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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썬다 싱 성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8. 12:08

썬다 싱 성자

 

 

썬다 싱은 1889년 9월 3일 북인도 펀잡주 람푸르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세르 싱은 부유한 대지주로서 교리에 따라 열심히 사는 시크교의 신도였다. 썬다의 어머니는 고상하고 순결하며 사랑과 동정심이 많은 사람으로서 썬다가 위대한 성자가 되는데 아주 큰 영향을 끼친 분이었다.

 

썬다는 열 네 살 때 어머니와 형을 잃게 되면서 조용하고 온순하던 성격이 큰 변화를 가져왔다. 그때 썬다는 기독교에서 운영하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 학교는 자신이 믿는 시크교가 아닌 기독교를 전파하였기 때문에 점점 반발심이 많이 생겨 불량한 학생이 되어갔다. 결국 썬다는 친구들이 보는 가운데 성경을 조각조각 찢어놓고 그 위에 기름을 부어 불에 태우게 되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 썬다는 시크교 안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하였으나 노력을 하면 할수록 더욱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만 생기는 것이었다. 썬다는 1904년(15세) 12월 16일부터 새벽마다 평화를 갈망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기도를 드리게 되었는데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되자 결국 셋째 날 새벽 5시에 동네 앞을 지나가는 기차에 치어서 죽을 결심까지 하게 되었다. 그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참된 신이 있다면 평안을 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고 또 기도하였다.

 

18일 새벽 4시 30분이 되었을 때 갑자기 썬다의 방안으로 밝고 환한 빛이 강하게 비춰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 밝은 광채 가운데서 신비로운 음성이 들려왔다. "너는 왜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찾는 길이니라. 나는 너와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목숨을 버린 예수 그리스도니라." 그순간 썬다는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계시구나! 이 분이 그 자신이구나" 라는 생각이 떠오르자마자 예수 그리스도 앞에 꿇어 엎드리게 되었다.

 

썬다는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큰 기쁨과 평안을 얻은 날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열정적이며 적극적으로 증거하게 되었다. 시크교는 힌두교의 한 종파였는데 그 교의 신도들은 다른 종교의 신도들보다도 종교심이 강했기 때문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게 된 썬다는 큰 핍박을 받게 되었다. 가족들과 친척들은 썬다를 박해할 뿐 아니라 그가 다니고 있던 학교와 살고 있던 마을의 기독교인들까지도 심하게 핍박을 하였다.

 

썬다의 숙부는 조카의 마음을 고쳐볼까 하여 그를 데리고 지하실로 들어가 금고를 열고 많은 금, 은, 보석, 화폐를 보이며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고 극진한 겸손으로 어린 썬다에게 빌었다. "네가 만약 그 이단의 신앙을 버리고 우리와 같이 있으면 이 모든 것이 너의 것이 될 것이다." 썬다는 숙부의 청을 거절하면 얼마나 그를 모욕하는 일인가 생각하고 두 눈에서 괴로움과 슬픔의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썬다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새 힘을 얻어 단호하게 말하였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비록 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다 준다할지라도 내 마음속에 있는 평안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내 몸이 불사름을 당한다 할지라도 나의 사랑하는 구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수주일 후 썬다는 시크교의 전통에 따라 태어나면서부터 한번도 잘라보지 않은 두발을 밀어버렸다. 이것은 그가 시크교도가 아니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은 썬다가 시크교도의 상징이었던 긴 머리를 잘라버리자 짐승과 같이 취급하였다. 그들은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못하게 하였으며 짐승을 대하듯이 음식물을 던져주었다. 또한 동네 사람들은 썬다를 만나면 욕을 하며 침을 뱉었다.

 

약 여덟 달 동안 썬다는 수많은 유혹과 핍박 가운데서도 타협을 하거나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그의 아버지는 몰래 독약을 넣은 주먹밥을 주면서 썬다를 내쫓았다. 썬다는 집을 떠나 얼마쯤 갔을 때 배가 고파서 그 주먹밥을 먹었는데 그때부터 심한 복통이 생기고 피를 토하면서 간신히 어느 미국 선교사의 집까지 도착하게 되었다. 급히 달려온 의사는 독약이 온몸에 퍼져서 손을 쓸 수가 없다고 하였다. 다음날 썬다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선교사의 집을 방문한 그 의사는 썬다가 하나님의 기적으로 치유된 것을 보면서 크게 놀랐다. 그일 후에 그 의사는 기적을 나타내신 하나님을 확신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한다.

 

여러 날 후에 썬다는 수바투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곳에서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 후 33일이 지났을 때부터 썬다는 맨발에 성경 한 권을 손에 들고 1년 동안 전국 순회 전도여행을 다녔다. 그 전도여행을 마친 후에 썬다는 그때까지 복음이 전파되지 못한 북인도에서 적극적으로 전도할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는 구령에 불타는 사랑을 가지고 복음이 전파되지 않은 카시밀, 펀잡, 바니할 지방을 돌면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구원과 평화를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다. 가진 것이라고는 담요 두 장과 성경 한 권 밖에 없는 그에게 가혹한 날씨와 회교도들의 박해는 너무나도 심했다. 썬다는 때때로 중상모략을 당하며 굶주리고 목마르며 인적이 없는 수풀 속으로 쫓겨나고 짐승의 굴에 들어가며 벗은 발은 큰 상처를 입게 되었다. 썬다는 주님을 위하여 이러한 고난을 많이 받게되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어떤 행복보다도 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언제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정진했다.

 

썬다 싱은 고원지대였던 코드갈에서 전도하던 중에 미국인으로서 부유한 생활을 버리고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사무엘 스토크스를 만나게 되었다. 스토크스는 썬다와 함께 전도하면서 지내던 시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는 주님을 본받고자 하는 열정이 생겨서 아씨시의 프랜시스처럼 탁발전도를 하기 위하여 인도로 갔다. 며칠 후 나는 길에서 인도 전역을 전도해 본 경험을 가진 홍포의 소년을 만났다. 그의 전도에 대한 열정과 성실함 그리고 메시지는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아직 소년인데도 그는 주님을 위해 온갖 환난과 박해 기아와 추위를 잘 견디었으며 심지어 옥에 갇히게 되는 경우에도 그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위궤양으로 말미암아 고생을 했다. 한번은 그가 위궤양에다 고열까지 겹쳐 도로 위에 쓰러진 일이 있었다. 날씨는 매우 춥고 해가 저물어 나는 어찌하였으면 좋을지를 몰랐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고열에 짓눌려 온 몸은 오한으로 떨었다. 사경을 헤매는 그에게 좀 어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애써 미소를 짓더니 들릴락말락한 소리로 '나는 대단히 행복합니다. 조금도 고통스럽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나는 매우 감탄했다. 그의 입에서 나는 한번도 불평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고통 중에서도 참 기쁨을 맛보았다."

 

1908년부터 1909년까지 2년 동안 썬다는 북인도 지역과 티베트를 전도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회교도의 박해는 말할 것도 없고 말라리아와 열사병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맨 적도 있었다. 또 눈보라와 빙하에 익숙한 그였는데도 얼어죽을 뻔한 때도 있었으며 히말라야 급류에 익사할 뻔도 하였다. 

 

1909년(19세) 겨울에 성공회 주교 레프로이 박사로부터 신학교에 입학을 해서 사제서품을 받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고 썬다는 목회와 신학적인 훈련을 받아보고자 입학하였다. 신학교에서 그는 여전히 홍포를 입었고 늘 혼자 앉아 성경을 묵상하거나 기도를 많이 했고 또 쉬는 날이면 여전히 전도를 하였다. 썬다는 그 성공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성직자가 된 사람은 다른 교단의 교회에서는 설교를 할 수 없고 오직 성공회 안에서만 목회해야 한다는 주교의 말을 듣고 그 학교를 중퇴하고자 하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이때 그는 이미 설교할 자격을 받았으나 자신의 증거사역이 제한된다는 것을 알고 주교에게 설교권을 반환하였다. 주교는 썬다가 부여받은 특별한 성격과 사역과 보다 넓은 선교영역을 인식하고서 그의 설교권을 승인해 주었다. 그리하여 교단이나 교리에 속박을 당하지 않고 전과같이 자유롭게 전도하고 설교하며 살기로 결단한 썬다는 결국 1910년(20세) 7월에 중퇴하게 되었다.

 

썬다는 신학생으로 있는 동안 여러 신비가의 서적을 읽었는데 그 중에서도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성 프랜시스』 등을 오래 애독하였다. 그밖에도 신비가 야곱베메, 아빌라의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스웨덴 보르그, 마담 기욘 등의 서적을 통하여 그는 내면생활에 더욱 깊은 곳을 지향하는 동기를 얻게 되었다.

 

1911년과 1912년은 북인도 지방을 다니며 전도하였다. 이 여행 중에 썬다는 날칸다라고 하는 곳에서 곡식을 거두는 농부들을 보고 열심히 전도를 하였다. 처음에는 아무런 반응이 없던 농부들이 점점 반감을 일으켜 욕을 하기 시작했고, 그들 중에 한 사람은 돌을 썬다의 머리에 던져서 상처를 내었다. 얼마 후에 돌을 던진 사람은 갑자기 머리가 아프게 되었기 때문에 부득이 일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썬다는 그 농부를 대신하여 낫을 가지고 다른 농부들과 함께 곡식을 베어주었다. 이러한 썬다의 행실을 보고 농부들은 감동을 받았다. 해가 지자 농부들은 아파서 일찍 집으로 돌아간 그 농부의 집으로 썬다를 데리고 가서 그의 선한 행실에 대하여 칭찬을 하고 썬다의 전도를 받게 되었다.

 

썬다 싱은 입신체험을 매우 많이 하였는데 그가 처음으로 입신체험을 하게된 때는 1912년(22세)이다. 그해 봄 티베트로 전도여행을 떠난 썬다는 많은 눈으로 인해 몇 주간 코드갈에 머물면서 기도생활에 전심전력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에 썬다는 문득 이상한 세계에 들어가 천사들의 무리 가운데 있는 것을 깨닫고 자신이 죽어서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온 줄 알았다고 한다. 이것이 썬다의 첫 번째 입신체험이다.

 

훗날에 썬다는 자신의 입신체험이 그의 전도여행에 끼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증하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사두로 생활해온 14년 동안 많은 고통과 핍박을 받았고 어느 때는 이 생활을 포기할 뻔하였던 유혹을 받았지만 이 입신체험을 생각하면 결코 전세계를 준다해도 나는 이러한 생활을 중지할 수는 없었다. … 나는 한 달에 8-10회 정도 영안이 열리어 천계에 들어간다.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동안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천계의 영광 중에 다니며 천사들이나 성도들과도 대화를 한다."

 

1912년 썬다는 북인도 전도여행 중에 마하리시를 만났다. 당시 썬다의 증언을 들어본다.

"나는 카일라스산의 만소로와르 호숫가를 지날 때 발이 미끄러지면서 산 아래로 굴러가다가 한 동굴 앞에서 멈추게 되었다. 그때 나는 그 동굴 속에 매우 나이가 많은 사람이 눈을 감고 앉아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의 몸에는 의복이 걸쳐있지 않았으며 머리와 손톱은 몹시 길게 자라 있었다. 그는 감았던 눈을 뜨자 나에게 앉으라고 손짓하며 ... 우리가 얘기를 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자"라고 말했다. 그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끝냈을 때 나는 그가 '마하리시(大聖師)구나'하고 생각했다. 내가 그에게 당신은 누구냐고 묻자 '나는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엄격한 이슬람교도였던 부모님의 슬하에서 자랐소. 장성하여 나는 더비쉬 사원에 들어가서 수도를 하며 코란 경전을 읽었소. 30세가 되었는데도 그 회교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였는데 당시 성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조카 중의 한 사람인 자르노스가 알렉산드리아에 들렸다가 나에게 세례를 주었소. 그 후 75세가 될 때까지 세계 여러 곳을 다니면서 전도하였소. 나는 21개 국어를 사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오. 그러다가 내가 더 여행을 계속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자 차츰 이곳까지 오게 되었고 이 카일라스 산에 거주해온 지는 209년이 되었오'라고 하였다."

 

썬다는 그의 이름을 여러 번 물었으나 그는 결코 알려주지 않고 "내 이름은 크리스천입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기 때문이지요"라고만 하였다. 썬다는 이 첫 번째의 만남 이외에 1916년과 1917년에도 마하리시를 만났다. 썬다는 마하리시를 만나서 은혜받은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여러 번 간증하였다.

 

썬다 싱은 1913년(23세) 주님을 본받아 40일 금식기도를 하게 되었다. 그와 친하게 지내던 의사 스위프트씨는 '목숨을 잃는다'고 반대하였지만 굳게 결심한 썬다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하드와와 데라둔 사이의 정글 속에 있는 참대나무가 우거진 숲을 택한 후에 금식하는 날짜를 계산하기 위해서 돌 40개를 가져다가 곁에 놓고 매일 한 개씩 던지면서 금식을 하였다. 금식을 하는 동안 그는 평소보다 더 큰 평화와 행복을 느꼈다. 그는 육체의 힘이 거의 없어졌을 때 사자와 맹수의 우는 소리를 들었다. 감각이 예민하게 되어 보는 것보다 느끼는 것이 더 빠르게 되었다. 나중에는 기력이 없어서 날짜도 헤아릴 수 없게 되었으므로 며칠인지 알 수 없었다. 마침 이때 대(竹)를 베러온 나무꾼이 거의 죽어 가는 사람을 보고 누구인지 알 수 없었으나 성경에 쓰여있는 그의 이름을 보고 썬다인 줄 알고 친구들에게 데려다 주었다.

 

이 금식 중에 있었던 체험은 그의 생애에 한 전환점을 이루는 중대한 경험이었다. 이 체험이 그에게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가에 대해서 그 자신이 고백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금식 전에는 나에게 유혹이 있었다. 그것은 내가 피곤할 때 누가 와서 질문을 하거나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나는 늘 괴롭게 생각하였다. 지금도 다소 그런 일이 있으나 정도는 다르다. 이것은 육체가 있는 동안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이러한 심경에서도 해탈하기를 바란다. 또 나는 먹지 못하고 몹시 피곤할 때 하나님께서는 왜 나를 돌보시지 않는가 하는 불평이 있었다. 또 어떤 때는 집에 가서 결혼을 하고 행복한 생활을 하면서 좋은 신자가 되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 무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일어났다. 다른 사람들의 결혼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그리스도와 결혼한 내가 어찌 또 결혼할 수 있겠는가. 나의 참된 결혼은 그리스도와 맺었다."

 

금식 중에 새로운 영적 능력을 받은 썬다는 몸이 회복되자 또다시 티베트로 전도여행을 떠났다. 이 전도여행 중에 썬다는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이때 있었던 최악의 박해는 큰 절들이 많은 라자르시에서 일어났다.

 

썬다가 저자 거리에서 전도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수(首)라마승은 격노하여 썬다를 체포하고 송장굴에 던져 사형을 시키라는 즉석공판을 내렸다. 썬다는 우물같이 생긴 송장굴까지 끌려가서 옷을 벗기운 채 던져졌다. 오른팔이 부러진 그로서는 이제 그 안에서 굶주림과 고통 가운데 죽을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 빈 우물 속에는 먼저 죽임을 당한 송장들이 많이 있었고 그 썩은 냄새로 인해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 처참한 암흑의 구덩이에서 사흘 밤낮을 한번도 잠을 자지 못한 썬다는 죽음이 점점 가까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당시의 경험에 대한 썬다의 간증을 들어본다.

 

"내 육체의 고통은 막심하였으나 내 영혼은 행복하였다. 나는 하나님께 더욱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속에는 큰 기쁨이 흘러 들어와 내가 소름끼치는 무서운 곳에 있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신기한 평화가 내 마음에 가득 차서 어찌 유쾌한지 나는 그것을 형언할 수가 없다. 나는 이때처럼 큰 희열을 경험한 적은 없다. 그리스도의 평화는 그 지옥의 우물을 천국의 문으로 변화시켰다." 사흘째 밤 그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 위에서 자물통 여는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로프를 잡으라는 소리가 들렸다. 로프가 손에 닿자 썬다는 혼신의 힘을 다해 위로 올라갔다. 밖으로 나와보니 구조자는 없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그 이듬해 1914년(24세)에는 네팔전도를 하게 되었다. 6월 8일, 썬다는 네팔의 일람이라는 부락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성경을 읽어주고 설교를 하다가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내가 계속 전도를 하자 사람들은 나를 끌고 가서 감옥 속에 던졌다. 그들은 나의 옷을 홀랑 벗기고 착고를 채웠다. 그리고는 많은 거머리 떼와 오물을 내 앞에 쏟아놓고 욕을 하면서 나갔다. 그 거머리 떼는 전신으로 기어올라 나의 피를 빨았다. 처음 두서너 시간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고통이었다. 나는 찬송을 하고 기도를 하였다. 순간 그 고통은 가볍게 느껴지고 감옥은 천성과 같이 변했다. 내가 온전히 기쁨으로 충만해서 찬송을 계속 부르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는 착고에 채인 채 다시 전도를 하였다. 그러자 그들은 다음날 나를 풀어주었다. 거머리가 내 피를 다 빨아먹었기 때문인지 현기증이 나서 잘 걸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의 이름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렸다."

 

 1918년(28세) 1월부터 썬다는 인도 전역을 다니면서 전도집회를 하게 되었다. 죽음을 각오한 사람이 아니면 갈 수 없는 티베트 전도, 많은 핍박을 받고 고난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는 의지, 많은 기적과 신비체험 등이 점점 전인도 교계에 알려지게 되어 설교와 강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였던 것이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는 청중들로 가득 찼다. 어떤 때는 수백 명, 수천 명씩 청중이 몰려와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썬다는 빈틈없는 전도일정으로 강행군을 하면서도 기도생활만은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일절 사람들에게 돈을 받지 않았다. 그는 돈을 넣는 전대는 물론 도시락도 가지고 다니질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1918년 겨울부터는 버마, 싱가폴을 돌면서 집회를 인도했다. 그는 말레이, 페낭에 가서 전도하고 일본으로 갔다. 썬다의 전도집회는 가는 곳마다 은혜가 넘쳤다. 도꾜의 후지미 교회는 썬다가 강단에 섰을 때 마치 예수님이 선 것 같았다고 하였으며, 고베의 교회에서는 청년들이 맨발의 썬다를 따라 겨울동안 양말 안신기 운동과 교회의 부흥을 위한 특별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후 3월부터 5월까지 썬다는 중국에서 전도여행을 하였다.

 

인도로 돌아온 썬다는 티베트로 향했다. 이로써 1908년부터 넘나들기 시작한 히말라야를 열 번째 넘은 것이다. '썬다를 통과시키지 말라'는 티베트 정부의 지령으로 인해 썬다는 항상 다니던 길을 피해서 험한 길을 돌아가야만 했다. 티베트에서도 마음대로 다닐 수 없기 때문에 부락전도를 하였는데 여간 어려움이 많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추위와 굶주림으로 큰 고통을 당하였다.

 

썬다는 랑케트 쪽으로 가는 길에서 티베트인 한 사람과 동행을 하게 되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눈보라와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이 덮인 산길을 사력을 다해 전진하다가 산비탈에 웅크리고 있는 한 사람의 동사체를 발견했다. 썬다는 동행자에게 그 사람을 업고 가자고 제의하였으나 그 동행자는 '그러다가는 우리도 얼어죽어요. 나는 살아야 되겠습니다'라고 하면서 냉정하게 앞으로 가는 것이었다. 썬다는 비탈을 조심스럽게 더듬으면서 내려가 그의 생사를 확인했다. 그 사람은 그때까지 살아있기는 했으나 얼어죽기 직전이었다. 썬다는 죽은 것 같은 그를 끌어올려 등에 업고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눈보라 길을 뚫고 나아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고갯마루에 거의 다다른 썬다의 시야에 또 하나의 동사체가 보였다. 가까이 가서 살펴보니 그는 바로 몇 시간 전에 살겠다고 먼저 가버렸던 사람이었다. 그는 이미 꽁꽁 얼어서 죽어 있었다. 썬다와 등에 업혀있던 사람은 서로 밀착해 있었기 때문에 체온이 내려가지 않았으므로 살게 되었는데, 목숨을 건지겠다고 먼저 가던 그는 혼자만 걸어가다가 체온이 너무 내려가 결국 얼어서 죽게 된 것이다. 썬다는 마태복음에 16장에 있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구원코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라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랑케트 쪽으로 전진했다.

 

1920년(30세)에 썬다는 영국과 미국의 주요도시를 방문하여 순회전도를 하였다.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썬다는 팔레스타인, 스위스, 독일, 스칸디나비아 삼국, 네덜란드, 프랑스 등등 순회전도를 계속하였다. 썬다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스위스에서는 썬다가 인도하는 집회에 참석을 하도록 하기 위해서 특별 열차를 배정해주는 일도 있었고 우체국에서는 우편배달을 위한 트럭을 가지고 사람들을 실어다주기도 하였다.

 

썬다는 많은 사람들이 머리에 손을 얹어 축복해 주기를 바랬지만 한번도 안수기도를 하지 않았다. 어느 목사님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와서 축복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썬다는 말했다. "성경을 찢어서 불태운 이 손으로 어떻게 안수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못에 찔린 주님의 손으로만 축복을 하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썬다는 두 손을 모으고 "주님, 이 아이들에게 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여 주었다. 썬다 자신은 날로날로 작아지고 오직 예수님만 더욱 크게 영광받으시기를 원했다. 유럽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으로 돌아온 썬다는 또다시 북인도 전도를 하였다.

 

1923년(33세) 4월, 세상을 떠난 썬다의 아버지는 거처할만한 집도 없이 떠도는 아들에게 주택을 마련하라는 유언과 함께 많은 재산을 상속하였다. 썬다는 토지문서들을 다 정리하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심라힐의 나환자촌 옆에 집을 하나 사고 나머지 돈은 복음 증거자들을 위한 자선 및 장학기금으로 희사했다. 썬다는 작은 주택이지만 이곳을 나환자 병원에서 일하는 의료선교사에게 내어주고 자신은 뒷마당에 토벽을 쌓아올려 방을 하나 만들어서 거처하게 되었다. 

 

5월 23일, 썬다는 다시 티베트 전도에 나섰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쟁후유증으로 말미암아 변경을 봉쇄하고 있어서 티베트 진입이 불가능했다. 설상가상으로 여행 중에 썬다는 위궤양으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당하였기 때문에 간신히 수바투로 돌아왔다. 유럽에서 전도할 때부터 더욱 악화된 위장이 이제는 헐대로 헐어서 치료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의사는 그에게 전도활동을 하지 말고 오직 휴양만 할 것을 당부했다. 극심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절망해 본적이 없었던 썬다였지만 몸이 너무 악화되어 전도여행을 다닐 수 없다는 통보를 받게 되자 암울하고 절망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십 년 동안을 잠시도 쉬지 않고 복음전파를 위해 최선을 다 하였기 때문에 과로와 영양실조 등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것이다.

 

썬다는 1924년(34세) 봄 다시 티베트 전도여행을 시도해 보았는데 위궤양뿐만 아니라 폐결핵까지 걸려서 거칠고 사나운 길을 많이 걸어야하는 전도여행이었기 때문에 감당하지 못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악화된 건강문제로 말미암아 휴양을 하면서 지낸 몇 년 동안 썬다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말 이외에는 성경말씀만 증거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가끔 나환자촌에 가서 나병환자들을 만나보기도 하였다. 건강상태가 조금이라도 가벼워지면 책을 집필하거나 문서선교에 힘을 썼다. 입으로 전도를 못한다면 문서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더 살려야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1928년(38세) 봄, 썬다는 다시 한번 티베트 전도여행을 시도했다. 그러나 히말라야의 산길에서 피를 토하며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그를 지나가던 티베트 상인들이 발견하여 수바투로 데려다 주었다. 다음해인 1929년(39세) 4월 18일, 썬다는 또다시 티베트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날 이후로는 아무런 소식도 없으며 언제 어디서 별세하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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