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개의 태양 / 김이경
봉숭아는 이름에 따라 느낌이 다르다. “봉선화”하면 한복을 차려입은 단아한 여인이 생각난다. 그러나 “봉숭아”하고 부르면 갈래머리 소녀가 달려 나올 것 같다. 그래서 난 ‘봉숭아’라는 이름이 더 좋다.
봉숭아는 화려하지도 않고 꽃밭 한 가운데 서있지도 않는다. 장미처럼 정염을 사르며 화려함을 뽐내지도 않고, 해바라기처럼 크지도 않다. 그저 꽃밭 가장자리나 뒤편에 피어 있다가 자기를 눈여겨보는 사람에게만 다소곳이 눈인사를 보낸다. 그러나 여름의 뜨거운 태양을 온 몸에 가득 품어 안은 꽃이기도 하다.
동백처럼 모가지 째 뚝뚝 떨어지는 꽃. 떨어져서도 제 빛깔을 잃지 않는 꽃. 그 꽃은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한 사이 뜨거운 태양을 제 안에 몰래 품는다. 수수한 촌부처럼 서있는 그 꽃이 정말 그렇게 뜨거운 것을 숨겨놓았을지 고개를 갸웃할 필요는 없다. 그 씨방을 살며시 건드려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손끝만 닿아도 폭발하는 열정. 안으로만 다스리기엔 너무 뜨거운 태양의 열기. 나는 그 뜨거움으로 손톱에 물을 들인다.
입추가 지나고 태양의 기세가 한풀 꺾일 즈음이면 봉숭아꽃을 딴다. 제사음식을 준비하듯 정성스럽게 꽃잎을 따 모은다. 여린 이파리도 몇 개 더한다. 천연덕스럽게 푸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봉숭아 잎을 조금만 으깨보면 그 속의 뜨거움을 금방 알 수 있다. 비볐던 손가락이 덴 자국처럼 벌게진다. 그러니 함부로 으깨서는 안 된다. 꽃과 잎을 조심조심 모아 깨끗이 씻어 물기를 말린다.
봉숭아 꽃잎을 따라 내 안에서 갈래머리 일곱 살 소녀가 걸어 나온다. 아득한 추억의 통로에서 걸어 나온 아이는 널찍한 대나무 평상에 앉아 고사리 같은 손을 펴서 내민다. 다정하게 눈웃음 짓는 고운 여인이 손톱 위에 곱게 찧은 봉숭아를 올려놓는다. 조심조심 피마자 잎으로 싼 다음 굵은 무명실로 동여맨다. 아이는 손가락을 가슴에 모으고 꽃빛 꿈을 꾼다. 흑백영화 같은 그림 속에 아이의 손톱만 발그레하게 물들어가는 꿈을 엿보며 꽃상을 차린다. 수라상을 차리는 궁인처럼.
맨 먼저 꽃과 잎 속의 햇살을 불러내야 한다. 막자사발에 넣고 찧는다. 막자가 부딪쳐 울리는 맑은 소리는 제례악을 삼는다. 사기가 부딪치는 맑은 소리, 굳이 막자사발을 고집하는 것은 그 소리 때문이다. 그러나 밤이 늦은 시간이라 소리가 크게 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꽃잎 속의 햇살이 튕겨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도 조심조심 찧어야 한다. 주술의 묘약 명반과 왕소금도 함께 넣는다. 그때 나는 제물을 준비하는 제관이다.
다음은 방을 만든다. 밀가루를 말랑하게 반죽하여 손톱가장자리에 벽을 쌓는다. 공들여 쌓아야 한 오리의 햇살도 흩어지지 않는다. 자칫 허술한 벽 틈이 있으면 햇살이 새 나가 덴 자국이 흉하게 남는다. 잠시 말리면 벽이 단단해지고 아늑한 방이 만들어진다.
막자사발에 곱게 담긴 햇살을 손톱 방 하나에 담길 만큼 길어 올린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손톱 위에 정성껏 다독여 방을 채운다. 새는 곳은 없는지 꼼꼼하게 살핀다. 이때는 끝이 가는 핀셋을 제구로 삼으면 좋다.
어머니는 피마자 잎으로 감싸고 굵은 무명실로 묶어주었지만 혼자서 치르는 의식이라 일회용 비닐장갑을 쓴다. 비닐장갑의 자잘한 무늬 속에 피마자 잎맥을 더듬어 보며 손가락 두 마디 정도가 들어가게 잘라서 손가락마다 조심조심 끼운다. 햇살은 비로소 손톱과 은밀하게 마주한다.
그때부터는 태양의 정기를 이식하는 비밀한 의식이다. 그것은 꿈나라에서 치르는 것이 좋다. 손톱은 스며드는 햇살에 초야를 치르는 신부처럼 몸을 연다. 열락과 고통이 엇갈리듯 들뜨고 열기로 욱신거린다. 숨이 막히지만 제의를 성스럽게 마칠 때까지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 햇살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가슴에 손을 모은 채 아침을 맞아야 한다. 일곱 살 소녀처럼 손을 모으고 잠이 든다.
제의를 마친 아침, 태양의 정기에 흠뻑 젖은 손톱은 다홍색으로 성장盛裝한다. 손을 펴면 손가락마다 떠오르는 열 개의 태양.
열 개의 태양에 여름의 정령을 간직한 나의 겨울은 올해도 춥지 않을 것이다. 아니, 열 개의 태양이 떠오르는 동안 나의 노년은 언제나 따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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