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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에도 치열하게 글쓰는 이어령 선생 “문단ㆍ학계서 외톨이지만 글로 영향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1. 3. 17:58
SOCIETY    2014.09.02주간경향 1091호
[유인경이 만난 사람]80대에도 치열하게 글쓰는 이어령 선생 “문단ㆍ학계서 외톨이지만 글로 영향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평생을 ‘최고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는 대체 어떤 삶을 살까. ‘대한민국 대표 지성’인 이어령 선생은 ‘우상의 파괴’와 ‘저항의 문학’을 외쳤던 20대 열혈 문학평론가에서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의 주창자로 80대에도 맹활약하고 있다.

생전에 최인호 작가는 “이어령 선생님의 손에 들린 붓과 신이 주신 최고의 선물인 그 놀라운 혀는 손오공의 손에 들린 여의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최 작가가 독자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선물이 <읽고 싶은 이어령>이란 책이다. 최 작가가 이 선생의 수많은 글들 가운데서도 가장 빛나는 글만을 가려 뽑은 이어령 에세이의 결정체다. 이 선생이 1967년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최 작가를 데뷔시킨 인연이 아름다운 책으로 탄생했다. 그 책을 보니 이 선생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졌다.

 

직접 쓰거나 기획한 책이 300여권에 이르는데, 이번 책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인가요.
“이번 책에 소개된 글들은 대부분 제가 20~30대 때 쓴 글들이에요. 옛글을 내놓는 것은 마치 학창시절이나 신입사원 때의 사진, 지금 보면 너무 촌스러운 모습을 공개하는 것과 같은데 80대에 그런 글을 내놓고 싶겠습니까. 그런데 서문에도 소개했듯 최인호가 암으로 투병을 할 무렵, 제가 문병을 가야 하는데도 저를 찾아왔어요. 자기가 아끼는 제 글을 골라 엮은 가제본 책을 갖고 왔더군요. 그때는 거절했는데 얼마 후 인호가 타계했어요. 인호가 없었다면, 그가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 책은 아마도 이 세상에 영영 나오지 못했을 거예요. 제 의지로 내지 않은 유일한 책입니다. 출판되고 보니 의미가 있더군요. 지울 수 없는 제 흔적들을 찾을 수 있고, 다시 보니 감회도 새롭습니다. 당시 제 글을 읽은 나이든 독자들에게도 추억이 될 수 있고요.”

소설이 아닌 글들은 당시 시대상이 반영되어서인지 다시 읽으면 진부한 경우가 대부분인데, 선생님의 글은 어느 시대에 쓰신 글이건 항상 신선합니다. 시대의 한계에 매몰되지 않는 보편성이라고나 할까요.
“저는 한 번 쓴 글은 다시 읽지 않고 지난 일도 되돌아보지 않습니다. 과거에 연연하기보다 항상 앞을 향해서 달렸어요. 이 책은 다시 읽어보니 문장이 ‘~것이다’로 끝나던데 당시엔 아주 새로운 문체였습니다. 젊은 나이에 왜 노인네처럼 썼을까 싶긴 하더군요. (글쓰기는) 80대인 지금 더 치열하게 써서 감각적으로는 더 젊게 느껴질 겁니다.”

문단 데뷔 당시엔 평론가로 필명을 날리셨죠.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청개구리를 해부하자 김이 모락모락 난다고 표현한 것을 ‘개구리는 냉혈동물이라 김이 안 난다’고 지적하거나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동이가 왼손으로 채찍을 잡는 묘사로 왼손잡이 주인공의 친자임을 암시했는데 왼손잡이는 유전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등 냉철하다 못해 모진 비평을 많이 했습니다.
“혈기왕성한 20대 젊은이니까 가능했죠. 그 소설들은 팩트가 틀린 것이지 문학적 사상이나 문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 항상 ‘내 머리로 생각해 내가 판단한 것만 믿는다’는 소신이 있어요. 남이 만든 요리가 아니라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 먹자는 거죠.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에 독약을 마시고 제자들과 나눈 말이 유명한데 아주 길게 말을 합니다. 저는 그 말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도대체 어떤 독약을 먹었기에 그렇게 오랜 시간 말을 할 수 있나 궁금했습니다. 당시 사료를 찾아보니 헴로크란 독약을 넣었더군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 머리로 납득이 되지 않으면 계속 연구하고 자료를 찾아보죠. 아마 제가 막내여서 혼자 생각하고, 사물에 호기심이 많고, 다소 버릇 없는 성향을 갖게 된 것 같습니다. 불쌍한 아이죠. 항상 따져 묻는 건방진 아이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부모형제도 싫어하죠. 그래서 글을 쓰면 항상 논쟁이나 말썽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남정현의 <분지> 사건의 증인으로 나서는 등 당시엔 매우 진보적이고 저항적인 문인이었는데 선생님은 그때나 지금이나 항상 중도에 있습니다. 좌우나 진보·보수로도 규정되지 않고요.
“지금은 상상도 못할 만큼 엄혹한 시대였어요. 반공법이 있어 간첩을 옹호하거나 변호해도 잡혀가던 시절이었죠. 그때 저는 작가 남정현을 옹호한 것이 아니라 그의 문학, 문학의 순수성을 옹호한 것입니다. 남 작가를 기소한 이들에게 ‘당신들에게만 법이 있나. 나도 법을 지킨다. 나의 법은 문법, 창작법, 수사법(레토릭)이다’라고 주장했죠. 유신 시절에 제가 경향신문 논설위원으로 쓴 글 가운데 150여건이 당시 정부로부터 규제를 받았습니다. 서슬 퍼런 당시 기관원들과 정말 지독히 오랜 시간을 실랑이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정부는 완전히 불신임을 받았다’라고 제가 쓴 문장을 갖고 ‘완전하다는 것은 숫자로 얼마냐. 100%냐. 그럼 국민이 전부 불신임한다는 거냐. 나는 불신임을 안 하는데 이건 거짓말이 아니냐’ 등등의 주장을 펴더군요. 저는 ‘불신임도가 100%라는 것이지 100%가 불신임한다는 것은 아니다’라고 반론을 폈죠. 박정희 대통령의 분식장려 운동도 ‘죽 먹던 국민을 밥 먹게 하는 것이 정부의 역할인데 왜 밀가루를 먹으라고 하냐’는 칼럼을 썼다가 문제가 됐습니다. 경향신문의 <여적>을 비롯, <지평선> <분수대> 등 타 신문의 칼럼을 새로 만들고 쓰면서 매일같이 정부와 싸웠습니다. 저는 좌도 우도 아니었기에 양쪽 모두에서 비판을 받았습니다.”

색깔이나 성향보다는 글이란 ‘무기’가 달라진 것 같습니다. 예전엔 아주 뾰족하고 예리한 칼이었다면 요즘 글은 부드럽고 푸근한 손 같다고나 할까요.
“예전에 쓴 날카로운 비판의 글을 보면 과연 그게 옳았냐는 회의가 들어요. 좀 더 창조적인 글을 쓸 걸 하는 후회도 들고요. 제일 쓰기 쉬운 게 비판의 글입니다. 특히 권력층을 비판하면 독자의 박수도 크죠. 제일 쓰기 어려운 글이 긍정과 창조적인 글입니다. 오해도 많고 너무 앞서가서 이해도 못 받습니다. 제 글이 날선 비판에서 긍정과 창조로 바뀐 것은 제가 늙고 생활의 여유가 있어 비판력이 사라져서가 아닙니다. 나이 들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제 삶과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과거의 독설보다는 시행착오를 거쳐 긍정과 창조적인 글을 쓰게 됩니다. 결국 창조는 긍정의 힘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20대에 신문사 논설위원을 시작으로 대학교수, 문화부 장관, 문학사상 대표, 서울올림픽 기획자. 새천년준비위원장 등 소위 문화권력이었는데 권력은 안 누렸습니다. 작가들이 워낙 탈권위적이긴 합니다만….
“자의로 그런 자리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장관 제의도 몇 번 거절하다 문화공보부가 아니라 최초로 ‘문화부’가 신설된다기에 맡았습니다. 권력 욕심이 없으면 뭐든 자유롭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어요. 모든 인사권도 간섭받지 않았고 대통령 결재가 난 사안도 직접 따져서 바꾸기도 했습니다. 제가 당시 만든 10개년 계획은 계속 이어졌죠. 특히 뿌듯한 것은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를 만든 것입니다. 교육부 산하가 아니라 문화부 소속으로 하고 예술가들을 양성하는 국립교육기관으로 만들었죠. 한예종 출신들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실력을 발휘하고 인정받는 모습을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제가 장관을 자진사퇴하고 연말까지 임기를 마치는 국무회의 5분 전에 그 법안이 통과되었습니다. 장관이건 공무원이건 소신껏 일할 수 있도록 여건이 마련되면 절대 나쁜 짓 하는 사기꾼 협잡배가 되지 않습니다. 다행히 제가 관여한 자리마다 소신껏 일할 여건이 주어져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아도 즐겁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20세기가 베토벤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모차르트의 시대라고 했습니다. 어떤 의미인가요.
“이젠 비극의 영웅인 베토벤의 고뇌 어린 진지함과 암울함보다는 모차르트의 경쾌함과 천진함이 필요한 시대라는 것입니다. 베토벤의 생애와 음악은 땀과 눈물과 고통의 결과입니다. 정말 어렵게, 가난하고 기구하게 살아 음악도 장중하고 가라앉게 만듭니다. 마치 우리가 한국전쟁을 거치고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하던 시대의 분위기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목숨 걸고 민주화를 쟁취했으니 저항과 투쟁만이 아니라 더 많은 일을 즐겁게 하자는 주장입니다. 고뇌하지 않고도 최상의 영혼을 누릴 수 있다, 너무 안일한 이지고잉이 아니라 평화롭고 재미있는 일을 신명나게 하자는 뜻이죠. 그래야 진정한 창의성, 창조적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스티브 잡스가 왜 부유층이 많은 스탠퍼드대학의 졸업식에서 ‘Stay foolish, Stay Hungry’란 말을 했을까요. 바보같이, 배고프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을 만큼 무모한 일을 하고, 현재에 만족하지 말고 항상 신나게 도전하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분노와 복수를 위한 도전이 아니라 모차르트처럼 천진한 도전을 할 때 창조적이 됩니다.”

모차르트는 천재인데 본인이 천재라고 생각합니까. 선생님의 숱한 업적과 아이디어를 보고 천재라고 평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만….
“어릴 땐 저도 제가 천재인 줄 알았어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천자문을 깨치고 중학 때 프로이트를 읽었으니 선생님들의 말씀이 다 시시했습니다. 그런데 진짜 천재는 글 하나를 써도 달라요. 이상의 <권태>를 비롯한 시를 읽으면 어떻게 그런 비유를 할까, 타고난 천재라는 감탄사가 나옵니다. 전 재능을 타고나지 않았어요. 다만 지적 호기심 등의 목마름이 끝이 없었습니다. 그 목마름이 창조의 비결인 것 같아요. 그리고 천재는 대부분 요절합니다. 저는 서른을 넘고부터 천재가 아님을 알았죠. 점점 나이 들면서 오래 산 사람 가운데 천재를 찾아보니 괴테가 있더군요. 괴테도 대단히 박식했지만 노력형입니다. 그래서 감히 대기만성형의 괴테로 방향을 수정했습니다.”

최근에는 기독교 신자가 되어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비롯한 신앙 관련 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작가나 예술가들이 종교에 경도하면 작품세계가 달라지거나 좁아지던데 선생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감히 기독교인이라고 불리기도 부끄럽습니다. 또 톨스토이형이 아니라 도스토옙스키형 신자입니다. 기독교인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다른 종교에 배타적이지 않고 신도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바른 자세라고 봅니다. 목사들에게도 설교보다 접촉하라고 하지요.”

가정법률상담소를 만든 이태영 박사는 팔순 무렵에 한 인터뷰에서 그 화려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가장 후회되는 일이 뭐냐는 질문에 ‘평생 일만 하느라 놀아본 적이 없다. 시간이 나도 놀 줄 모르는 게 후회스럽다’라는 말씀을 했습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에 많은 것을 이룬 선생님도 후회스러운 일이 있나요.
“전 한 번도 직장다운 직장에 다닌 적이 없습니다. 신문사 논설위원, 대학교수, 장관 등 누구에게 구속되거나 출퇴근 시간이 정해진 직장을 다니며 상하관계에 얽매인 적이 없었어요. 노태우 대통령이 제가 모신 최초의 상사입니다. 그러다 보니 타인과 융화하거나 타협하는 일에 서툽니다. 하도 제 목소리를 내니 노 대통령이 자신의 인생관인 ‘참용기’를 배우라고 하더군요. ‘참고, 용서하고, 기다리라’는 뜻이랍니다. 평소 못 참고 용서하지 않고 못 기다린 탓인지 저는 교수인데 제자도 없고 작가에 문학사상이란 문학지도 운영했는데 따르는 문인도 없어요. 이상문학상을 만들었는데 제 팔순잔치에 이상문학상 수상자 가운데 한 명도 오지 않았답니다. 외롭고 고독한 삶이죠. 진작 참용기를 익힐 걸 하는 후회는 합니다.”

60세에 이화여대에서 정년 퇴직할 때 고별사가 인상 깊었습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에 대한 슘페터의 말을 인용했죠. 선생님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까.
“30대에 이미 두 권의 명저를 내어 유명인사가 되었던 슘페터는 ‘당신은 진정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렇게 대답을 했죠. ‘유럽 미녀들 사이의 최고 연인, 유럽 최고의 승마인, 그 다음으로는 세계 최고의 경제학자로 기억되고 싶다’고요. 그러나 66세로 그가 하버드대서 마지막 강의를 할 무렵 그때와 똑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대답은 아주 달랐습니다. ‘나는 대여섯 명의 우수한 학생을 일류 경제학자로 키운 선생으로 남고 싶다. 나도 이제는 책이나 이론으로 기억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나이가 된 것이다. 사람의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책이나 이론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말입니다. 팔순인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훌륭한 학자도 아니고, 이상적인 남편이나 좋은 아버지도 아니었습니다. 문단과 학계에서도 외톨이인 편협한 사람입니다. 그래도 신화학자 이윤기 선생처럼 제 글이나 시를 외는 이들, 혹은 거리에서도 제가 쓴 글을 감명 깊게 읽었다고 해주는 분들 덕분에 행복합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글로 영향을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라고 하지만 82세에도 빛나는 눈과 거침없는 말투, 숱한 인용구와 사람 이름을 술술 풀어내는 그를 대체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의 주장대로 천재가 아닐지는 모르지만 이어령 선생은 여의봉을 여전히 휘두르는 영원한 손오공이다.

<글·유인경 경향신문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사진·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