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명 / 윤석희
갈기갈기 찢겨 있다. 잎으로 바람을 견딘 것이리라. 찢긴 잎이 흔들리니 더 처연하다. 그런들 어떠냐고 오히려 맡긴다. 아직 청춘 같건만 떠날 준비를 하는 걸까. 잎이 바랜다. 모양새도 흩어진다. 메마르는가, 했더니 이내 버석거린다. 흙이 되려나 보다.
꽃봉오리의 자줏빛이 선연하다. 아물린 채 좀처럼 벙글지 않는다. 만개하지 않고서 지려는가. 고개 늘어뜨려 땅을 향했다. 할 일을 다 한 겸허함이다. 활짝 펴 보지도 않고 서두르는 연유는 무엇일까. 꽃 줄 위의 열매 고투리가 여리다. 파랗다. 총총하게 힘을 실어 당당하다. 꽃은 다 알고 있으리라. 자신의 소임을. 총총한 갈래의 열매에게 만개의 힘마저 보태야한다는 것을.
열매는 나무의 영화일까. 정점일까. 아니 소실점이다. 그로부터 점점 사그라져가는. 탐스럽다. 한 다발이 소복하다. 젊다. 싱그럽다. 서로 시기하지 않는다. 몸을 포개 의지하며 성장을 도모한다. 잎의 청춘이 다하기 전 손가락만도 못한 것을 살찌워야 한다. 그래서 열매는 더 급하다. 태양이 강렬해야겠다. 수분도 넉넉해야겠다. 잎 마르기 전 꽃잎 떨어뜨리기 전 여물려야 한다. 완숙의 향내를 담아야 한다.
자손을 챙기며 키우는 것은 죽음을 예비하는 과정이리라. 허망한 육신의 소멸에 쐐기를 박는 일이다. 자연의 소망에 대한 신의 응답 아니겠는가. 뿌리는 마련해 두었다. 다음 세대를. 작은 떡잎 삐죽 올리며 소담하게 키운다. 곁에 두고 열망, 생명까지 나누어 주었을 터다. 살도 피도 넘겨준다. 열매 영그는 동안 땅 속에선 새 생명까지 부지런히 먹이고 입힌다.
여문 열매에 단내 배이면 잎은 떠날 채비를 한다. 한때 잎은 나무의 꿈이었지. 푸른 젊음이었다. 줄줄이 잎맥에 새긴 사연 섬세하게 살아 있다. 헌데 단박 시들해진다. 싱그럽던 자태 거친 모양새로 변했다. 지나온 세월 민적이며 돌아보지 않는가 보다. 단숨에 주저앉아 버린다. 어찌 그리 서두르는가. 미련은 두고 가는가.
옆자리 새 잎은 부쩍부쩍 큰다. 어미 떠남은 아랑곳없다. 제 잘난 맛에 고개 쳐들고 하늘 바라며 당당하다. 어느 결에 누가 키웠더란 말이냐. 우쭐하며 쭉쭉 한 삶을 재촉한다. 그랬었구나. 나를 위해 부모님이 지셨구나. 새끼를 위해 져야 하는구나, 내가. 바나나 나무는 내게 말한다. 어미 아픔 따윈 기억조차 없애야 한다고. 새끼의 건강한 내일만을 염두에 두자고.
흙투성이 파뿌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할머니가 헤죽거린다. 길바닥에 퍼더버리고 쓰레기통을 들쑤셨다. 닥치는 대로 입에 가져간다. 얼굴이며 옷이 범벅 칠로 엉망이다. 보다 못해 말리지만 막무가내다. 초점 잃은 눈빛이 멀겋다. 치매가 분명하다. 내 살붙이 아니라도 삶의 구차함에 울컥 목이 메어 온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또 다른 여인. 하늘을 올려다본다. 원망과 연민의 교차점에서 잠시 서성이더니 달려들어 노파를 들쳐 업고 달린다. 어디서 저런 힘이 솟구칠까. 그 여인 또한 초로이다. 발버둥치는 노인을 다독이는 정성은 분명 정일게다.
‘저 무거운 짐을 어이할꼬. 저 빚을 다 어찌할꼬.’ 탄식이 튀어나온다. 자존감을 지킬 수 있을 때까지만, 그 때까지 만이라고 최면을 걸듯 중얼거린다.
치앙마이 숙소 마당에 서 있던 바나나나무가 생각난다. 싱그럽게 잎을 피워 올리는 어린 나무 때문일까. 주인아저씨가 열매 다발을 낫으로 베어 내고 어미나무 등치마저 쳐낸다. 열매 거뒀으니 이제 소용없음이다.
머잖아 질 터인데 기다려주질 않는다. 멀쩡한 나무인데 야박도하다. 아니 스스로 예비한 단명이 아니냐. 너무 이른 떠남이 안쓰럽지만 추한 꼴을 보이지 않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으랴. 한번 열매 맺으면 그만인 바나나 나무를 닮고 싶다. 삶도 사멸도 정갈하고 단호하지 않는가. 봄이면 다시 살아나는 나무들이 이젠 부럽지가 않다. 간절히 소망하면 이루어지려나. 바나나나무처럼 단명을 꿈꾸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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