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훈 선거법 위반 판결 보니
김동진 수원지법 성남지원 판사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의 1심 판결을 “지록위마”(사슴을 가리켜 말이라고 한다)라고 비판했다가 정직 2개월의 중징계를 당했다. 항소심(서울고법 형사6부·재판장 김상환)이 9일 국정원 심리전단의 활동을 공직선거법 위반이라고 판단한 것은 1심이 ‘말’이라고 부른 것을 ‘사슴’이라고 바로잡은 것과 같다.1심 판결을 깬 것은 치밀한 데이터 분석의 결과이기도 하다. 1심은 수많은 글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은 채 ‘이전부터 해오던 정치개입의 연장으로 볼 수 있으므로 국정원법 위반만 인정된다’고 했다. 하지만 항소심은 27만4800건의 트위트·리트위트 글을 분석하고 다른 증거들과 종합해 이런 판단을 반박했다.
판결문에 그래프 5개…표는 더많아
시기·주제별 분석도 관련성 확인
노골적 지시가 국헌문란 배후 밝혀
박근혜 후보 확정뒤 선거글 증가
안철수 뜰 때는 ‘안철수 비방글’ 기승
문재인 단일화 뒤론 ‘비방 표적’ 이동
후보동선·쟁점과도 정확히 맞물려
■ 치밀한 데이터 분석…선거개입 의도 확인
1심이 국정원 활동에 특정 후보를 당선 또는 낙선시키려는 목적성·계획성·능동성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런 점이 인정되느냐가 항소심에서도 가장 중요한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먼저 국정원 심리전단 요원들의 활동상을 꼼꼼히 확인했다. 판결문을 보면, 심리전단은 원 전 원장의 지시사항이 반영된 ‘이슈와 논지’를 매일 하달받아 움직였다. 예컨대 2012년 9월7일께 안철수 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의 ‘이슈와 논지’를 받은 뒤, 안 후보 비방 글을 3일간 363차례 올렸다. 트위트덱·트위터피드 프로그램을 사용해 선거개입 글의 대량 확산도 시도했다. 재판부는 “익명의 국민인 양 가장한 채 새로운 매체(트위터)를 이용해 변칙적 방법으로 적극적·체계적으로 활동한 것”이라며 “능동적이고 계획적인 행위로 선거운동의 핵심 요소를 갖췄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댓글과 트위터글을 ‘국정 개입’과 ‘선거 개입’으로 일일이 구분했다. 1심이 국정원의 활동을 선거 시기와 그 이전으로 구분하기 어렵다고 했기에, 두 시기 사이에 질적 차이가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시계열 분석 결과 선거 개입 의도가 뚜렷해졌다. 2012년 1~6월 선거와 직접 관련 없이 이명박 정부를 홍보하는 등의 ‘정치 글’이 압도적(84~97%)으로 많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이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된 8월 이후 ‘선거 글’ 비중(50~83%)이 부쩍 높아졌다.
‘안철수 반대’, ‘민주당 반대’, ‘문재인 반대’, ‘박근혜 지지’ 등 유형별 분석도 이뤄졌다. 안철수 전 후보가 박 후보와 양자 대결 여론조사에서 앞서는 등 기세를 올리던 2012년 8~9월 안 후보 반대 글이 ‘선거 글’ 가운데 가장 많은 41~42%였지만, 문재인 후보로 단일화된 2012년 12월에는 안 후보 반대 글이 한건도 발견되지 않았다. 2012년 8월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은 ‘통합진보당 반대’ 비중이, 이정희 후보가 박 후보와 텔레비전 토론에서 맞붙은 12월 42%까지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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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4쪽에 이르는 판결문에는 그래프가 5개나 들어 있고, 표는 그보다 훨씬 많아 마치 논문 같은 느낌을 준다. 통상적인 판결문은 문자로만 작성된다. 그만큼 객관적 데이터 분석으로 결론을 도출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 노골적 지시·독려가 국헌문란의 배후
앞서 1심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형사21부(재판장 이범균)는 증거로 인정한 트위터 글 11만여건 등의 내용은 제쳐두고, 원 전 원장의 구체적 지시가 없었다는 점에 주목해 선거법 위반 혐의를 무죄로 판단했다. 그러면서 “대선이 임박한 시점에도 종북세력을 경계하고 대응하라는 지시만 했고, 구체적으로 선거에 개입하는 지시는 없다. 특히 11월에는 선거에 불필요하게 연루되지 않게 각별히 유의해달라는 발언까지 했다”며 선거 개입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데이터 등을 이용해 선거 개입의 능동성과 계획성을 확인한 항소심 재판부는 이런 판단이 객관적이지 않다고 밝혔다. 원 전 원장이 2012년 11월23일 “선거 종료 시까지 불필요하게 연루되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유의”하라고 지시한 것은 오히려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라’는 취지였을 수 있다고 봤다. 투표일이 가까워질 때 글 수가 줄어든 것도 야당에서 관련 의혹을 제기한 것과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선거를 언급하며 “금년에 잘 못 싸우면 국정원이 없어지는 거다”라며 활동을 독려한 게 원 전 원장의 진심이라는 게 항소심의 판단인 셈이다. 재판부는 “심리전단 직원들이 ‘너무 세게 하는 것 아니냐, 자제해야 한다’는 등의 얘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상부에서는 ‘적극적으로 하라’며 활동을 독려했다”며 원 전 원장 등 국정원 지휘부의 노골적인 지시가 선거 개입이라는 국헌 문란의 배경이라고 밝혔다.
노현웅 기자 golok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