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욕심에서 오는 시험이 더 무섭습니다! (약 1:12-1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6. 1. 08:47

욕심에서 오는 시험이 더 무섭습니다! (약 1:12-18)


  야고보서는 베드로전후서와 요한 1,2,3서와 유다서와 함께 공동서신으로 분류되는 성경으로 이 편지는 여러 교회들이 함께 읽도록 쓰여진 성경으로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를 통해서 기록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야고보는 처음에는 예수를 메시야로 믿지 않았다가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보고 예수를 참 하나님의 아들로 믿었습니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깨끗하여 예루살렘교회 초대 감독이 되었고, 기도도 얼마나 많이 했던지 그의 무릎이 낙타무릎같이 되었다는 학설이 있습니다. 그는 평생 면도질을 하지 않고 기름도 바르지 않았고, 술과 독주를 입에 대지도 아니했습니다.
  백성들의 신임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그이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하는 백성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 그가 엘리야처럼 기도해서 가뭄에 비도 내리게 했다고 합니다. 그가 쓰던 의자를 4세기 때가지 보관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1절에서 자기를 소개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종은 그 몸에 흔적을 가졌습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를 표시하는 불 도장을 몸에 찍으므로 표시를 삼았습니다.
  우리들도 예수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갈6:17절에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바울은 자기의 몸에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매맞은 흔적, 옷을 벗으면 여기 저기 흔적이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눈에는 눈물로 얼룩진 통회의 흔적이 있어야 하고, 손바닥엔 사랑의 수고의 흔적이 있어야 하고, 발에는 평화의 사도의 발자국이 있어야 하고, 무릎에는 기도하는 무릎의 흔적이 있어야 하고, 허리에는 봉사와 겸손의 흔적이 있어야 하고, 입술에는 찬양과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고, 가슴에는 예수의 심장으로 예수의 마음의 흔적이 있어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제목 소개!▶


  ①시험은 종류가 다양합니다(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먼저 시험은 여러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시험은 다양하고 생각지도 않았던 시험이 있습니다. 돈에 대한 시험, 명예에 대한 시험, 자존심에 대한 시험, 이성에 대한 시험, 질병에 대한 시험,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 대한 시험 등 다양한 시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으로 '도키마조'이고, 또 하나는 마귀가 주는 시험으로 '페이라조'라고 합니다. 그리고 오늘 주제인 인간의 욕심으로부터 오는 시험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마치 입학시험, 승진시험과 같아서 막상 시험을 치를 때는 괴롭고 쓰리지만 일단 시험을 치러서 합격하고 나면 더 큰 축복이 됩니다. /아멘!/
  그러나 마귀가 주는 시험은 우리를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입니다(요10:10). 그리고 오늘 14절에서 오는 시험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에서 오는 시험입니다. /할/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도키마조)은 무엇인가?
  시련, 환란, 고난 등으로 어떤 목적을 위한 '테스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인정하기에 앞서 '테스트'를 먼저 해 보십니다. 이 시험을 통해 더 강해지고 더 담대해지고, 더 하나님을 찾게 되는 과정으로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독수리의 훈련 법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미 독수리가 자기의 큰 날개에 어린 새끼를 품고는 창공 높이 올라가서 사정없이 밑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러면 새끼 독수리는 추락하지 않으려고 연약한 날갯짓으로 안 간 힘을 쓰며 펄럭거립니다. 독수리는 이런 반복적인 훈련을 통하여 새끼 독수리를 훈련시킵니다.
  사실 새끼독수리에게는 이런 훈련이 시험이요, 시련입니다. 그런데 단 한 마리의 새끼 독수리도 이 훈련을 통하여 땅바닥에 떨어져 죽은 새끼는 없습니다. 떨어질 즈음에 어미 새가 내려와 그 날개에 받아 가지고 다시 올라갑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새끼 독수리는 자랍니다. 강해집니다. 날쌔집니다. /믿/ 어미 새 쪽에서 보면 새끼 새를 시험하는 것이요. 새끼 새 쪽에서 보면 그것이 연단이고 시련이고 훈련입니다. /할/


  ㉡또 하나는 마귀가 주는 시험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시험입니다. 요10: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 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이 시험을 '페이라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은 목적이 있고, 결과도 선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은 그것으로 인하여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시험은 목적이 나쁘고 결과도 나쁩니다.
  ▶사단의 시험이 갖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사단의 시험은 언제나 그럴싸하고 감미롭고 흥미 있게 시작됩니다.
  둘째는, 사단의 시험은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있습니다. 성차별도 없고 국경도 없습니다. 아담도 시험했고 삼손도 시험했고 예수님도 시험했고 베드로도 시험했고 우리도 시험하러 덤비고 있습니다.
  셋째는, 그러나 그 시험은 이길 수 있습니다. 내가 그 시험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시험을 이기신 주님과 연합하면 그 능력으로 시험을 이기는 것입니다.
  연합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힘이 없습니다. 내가 지금 엄청난 시험을 당하고 있습니다. 나를 도와주시옵소서. 이 시험을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소리질러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정원사가 나무의 가지를 싹둑싹둑 자리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던 사람이 물었습니다. '왜 나뭇가지를 무자비하게 자르고 있습니까?' 정원사는 대답했습니다. '저는 나무의 건강을 위해 가지를 자르고 있습니다. 가지를 자르지 않으면 건강하고 좋은 나무가 될 수 없습니다.'
  도로 길 좌우엔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습니다. 은행잎이 떨어지고 늦가을이 되면 은행나무 가지를 다 잘라줍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보다 더 성숙한 나무가 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벧전4:12절에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했고, 13절을 보면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야 영광의 날에 너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멘!/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되는 시험이 있습니다(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이 시험은 대부분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닌 내부로부터 솟아오르는 정욕의 시험을 가리킵니다. 욕심 때문에 오는 유혹, 정욕 때문에 오는 유혹, 교만 때문에 나타내려는 유혹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미혹'이라고도 합니다. 끌려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지 않습니다. 13절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찌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시험에 넘어간 뒤 그 책임을 하나님께 돌려서는 안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기' 때문입니다. /할/
  여러분,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선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악이 티끌만큼도 개입되실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으실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친히 아무도 악에 빠지도록 시험하실 수가 없습니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롬8:28절에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할/
  ㈁그러므로 유혹의 시험은 물리쳐야 합니다. 요셉은 보디발 부인의 성적 유혹으로부터 멀리 피했습니다. 피하는 길이 이기는 길입니다. /아멘!/  
  ▶과거 시험을 치르러 한양으로 올라가던 젊은이가 어느 날 밤 주막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주막에는 예쁜 여자가 온갖 교태를 부리며 술과 미모로 그를 유혹하기 시작했습니다. '서방님, 하룻밤만 더-, 하룻밤만 더' 하면서 유혹했습니다.
  그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 젊은이는 술과 여자에 빠져 과거 시험에 응시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은 나쁜 시험에 빠져버린 사람입니다. 그러나 다른 젊은이는 절세가인의 감미로운 유혹을 뿌리치고 한양으로 올라가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으로 급제한 후 금의환향했습니다.
  한 사람은 시험에 졌고 한 사람은 시험에 이긴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런 미혹에서 이기고 승리하는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②시험이 찾아올 때 사람들이 어떤 태도를 취합니까?
  보편적으로 몇 가지의 유형이 있습니다.
  ⑴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부부싸움을 해도 그렇습니다. 자기야 본래 좋은 사람인데 당신하고 살면서 나빠졌다고 하며 그 나빠진 원인을 상대방에게 돌리는 경우를 자주 목격합니다. 그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탓일 수 있겠습니까?
  '가정을 좀 먹는 네 가지 탓'에서 벗어나기 바랍니다. 즉 '남편 탓, 아내 탓, 부모 탓, 자식 탓'을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다 보면 탓하는 것이 체질화되어 고약한 사람이 됩니다. 내 탓은 죄를 끊는 동기부여를 하지만, 남 탓은 나의 죄를 증폭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믿/
  ⑵환경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 잘못된 일이 정말 환경 때문에 생겨난 일일까요? 아닙니다. 환경은 큰 이유가 아닙니다. 지난 다음에 생각해 보십시오. 진정 그 길밖에 없었습니까? 얼마든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환경 탓이 아닙니다. 원인은 자신에게 있습니다. 가난하면 도적질을 해도 됩니까? 화나면 살인을 해도 됩니까? 안 되는 것이지요. 환경 탓이라면 책임질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됩니다.
  ⑶자기 죄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나만 그런가?' 하면서 '다 그렇다.'고 보편화시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내 죄는 내 죄이고, 자기 잘못은 자기 책임입니다.
  ⑷실수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자기는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깜빡 실수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실수였을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할 수 있는 씨앗이 이미 자기 속에서 자라고 있었음도 인정해야 합니다.
  ▶오래 전에 연대 앞 공중전화박스에서 통화를 간단히 하라고 하던 아주머니를 전화하던 청년이 발끈하여 칼로 찔러 죽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그 청년 이야기가 한심합니다.
  자기는 자라면서 나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데 그 순간에 자기가 왜 그랬는지 알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순간적인 실수였을까요? 아닙니다. 이미 자기 속에 오랫동안 누적된 욕구불만이 있었습니다. 그 누적된 것이 그 순간에 터져 나온 것입니다.
  ⑸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고 하며 은근히 책임의 초점을 흐려버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완벽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단단히 결심했다면 그 사건에서 충분히 시험을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시험을 충분히 이길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 시험을 이기지 못해 자기 자신이 죄를 지은 것이지 애초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⑹자기 책임을 항상 마귀 탓으로 돌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마귀가 중간에 장난해서 어찌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가장 고약한 태도이고, 가장 무책임한 태도입니다. 설사 마귀가 중간에 장난을 했다고 할지라도 내 마음과 의지를 통해 벌어진 일은 내가 책임을 지겠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⑺자기가 저지른 것이 죄가 될 줄 몰랐다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참으로 미숙한 태도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일곱 가지 태도는 자신이 자신을 과보호하려는 태도입니다. 어린아이들을 과보호하면 버릇이 나빠지듯이 자신을 과보호하면 여러 가지 면에서 나쁜 태도가 체질화됩니다. 그러면 문제 해결은 요원해지고 시험을 극복할 수 없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죄는 '내 탓이요'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게 되고. 축복된 자리를 향한 위대한 출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아멘!/


  ③왜 시험이 옵니까?(14)
  사실 '왜 시험이 올까요?'라는 질문은 대단히 중요한 질문입니다. 무엇 때문에 시험을 당하는지, 혹은 시험이 어느 길로 오는지를 알아야 시험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지혜가 보다 많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야고보는 시험의 근본 원인을 '자기 자신'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⑴사람이 죄의 유혹을 받는 것은 '욕심'이라는 '미끼'에 걸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탓할 수 없습니다. 순전히 자기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욕심이 죄의 유혹으로 이끌고 갈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욕심은 항상, 대상에 의해서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쉽게 이끌립니다. 예쁜 여자, 술, 돈, 화려함, 인기, 권력, 등등의 감각적 대상의 올무에 빠지게 됩니다.
  물론, 좋은 일을 위한 욕심도 있습니다. 어떤 이의 표현대로 '주를 위한 긍정적 의미의 욕심'도 있을 수 있지만, 욕심은 일반적으로 모든 죄악의 뿌리가 되는 부정적 감정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원인은 세상이 아닙니다. 환경도 아닙니다. 원인은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시험은 내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정말로 내 책임이 없는 상태에서 욕심을 부리지 않았는데도 어려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영적으로 부족해서...'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나는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다 보면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원망의 자리'로 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원망하는 것을 대단히 큰 죄로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원망이란 기본적으로 마음의 간사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원망을 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리로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망하는 사람을 보면 진실한 삶의 모습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창2-3장에 나오는 하와를 대하는 아담의 모습을 보십시오. 일이 잘될 때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하더니 일이 잘못되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저 여자가'라고 나옵니다. 그렇게 여자 탓을 하다가 나중에는 여자를 주신 하나님에게까지 원망을 돌립니다.
  이처럼 원망은 자꾸 거슬러 올라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는 결국 하나님을 원망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남 탓, 환경 탓이요, 좀더 나아가면 조상 탓이요, 마침내는 하나님 탓을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원망은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 됩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원망하는 죄를 지으면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와 시험이 있을 때마다 내 책임을 항상 먼저 생각하고 슬기롭게 어려운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 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⑵아담과 하와도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을 받아 넘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부족함이 없는 넉넉한 에덴동산을 이루시고 신접살림을 차리게 하셨습니다. 에덴 동산에 얼마나 실과가 많았습니까?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것으로 만족을 삼지 못했습니다. 감사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오직 한 가지 선악과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기 할 만큼 탐스러웠습니다.' 결국은 욕심에 끌려서 선악과를 따먹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의 원죄의 창시자가 된 것입니다. /할/
  ⑶우리는 야고보 사도가 처음에 고백한 것처럼 종의 자세로 살아야 합니다.
  욥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다. 그가 얼마나 많은 시험을 겪었습니까? 사실 욥처럼 하나님을 원망할 이유가 많았던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많던 재산이 다 날아가 버렸습니다. 사랑하는 십 남매가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은 시험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욥1:21절에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할/
  그렇습니다. 욥은 자기가 주인이 아니고, 자기는 종이고 주인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주인 되신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을 삼고, 또 주인 되신 하나님이 가지고 가시니까 그것으로 감사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의 마음 속에 욕심이 없으니까 시험에 빠질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아멘!/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랍비에게 사랑하는 아들 두 명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랍비가 잠시 외출한 사이에 두 아이가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랍비의 아내는 일단 두 아들의 시체를 방안으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나서 남편이 돌아오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뒤에 랍비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내는 남편 랍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제가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제게 아주 귀중한 보석 두 개를 맡기고 갔습니다. 그런데 오늘 느닷없이 저를 찾아와서는 맡겨놓은 보석을 돌려달라고 하는데 이럴 때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랍비는 아무런 생각 없이 대답했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주인이 달라고 하면 당연히 돌려주어야지. 어서 돌려주도록 하시오.' 그제야 랍비의 아내는 랍비를 데리고 두 아들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흐느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 방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놓으셨던 귀중한 보석 두 개를 찾아가셨답니다.'
  우리는 주인이 아닙니다. 주인 되신 하나님이 주신대로 만족하고, 주인 되신 하나님이 도로 가지고 가시면 그것으로 만족을 삼고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욕심이 없으면 우리가 시험에 빠질 리가 없습니다. 결국은 다 인간의 욕심 때문에 미혹을 받아 시험에 넘어가는 것입니다. /믿/


  ④'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
  중간에 죄가 있습니다. 시작은 욕심입니다. 결과는 사망입니다. 얼마나 무섭습니까?
  욕심은 탐심입니다.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마음' '분수에 넘치도록 더 가지겠다는 마음'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한계를 모르는 소유욕'이 탐심입니다.
  이 탐심이 있는 한, 합리적인 의논은 불가합니다. 의(義)도 이루어 질 수 없습니다. 이 탐심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한 지난 일도 괘씸하게 생각되어 용서가 안되고, 그러다 보니 현재도 마음이 편치 못하고, 무엇 보다 미래에 일어날 일까지 예상하면서 미리 불편하고, 미리 행복하지 못합니다. 다 탐심 때문이다.
  ▶미국의 대재벌이었던 록펠러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소유가 넉넉하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내가 클리블랜드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한 주에 3불을 받아도 하도 귀하게 여겨져서 화장실로 달려가 몰래 세어보곤 했고, 그 때는 그 주급 3불이 천하를 얻은 듯 가슴 뿌듯하고 행복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다. 지금은 그때보다 엄청나게 재산이 많아졌지만 행복은 오히려 그렇지 못하다. 만일 그 때 그 행복을 도로 살 수만 있다면, 나는 지금의 재산을 다 내 놓겠다.'
  록펠러의 이 말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행복이란 소유와 비례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돈이 없다고 '난 불행하다.' 이렇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또 가졌다고 교만할 것 없고, 못 가졌다고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아멘!/
  여기 '잉태하여' '낳는다.'는 표현은 다분히 성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욕심이 죄를 잉태하여 출산하고 죄가 커나가 사망을 낳는 여성 이미지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욕심이 세상의 온갖 악한 대상들, '물질, 향락, 권력, 인기' 등등 음란한 결합을 이룰 때 필연적으로 '죄' 덩어리라는 사생아를 낳게 됩니다.
  그 다음에 악한 욕심의 외아들인 죄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절정에 이르게 되면 사망이라는 최후의 원수를 낳게 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이라는 표현과 '죄가 장성한즉'이라는 두 표현을 비교해보십시오. 욕심이나 죄가 모두 생명체의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속성은 좋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입니다.
  욕심에 중독되어 가지가지의 죄악을 낳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의 굴레에 갇혀 점점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죄가 욕심이라는 어머니의 탯줄을 끊고 나온 뒤 자꾸만 자라나서 더 이상 성장할 여력이 없는 막다른 골목에 이르게 될 때, 결국 죽음으로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할/
  ▶여기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욕심은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눅12:15절에서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 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탐심은 '자신이 이미 가진 것보다 더 가지려고 하는 욕심'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탐심은 탐욕이라고도 하고, 넓은 의미에서 욕심이라고도 합니다. /할/


  ㉠이 욕심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⑴개인적인 욕심입니다.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더 채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커스틴'이라는 역사물을 저술하는 작가가 유럽 벨기에 왕가의 흥망성쇠를 다룬 책을 썼습니다. 그 중 '3명의 에드워드'라는 글이 있는데, 그 글의 주인공은 '레이놀드'라는 왕자입니다. 이 레이놀드 왕자에게는 크라수스라는 별명이 있었습니다. 그 뜻은 '뚱뚱한 것보다 더 뚱뚱하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은 차기 왕이 될 사람인데 부왕이 갑자기 서거하자 그 동생 에드워드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형 레이놀드를 유커크라는 성에 가두게 됩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정권을 잡은 동생 에드워드가 형을 절대로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감옥을 비교적 아담하게 꾸며 살기 좋은 방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또한 감방에 작은 창문 하나를 만들어주고 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형이 원하면 언제든지 창문으로 나갈 수 있고 그래서 자유인이 되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창문이 아주 작다는 것입니다. 몸무게를 줄여야만 그 창문 바깥으로 나가서 자유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왕이 된 동생 에드워드는 신하들을 모아 놓고서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 형이 몸무게를 줄여서 저 창문을 나올 수가 있다면, 형은 대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써 자신을 잘 관리하는데 성공한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기쁘게 내 형에게 왕의 자리를 양위하겠다. 그러나 나오지 못한다면 자기 몸무게 하나 컨트롤을 할 수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내 결정이 옳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그리고 감방을 지키고 있는 경비병에게 매일 하루 세 끼씩 산해진미의 음식을 형이 있는 감방에 제공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원하면 언제든지 간식을 풍성하게 먹을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결국 이 사람은 그 감옥 안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탐식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개인적인 욕심을 이겨야 합니다. 즉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합니다.
  ⑵관계 적인 욕심입니다. 남의 것이 탐이 나서 욕심을 부리는 것을 말합니다.
  몇 년 전, 한 신문의 만화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나뉜 두 목초지가 있었습니다. 두 목초 지는 비슷한 크기였고 각각 푸른 풀이 우거져 있었습니다. 각 목초 지에는 노새가 한 마리씩 있었는데, 두 마리 다 철조망 울타리 사이로 고개를 집어넣어 반대편 목초 지의 풀을 뜯고 있었습니다. 풀을 뜯기가 훨씬 어려운데도 울타리 너머의 풀이 더 좋아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풀을 뜯던 노새들의 머리가 울타리 사이에 끼여 버렸습니다. 아무리 해도 빠져나갈 수 없게 되자 노새들은 겁을 집어먹고 시끄럽게 울어댔습니다. 이 만화의 제목은 '욕심'입니다.
  사실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다른 사람의 초장이 더 푸르러 보이는 법입니다. 이것을 이겨야 합니다. /아멘!/
  ⑶심지어 하나님 앞에서까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7장에 나오는 아간이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감추었습니다. 7:21절에 보면, 나중에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에 발각된 뒤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노략한 물건 중에 시날 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이백 세겔과 그모게가 오십 세겔되는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가졌나이다.' 결국 그는 돌로 맞아 죽어 저 아골 골짜기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것을 탐내서는 안됩니다. 결코 이런 욕심을 부려서는 안됩니다. /아멘!/
  ㈀욕심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십니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십계명 중 마지막 계명으로 명령하셨습니다. 시10:3절에 '악인은 그의 마음의 욕심을 자랑하며 탐욕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욕심을 부리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고 멸시하는 자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욕심은 모든 죄의 뿌리와 근원입니다(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습니다.
  장기려 박사는 그의 헌신적인 진료활동을 통해 국내외에서 상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중에서 그가 가장 영예로운 상으로 여기는 것은 회갑연 때 함석헌 선생의 축사입니다.
  함석헌은 '그 사람이 어디 능력이 있어서 일을 하나? 욕심이 없으니 다 되는 거지'라고 했었습니다. 죽었을 때 물레밖엔 남지 않았다는 간디를 바라보며 장 박사는 자신의 부요 함을 부끄럽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욕심만 버리면 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성자처럼 살수도 있습니다.
  ㈂욕심은 우상숭배입니다. 골3:5절에 보면 '욕심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탐심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무엇이 있게 되는데 그건 바로 우상숭배이기 때문이다. 과도한 탐심 속에는 어떤 고상한 생각도, 위대한 정신도, 하나님에 대한 영성도 기도나 찬송도 그 마음속에 자리 잡을 여유가 없습니다.
  엡5:5절에 '너희도 정녕 이것을 알거니와 음행하는 자나 더러운 자나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을 얻지 못하리니' 욕심을 부리는 자를 우상숭배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우상에 절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금, 은, 동, 철의 우상은 섬기지 않는다 해도 더 사특한 자기 자신의 욕망이란 우상에 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우선 시 되는 그 어떠한 것도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가정이나 직업, 취미도 하나님보다 앞세워지면 우상이 되고 이러한 우상을 섬길 때에 모든 불행과 고통과 환난이 우리의 삶 가운데 다가오게 됩니다.
  딤후6:10절에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찔렀도다.'
  욕심이 미혹의 근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심에 사로잡히면 믿음에서 떠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일단 욕심에 사로잡히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구두 닦는 청년이 찬송가를 부르면서 구두를 닦는데 그 모습이 하도 기특해 은행장이 자신의 일부 재산을 정리해서 그 청년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돈을 받고 청년은 돈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집안 어디에 숨겨두어야 도둑이 찾지 못할까 고민하는 바람에 그의 입에서 그만 찬양이 끊어졌다고 합니다. 찬양이 멈춘 것을 알고 그는 은행장에게 도로 돈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는 구두닦이를 하며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욕심을 버려야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욕심을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⑴욕심이 일어나거든 거룩한 욕심을 가지십시오.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 권에 대해 욕심을 가져서 형 에서에게 팥죽으로 그 장자 권을 샀던 것처럼 거룩한 욕심을 가지려 해 보십시오. 그러면 세상적 욕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⑵자족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빌4:11-12절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우리가 사도 바울 처럼 자족하는 삶을 살게 되면 욕심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⑶절제의 마음을 가지십시오. 잠30:8절에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십니다. 지혜자 아굴은 재물에 대해 탐심을 버리고 절제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럴 때 욕심을 이길 수 있습니다.
  ⑷하나님으로 만족해하십시오! 시23:1절에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다윗처럼 그저 여호와 한 분만으로 만족한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⑸마음을 지키십시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돈이나, 건강은 지키려고 안간힘을 다 씁니다 만은 마음을 지킬 줄 모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우리가 모든 허망한 마음들을 예수께 복종시키면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말씀으로 지켜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지켜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로 지켜야 합니다. /아멘!/
  이것이 깨어있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2:5절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여기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권위 아래 둔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위 아래 우리의 생각과 욕구와 가치관을 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삶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⑤시험을 참는 자(이기는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됩니다(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아무리 하나님께서 귀한 기회를 주셔도 참지 못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 참는다는 말은 참을성 있게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 쉽게 표현하면 모든 욕심의 유혹을 이기고 견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아야 합니다. 인내가 필요합니다. 인내는 계속해야 합니다. /할/
  여러분, 대부분의 모든 일들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때가 있습니다. 밥이 익는 것도 때가 있습니다. 집을 짓는데도 때가 있습니다. 국가의 거대한 계획들은 수십 년이 걸립니다. 모세라는 한 지도자가 나오기까지 80년이 걸렸습니다. 주님이 이 땅에 오시기까지는 수천 년이 걸렸습니다. 우리 신앙훈련도 때가 있습니다. 기간이 있습니다. 요셉의 고난도 때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한없이 낮추시는 것 같아도 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정하실 때까지 참아야 합니다. 낮아지고 죽어지고 순종하고 충성하면 높여주실 때가 옵니다. 그래서 벧전5:6절에서 베드로는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고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끝까지 참으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도 끝까지 참을 때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아멘!/
  함석헌씨의 '고난의 선물'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고난은 죄를 씻어준다. 고난은 인생을 씻어 깨끗하게 한다. 고난은 인생을 깊게 만든다. 이마 위에 깊은 주름살이 갈 때 마음속에 깊은 지혜가 생기고, 살을 뚫는 상처가 깊을 때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향기가 높다. 고난은 인생을 위대하게 만든다. 고난을 견디어 냄으로써 생명은 한 단계씩 진화한다.' 그러므로 온전한 축복이 임하기까지 온전히 참고 나가시기 바랍니다. /할/
  ⑴끝까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그랬습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여호와께 드릴 때처럼 하나님을 사랑함에 합격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을 때 그 신앙은 비로소 최상의 신앙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리 뛰어도 자기를 위한 합리적인 신앙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모르고서는 진정한 신앙의 성숙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깊이 깨달아 갈 때 신앙의 완성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⑵시험을 합격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할/
  계2:10절에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약속했습니다.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하늘의 생명수가 흐릅니다. /아멘!/
 

  ⑥속지 않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16-18).
  ⑴16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욕심으로 무엇을 얻고, 욕심으로 무엇을 이루겠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욕심의 결과는 생명이 아닙니다. 사망입니다. 망하는 것입니다.
  ▶나이 50대에 접어든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해 결혼기념일을 맞이했습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 분이 너무나 행복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니까 보기에 좋습니다. 그래서 결혼기념으로 제가 소원을 한 가지씩만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천사는 먼저 아내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자기의 소원을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 남편하고 세계일주를 한 번 했으면 좋겠습니다.' '소원을 들어드리지요' 그러면서 천사는 아내의 손에 두 부부가 세계를 일주할 수 있는 비행기표 두 장을 쥐어주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에 천사는 남편에게 소원을 물었습니다.
  '당신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남편은 머뭇머뭇하더니 천사를 끌고서 구석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천사의 귀에 대고서 소곤소곤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저보다도 나이가 한 30살쯤 연하의 마누라를 한 번 데리고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자 천사는 빙긋이 웃으면서 남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남편의 나이가 50대인데 갑자기 늙어서 80대의 할아버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욕심의 결과입니다. 욕심으로 무엇으로 얻겠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욕심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시험에 빠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험을 만나셨습니까?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언제나 우리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선하십니다. 언제나 복되게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간에 그저 감사함으로 받으시면 됩니다.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해 주시겠지!' 그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면, 곧 하나님은 우리를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
  ⑵하나님은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을 주시는 분이십니다(17).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십니다. 마7:11절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악할 지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언제나 좋은 것을 줍니다. 하물며 하나님은 선하신 분인데 왜 자녀가 된 우리에게 나쁜 것을 주시겠습니까? 가장 좋은 것을 주십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좋은 것은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세상이 좋은 것을 주는 것 같지만 속지 마십시오. 세상에는 공짜가 없습니다. 내게 하나를 주면서 열을 가져가는 곳이 세상입니다. 내게 있는 것을 다 빼앗아가야 만족하는 곳이 세상입니다. 그것이 사단입니다. 좋은 것은 절대로 주지 않습니다.
  세상의 복은 근심과 두려움이 함께 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것은 다릅니다. 잠10:22절에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아멘!/
  ⑶왜 우리에게 좋은 것만 주시려고 하십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낳았기 때문입니다(18).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우리는 사랑 받는 자녀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어떤 시험을 만나도 그 속에는 아버지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있습니다.
  여기서 야고보는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셨다는 사실과 관련해서 중요한 몇 가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는 본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님은 특별히 우리를 택해서 두 번째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할/
  ㈁우리로 '첫 열매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습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은 첫 열매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의 초태생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소중히 생각하시겠습니까?
  사49:15절을 보세요!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아멘!/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잊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의 것으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름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면서 늘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눈동자와 같이 보살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믿/할/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낳으신 동기가 무엇입니까? 내가 잘나서 그런 것입니까? 내가 의로워서 그런 것입니까? 아닙니다. '자기의 뜻을 좇아'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 적인 은혜입니다. /아멘!/
  ㈃또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를 무엇으로 낳으셨다고 하셨습니까? 거듭남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습니다.
  벧전1: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들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들어야 믿음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롬10:17절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아멘!/
  우리 모두 말씀으로 거듭나서 어떠한 세상의 유혹과 미혹에서도 당당히 이기고 승리하는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014년 6월 1일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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