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무스 / 정여송
내 안에 한 남자가 있다. 그 남자는 이병헌처럼 멋지지도 않고 전유성 같은 유머와 위트를 지니지도 못했다. 타이거우즈마냥 신의 기술을 훔친 남자는 더더욱 못된다. 약간 화통한 것 같으나 좁쌀뱅이 남자다.
그래도 나는 그 남자가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무구한 마음으로 물어볼 줄 아는 남자였으면 했다. 희끄무레하고 누리끼리하며 푸르뎅뎅하고 불그스름한 세상을 볼 줄 아는 남자라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름과 차이가 만들어가는 다양성이 내는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남자이기를 소원했다. 사소한 일상에서도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줄 아이디어를 찾는 남자라면 대길이었다. 하지만 그 모두는 허황된 바람이었다.
그 남자는 스스로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면서 융통성 없이 따지기만 했다. 그런가 하면 과거로만 문을 열고 닫으려고 할 뿐이었다. 나중에는 뒷전도 못되고 먼전이 되어 전전긍긍 하였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까다롭지만 통제가 가능해 끌어안고 살 수 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 남자는 늘 기가 살아 있었다.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점점 나의 기세에 눌려 존재감마저 확인하기 어려운 처지로 내몰렸다. 작아지고 나약해지고 부서지고 무너지고…… 그러나 그렇게 무시하고 저버려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아리아리 멀기에 닿을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영원히 헤쳐 나올 수 없는 무저갱 같은 곳에서 본능을 숨기며 사십 년 동안이나 살았다. 그러니 어떠한 관심이나 시선조차도 받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였다. 그 남자와 더불어 살던 과거는 이미 오래된 미래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 남자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대체 먼지 같이 눈에 띄지 않던 그 남자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기까지 했던 그 남자가 아주 가끔 언뜻언뜻 들고나더니 행보를 강행했다.
드디어 큰 그루의 나무처럼 푸른 그늘을 만들고, 나무의 곳곳에 깃을 드리우듯 가지를 펼쳤다. 때로는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는 김수영의 ‘풀’처럼, 더러는 무서운 기색도 없이 쏟아지는 폭포와도 같이, 가끔은 스스로 도는 팽이라도 된 듯 과감하게 본색을 드러내었다. 어쩌면 서로 간에 이해관계를 조율하려는 심사였는지도 모른다. 신뢰를 높여 상호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의도였지 않을까싶기도 하다. 나를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힘을 쏟아보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그런데 어쩌자고 나는 ‘하이고 가소로워라’하며 비아냥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는 것일까.
그 남자는 아니무스다. 내 안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남성성. 위기의 순간에 강인한 결단력을 분출하는 남성적 요소. 내 남은 삶에 힘이 되어 줄 남자. 그 남자는 마그마가 솟구치듯 분출하여 나를 압도하려 한다. 내가 나를 버린다 해도 포기하지 않을 태세다. 미안하기도하고 참 고맙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그 남자 덕분에 나는 많이 대범해졌다. 정의감이 생기고 올곧고 당당해졌다. 가만히 하는 양을 지켜보면 젊었을 적에 남편이 보여주던 그 남자다움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같이 살아서 닮은 줄 알았다. 나중에는 배워서 습득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나이가 들면서 내게 생긴 배짱은 아니무스가 장성하여 내 안에서 게이머인양 키를 쥐고 조정을 하였던 것이다.
그 남자는 결코 숨죽여 살아온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도, 할 수밖에 없는 일도 참고 억누르며 견뎌내었다. 긴 숨을 누르고 삭이며 죽은 듯이 기다렸다. 내가 생각하고 기대하고 원하던 남자로의 변신을 추구하기 위해 인忍하고 또 인忍하며 공을 들였다. 아무도 모르게 건장해진 그 남자가 드디어 신출귀몰했다. 내 앞에 당당하게 나타나서는 지천명을 넘긴 아줌마가 아직도 영화 속의 여주인공을 꿈꾸느냐고 코웃음을 쳤다. 무엇을 더 찾겠다고 여자이길 포기하지 않느냐며 거들먹거렸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겪은 일들로부터 받은 지혜가 백만 광주리도 넘을 터인데 순리를 따돌릴 거냐며 비웃었다.
그렇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점점 적어지고 소멸돼 간다. 용케도 알아본 그 남자가 무쌍하게 나타나 나의 흑기사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내 안의 너무나도 다른 화끈하고 남자다운 나. 같잖고 못마땅한 일을 벌려도 옛정으로 갈무리 해 주고, 하는 말마디마다 싫고 미워도 같은 맘이 되어주며, 무기력하고 나태해지는 생각에 의지를 부어준다.
어렵고 힘들어도 같이 걸어가야 할 관계임을 보여주듯 내 안의 그 남자가 어깨를 툭툭 치며 싱긋 웃는다. 나도 눈을 찡긋거린다. 그렇게 우리는 너와 나 구분 않고 어우렁더우렁 살아가야만 하는 관계다. 마치 “두 사람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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