같고, 내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에 사는 것 같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지은 집은 완전할 수가 없습니다. 세월이 가면 낡고 여기저기 문제가 생깁니다. 여기저기 금도 가고 비도 새고 화재나 지진에 불타거나 무너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늘 불안하고 안심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현세의 삶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은 완전합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참된 평안을 누리며 살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장차 맞이하게 될 내세의 삶, 저 천국의 삶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할/
  ▶초대교회 이야기 가운데 읽은 한 토막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할 때 콜로세움 경기장에 굶주린 사자를 풀어 산사람을 사자 밥이 되게 했습니다. 로마시민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어머니와 어린 아들이 많은 기독교도들 틈에 끌려나왔습니다. 이제 막 사자 굴의 문이 열렸습니다. 굶주린 사자들이 으르렁거리며 달려옵니다. 어린 아이가 두려워 떨자 어머니가 아들의 몸을 꼭 안아주면서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얘야 눈을 감고 조금만 참아라. 그러면 곧 눈앞이 환하게 밝아올 것이란다!'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세를 살면서도 저 천국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여러분,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한 번은 꼭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이 만남이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축복의 만남이 될 것이지만 예수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심판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신 것이고, 앞으로 반드시 이루어질 주님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사실을 꿈에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의 삶과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의 삶이 다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 만남을 준비하며 살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전혀 그 만남을 준비하지 않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더라도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생각만 하면서 실제로 그렇게 준비를 잘 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철저하게 준비하는 사람은 그 만남이 조만 간에 이루어질 것으로 믿지만, 제대로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그 날이 막연하고 먼 미래에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날은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때 도적처럼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은 갑작스런 상황에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지금이 그 날을 준비할 때'라는 점입니다. 지금 준비하지 않은 사람들은 나중에도 준비할 시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반드시 한 번은 주님을 만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날을 잘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벧후3: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무슨 말씀인가? 우리는 장차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 이후에 우리가 들어가게 될 저 천국을 소망한다는 말입니다. /할/
  그래서 오늘 주제가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은 '십자가의 원수로 살 것인가? 아니면 천국 백성의 바른 삶을 살 것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탤런트 김혜자 씨가 쓴 '텍사스의 한 부자이야기'입니다.
  부자가 어느 날 성직자를 집에 초대해서 잘 대접한 후 그 높은 장소에서 동쪽 문을 쫙 열면서, '저 기름펌프가 펑펑 올라오는 유전이 자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서쪽을 여니, '소 떼가 있는 목장도 자기 것'이랍니다. 또 이쪽저쪽 창문을 여니, '골프장, 호텔이 있습니다. 다 자기 것이라며, 부러울 것이 없다.'고 자랑을 합니다. 그는 40년 전 맨손으로 텍사스에 와서 일군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때, 성직자가 가까이 가서 어깨를 만지며 그 부자에게 말했답니다. '위에는 무엇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 부자는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된 기대와 소망은 위에 하나님이 계신 곳이지 텍사스의 부자처럼 동쪽도 서쪽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계신 저 위에 것을 위해 '나는 무엇을 준비하며 살았는가?'를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늘의 시민권자로 살았는가?' 아니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았는가?'를 한번 정검해 보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두 가지 부류의 사람들을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한쪽은 바울이 '너희'라고 하며 편지를 써 보내는 사람들입니다. 즉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다른 한쪽에는 그가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18)이라고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어떤 자들인지에 대해서 바울은 본문 19절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그리스도인들은 그런 자들 같아서는 안 된다고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편지하며 권면하는 것이 20-21절의 내용입니다. 같이 상고 해 보겠습니다. /할/

 

  ①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18).
  당시의 세속주의 크리스천을 '십자가의 원수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되게 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편지 앞부분 즉 2:5-8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정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부인하고 죽기까지 복종하는 정신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원수들이란 이런 십자가의 정신을 저버리고 십자가와는 정 반대의 삶을 사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자기를 낮추기보다는 자기를 높이려고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려기 보다는 자기를 위해서, 자기 이익만을 탐내며 삽니다.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기보다는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며 거기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아까 텍사스에 부자처럼 말입니다. /할/
  '십자가의 원수!'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빌립보교회 안에서는 실제로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옥중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십자가의 원수'로 살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때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누구인가? 십자가의 주님을 향하여 칼을 들이대며 덤비거나 창을 들어 던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누구나 범하기 쉬운 일이기에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이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음을 감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허다합니다. /할/

 

  ②십자가의 원수의 삶은 무엇인가?
  ⑴먼저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자들의 결말은 멸망입니다(19).
  먼저 결론부터 말씀하고 본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마침이란 말은 저희의 운명이란 말과 같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들에게 정해진 운명은 멸망입니다. 멸망 뒤에는 영원한 심판이 있습니다. /할/
  ⑵배로 하나님을 삼지 말라!
  여기서 배란 `코일리아'라는 말로서 '식욕, 정욕, 음욕, 물욕'이 다 여기서 나옵니다. 이것을 위주로 살면 곧, 이것을 신으로 섬기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배는 인간 욕망 전부를 가리킵니다. 그들의 욕망은 하나님 대신에 저들의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은 욕망의 노예가 되고 있어서 욕망을 따라 거침없이 살고 있고 욕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아니합니다.
  결국 돈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말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기 때문에 천하를 다 주어도 족하다 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온 천하를 다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신 말씀은 사람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뜻입니다.
  귀한 것이 천한 것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재물의 유혹에 사로잡혀 소경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히 말세의 현상입니다.
  ▶'하나님 맙소사'라는 미국영화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서 하나님께서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에게 옷을 입히시지 않고 벌거벗겨 놓으신 이유를 말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옷을 만들어 입히셨다면 그들은 '주머니를 만들어주십시오'라고 했을 것이고, 주머니를 만들어 주면 다시 '돈으로 채워 주십시오'라고 요구했을 것이다.'
  ▶어떤 목사님이 숨을 거두려고 하는 유명한 소매치기를 위해 복음을 제시한 뒤 그의 영혼을 위해 그의 손을 붙들고 간절히 기도해 주었습니다. 목사님이 기도를 끝내고 보니 소매치기의 숨은 이미 끊어져 있었는데 기막히게도 그의 손은 목사님의 금 시계줄이 꽉 쥐어져 있더랍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도 없습니다. 욕망 따라 사는 사람이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아멘!/
  ⑶부끄러움을 영광으로 여기지 말라!(19)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이 말씀의 뜻은 부끄러운 일을 영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비도덕적이요, 반인륜적이라는 말입니다. 말세가 되면 파렴치한 일을 하면서 털끝만큼도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습니다. 가책은 고사하고 오히려 자랑스럽고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뜻 있는 사람들은 탄식합니다.
  죄는 마땅히 수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죄를 짓는 것을 괴로워하거나 갈등하기는커녕 도리어 자랑으로 알고 영광으로 삼는 것은 십자가의 원수가 됩니다. /아멘!/
  ⑷땅의 일만 생각하지 말라!(19)
  즉 이 세상일에 애착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세상은 천국 가는 발판으로만 이용할 뿐이지 거기에 애착하는 것은 십자가에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또 땅의 일이란, 육신을 좇는 자로 육신의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롬8:5절에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좇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그러나 참된 성도는 위엣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찾는 자입니다. 골3:1-4절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아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치었음이니라'
  아직 세상 것에 연연하고 그것이 탐나고 그것을 취하려고 하면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신앙 생활은 눈을 들어 하늘을 처다 보는 생활입니다. 뜻을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내 육신은 비록 이 땅에서 살고 있지만 내 정신과 마음과 뜻은 하늘에 두고 살아가는 생활, 이것을 신앙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몸은 하나님 앞에 나와 있는데 정신과 마음이 모두 이 세상에 깊이 빠져 있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면 먹고도 죽습니다. 가졌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사람이 되면 가진 것이 없어도 부유합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십자가 밑에 나왔으면서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동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의 원수로 살 것인가? 아니면 천국 백성으로 살 것인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합니다. 이 선택을 잘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우리는 천국 시민권 자로 살아야 합니다(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눈물로 호소하면서 저들이 또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이미 저들 가운데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교인들을 바라보며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 교인들도 많았습니다. 저들을 바라보며 안타까워하지만 저들을 돌이킬 능력이 없어 안타까워하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저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천국시민이라는 사실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특히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시민이라는 의식을 강조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빌립보가 어떤 도시입니까? 빌립보는 마게도니아 즉 오늘날의 그리스의 도시면서도 로마가 정복한 식민지였습니다. 군사적, 전략적 가치 때문에 로마는 거기에 식민도시를 세웠습니다. 그 시민들의 대부분은 오랫동안 군인으로 로마에 충성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군복무의 대가로 로마의 시민권을 부여받고 로마시민으로서의 모든 명예와 특권을 누리며 거기서 살도록 허락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로마식민지에 사는 로마 시민권자들의 특징은 어디서 살든 완전한 로마인으로 행세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인의 옷을 입고, 로마의 법을 따라, 로마의 언어를 사용하며, 로마의 도덕과 풍습을 따라 사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 사는 사람들이면서도 스스로 로마인으로 여기고 로마인처럼 자랑스럽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을 비유 삼아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비록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나라의 시민이라는 자각 속에 하나님나라 백성답게 살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할/

 

  ⑤그러면 천국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⑴천국시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마르틴 루터 킹 목사가 불만 섞인 표정으로 거리를 청소하는 흑인 청소부를 만났습니다. 그가 킹 목사에게 불평을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백인들의 집이나 청소하고 저들이 어질러 놓은 길이나 청소하며 살아야 합니까?' 이 때 킹 목사가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당신은 백인들의 길 한 모퉁이를 청소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의 한 모퉁이를 쓸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저 천국시민이라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비록 청소를 하고 있더라도 우리는 천국시민입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더라도 우리는 저 천국 백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시장에 팔려 나왔습니다. 오랜 시간 끌려와 지치고 병들고 허기졌습니다. 모두가 길게 누워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청년이 허리를 고추 세우고 반듯하게 앉아있었습니다. 노예를 사러 온 한 신사가 물었습니다.
  '힘들 텐데 눕지 왜 그렇게 힘들게 앉아있는가?' 그 청년 대답이 '나는 추장의 아들이요. 추장의 아들이 어떻게 땅에 누울 수 있겠소' 바로 이것이 자존심입니다. 천국 시민권 자는 자존심을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미국의 식민지 작가 '마크 트웨인'이 쓴 '왕자와 거지'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1881년 그가 46살에 쓴 소설입니다. 이 속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한 날 두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한 아이는 버킹검 궁전에서 태어났고 다른 아이는 거지 소굴에서 태어났습니다. 거지 소년은 늘 왕궁을 그리워했습니다. 그리고 버킹검 궁전에 살고 있는 에드워드 공자는 거지 생활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 거지가 왕궁 호위병에서 혼나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왕자는 그 거지를 왕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그리고 호기심으로 옷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그리고 거지를 꾸짖은 호위병을 꾸짖으려고 문으로 나갔다가 거지로 오해를 받아 밖으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거지와 왕자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바뀌고 말았습니다. 거지 소굴로 들어간 왕자는 거지 취급을 받아 거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 순간도 거지라고 생각하여 본 적이 없습니다. 밥을 얻으러 다녔습니다. 그래도 속으로 생각합니다.
  '나는 왕자다. 며칠 후 다시 궁중으로 돌아 갈 것이다.' 밥을 얻어먹으며 모욕을 당하여도 참으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왕자다. 며칠 후 다시 궁중으로 돌아 갈 것이다.' 땅바닥에서 불편하게 자면서도 중얼거립니다. '나는 왕자다. 며칠 후 다시 궁중으로 돌아 갈 것이다.' 구박을 받으면서도 끝내 왕자처럼 살았습니다. 당당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한편 왕궁으로 들어간 거지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도 생각합니다. '나는 거지다. 조금 있다가 왕자가 돌아오면 거지로 돌아 갈 것이다.' 최고의 호화로운 침대에서 자면서도 말합니다. '나는 거지다. 조금 있다가 왕자가 돌아오면 거지로 돌아 갈 것이다.' 사람들로부터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도 생각합니다. '나는 거지다. 조금 있다가 왕자가 돌아오면 거지로 돌아 갈 것이다.'
  드디어 운명이 바뀌는 날이 왔습니다. 왕자는 궁으로 돌아가 신분을 밝힙니다.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지를 내보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이 무엇인지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그런 말입니다. /할/
  '나는 누구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자다.' 우리는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자만 하늘 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사는 하늘 나라 백성입니다. 최고의 시민권을 가졌다는 자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할/


  ⑵하늘의 시민권 자는 하늘 나라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나라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에 하늘 나라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한국에 있는 미군들은 이 곳에서 잘못하여도 미국 법으로 재판을 받게 됩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늘나라 법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늘 나라 법이 무엇입니까?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천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천국 시민답게 살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올림픽에 참여하여서도 하늘 나라 법을 지키면서 안식일에는 아무리 금메달을 취득하는 경기라도 경기를 하지 않습니다. 금메달보다 귀한 것이 하늘 나라 법입니다. /할/


  ⑶하늘의 시민권 자는 사명 따라 살아야 합니다.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간 선교사 이야기입니다. 오랜 세월동안 선교를 했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답답했습니다. 좌절도 왔습니다. 실망도 됐습니다.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해변 가를 거닐고 있었습니다. 모래가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선교사는 모래 한 주먹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고 기념으로 가지고 가려고 봉지에 담았습니다. 그 때 모래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선교사님! 내 사명은 이 곳에서 이 해변을 아름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한국으로 가지고 겨서 방안에 두면 내 사명을 잃어버립니다. 가지고 가지 마세요.' 모래가 이렇게 말하는 것 같을 때에 선교사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렸습니다. '선교사님의 사명은 아프리카에 있는 것입니다. 한국으로 돌아가면 선교사가 아닙니다.'
  선교사님은 돌아가기를 포기고 끝까지 남아 아프리카 영혼을 위하여 일하다가 죽었습니다. /할/ 우리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곳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늘 나라로 갈 것을 바라보면서 이 곳에서 영혼 구원에 앞장서야 합니다. /아멘!/
  ▶영국에 '크롬웰'이란 사람이 전도하다가 천주교 신도인 메리 여왕의 핍박으로 인해 죽게 되었습니다. 처형대의 칼날이 떨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종이 여섯 번만 울리면 사형을 집행하게 되어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종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종지기에게 사람을 보내어 확인해 보았더니 분명히 종을 쳤는데 종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종 탑 꼭대기에 올라가 보았더니 한 여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종에 매달려 죽어 있었습니다.
  이 여인은 크롬웰의 애인인데 크롬웰을 살리고자 온갖 애를 다 써보았지만 길이 없자, 종 탑에 올라가 종을 몸으로 부둥켜안고 종소리가 나지 않도록 한 후 자신은 종 틀에 끼어 그렇게 죽었던 것입니다. /할/
  이 이야기를 들은 메리 여왕이 직접 그 곳으로 왔습니다. 이 광경을 지켜본 메리 여왕은 말하기를 '오 값진 희생! 크롬웰을 대신하여 죽었구나. 크롬웰을 석방하라. 그를 대신하여 애인이 죽었도다. 크롬웰을 위하여 대신 죽는 사람도 있는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구나.'라고 말하며 그 자리를 떠났다고 합니다.
  석방된 크롬웰은 손수건에 애인의 피를 묻히고 '이 피는 나를 위한 희생의 피'라고 울먹이며 피 묻은 손수건을 가슴에 간직한 채 일생동안 다른 여자를 사랑하거나 결혼하지 않고 정절을 지키며 복음을 전하면서 살았답니다. /할/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낸 정근모 장로님은 젊었을 때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머리가 비상한지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서울대학교에 막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는 국비로 미국에 유학을 갔습니다. 이 분에게는 다정한 친구 하나가 있습니다. 고등학교 동기이고, 대학교는 일년 후배입니다. 그 친구는 김재익이라고 하는데 고등학교 2학년을 마치고 그 친구 역시 서울대학에 입학합니다. 경제를 공부합니다.
  이 정근모씨는 원자계통에 대해서는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들은 유학 중에 떨어져서 공부했고 공부해도 분야가 다르지 않습니까? 그 사이에 정근모씨는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예수를 영접하고 독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정근모씨는 과학기술처 장관이 되고, 김재익 씨는 대통령 실에서 경제 담당 수석비서관이 됩니다. 바쁜 시간 중에 시간을 내서 만나면 경제 이야기, 과학 이야기, 정치 이야기, 그러다가 정작 헤어지고 생각해보면 해야 될 예수님 이야기는 하지 못하였답니다. 

  '다음에 만나면 반드시 예수님 이야기를 하리라'고 다짐하였지만 또 만나면 경제 이야기와 정치 이야기와 과학 이야기만을 했답니다. 이렇게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헤어진 다음에는 후회했습니다. 그러다가 중국 정부의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대통령 일행이 미얀마의 아웅산에서 참변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그 경제 수석도 함께 참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중국에서 들었습니다. 그는 즉시 달려와서 시신 앞에서 얼마나 통곡을 하고 몸부림을 치는지 '내가 그때 경제 이야기는 안 해도 되었고, 과학 이야기도 안 했어도 되지 않았나? 더 급한 이야기가 있는데!' 하면서 '예수님 이야기 하늘나라 이야기 왜 안 했던가?'하면서 땅을 치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었고 전도하는 일을 내일로 미루었다가 후회막급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을 그런 경험이 없습니까? 안 해도 될 이야기는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면서 정작 해야 될 하나님 나라 이야기, 예수 소리는 못하지 않았습니까?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당장 이 시간 가서 '하나님 나라 전파하라. 오늘에 충성하되 하나님의 일을 우선해서 천국을 전파하는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할/
  천국 시민권 자는 사명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사명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배요, 또 하나는 전도입니다. /할/

  ⑷천국의 시민권 자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에 실천자가 되어야 합니다.
  마22:37-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큰일, 가장 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냥 사랑이 아니고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는 사랑'입니다. 말하자면 가슴이 떨리고 영이 떨리는 그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첫째가는 일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어떤 대상을 정말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영이 떨리게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면 마음도 떨리고 정신도 떨리고 영혼도 떨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 사람들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합니다.
  마음이 떨리고 영혼이 떨리는 사랑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그런 사랑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구체적으로 표현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사랑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십니까? 사실 아주 당연한 질문인데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말씀은 내가 지금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내 생각과 관심 그리고 현재 내 마음속을 하나님이 지배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또 이 말씀은 내가 지금 하나님의 뜻을 우선해서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우리들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판단하고 생각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과감히 그 뜻을 취하고 나머지는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 삶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우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수고도 있어야 합니다. 때로는 희생도 감수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는 그만한 대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데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용기 없는 사람은 하나님을 따르거나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 길을 좁은 길, 좁은 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만큼 어렵고 힘들고 수고로운 길이기 때문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요13:34-35절에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 
  무슨 말씀인가? 그것은 '함께 더불어 살라'는 당부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삶에는 행복이 있어야 합니다. 기쁨도, 즐거움도, 재미도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적어도 주님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혼자 살수 없고 근본적으로 함께 살고 더불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유년기에는 부모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성장하면 이웃과, 친구와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생전체를 살아갈 때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관계의 삶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장 기쁨이 주어지고 행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그것은 이 관계의 삶이 가장 정상적일 때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서로 함께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할/


  ⑸천국 시민권 자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를 깊이 생각'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히3:1절에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프랑스의 철학자 파스칼은 '팡세'에서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습니다. 성경 사 42:1-4절 말씀 중 '상한 갈대'라는 말씀을 묵상하던 가운데 이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답니다. '인간은 자연 가운데서 가장 약한 하나의 갈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하는 갈대이다.' 파스칼이 볼 때 인간은 피조물 중에 정말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서 비참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연약한 존재가 생각을 하게 될 때 피조물 중에 가장 능력 있는 존재로서 위대함을 가지게 된다고 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인간다움은 생각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생각하며 살아갈 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생각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너무 바빠서 생각할 여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생각하는 훈련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하며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고 예수를 믿으면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늘 예수를 생각하며 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를 닮아가게 됩니다. 늘 예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살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게 됩니다. 늘 예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살면 자신의 마음도 예수님의 마음을 닮게 됩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살면 외모조차도 예수님을 닮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하되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주목하다'는 뜻을 갖습니다. 골똘하게 생각하며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누군가를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가 주는 소중한 교훈을 찾아내는 것을 말합니다. /할/
  ㈀사도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을 사도라고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유일하게 예수님을 사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분'이라는 뜻입니다. 그 분이 왜 오셨습니까? 마9:13절에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그리고 눅19:10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 보면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인간들로 하여금 죄 문제를 해결해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면케 해 주시기 위해서 그 분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할/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대제사장이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입니다. 특히 인간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속죄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를 이루게 하는 중보자입니다. 히5:4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이 귀한 일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대대로 맡기셨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왜 특별한 대제사장이신가 하는 점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짐승을 잡아 그 피로 백성들의 죄를 속죄토록 했습니다. 제사 드리는 사람들마다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제사 드린 사람이 속죄 받은 뒤에 다시 죄를 지으면 또 다른 제물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대제사장들이 드린 속죄의 제사는 불완전합니다. 그리고 반복적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대제사장 예수님께서 드리신 속죄의 제사는 달랐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점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7:27절에 보면 '그는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그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또 9:11-12절에 보면 '그리스도께서는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제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제물로 하여 제사를 드리신 대제사장이십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하신 대제사장이십니다. 그래서 이 속죄 제사는 완전한 속죄의 제사가 되는 것이고 또 다시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는 속죄의 제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께서 대제사장이 되셔서 자신을 드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은 죄에 대한 속죄의 제사를 드리셨습니다.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완전한 화해를 이루셨습니다. 이런 것을 생각하되 예수를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멘!/


  ⑹천국 시민권 자로 살기 위해서 우리는 사도 바울을 '본 받고' 살아야 합니다(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 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이 말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일차 권면한 말씀(고전11:1)입니다. 그리고 오늘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두 번째 권면하는 말씀입니다.

  '나를 본 받으라' 이 말씀은 우리 정서로서는 쉽게 말하기 힘든 말이지만, 사도바울이 자신의 믿음을 과신해서 한 말이 아니고 자꾸만 흔들리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뜨거운 열심과 확고한 신앙과 그리고 자신의 열정적인 헌신을 본받으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멘!/
  그리고 그는 우리를 본 받아 행하는 자들을 자세히 주시하며 관찰하라고 덧붙였습니다. 조만 간에 빌립보를 방문할 에바브로디도나 디모데 또는 빌립보 교회에서 바울을 이미 본받아 행하는 자들을 자세히 관찰하라는 것입니다. 즉, 이들을 본 받는 것은 결국은 '예수님을 닮으라'는 말입니다. 천국 시민권 자의 신앙의 모델이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할/ (2014년 5월 18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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