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大成里敎會 (초기 작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2. 2. 10:53

K시에서 삼십 리쯤 떨어진 대성리에 교회가 하나 생겼다. 교회라기보다는 어떤 잘 믿는 그리고 별 교육이 없어도 다니는 성경학교 처녀 집에서 부모의 승낙을 얻어 그 사랑채에서 몇몇 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그러한 교회였다.

이것은 교회가 시작되는 의례적인 방법 중 하나이기도 했다. 즉 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K시의 작은 여자 미션스쿨에서 여학생 몇 사람이 나와 집집마다 다니며 전도지를 배부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권고를 한 뒤 우선 어린애들을 먼저 모아 노래도 가르치고 작은 엽서크기의 성화도 나누어 주고 해서 코흘리개들이 재미있게 잘 모일 즈음해서 이제는 과히 싫어하지 않은 부녀자들을 모아 예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노랑머리, 파란 눈을 가진 미국 여자 선교사가 서투른 한국말로 설교를 했기 때문에 호기심에서도 몇 사람씩은 꼭 나왔다.

미션학교에서는 그 학교 학생들과 교직원이 매월 헌금을 해서 찬송가도 사다 주며 성경도 사다 나누어 주었다. 여학생들이 와서 아름다운 목소리로 특송도 해주었고 어쩌면 그렇게 청산유수같이 말도 잘 하는지 자기네들의 어려운 사정을 잘도 알아 이 여학생들은 무소부재하시고 전지전능하시다는 하나님께 고하고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도록 기도해 주었다.

이렇게 일년쯤 지나자 교인수도 꽤 많아지며 처녀의 아버지를 비롯해서 남자들도 두셋 끼어들게 되고 이웃 마을에서도 사람들이 한두 사람씩 오게 되었다.

이제는 미국 선교사가 매주일 나오지 않고 그 학교의 선생들이 교대로 나와 설교를 하였다. 대성리 마을에서도 언제나 은혜를 입고 있을 수만은 없다고 부인들이 교대로 설교 나오는 선생들의 점심접대를 하며 헌금을 열심히 하여 교회를 하나 지을 수 있도록 하자고 말하였다.

처녀의 아버지 김정수씨가 주동이 되어 재정 관리를 하며 추수 때는 쌀로, 맥추 때는 보리로 거두어 들여 집 장만할 준비를 하였다. 재정관리라 해도 일주일에 헌금으로 거두어지는 돈은 이삼천 원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이 년째 되던 해에는 대부분의 돈은 미션학교의 원조를 받아 마을에 공회당 비슷한 집을 하나 지었다. 그리고 그 처녀는 전도사가 되어 이웃마을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교인을 모아오고 흥미를 잃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을 격려해서 교회에 나오게 하고 해서 교회다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오년 째 되던 해에는 좀더 큰 건물을 옆에 세우고 십자가도 해 달며 외관이 교회처럼 되어갔다. 그해에 처녀의 아버지 김정수 씨가 장로로 되었다. 장로가 될 때에는 누구든 그 교회에 큰 물건을 하나 헌납해야 한다는데 김정수 씨는 가난하였다. 그러나 매주 교대해서 설교를 나오는 미션학교의 한 선생이 시내 모 교회의 장로도 장립 당시는 아주 가난해서 헌납할 아무런 자금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일을 위해서 백날을 기도했더니 우연히 어떤 분이 도와주게 되고 또 장로가 된 뒤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일이 잘 되어서 지금은 시내에서 손꼽는 큰 양복점을 경영하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김정수 씨는 힘을 얻어 새벽마다 일어나 교회의 살림을 맡는 장로가 되고자 하니 하나님께서 힘주시라고 기도를 백날 계속했으나 아무런 독지가도 나타나지 않아 많지 않은 논 두마지기를 팔아 교회 종탑을 하나 세우고 설교하는 강대상을 만들어 바치었다.

하나님은 이 김 장로에게 물질적인 축복은 하지 않았으나 신앙이 열광적으로 돈독해지도록 축복하셨다. 그에게는 교회의 살림이 바로 자기 집 살림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이 돈독한 사람을 시험하시기를 좋아하시는 모양이었다. 이 김 장로에게도 시험이 닥쳐왔다. 전도사로 일하던 큰 딸도 좋은 신랑감이 생겨 시집을 가게 되고 교회도 이제 제 모습을 갖추어 교회를 담당할 목사만 있게 되면 제 구실을 하게 되었는데 미션학교에서는 교회를 개척한 지 오년 만에 원조하는 일을 끊어버린 것이다. 교회가 이만치 성장하고 믿음이 좋은 장로도 생겨나고 집사도 몇 사람 뽑혔으니 독립할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성리교회로서는 얼마 되지 아니한 주정 헌금 가지고는 도저히 목사를 모실 재간이 없었다. 목사는커녕 강도사나 전도사도 모셔올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김 장로는 미션학교의 미국인 여자교장을 찾아가서 여러모로 애원하고 이삼년만 더 재정적으로 보조해 주지 않겠느냐고 말했으나 일언에 거절을 당하였다. 그 학교는 새해부터는 새로운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럼 전도사를 모시기까지 당분간만 옛날처럼 설교를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교장은 한국인 교감을 불러 이 문제를 부탁하였다.

김 장로는 교감을 따라 교무실로 들어왔다. 도두가 낯익은 선생들이었다. 그들은 반갑게 달려와서 인사를 하고 교인들의 안부를 친절히 묻고는 모두 제 일자리로 돌아갔다.

“완전한 교회란 한이 없으니 결국 빨리 독립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교감은 옆자리를 권하며 안락의자에 기대며 말했다.

“지금까지야 여러 선생님들의 덕택으로 잘 해왔지요. 그러나 아직 젖먹이를 이렇게 떼어 버리시면…….”

김 장로는 버릇으로 허리를 굽히고 송구스런 태도로 손을 부비며 말했다.

“다산하는 집안을 보세요. 연년생으로 어린애를 낳을 때 저 어린 것이 어떻게 엄마 품을 떨어질 수 있을까 해도 야박하게 한번 젖을 떼면 다 제 나름으로 자라지 않습데까?”

“잘 사는 집에서는 연년생으로 낳아서도 잘 기르지만 못 사는 집에서는 병약하게 기르다 죽이는 수가 많지요”

“그러나 실정은 어디 잘 사는 사람이 다산합니까? 못 사는 사람일수록 많이 낳지요”

“그래 큰일입니다”

교감은 직원실을 한번 휘돌아보더니

“윤 선생”

하고 큰 소시로 불렀다. 윤 선생이 교감 책상 앞으로 왔다.

“윤 선생. 다음주 대성리교회 설교 한번 안 해주시렵니까?”

“제가요?”

그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우리가 개척한 교횐데 곧 전도사를 모신다니까 그때까지는 우리가 좀 도와줘야겠는데요.

“아이구, 제가 뭐 알아야죠. 그땐 의무적으로 돌아가며 맡았기 때문에 주제넘게 나갔습니다만 은혜가 없어요.

“윤 선생님 부탁합니다.”

김 장로가 간곡한 청을 했다.

“아니 김 장로님 정말입니다. 전 자격이 없어요. 제가 박 선생에게 부탁해 보지요”

그는 자리에 앉아 책을 보고 있는 박 선생 곁으로 가서 뭐라고 작은 소리를 했다. 그러자 박 선생도 펄쩍 뛰며 손을 내 저었다. 윤 선생이 웃으며 뭐라고 또 권하자 박 선생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럼 윤 선생이 적당히 설교하시오”

김 장로는 무안해서 자리를 일어섰다.

“이거 미안합니다. 누가 안 나가면 저라도 나갈 테니 그리 아십시오.

교감이 김 장로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김 장로는 돌아오는 길에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렇게 의무적으로 적당히 설교를 해온 것을 까마득히 모르고 은혜에 충만했던 자기들이 처량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그는 자기 교회로 맡아 일해 줄 전도사가 절실히 필요한 것을 느꼈다.

처음으로 대성리교회가 맞아들인 전도사는 나이가 어리고 갓 결혼한 윤 전도사였다. 부인은 노래도 잘해서 유년 주일학교도 잘 경영해서 교회는 아주 잘 되어 갈 것 같았다. 그러나 겨우 일년 일하고는 그만두었다. 신학교에 가서 더 공부하고 목사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김 장로와 집사들이 전도사 집에 가서 만류하였다.

“이제 마치 정도 들었는데 이렇게 길 잃은 양들을 두고 떠날랍니까?”

“죄송합니다. 저도 마음이 내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역자로 나서려면 젊어서 더 공부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도사님, 솔직히 봉급이 적어서 그러지라우?”

입빠른 여 집사가 한마디 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돈 바라고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저도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 집 생활은 막연합니다. 그러나 공부를 해야지요.”

모두들 아무 말을 잇지 못하고 멍하게 앉아 있었다.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는데 또 교역자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람, 목사가 되어서 꼭 우리 교회에 오시오”

“아따 속없는 소리 하네. 그래 공부해서 더 좋은 교회로 가실라고 그러는디 목사가 되어서 우리 교회에 오시것어?”

입빠른 윤 집사가 또 말했다.

“집사님 무슨 말씀을. 하나님의 섭리면 또 오게 되겠지요. 절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저도 어디가나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큰 그릇은 큰 곳에 쓰시니께 큰 교회로 가실 것이오.”

“지금까지 뭘 배우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약한 지체를 더 귀히 여기십니다.

“그래 우리보다 더 간절하고 약한 지체가 어디 있소? 윤 전도사님,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나 윤 전도사는 떠나고 말았다.

 

그들이 두 번째로 가까스로 구한 전도사는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전도사였다. 사 년제 대학 철학과를 나오고 신학대학에서 삼년을 공부한 과분한 전도사였다. 그는 젊고 단신이며 패기에 넘쳐 있는 전도사였다.

그는 K시에 머물러 미인 선교사와 함께 대학생 성경연구회를 인도하며 주일날과 삼일(수요일) 밤만 와서 예배를 인도하였다. 누구나 고 전도사가 실력 있고 훌륭한 분임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교회는 잘 되어 가지 않았다. 첫째, 그는 대학생 성경연구회에 더 열심이었고, 둘째, 그의 설교는 어려웠고, 셋째로, 무엇보다도 타격적인 것은 K시와 대성리 사이에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긴 것이다. 지금까지 십리 남짓 걸어 다니던 교인들은 다 그쪽교회로 옮겨갔다.

김 장로와 고 전도사는 뜻이 잘 맞지 않았다. 김 장로는 주정 헌금을 정하여 아무리 적더라도 꼭꼭 내야 한다고 재정난에 부딪쳐 호소했는데도 고 전도사는 주정헌금제를 반대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시는 자를 사랑하느니라.’라는 성경 구절 들고 헌금궤는 교회입구에 놓고 즐겨 내는 액수만 받게 하며 의무적인 헌금은 반대하였다. 따라서 교인 수가 줄어진 데다 헌금은 더욱 줄어졌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 줄어든 헌금이 정말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헌금이라고 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는 주일 낮만 설교하고 주일 밤과 삼일 밤은 성경공부를 위주로 하였다. 누구나 하나님 말씀을 이해하고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하며 하나님의 계시는 목사나 강도사나 전도사를 통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게 되는 평신도 각자에게도 나타나며 아무도 이 계시를 경멸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성경 공부하는 밤 집회에는 인원이 그나마 반도 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전도사는 참 구원은 말씀을 통해서 얻을 수 있으며 부흥회나 기도원에 열심히 참석함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그가 좋아하는 성구는 로마서 10: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는 것으로 믿음의 근본은 말씀 묵상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골 시림은 누가 가르쳐 주어야지 어떻게 말씀 묵상을 하는가? 교회를 성경 학교 다니듯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께서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각각 다른 은사를 주어 예수의 몸인 교회를 섬기게 했는데 각자에게 맡긴 직분과 재능을 찾아보지도 않고 땅에 묻어둔 채 미신처럼 성령강림과 축복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전도사가 뭐 복 주는 말은 하지 않나 하고 스스로 말씀을 깨닫고 실천하는 일은 하지 않고 있는 것은 잘 못이라는 것이었다. 밤 집회는 성도의 교재를 긴밀히 하여 소원해지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긴밀히 하는데 뜻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농시 일도 바쁜데 그냥 쉽게 가르쳐 주지 무슨 성경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라는 것인지 너무 어려웠다.

김 장로와 집사들은 차츰 고 전도사를 싫어하게 되었다. 고 전도사의 신앙은 지식위주의 신앙이며 영적 체험이 없는 죽은 신앙 같았다. 그보다 더 그를 싫어하게 된 동기는 고 전도사는 안하무인격으로 장로나 전도사도 꾸중하였다. 다음차례 기도를 미리 순서를 정하고 기도를 맡은 사람은 오랫동안 준비하여 종이에 써서 기도하고 길게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자기들 뿐 아니라 시내 원로목사들에 대해서도 대담한 비난을 공공연히 하였다. 기력이 약해지면 젊고 유능한 후배 목사에게 자리를 넘기고 은퇴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이며 교회를 종신직장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 했다.

이 발언은 물의를 일으켜서 제직회에서 고 전도사를 추방하자는 말이 나왔다.

첫째, 고 전도사는 대성리교회가 위주가 아니며 대학생 성경연구회의 일을 주로 하고 있으며, 둘째, 원로목사를 공공연히 비난하고,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유익하지 못한 것은 고 전도사를 모신 이후 교세가 약해졌지 더 나아진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도 없지 않았다.

그에게 죄가 있다면 너무 솔직하게 자기 의사를 나타낸다는 것인데 솔직하다는 것이 죄가 될 수 없으며 또 그만한 실력자를 이처럼 적은 사례금으로 모실 수 있겠느냐? 또 하나는 한 달분 사례금을 통틀어 대성리에서 가장 가난한 박 서방을 도와준 일은 고 전도사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였다.

고 전도사는 지난번 크리스마스 특별헌금을 교회의 행사와 치장에 쓰지 말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자고 했다. 그러나 김 장로는 지금까지 해 온 행사를 어떻게 그만 두겠느냐고 맞서 결국 행사를 하게 되자 고 전도사는 자기의 일개월분 사례금을 박 서방에게 주도록 말했던 것이다.

제직회에서는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반대파와 찬성파 때문에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아 그는 강도사 시험에 합격하고 얼마 되지 않아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이번에는 교육은 부족하더라도 신령한 전도사를 모시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여러 군데 교섭을 하였으나 사례금에 이르자 모두들 적당한 구실로 교회를 맡는 일을 사절하여 좀처럼 대성리교회를 맡을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다 이번에는 전번에 생긴 교회의 반대방향에 또 하나의 천주교회가 생겼다. 그들은 교회 존망의 기로에 섰다. 그러나 서로 돌아가며 설교하고 좋은 새 전도사를 보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 저희들 길 잃은 양들을 버리시렵니까? 두드리는 자에게는 문이 열린다 하셨으니 우리의 간구를 들러 주시며 우리를 먹여주실 목자를 보내주시옵소서.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사례금이 적다는 것이었다.

교회에 야간고등학교를 다니며 주일학교 반사도 하는 학생이 하나 있었다. 그는 어느 날 학생회 헌신예배 때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헌금기도를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 저는 오늘 가지고 있는 돈 전부를 바쳤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하기 때문에 모두 모아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농촌이 갑자기 잘 살게 되거나 우리 마을에 이적이 일어나지 않은 이상 우리는 가난할 것입니다. 도시의 어떤 교회는 한주일 헌금이 2만원도 되고 십만 원도 된다고 합니다. 또 서울의 어떤 교회는 한 사람의 추수감사 헌금이 오백만원도 넘는 때가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부자 교회와 대항해서 우리의 가난한 교회가 어떻게 좋은 목자를 모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만은 생활에 걱정 없는 교역자를 보내어 주십시오. 비록 우리는 가난하나 믿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줄 압니다.

그는 예배가 끝난 후 격식에도 없는 기도를 하였다고 김 장로에게 꾸중을 들었다. 그러나 그는 태연했다.

“기도란 자기 마음에 있는 것을 솔직히 하나님께 고하는 것 아닙니까?”

“이놈 봐. 그렇지만 모든 일에 감하한 마음으로 해야지 그러면 쓰간디? 그리고 그런 기도는 골방에서나 할 일이지 대중기도를 그렇게 하면 쓰간디?”

“장로님, 저는 교회에 대해서 불평이 많습니다.”

그는 고 전도사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학생이었다.

“믿는 사람은 다 예수그리스도의 형제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전도사 한분을 못 모시고 이렇게 애타며 어떤 교회는 자기네끼리 활동하고 치장하는데 많은 돈을 쓰니 형제끼리 이럴 수가 있습니까?”

김 장로는 입맛을 쩝쩝 다셨다.

“교역자를 잘못 모시면 젊은 놈들에게 이렇게 후환이 있다니까”

하고나서는

“우리는 말이여, 만들어진 토기란 말이여. 피조물이 창조주더러 왜 나를 이렇게 만들었느냐고 물을 수 있간디? 다 잘 사는 사람은 잘 사는 대로 믿고 못 사는 사람은 못 사는 사람대로 믿어야 혀”

그렇게 육 개월의 공백기간이 지난 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구를 들으셨음인지 전도사 한분을 보내 주셨다.

다섯 살, 세살, 한살짜리 어린이들을 졸랑졸랑 거느린 천 전도사였다. 그는 말 수레에 얼마 되지 않는 살림과 어린애들을 싣고 이 마을에 왔다. 그는 오래 전에 성경학교를 나온 전도산데 몸이 건장하고 목소리가 우렁차며 강대상을 손뼉으로 치며 간절한 목소리로 기도할 때는 속이 후련하였다.

한달 사례금이란 쌀 한 가마에 돈 이천 원인데 식구 적은 전도사라야지 몸집도 저렇게 크고 보면 어떻게 교회가 당해내겠느냐고 한편에서는 반대했으나 설교도 잘 하고 기도도 마음에 들고 성격도 시원하니 그냥 모시자고 했다.

그는 오자마자 헌금을 다시 주정헌금제로 바꾸고 매일 여 집사 한분을 데리고 교인 집을 일일이 심방하고 안 믿는 집에 가서 전도하곤 해서 대성리는 일종 신앙부흥 붐이 일었다.

그는 목소리가 우렁차서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한 사람 같았고 또 신앙도 돈독해서 어린애들의 이름도 십이사도의 이름을 본떠 첫째는 배드로, 둘째는 천 안드레, 셋째 딸은 마게도냐의 비단장수의 이름을 따 천 루디아라했다.

교회는 다시 흥성거리는 야간집회가 주간보다 오히려 많았다. 그들은 설교가 끝나면 통성으로 기도하였다. 모두 자기들의 고되고 답답하고 외롭고 한스러운 팔자를 눈물로 털어놓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기도를 하였다. 천 전도사의 기도는 이런 때 어떻게 빨랐는지 본문은 무슨 말인지 알 길이 없고 주여어! 하고 길게 뺄 때와 주! 주! 하고 온힘을 함께 뭉쳐 발음할 때만 똑똑히 들려왔다. 이 울음의 통성기도란 일종의 예술이었다. 각자 기도하는 소리가 잔잔한 물결처럼 흐르다가 전도사의 주여어! 하는 우렁찬 목소리에 곁들여 주여어! 하는 날카로운 여 집사의 목소리가 겹치면 갑자기 모든 기도소리는 커지면서 큰 노도가 교회를 덮쳐 눌러버리는 것이었다. 그럴 때는 머리끝이 오싹하게 곤두서면서 어떤 신비한 힘에 자기가 휩싸여 들어가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면 다시 잔잔한 교향곡의 제 삼악장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한 오 분 통성기도가 끝나고 나면 교인들은 피로와 답답함과 한스러움을 잊고 가뜬한 발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천 전도사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를 들어 설교를 하면 다음주일은 부인네들이 자기 힘에 과분할 정도의 감사헌금을 하였다. 따라서 그 마을에 말 수레를 끌어 생계를 유지하는 김 서방 집에서는 여편네가 예수에 미쳤다고 싸움이 일어났다. 그러나 교회의 헌금은 훨씬 많아졌다. 성도의 교제도 빈번하여 여 집사 전체와 천 전도사가 떼 지어 신자 집을 방문하여 마을을 돌았기 때문에 마을노인들은 손가락질을 하였다. 그러나 교회의 참 기쁨을 안 부인들은 손가락질하는 안 믿는 사람들이 더욱 불쌍하기만 했다.

연말이 되어 신년도 예산을 다시 짜게 되었다. 예산편성이래야 신년도에는 전도사의 사례를 어떻게 할 것인가? 교회확장기금을 얼마쯤 저축할 것인가? 그것이 전부였다. 나머지는 생각할만한 아무런 재정적 여유가 없었다.

전도사 사례문제가 나오자 여 집사인 윤 집사가 대뜸 말했다.

“내년에는 전도사님 사례금을 삼천 원으로 올립시다.”

이 금액은 몇몇 집사들끼리 미리 협의가 된 액수인 모양이었다.

남자 박 집사는 반대했다.

“푼수를 알아 살림을 해야 되는디 삼천원으로 정한다면 우리 교회는 헌금한 것 전부를 드려야 되오. 그럼 교회는 뭣이오? 밑 터진 시루에 물붓기로 모아서 드리고 모아서 드리면 무엇이 남는단 말이요? 그러니 이번에는 오백 원만 더 올립시.”

윤 집사가 벌떡 일어났다.

“박 집사님은 늘 돈돈 하는디 어째서 모은 돈을 다 드린다요? 내년에는 우리가 교인을 더 모아서 헌금도 더 받을 생각을 해야지 어디 금년허고 똑같이 받을 생각을 하면 쓰간디요? 그라고 전도사님 집은 곧 또 산고가 든단 말이우라. 그 돈 갖고는 살도 못해요”

김 장로가 말했다.

“전도사님을 위해서는 많이 드려야겠고 우리 살림으로 봐서는 적은 것이 좋것고 그러니께 이야기들을 해보시오. 많이 정해놓고 돈이 안 들어오면 우리 호주머니라도 털어야 할 것이요”

모두 주춤해서 선뜻 말하지 않았다.

“가난한 집에 먼 애기는 그렇게 나 쌓는디여. 아주 열두 사도 다 낳을 모양 아니어?”

남 집사 한 사람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참말로 큰일이구만”

박 집사가 다시 일어났다.

“교회는 돈 걷는 걱정만 하는 데가 아니니께 우선 새해에는 이천오백 원으로 정해놓고 헌금이 더 들어오면 특별히 더 드리기로 하는 것이 어쩌것소?”

윤 집사가 또 맞섰다.

“그렇게 하면 누가 헌금을 더 내겠소? 처음부터 삼천 원으로 정해놓아야 해라우. 나는 삼천 원으로 정하기로 동의할라요.”

그러나 이 동의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결국 이천오백 원으로 낙착이 되었다.

천 전도사는 다시 아들을 낳아 이번에는 이름을 천야고보라 정하였다. 그는 아들을 얻자 싱글벙글하였다.

“전도사님은 재주가 좋으십니다. 어떻게 아들만 줄줄 뽑으신게라우?”

하고 교인이 치사하자

“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지요.”

하고 기뻐했다.

“인자 아들이 셋이나 된게 그만 나셔도 되것그만이라우”

하고 말하자

“인간의 힘으로 어쩔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면 더 낳아야지요. 애들은 다 자기 먹을 복을 타고 나니까요”

하고 몇은 더 낳겠다는 의사표시를 하였다. 정말 활기 있고 정력 좋은 전도사였다. 자기 사례가 바랐던 것처럼 오르지도 않았으나 실망하는 기색이 없이 오히려 전보다 더 열심히 심방도 하였다. 이번에는 점심도 먹지 않고 심방을 했기 때문에 따라다니는 여 집사는 배가 고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점심때에 심방을 받은 가정은 식사대접도 못하고 보내려니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전도사님, 심방은 점심 먹고 천천히 하지요”

하고 한 집사가 말하자

“그럼 점심을 들고 오세요. 전 원래 점심을 잘 않습니다. 그동안 전 교회에서 기도하고 있겠습니다.”

하고 태연히 말했다.

여 집사들은 모여 상의하였다.

“전도사님이 점심을 안 드시겠다니 어쩐디어?”

“안 들긴 왜 안 들어.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든디. 그 덕대 크신 분이 점심을 안 드시겠어?”

“심방은 해야겄고 그럼 어쩐대?”

“어쩌긴 점심 낼만한 집을 정해놓고 때를 맞춰 가야지”

“아이구 참. 그럴 사람이 어디가 있어. 먹는 대로 전도사님 대접할 수도 없고”

그들은 대책 없이 걱정만 하였다. 그러다가 여전도회에서 그날 점심에 쓰일 쌀과 반찬을 미리 준비하고 그날 점심을 먹을 집을 정하고 심방하기로 하였다.

첫날 점심으로 성찬이 준비되었다. 그러나 전도사는 한술도 뜨지 않고 그 집을 나와 버렸다. 자기는 점심을 먹기 위해 심방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성격도 참 괴팍하셔”

“말도 말어. 우리 교회로 오실 때도 전 교회에서 자기에게 나쁜 말 한번 한 것이 귀에 들어가서 당장 이삿짐을 싸고 나와 돌아다니다 오셨당만”

“뭐라고 했간디?”

“거기 집사 한 사람이, 목사 될 생각도 안 해보는 형편없는 전도사라고 했다느만”

“아니 왜 목사가 안될꼬?”

“목사는 누구든지 되는 것이간디? 지금은 신학대학을 나온 사람이 많아서 여간해서는 안 된데”

“그나저나 그 집도 큰 일이여. 집안 식구가 점심을 다 굶는다드란게”

집사들은 모이면 이런 전도사 이야기였다.

“애기어머니까지 점심을 굶으니 젖이 제대로 나오겄어?”

“참말로 애기어머니라도 먹어야 할 것인디”

여 집사들은 집안일을 좀 도와달라고 전도사 부인을 일부러 불러내어 점심을 대접해보내곤 했다.

이렇게 한해가 지나고 두 해째 늦가을 무렵이었다. 전도사 부인은 다시 만삭이 되었다.

“아이고, 나는 내 일처럼 심란해 죽겄어”

수다스런 윤 집사가 거의 죽어가는 소리를 하였다.

“참말로 열둘 다 날 모양이어”

“열둘 낳고도 남것등만”

모여 앉은 여 집사 한 사람이 말했다.

“멋을 본게 그려?”

“보나마나제잉. 정력은 좋으신데 전도사라고 농사를 혀 장사를 혀, 심방하고는 늘 집에만 박혀 계시니 자연 그리 되제잉”

“그래도 여자가 안 날라고 마음먹으면 될 것인디”

“오매 말 말어. 남자들이 속 있간디?”

“그래도 이번에는 닭고기에 미역국은 먹겄구먼”

지난봄에 김 장로가 병아리 한 배 깐 것을 전도사 집에 몽땅 보내서 전도사 집엔 여남은 마리 닭들이 있었다.

“닭도 못 먹어서 삐쩍 말랐어. 그 집 식구치고 전도사밖에 살찐 사람 있간디?”

“지난번에는 천 베드로 생일이었는디 그 삐쩍 마른 닭 한 마리도 안 잡어 주었디어”

여집사 한 사람은 혀를 끌끌 찼다.

“생일 쇠는 대신 돈 십 원만 달라고 했는디 그것도 안 줬다고 부인이 눈물바람 해서 참 안되었드만. 십년동안 누구 생일도 쇠지 말자고 했대”

그들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저러나 내년에는 또 문제가 생기겄어”

그러자 윤 집사가 재빨리 나섰다.

“박 집사는 말이여, 지금 맘이 떠있어. 자기 마을에 교회가 하나 생긴디어”

“아니 교회가 또 생겨?”

“하렐루야 교회라든가?”

“그것은 이단종교 아니겄어?”

“모르지. 별놈의 예수교가 많은 게 누가 알아?”

윤 집사는 박 집사를 미워하였다. 그는 언제나 교회를 헐뜯고 전도사를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말 수레를 끄는 김 서방이 술이 얼근히 취해 가을날 해질녘 길을 돌아오고 있었다. 빈 수레에 걸터앉아 유행가를 늘어지게 불렀다. 이웃마을 장날에 마을에서 내가는 쌀 배추 등을 실어다주고 노점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오는 길이었다. 이날은 천 전도사의 심부름도 겸해서 닭은 내다 팔고 미역 한 가닥을 사고 중병아리 열 마리를 사서 수레에 싣고 있었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봄에 새파란

하다가 담배를 한 대 깊이 빨아 연기를 내뿜고

잔디 얽어

하고 쳐다보니 저쪽 앞을 심방을 마치고 돌아오는지 천 전도사와 윤 집사가 걸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제길 신여성이여, 제 남편은 장바닥에 앉아 고추 장사를 하고 있드만은”

그리고는 담배를 마지막 한 모금까지 쪽 빨아 내던지고 침을 찍 뱉었다. 수레는 점점 가까워졌다.

“전도사님, 우리 구루마 좀 타보실라요? 여기는 택시도 없고 이것이 최고급 택시요.”

김 서방은 전도사를 보자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걷겠습니다.”

“아 여기 나란히 앉아서 닭 판 돈 회계도 하고 그럽시다.”

“아이구, 그건 배드로 엄마와 얘기하십시오. 난 모릅니다.”

전도사는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원 돈을 마다고 하시다니”

김 서방은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다 말고 전도사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돈처럼 좋은 것이 어디 있답니까? 이번에 닭을랑 잘 길러서 돼지를 한 마리 키워보시오. 세상에 전도사도 사람인디 안 먹고 살간디요”

이번에는 윤 집사가 응대를 가로챘다.

“수동 아버지 한잔 하셨그만이라우. 그러지 말고 예수를 믿으시오”

“예수는 마누라가 잘 믿는디 지가 혼자 천당에 갈랍디어?”

그는 또 담배를 꺼내어 피우기 시작했다.

“천당은 자기가 믿어야지 남이 믿어서 가는 곳 아니어라우”

“그 말이 그 말이지 말로만 잘 따져서 천당에 간다요? 나는 밤마다 천당에 가요”

“밤마다요?”

“그라지라우. 해만 뜨면 지옥이고 밤만 되면 천당이고. 지옥과 천당은 다 나한테 물어보시오.”

“그러시지 말고 교회에 나오십시오. 수동이 어머니는 그렇게 잘 믿으시는데”

천 전도사가 점잖게 말했다.

“전도사님, 나 세상에 교회에 가고 싶어도 못 가는 이유가 많이 있소”

그는 또 한번 침을 찍 뱉고 말했다.

“첫째, 담배를 피우니 못 가고”

“그건 끊으시면 되지 않습니까. 돈도 안 들고 건강에도 좋고”

“담배를 끊어요?”

그는 전도사를 쳐다보았다.

“세상에, 내가 일곱 살 때부터 피운 담배를 끊는단 말이요?”

그리고 나서는

“그 다음, 술을 마시니 못 가고”

“아이고, 그 술같이 사람 잡는 것 없어라우”

윤 집사가 넌더리를 냈다.

“또 세상에 꼴 뵈기 실은 것이 심방 다닌다고 여편네들 떼 지어 다니는 것, 나 이것 구역질나서 못 보겄어라우”

“참, 별소릴”

윤 집사는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다.

“그래 우리가 떼 지어 다니며 수동 아버지더러 밥을 달랍디까? 참말로 벌 받을 소리요”

“또 하나 교회 못 가는 이유를 말씀해 드릴까요?”

“어서 말씀해 보십시오.”

김 서방은 상체를 쪽 뻗고 수레 밖으로 내밀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바뻐서 그럽니다. 우리 일거리가 어디 시간 정해놓고 있다요?”

“오매, 간사스런 소리. 다 이유요 이유. 낼라면 왜 시간이 없어요.”

윤 집사가 톡 쏘았다.

“뭐 간사스럽다?”

그는 기분이 홱 틀리는 모양이었다. 몇 번 헛기침을 하더니 놋쇠가 노랗게 드러난 네모난 라이터를 꺼내어 두 손으로 움켜쥐더니 다시 불을 켜 담배를 피웠다.

“택시를 안 타시려거든 천천히들 걸어오시오”

하고 말고삐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또 늘어진 유행가를 불러댔다.

“이 강산 낙화유수 흐르는”

하다가 뚝 끊고 윤 집사의 괘씸한 말투가 생각나서 혀를 찼다. 그러나 이내 낙천가가 되었다.

“서방 놈들은 뼈 빠지게 벌어서 마누라님들 천당 보낼 준비 하는구나”

하고 노랫가락처럼 외쳐댔다.

천 전도사는 또 아들을 낳아 이번에는 천 요한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요한이 난 지 두 달 채 못 되어 다시 새해 예산을 짜는 제직회가 열렸다.

이번에는 박 집사가 처음부터 어려운 문제를 끌어냈다.

“예산편성에 앞서 전도사님의 거취문제부터 이야기 합시다.”

분위기가 갑자기 침통해지고 말이 없었다.

“우리 교회의 재정형편으로는 아무리 사례금을 높여 봐도 전도사님 가족을 부양할 수 없으며 전도사님은 닭장수를 안할 수 없을 것이요”

“박 집사, 먼말을 그렇게 함부로 히여.”

김 장로가 주의를 주었다.

“솔직한 말 아니오. 이대로 있다간 피차 어려우니 더 부자교회로 옮겨주시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소. 이처럼 교회가 돈 문제에만 머리를 쓰면 뭐요. 나는 차라리 교인생활 그만 두고 부자 된 뒤에 믿기 시작 할라요.”

윤 집사가 일어섰다.

“장로님, 이것은 참말로 인정머리 없는 소리라우. 지금 전도사님더러 나가라 하면 갓난애까지 오남매를 거느리고 어디로 갈 것이요”

“그럼 갈 디 없다고 우리가 모신단 말이오?”

김 장로가 탁자를 땅땅 쳤다.

“싸우지 말고 순리로 해결합시다.”

“박 집사님은 순 감정적이어라우. 그래 언제 전도사가 닭 장사를 했단 말이요. 우리가 전도사 한분을 후히 대접 못하니 회개하고 기도할 줄 알아야지 내쫓자니 그것이 말이요?”

결국 제직회는 싸움판이 되고 아무 결론을 얻지 못하였다.

다음날, 천 전도사가 기도원으로 기도하러 떠났다는 소문이 퍼졌다. 이틀이 되어도 삼일이 되어도 천 전도사는 마을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대성리교회에는 머물러있지 않으리라고 부인이 이야기했다는 소문이 다시 퍼졌다.

금요일 밤에 천 전도사는 돌아왔다. 그리고 부랴부랴 짐을 꾸려 토요일 아침 김 서방네 수레에 싣고 떠났다.

김 장로가 눈물로 만류해도 소용없었다.

부인이 갓난애와 세 살 난 애를 포대기에 싸서 양 무릎에 앉히고 세 어린애도 이불을 하나 뒤집어쓰고 앉아 덜거덕덜거덕 찌푸린 겨울날 속을 떠났다. 부인 교인들은 이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추운 겨울에 이렇게 전도사를 내보낼 수가 있는가? 그러나 전도사는 어떤 만류도 듣지 않았다.

다음날, 교인은 교회에 반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여니 때처럼 예배는 시작되었다. 묵도하고 찬송하고 기도하고 헌금하였다.

박 집사는 침통한 표정이었으나 어린애들이 헌금할 때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원짜리 코묻은 돈을 내면 여니 때처럼

“거슬러줄까?”

하고 물어서 헌금주머니를 뒤져 혹 삼원, 혹 사원씩 거슬러 주기도 했다.

김 장로가 설교 때가 되자 늘 애송하던 마태복음 오장을 읽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그는 교인들을 두루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 말씀에 굶주려 이곳에 모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목자를 찾아 얼마나 헤매었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어제 우리 손으로 목자를 내 쫓은 죄인이 되었습니다. 이 소문을 들으면 이제 누가 우리 교회를 돌봐 주겠습니까? 우리는 영원히 버림받은 양들이 되었습니다. 차라리 교회가 생기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굶주린 양들을 모아놓고”

그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고 말없이 얼마동안 서 있었다.

“오늘은 그냥 통성기도를 하고 헤어집시다.

모두 통곡하는 기도소리가 교회를 메웠다.

주여어! 하고 높고 날카로운 여인의 목소리가 있었으나 주여어! 하는 굵고 우렁찬 천 전도사의 목소리는 비어 있었다. 따라서 굵은 파도처럼 온 몸을 엄습해 오는 신비한 무엇이 없었다. 기도의 리듬은 조화를 잃고 심한 불협화음이 귀를 찢는 듯했다. 잡음이요, 통곡이요, 발악이요, 발광처럼 느껴지기만 했다.

예배가 끝나도 심히 불안하고 답답하고 외로운 마음으로 교인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집으로 향했다. 여 집사들은 아무래도 후련하지 않은지 그냥 교회 마루에 뭉쳐 앉아 있었다. 김 장로도 처음으로 후련하지 않은 기분을 맛보았다. 지금까지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이 모호하게 흐려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교회는 다시 통성기도 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주여어! 하는 날카로운 여 집사의 목소리에 겹쳐 김 장로의 굵은 기도소리도 들여왔다.

“주여, 교회는 무엇 하는 곳입니까? 어떻게 하면 천국 백성으로 사는 것입니까? 어떤 사람이 참 신자이며 어떤 사람이 참 목사입니까?”

천 전도사처럼 우렁찬 목소리는 아니었으나 분명 이것은 교향곡이었다.

(一九七○年 現代文學 九月號 2005년 개작)

작품 평

9월의 소설 金京洙 -크리스찬 신문- 1970년 9월

   이상에서 말한 두 작가-이범선, 이종항-과는 달리 오승재는 내가 전혀 모르는 작가다. 내가 그의 작품을 읽는 것도 처음이고, 아직 만난 일도 없고. 그러나 <대성리교회>라는 제목이 나로 하여금 이 작품을 읽게 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먼저 느낀 것은 이 작가가 퍽이나 교회 생활에 익숙하다는 것이다. 어느 한 시골에 세워진 개척교회의 모습을-그 시초부터 교회가 하나의 교회로 구실을 할 때까지의 이야기를-참 잘 알고 있다.

  모든 작가가 그러하지만 교를 그 본질적인 면에서보다는 피상적인 다시 말하면 교회라는 한 형태가 보여주느 외각을 더듬어 교회를 안다 하는 것은 장님이 코끼리를 더듬는 꼴이 되지 않을지 모르겠다.

  오승재의 <대성리교회>는 그러기 때문에 결국 '주여 교회는 무엇을 하는 곳입니까?어떤 사람이 참 신자며 어떤 사람이 참 목사입니까?'라고 끝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어떻든 경제적인 기반이 없이 허덕이는 농촌 교회의 모습이 눈 앞에 선하다. 교회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병폐를 오승재의 <대성리교회>는 잘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전부느 아니다.

  교회랍시고 초청을 받아 가 보았으나 시덥잖은 교회, 그리고 교역자를 불러다 놓고는 이러쿵저러쿵 시시덕거리는 교회, 영적인 정신적인 사회적인 고민도 없이 그저 교회 하나를 유지하기 위해 급급하는 교회, 이것이 오승재의 <대성리교회>다,

  공부도 하고 능력도 있고 젊은이에 대한 관삼도 있었던 전도사는 별다른 흔적도 없이 훌쩍 떠나버리고......

   그러나 나는 오승재의 <대성리교회>에서 우리나라의 흔들리는 교회의 모습을 적나나하게 읽고 있다.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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