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승재 장로(박사)소설 콩트 에세이

[스크랩] 식모(食母) (초기 작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12. 2. 10:53

K여고의 교목실에서 신앙지도위원회를 하고 있던 곽 선생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교회의 김 권사로부터 시골에서 올라온 식모를 쓰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왔다는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는 아내의 말이었다.

“어떻게 하긴. 이 어려운 판국에 웬만하면 두어야지. 가리고 어쩌고 할 게 있소?”

“그런데 나이가 좀 많아요.”

아내는 평소에 열 서너 살 되는 어린애를 식모로 두고 싶어 했다.

“할머니요?”

“아니오. 서른하나래요.”

“서른하나?”

그건 곽 선생에게도 의외였다. 아내보다 다섯 살 아래였지만 그렇게 되면 식모라도 다루기가 힘들 것이었다.

“그래서 어쩔까 해요.”

“과부요?”

“몇 년 전에 이혼을 했대요. 어린애는 없고.”

“대단하구먼. 왜 남편을 마다하고 식모살이를 할꼬?”

“교회를 못 다니게 해서 이혼을 해 버렸다나요.”

“그럼 또 열렬한 크리스천이겠구먼.”

“보통 열렬한 것이 아닌가 봐요. 식모살이를 하려고 이곳 김 권사님을 찾아 왔는데 간밤 꿈에 예수님이 나타나 어린애 셋 있는 집으로 가라고 했다는 거예요.”

“그건 또 걸작인데.”

“그러자 김 권사님이 갑자기 어린애가 셋 있는 우리 집 생각이 나더라는 거예요.”

“그럼 예수님의 명령이기에 어쩔 수 없겠구먼.”

“두어요?”

아내는 결정을 못해 답답한 모양이었다.

“당신이 결정해야지. 나야 뭐 식모 다루는 것 아니고.”

“그렇지만 그렇게 나이 든 사람을 두면 당신도 여러 면으로 불편하지 않겠어요?”

“불편하긴 따로 방이 있는데. 왜 얼굴이 예뻐?”

아내는 기가 찬다는 듯 말했다.

“그래요 멋쟁이고 천하일색이에요. 왜 구미가 당겨요?”

“아무리 달덩이 같아도 해 같은 당신 앞에서는 빛을 잃을 건데 뭐. 도대체 얼마나 달래?”

“매달 이천 오 백 원이오.”

“비싸지도 않은데.”

“그러게 말이에요. 자기는 돈이 문제가 아니래요.”

“좀 수상한 데가 있지 않소?”

“김 권사님은 그런 염려는 없대요. 그런데 사람이 좀 얌체 같아요.”

모든 것을 듣고 나니 곽 선생도 결정하기가 어려워졌다.

“잘 생각해서 결정하구려. 난 당신이 좋다면 반다는 없으니까.”

“그렇게 대답하면 어떡해요. 그래서 묻는 게 아니에요?”

“우선 급하니까 신원만 확실하면 당분간 두고 보던지.”

그는 전화를 끊었다.

신앙지도위원회의 회는 계속되었다. 어떻게 하면 시끄러운 예배분위기를 경건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논의의 초점이었다.

“경건회가 시작되어 늦게 들어오는 학급들이 있어 시끄러운데 담임이 시작 오 분 전에 학급에 가서 학생들을 인솔해 들어오고 또 예배하는 도중에도 선생들은 맨 뒷자리에 앉아 있을 것이 아니라 학생들 사이에 끼어 앉아 떠드는 애들에게 주의를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더울 때는 누가 학생들 사이에 끼어 앉아 있으며 또 선생들 자신이 잘 참석하지 않는데 오 분전에 학생까지 인솔하라면 그렇게 할 선생이 있겠어요? 이건 거의 실천이 불가능 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선생은 목사님이 체크해 두었다가 잘 부탁하는 방법으로 실천해야지 그렇지 않고 무슨 뾰쪽한 수가 있습니까?”

곽 선생은 교회의 집사였지만 이런 의무적인 예배는 반대였다.

“목사님, 사람은 강제로 또 타인에 의해서 신앙심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경건회는 일주일에 삼일 동안으로 줄이고 참여하고 싶은 학생만 들어오게 합시다. 그럼 자연히 정숙하고 경건해 질 것입니다.”

“그건 말도 안 됩니다. 그렇게 되면 한 사람도 안 들어 올 걸요.”

성경을 가르치는 김 강도사가 말했다.

“그럼 문제는 더욱 심각하지요. 모두가 싫어하는 예배를 강제로 매일 끌어다 앉혀 놓는다면 졸업하기까지 육백 번 이상 그런 짓을 당하고 졸업 후 어떤 학생이 스스로 교회에 나가겠습니까?”

“곽 집사님은 문제를 긍정적인 면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고 언제나 부정적인 면으로 해결하러 드시는데 그렇다면 예배를 한 번도 안 드리는 것이 더욱 좋다는 말이 되지요.”

목사님이 한 마디 했다.

“저는 오히려 목사님이 부정적인 면만을 보고 계시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 학교에는 신앙이 좋은 학생들이 많습니다. 따라서 원하는 학생만 들어오게 해도 꽤 많은 수가 들어오며 또 경건회 시간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면 자연 학생 수는 증가할 것이며 특히 열렬한 학생들을 묶어 몇 개의 기도그룹을 짜고 활동을 시켜 친구들을 전도하게 하면 학교를 졸업하고도 좋은 크리스천이 될 것입니다.”

“그럼 곽 집사님이 한번 해보시오.”

김 강도사가 짜증난 듯 말했다.

“강도사님. 저는 이 학교에서는 집사가 아니고 선생입니다. 선생은 자기 맡은 과목을 연구해서 잘 가르치는 것이 직분입니다. 직분에 충실한 것이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까? 기독교 정신을 토대로 세워진 이 학교가 할 일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어 학생들이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길을 열어 주고 도와주면 됩니다. 공부하러 온 학생들을 강제로 모아다가 싫은 설교를 듣게 하는 것이 강도사님의 직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공기가 좀 험악해지자 목사님이 큰기침을 했다.

“지금 말이 많이 빗나갔는데 기독교 학교에서는 변경할 수 없는 원칙이 잇습니다. 일주일에 여섯 번 예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결국 논의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선생들이 봉사 정신을 발휘해서 학생들 사이에 끼어 예배를 드리자는 결론을 내렸다.

직원실에 결과가 보고 되자

“봉사 좋아하네.”

하고 선생들은 핀잔이었다.

이날 곽 선생은 서른 한 살의 식모가 궁금하여 일찍 귀가하였다. 집에 막 들어서는데 국민학교(초등학교) 사 학년인 큰딸이 식모 아주머니가 들어왔다고 작은 소리로 말했다. 식모는 얼굴이 가무잡잡하고 무뚝뚝하여 매력이라고는 조금도 없어 뵈는 여자였다.

“어때요?”

하고 아내가 가까이 와서 말했다.

“웬 살이 그리 쪘어? 저고리가 터지겠는데.”

“당신은 좀 불순해요.”

아내가 짜증을 내며 옆구리를 꼬집었다.

“소 같아서 일은 잘 하겠구먼.”

“손이 좀 거칠 것 같아요. 그릇이나 깨지 않을지 걱정이에요.”

“스텐 그릇이야 남겠지.”

 

저녁을 마치고 신문을 읽고 나자 가정예배를 드리기 위해 서재에 모였다. 으레 설거지를 마치고 드렸으나 식모가 들어왔기 때문에 애들이 자기 전에 함께 보자는 아내의 요구로 좀 빨리 모인 것이었다. 예배를 드리자고 얘들을 부르자 세 살짜리 꼬마가 맨 먼저 나서서 성경책을 펴들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어도……>

모두 웃으며 의자에 앉았다.

“오늘은 어떤 찬송을 부를까?”

국민학교 일 학년짜리가 <선한 목자 되신 예수님>을 부르자고 했다.

막 찬송을 시작하려는데 식모가 들어왔다.

“예배 볼라면 나도 봐야지라우.”

그녀는 낡아 떨어진 찬송가와 성경까지 들고 들어왔다. 그리고 풀썩 방바닥에 앉으며 말했다.

“애들아. 내려와 앉아라.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데 왜 의자에 앉아 있냐?”

일학년 놈이 엄마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모두 내려앉았다.

“아줌마는 설거지 다 했소?”

아내가 못마땅한 듯이 물었다.

“예배보고 할라요.”

처음 찬송은 잘 되어 나갔으나 식모의 목소리가 점차 커지자 가락은 늘어지고 곡은 바뀌어서 완전히 식모가 찬송을 작곡하고 인도하게 되었다. 삼학년 얘가 성경을 읽고, 아내가 다락방을 읽고, 곽 선생이 기도하였다. 그런데 세 살짜리 꼬마가 자꾸 기도를 흉내 내어 애들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녀석은 말끝마다 아멘, 아멘 했기 때문에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식모는 어린애의 궁둥이를 살짝 때리는 모양이었다. 얘가 와하고 울음 터뜨리는 바람에 곽 선생은 성급히 기도를 마무리 지어버렸다. 그러나 이 께름칙한 가정예배는 온통 기분을 망쳐 버렸다.

“참 별꼴이야.”

아내가 식모가 나간 뒤 뾰로통해서 말했다.

“옛날처럼 애들이 잔 뒤에 하지.”

“이제 드리지 말아요. 둘이 드리면 안 끼어들겠어요?”

“기독교인은 다 형젠데 같이 예배 드려야지.”

“성자 같은 소리 하시네요. 내일 당장 내보내야 되겠어요.”

“가정예배 같이 드리자고 한 이유 때문에 내 보내면 말이 안 되지.”

그들은 같이 웃었다.

 

다음날 새벽 갑자기 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아니, 이 새벽에 누가 왔을까?”

곽 선생은 불을 켜고 시계를 보았다. 4시 반이었다. 또 다시 벨 소리가 길게 두 번 울렸다. 곽 선생이 파자마 바람으로 나가려는 것을 아내가 말렸다.

“밤에 함부로 나가는 게 아니에요. 제가 나가 볼게요.”

얼마 만에 아내가 돌아왔다.

“식모가 나간 모양이에요.”

“그래? 깍듯이 고별인사까지 하고 나간 건가?”

“어린애 방이랑 조사 좀 해 봐야겠어요.”

그녀는 불을 켜고 먼저 식모 방을 조사한 다음 서재, 어린애 방을 두루 다녀 보고 별 이상이 없는지 돌아왔다.

“없어진 것도 없고 옷 보따리도 그냥 있어요.”

“새벽 기도 간 게 아니오?”

“오라. 또 주책이 거길 갔구먼.”

“그럼 왜 벨을 누르고 갔을꼬? 지금 갑니다는 신혼가?”

“주책이. 조용히 갔다 올 것이지.”

“빨리 일어나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라는 그런 신호가 아니겠소?”

“글쎄 지금이 몇 시인데요.”

아내는 짜증난다는 듯 말했다. 하교나 교회에서는 새벽기도를 강조했지만 그들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늘 일말의 가책 같은 것이 있었는데 이제는 식모를 통해 압력을 넣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곽 선생은 이런 형식을 강조하는 신앙이 싫었다.

“그런데 어떻게 그리 시간을 잘 맞추어 일어났을꼬?”

“시계를 찼지 않아요. 안 보셨어요? 그래 뵈도 멋쟁이라구요.”

막 잠이 들려고 하는데 또 벨 소리가 났다. 이제는 돌아왔다는 신호였다. 옆에서 자고 있던 꼬마가 잠에서 깨어 칭얼댔다. 그녀는 신경질을 내며 밖으로 나갔다.

“문을 두들기지 왜 깜짝깜짝 놀라게 벨을 눌러요?”

밖에서 날카로운 아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따 잠 깰 때도 되얐구만이라우.”

“아기가 깨니까 그러지요.”

곽 선생은 학교에서 귀가하자 부자를 뜯어 종이를 끼워 넣고 소리가 크게 울리지 않게 해 놓았다.

식모가 온 첫 주일 식모가 나가는 교회에서는 목사님을 비롯해서 많은 교인들이 심방을 왔다. 아내는 수박을 사 오고 차 대접을 하느라고 부엌에서 수선을 떨고 식모는 교인들과 예수님을 만난 마리아처럼 서재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곽 선생도 수선을 피우는 어린애를 안고 왔다 갔다 하였다.

“이제 우리가 비로소 기독교인이 되는 모양이요.”

“왜요?”

“처음으로 봉사라는 것을 제대로 하고 있지 않아요?”

“참 시어머니 모셔 놓은 기분이에요.”

 

학교에서는 가을이 되어 추수감서헌금을 하게 되었다. 금년 목표는 30만원으로 교직원이 20만원, 학생들의 목표가 10만원이었다. 추수감사 예배를 일주일 앞둔 종례시간에 교장은 이 목표액을 말한 뒤 종이를 나누어 주고 헌금액수를 적어 내라고 하였다. 이 헌금은 학교에서 개척한 교회의 건축헌금으로 쓰일 것이었다.

“교회에서 헌금하고 학교에서 헌금하고 이렇게 이중으로 할 필요가 없잖아?”

“헌금은 자기의 정한대로 할 것이지 공개해서 적어 낼 일은 아니지.”

그러나 소곤거릴 뿐 아무도 입 밖에 내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곽 선생은 일어났다.

“헌금을 적어 내라고 하면 약간 강제적이고 즐거운 마음으로 할 수 없으니 다음 추수감사예배 때 각자 헌금주머니에 넣도록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고 직원실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도 거들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곽 선생. 적어내기가 부끄러워요?”

하고 교장 선생은 말하였다.

“부끄러울 것 없어요. 하나님은 많다고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기뻐 내는 것을 받으십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적어요. 다음 봉급 때 공제하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니까.”

선생들은 와 웃었다. 그리고 종이쪽지에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곽 선생은 얼굴이 화끈 닳아 올랐다. 그렇지 헌금은 임의야. 그래서 그는 이런 강제적인 헌금은 않기로 하고 0이라고 적어냈다. 기독교 학교가 이런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식모에 대해 아내의 불평은 점점 늘었다. 어느 날 밤이었다.

“쌀이 너무 든다고 걱정했는데 많이 먹을 뿐 아니라 퍼 내가요. 글쎄.”

“퍼다 어디다 쓴단 말이요. 화장품이라도 사나?”

“교회에 성미를 내나 봐요.”

“그럼 좋은 일이구먼 그래.”

“한 되도 아니고 서 되는 가져가는 것 같아요.”

“특별히 헌금을 따로 주는 것도 아니고 그건 어쩔 수 없지 않소? 딴 데 쓰지 않은 이상. 우리가 성미를 안 내니까 하나님이 딴 사람을 시켜 내게 하는 것 아니겠소?”

“하지만 성미란 자기 먹을 것을 덜 먹고 아껴서 모아 둔 것을 내는 것인데, 먹기는 항소처럼 먹고 또 퍼 가니 말예요.”

“참 어떻게 내보내야 할 것인데 많이 먹는다고 내보낼 수도 없고, 또 새벽기도 나간다고 내보낼 수도 없고……”

“내보내긴. 하나님께서 우리 훈련을 위해 우리에게 보내신 종이라고 생각해야지.”

“당신은 진정이에요. 빈정거리는 거예요.”

“좀 두고 봐요. 어느 식모 치고 속 안 썩히는 사람 봤소? 아예 안 두고 살 생각을 해야 하는 건데.”

“그렇지만 조금만 일하면 허리가 아파지는데 어떡해요.”

그러다가 아내는 월동 준비를 할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김장도 해야 하구, 연탄도 들여야 하구……

“크리스마스 때는 또 보너스가 있잖아.”

“에게게 그 쥐꼬리만한 보너스?”

“그래도 그게 어디야. 월동 준비는 될 테니 말이야.”

김장철이 왔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김장철에 대부흥회가 있다는 광고가 간지로 마을에 나돌았다. 식모는 미리부터 신이 나 있었다. 이 부흥회에는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아주 유명한 부흥강사인데

“보세요오. 보세요.”

이렇게 일단 길게 빼고 말을 시작하면 거미가 뒷구멍에서 실을 뽑듯 줄줄줄줄 말을 해대는데 어떻게 은혜스러운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 부흥강사는 책도 쓰고 자기가 노래도 지었는데 그 노래가 또한 어떻게 은혜가 충만한지 알 수가 없다고 하였다. 식모는 자기가 바로 그 부흥 강사가 되는 것처럼 그 강사가 지었다는 노래를 찬송가에 맞춰 불러댔다.

 

헐벗고 굶주리니 무엇으로 바치리까?

돈 없고 힘없으니 마음 또한 적나이다.

물질의 다소보다 중심 보는 나의 주여

과부의 헌금하는 그 믿음 주옵소서

 

내 생활 예산하고 주께 어찌 비치오며

쓰고서 남은 돈을 어이 즐겨 받으시랴

맡겨주신 나의 소유 주의 전에 다 던지고

이 몸까지 다 바쳐서 제사하게 하옵소서

 

다 아는 춘향전을 듣고 또 흥겨워 하는 사람처럼 그 부흥사가 무슨 말을 할는지 다 알면서도 또 듣고 싶어 흥이 난 것이었다. 얼마 동안 우리 집은 이미 작은 부흥회가 시작되었다.

“뭔가 신앙이 좀 빗나간 게 아니에요? 이러다가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아 불안하고 몸이 오싹오싹 해져요.”

아내는 불안한 듯이 말했다.

“아니야. 우리는 머리로 믿는 신앙이고 저 식모는 뜨거운 가슴으로 믿는 참 신앙 같다는 생각이 안 드오?”

“언제는 감정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근거하지 않은 열심은 위험하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 말도 했던가?”

식모의 방에서는 밤중에 가끔 준비 기도를 한다고 비명에 가까운 기도 소리가 들려왔다.

“꼭 귀신을 섬기고 사는 기분이에요.”

“곡에 맞춰 찬송을 제대로 할 때보다 곡은 틀리더라도 막 광적으로 박수를 치며 찬송을 부르면 어떤 알지 못한 기운이 솟아나는 것 같은 환상을 갖게 되지 않아요?”

“그런 것은 신앙이라기보다는 접신해서 귀신 들린 경지 아니에요?”

“아무튼 신사복 입고 있는 사람은 그런 무아경이 없어. 헌금을 할 때에도 감동했다고 더 많이 내지도 않거든. 그러나 사실은 분수도 모르고 몽땅 바쳐 버리는 사람이 신앙공동체에서는 더 뜨겁고 필요한 사람들이야.”

“신앙공동체가 그 뜨거운 사람들의 헌신으로 생기를 찾는다고 가정해요. 그 순간의 열정들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허물없는 성도로 보전되나요? 구원은 받나요? 오히려 그 사람들의 가정은 망가지는 게 아니에요?”

“무슨 걱정이야.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건데.”

“왜 그렇게 빈둥거려요? 그런 사람을 보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듯을 분별하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아무튼 식모 때문에 곽 선생 내외는 성경에 대해 더 생각하게 되었다. 아내는 조심스럽게 식모의 마음을 떠보았다. 김장때에 도움을 받으려고 식모를 쓰는 것인데 부흥회에 가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산 사서 비올 때 남 빌려 주는 격이었다.

“김장철인데 거리도 먼 부흥회에 가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해요?”

“김장을 좀 빨리 하면 되지라우.”

“이렇게 날씨가 더운데 겨우내 먹을 김치가 시어지면 어떻게 해요?”

“그람 끝나고 하지라우.”

“그러지 말구......”

“안 돼라우. 나는 부흥회는 꼭 가야 해라우.”

그녀는 기겁을 하며 말했다. 할 수 없이 11월 말에 김장을 마쳐 버렸다. 부흥회가 시작되자 식모는 신바람이 나서 낮이고 밤이고 부흥회를 나갔다. 낮이 짧은 겨울이라 저녁을 일찍 지어 놓고 자기는 식은 밥을 국에 말아 먹고 휙 나가 버렸다. 겨우 밥만 해 놓고 나가 버리면 아내는 부엌에서 불평 불평하였다.

기명은 물만 묻혀 찬장에 엎어놓으니 찬장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지, 거미줄은 여기저기 걸려 있고, 아유 난 못 살아. 세숫비누가 남아나나 트리오는 일주일에 한 병씩 없애지. 행주는 그렇게 삶아 널라고 해도 하지 않아 방 걸레 같지. 정말 더러워서 못 살겠어. 반찬 하날 제대로 할 줄 아나. 음식 간을 맞출 줄 아나. 아유, 내가 허리만 아프지 않으면 그냥……

“엄마 밥 줘.”

애들은 졸라댔다.

“가만있어 부엌 청소 좀 하구.”

곽 선생은 책을 보다 말고 부엌으로 내려가는 세 살짜리 꼬마를 안고 왔다. 이렇게 저녁이 수선스러웠다.

부흥회 마지막 날 밤도 식모는 이른 밥을 지어 놓고 아내의 헌 바지를 입고 헌 스웨터를 걸치고 부산하게 밖으로 나갔다. 바지도 작고 스웨터도 작아 곧 터질 것 같았다.

“정말 별 꼴이야.”

아내가 아니꼬운 눈초리로 내보내고 이제는 지쳤는지 반찬 만들 생각도 않고 방에 누워 있는데 왁자지껄 옆집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식모는 하룻밤 부흥회도 못 간다요?”

“부흥회가 뭐 말라비틀어진 것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집 애는 못 보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다 똑 같어라우. 식모라고 그렇게 부려먹으면 벌 받을 것이요.”

이번에는 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도대체 저게 뉘 집 식모야. 나가요 나가, 못 나가겠어? 남의 집에 왜 함부로 들어와 큰 소리야. 남이야 벌 받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아무튼 예수쟁이는 이해가 안돼. 자기나 잘 나갈 일이지 왜 꼭 남을 데리고 가야하는지. 재수 없게.”

“보세요오 보세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 불에 안 떨어질라믄 예수 믿으시오.”

“여보, 아 빨리 쫓아 버리지 못해. 그리고 이 계집애도 당장 오늘 밤 보따리 싸서 내보내요.”

문빗장이 걸리는 소리가 나고 식모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옆집 소란은 끝나지 않았다.

“야 우리 집엔 너 같은 식모 필요 없다. 당장 나가라.”

옆집 부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요 요망한 것이 천당은 가고 싶은 모양인데 지금부터 보따리 싸 짊어지고 천당을 향해 가봐.”

“왜 그래?”

삼학년 애가 놀라서 뛰어와 물었다.

“모르겠다. 너희들은 공부나 해.”

“공부 다 했어 밥 줘.”

일학년 얘가 또 졸랐다.

저녁을 먹고 나자 아내는 허리가 아프다고 누워 버렸다. 갑자기 김장, 부엌 청소, 반찬 치다꺼리를 계속해서 하고 나니 그리 된 모양이었다.

“엄마, 아야 해?”

꼬마가 가까이 가서 물었다.

“엄마 허리가 아프시데.”

곽 선생은 이날 밤은 자기가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다.

“관 둬요 글쎄. 좀 있으면 좋아질 거예요. 안 되면 내일 아침 치우라 하면 되구.”

곽 선생은 기어이 부엌으로 갔다.

“한 사람을 천당 보내려면 이만한 숨은 희생은 있어야 할 걸.”

아내는 씽긋 웃었다.

“여자들은 정말 더러워 죽겠어.”

“뭐가요.”

“같은 행주로 상 훔치지. 그릇 닦지. 또 그걸로 물기 훔치지. 이거 뭐 접시에 세균 묻혀 놓는 일을 하고 있는 거 아냐?”

“그러게 자주 삶지 않아요?”

“밖에 마른 수건 걸어 놓았으니까 이제부터 물기를 훔칠 때는 그걸 쓰도록 해. 접시를 말릴 수 없을 바엔 말이야. 아무래도 부엌일도 남자가 들어야 개선이 되려나봐.”

“제발 그렇게 되었으면 좋겠어요. 여자들도 훨훨 밖으로 좀 나다니게.”

“풍만한 유방만 주어. 방안에서 뒹굴며 벌어 온 돈 울거 먹을 테니.”

 

밤늦게야 식모는 돌아 왔다. 곽 선생 내외가 불을 끄고 자리에 드려는 데 식모 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니 울고 있지 않소.”

“기도를 그렇게 해요.”

“그렇지만 보통 때는 갔다 와서는 기도하지 않았잖아?”

“오늘은 특별히 은혜를 받은 모양이지요.”

그러나 기도라면 좀 수상했다.

“가봐.”

“관두세요. 그러다 잘 거예요.”

“가보라니까.”

아내가 식모 방에 갔다가 얼마 만에 돌아 왔다.

“아이 웃겨.”

“뭐가?”

“글쎄, 오늘이 부흥회 마지막 날인데 헌금할 때 부흥 강사가 자기 시계를 끌러 바치라고 할 것 같드래요. 그래 미리 끌러 호주머니에 담고 갔다지 뭐예요.”

“덥석 바치려고?”

“바치긴. 바치기 싫어서 그랬지요. 그런데 집에 와 보니 시계가 없어졌다는 거예요. 버스 안에서 소매치를 당한 것 같대요.”

“그래서 서운해 우나?”

“자기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는 기도를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자기 마음속까지 그렇게 잘 알아서 자기를 치시고 회개하게 하신데요”

“결국 기도하는 소리구먼.”

“식모치고는 걸작을 두었어요.”

 

겨울 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 밤 식모가 밤 예배에 나간 뒤였다. 아내가 세면장에 풀어놓은 시계가 없어졌다고 법석을 떨었다. 그것은 결혼 때 받아 아내가 늘 아끼던 것이었다. 온 방을 뒤지고 수챗구멍을 뒤진 뒤 맥이 풀려 돌아 왔다.

“혹 식모가 차고 간 게 아닐까?”

“왜 남의 시계를 차고 가요? 그게 얼마짜린데.”

“결국 모든 물건은 하나님 것이니까 서로 나누어 써도 된다고 생각한 것 아냐?”

“무슨 농담을 그렇게. 정말 그걸 차고 도망간 게 아닐까요?”

식모가 돌아오자 아내는 급하게 달려갔다. 거기다 마지막 희망을 건 모양이었다.

“혹 내 시계 못 봤어요?”

“여기 있소.”

방에서 듣고 있자니 곽 선생은 웃음이 나왔다.

“아니 글쎄 누구 시곈데 말도 없이 차고 가요?”

“아주머니 안 쓰길래 잠깐 차고 갔다 왔지요.”

“안 쓰다니 세수하다 잊어버리고 풀어 놓은 것인데, 그래 남의 걸 말도 않고 차고 가서 애간장을 그렇게 녹이면 어떻게 해요.”

“시계가 없으니깨 불편해서 그만……”

아내는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안 되겠어요. 어떻게 해서든 내보내야지.”

“왜 시계 차고 갔다가 돌려주었으니 나가라고? 세상에는 정직한 식모도 드물잖어?”

“그렇지만 식모는 식모다운 데가 있고 식모 구실을 해야지요.”

결국 곽 선생 내외는 식모를 내보내야겠다는 결론을 내었다. 다만 좀 더 기다렸다가 크리스마스 보너스가 나오면 퇴직금 겸 한 오천 원 쥐어 주고 보내기로 하였다. 그러나 무슨 핑계를 대서 내보내야 할지 그것이 문제였다.

 

크리스마스 보너스가 나오는 방학하는 날 아침이었다. 갑자기 식모가 자진해서 나가겠다고 말했다. 그것은 의외의 반가운 소식이었다.

“왜 갑자기 그만 두려고 그러세요.”

아내는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나 명랑한 음성으로 말했다.

“엊저녁 밤에 예수님이 나타나서 나보다 북쪽으로 가라고 하등만요.”

“북쪽이요?”

“내가 양을 먹이는디 풀이 갑자기 노랗게 죽어 버리는 것이 아닝게라우. 그래서 근심했더니 걱정 말고 북쪽으로 가라고 하드랑게요.”

“그래서 북쪽 어디로 갈려구요?”

곽 선생이 호기심이 생겨 물어 보았다.

“서울로 가 볼라구요.”

“무작정 서울 어디로 가겠다는 거요?”

“부흥회 때 만났던 아는 목사님이 계셔라우.”

“그래 언제 떠나려구요.”

“아침밥 묵고 곧 갈라요.”

곽 선생 내외는 서로 쳐다보았다.

“오늘 봉급날인데 오후에 돈 드릴 테니 하룻밤 자고 내일이나 가십시오.”

“돈은 있어라우.”

식모는 끝내 가겠다고 우겼다. 그래서 이웃에서 돈을 빌려 이천 오백 원을 주고 아내의 헌 시계를 주었다.

곽 선생이 등교하려 하는데 아내가 가까이 왔다.

“어쩐지 꿈 이야기가 기분 나빠요. 풀이 다 말랐다니 그게 뭐예요.”

“무당 근성이지. 또 꿈은 반대라니까 오늘은 특별히 보너스가 많이 나올지 누가 알아? 한 턱 쓸 테니 기대해요.”

그는 학교로 왔다. 종업식이 끝나고 서무과에서는 봉급과 보너스 지급이 있었다. 그런데 이해 보너스는 천차만별이었다. 엉뚱하게 많은 사람, 의외로 적은 사람, 하나도 같은 사람이 없었다. 적은 사람은 모두 불평이었고 많은 사람은 안 세어보고 액수를 감추어버렸다. 이것은 꼭 근무 성적을 따라 준 것 같지도 않았다. 서무과에 문의해도 신통치 않은 대답이었다. 교장 선생이 직접 지시한 것이기 때문에 서무과에서도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예년 크리스마스 보너스는 직책의 상하를 막론하고 균일하게 주어서 기독교 학교답다고 받을 때 즐거웠던 보너스였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셈이야?”

“곽 선생은 얼마나 나왔소?”

“나는 아직 서무과에 들리지 못했습니다.”

“아니, 근무 평가를 어떻게 했으면 이렇게 천차만별이지?”

“소수점까지 찍었나 봐요.”

여 선생들의 불평이 더 많았다.

“곽 선생님. 교장실에 한번 가보십시오.”

이런 일에 교장실에 갈 수 있는 사람은 곽 선생밖에 없었다.

“왜, 곽 선생님 보너스가 적을 것 같아서 그래? 곽 선생은 갈 수가 없지. 왜 많이 주었느냐고 따지는 사람 봤수?”

곽 선생은 되도록 오래 사무를 보고 있었다. 어쩌면 다른 사람보다 터무니없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가슴을 울렁거리게 했다. 그러나 풀이 말랐다는 식모의 말이 떠올라서 생각을 종잡을 수 없게 했다. 어쩌면 터무니없이 적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봉투를 받는 것을 주저하게 했다. 꿈은 반대라니까 터무니없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 그러나 또 꿈이 맞는다면 이웃집에서 빌린 빚도 갚을 수 없을 만큼 터무니없이 적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해서 가슴이 떨렸다. 그래서 되도록 선생들이 많이 흩어진 뒤 서무실에 들리고 싶었다. 드디어 일은 끝났다. 그는 서무과로 내려갔다. 도장을 넘겨주었다. 서무 직원은 도장과 함께 봉급 봉투를 넘겨주었다.

“보너스는?”

“글쎄 곽 선생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 교장 선생님이 적어 준 것인데요.”

그의 보너스 난은 0이었다.

교장실 문을 두들겼다. 교장은 안경 너머로 곽 선생을 쳐다보았다.

“잘 오셨소. 앉으시오.”

곽 선생은 교장을 보고 한번 씽긋 웃으며 여유를 보였다.

“교장 선생님. 이번 보너스는 어떻게 정하셨습니까?”

“그러잖아도 보너스 이야기를 하려 했는데 잘 오셨소.”

그리고서는 안경을 만지작거렸다.

“곽 선생도 수학 선생이라 수학에는 정확한 용어를 정의해서 쓴다는 것을 잘 아시지요? 어디 곽 선생이 먼저 보너스라는 용어부터 정의해 보겠습니까?”

그는 좀 당황했으나 우선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보너스는 봉급과 구별되며 고용기관의 약속에 의해 선생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뜻으로 덤으로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 학교는 무슨 약속이 있었습니까?”

“매년 주어 오는 관례가 바로 약속이지요.”

교장은 안경을 까딱까딱 흔들었다.

“그런데 약간 틀린 데가 있어요. 봉급과 구별되는 것은 맞는데 보너스는 선생들의 노고에 보답하는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교장이 그냥 대가 없이 거저 주는 것입니다. 즉 성경을 빌어 말하자면 하나님의 은혜와 같은 것이지요.”

“그래서 아무렇게나 줄 수 있단 그런 말입니까? 선생들의 기대에 맞게 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주는 것이 아니구요?”

“아니지요. 하나님의 은혜는 아무렇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통로가 있어야 합니다. 바로 기도가 은혜의 통로지요.”

“그래서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은 많이 주고, 기도 적게 하는 사람에게는 적게 주었다는 말입니까?”

“말하자면 그런 셈이지요.”

“그런데 교장 선생님께서는 기도 많이 하는 정도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어요. 신앙의 간접적인 척도는 십일조를 얼마나 성실하게 하는가를 알아보는 일입니다.”

곽 선생은 자기가 십일조를 적어낼 때 0이라고 썼던 생각이 났다.

“바로 그것이 내가 보너스를 나누어 준 기준입니다.”

교장 선생은 원칙에 맞는 행위를 했다는 기고만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곽 선생은 크게 웃으며 일어났다.

“교장 선생님은 참으로 축복 받으셨습니다. 그런 아이디어를 하나님의 계시로 받으셨다니. 저는 좀 불평하러 왔는데 조금도 불평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보다 더 법에 능통하신 것 같습니다.”

곽 선생이 교장실을 나오려는데

“곽 선생.”

하고 교장이 불렀다.

“난 곽 선생도 많은 복을 받으셨다고 들었는데. 좋은 식모를 하나님이 보내 주셨다면서요?”

곽 선생은 돌아보았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신앙의 본보기를 보내 주셔서 큰 깨달음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축복마저 오늘 아침에 사라졌습니다. 나가 버렸으니까요.”

(1972년 1월, <한국종교문학전집> 제1호, 2005년 1월 개작)

 

 

출처 : 낮은 문턱
글쓴이 : 은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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