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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프랜시스 성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8. 12:07

프랜시스 성자

 

 

기독교 역사상 크게 존경을 받고 있는 프랜시스 성자는 1182년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부유한 포목상인 삐에뜨로 디 벨라도네의 맏아들로 출생했다. 프랜시스는 소년시절 산 조르조 성당의 부속학교에서 문법과 종교교육 등 초보적인 공부를 했다. 청년시절에 프랜시스는 귀족의 자녀들과 어울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쾌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허영심이 많았던 그의 부친은 프랜시스가 돈을 함부로 낭비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할지라도 막지 아니하고 내버려두었다.

 

1202년(20세), 프랜시스는 아씨시의 귀족들과 시민들 사이에 있었던 전쟁으로 말미암아 1년 동안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 감옥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프랜시스는 오랫동안 중병으로 고생하면서 육신의 쾌락을 좇아 살았던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좀더 가치있는 삶을 살고 싶은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1205년(23세), 브리엔 왈터 장군은 교황군에게 큰 승리를 안겨다 주어 이탈리아 전역에서 큰 명성을 떨쳤다. 이러한 소식을 듣고 프랜시스는 기사가 되어 왈터 장군과 같은 공명을 떨치고 싶은 마음 때문에 아폴리아로 진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진군하는 도중에 심한 열병에 걸려 자리에 눕게 되었는데 그때 프랜시스는 자신의 삶에 대하여 반성하게 하는 신비한 음성을 듣게 된다. "프랜시스야 너는 어디로 가느냐?" "아폴리아로 가서 기사가 되려고 합니다." "너는 주인과 종, 둘 중에 어느 쪽을 더 기대하고 있느냐?" "물론 주인이지요."그렇다면 왜 주인을 따르지 않고 종을 따르려고 하느냐?" 이때 프랜시스는 말씀하시는 분이 누구인줄 알고 깜짝 놀래면서 "주여, 저에게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하고 물었다. "너는 고향으로 돌아가라. 거기서 너의 할 바가 무엇인지 알게 되리라." 정신을 차리고 자신이 본 환상과 음성을 곰곰이 생각한 끝에 기사가 되려고 했던 계획을 포기하고 아씨시로 향했다.

 

프랜시스가 아씨시로 돌아오자 그의 주변에는 다시 옛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프랜시스는 인색하게 보이기가 싫어 그들의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그러나 이때 벌써 프랜시스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근본적인 변화가 싹트고 있었다. 그는 지난날을 반성하기 시작했고 자신의 일생을 온전히 바칠 수 있는 삶의 목적을 발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해졌다.

 

여름철 어느 날 밤에 옛 친구들은 프랜시스가 옛날의 쾌활함을 잃어 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옛 생활로 돌이키게 하려고 호화판 연회를 열게 되었다. 연회가 끝난 후에 거리로 나온 프랜시스는 다른 친구들과 점점 멀리 떨어져 걸으면서 값진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였다. 프랜시스가 홀로 어느 가파른 언덕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몽롱한 상태에 빠지면서 깊은 신비체험 즉 성령의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프랜시스의 전기를 만든 첼라노의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프랜시스는 이 세상의 영화가 헛되다는 것을 깊이 깨닫는 동시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운 영적 체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순간 프랜시스는 갑자기 어떤 사랑의 격류 속에 던져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한 감미로움에 사로잡혀 보고 듣고 움직이는 것을 전혀 할 수가 없었다. 그 후 어느 날 프랜시스는 그 밤에 있었던 체험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때 나는 비록 내 몸의 팔과 다리가 갈기갈기 쪼개졌다고 할지라도 그런 줄을 모르고 꼼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프랜시스는 그동안 망설이면서 얽매여 있던 세상 줄을 끊게 되었다. 또한 마음속에 복음의 빛이 비추어지자 그때까지 우월감을 가지고 살아왔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한가를 느끼기 시작했다. 드디어 프랜시스의 마음속에는 거룩한 생활, 의로운 생활, 고상하고 풍족한 생활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아름답게 생활하는 모습이 찬란하게 비춰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큰 은혜를 체험하고 회개생활을 시작한 때부터 프랜시스는 예수님의 청빈생활을 특별히 사모하게 되었다. 그는 흉년이나 전쟁으로 인하여 곤궁에 빠져있는 사람들을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돌보아 주었다. 또한 그는 길을 걸어가다가 걸인을 만나게 되면 가지고 있던 돈을 전부 내어주었고 돈이 없을 때에는 모자나 허리띠 혹은 입고 있던 의복을 벗어주었다.

 

프랜시스는 어느 날 홀로 말을 타고 움브리아 평원을 지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말이 요동을 하여 앞을 보니 흉측한 나환자 한 사람이 서있는 것이었다. 크게 놀란 프랜시스는 빨리 도망갈 생각만 하고 있는데 그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그의 마음속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프랜시스야, 네가 하나님의 뜻을 참으로 실행하고자 한다면 네가 지금까지 육정으로 사랑해온 모든 것을 멸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네가 이것을 실천한다면 지금까지 달콤하고 사랑스럽게 생각되었던 모든 것들은 견디기 어려운 괴로움이 될 것이고 지금까지 꺼리며 피해온 모든 것들은 참으로 달콤하고 형언할 수 없는 기쁨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프랜시스는 지금까지 자신이 나환자를 가장 싫어했음을 생각하고 즉시 말에서 뛰어내려 무서운 문둥병 환자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용기를 내어 사랑을 실천한 후에 말을 타고 돌아가는 프랜시스의 심령은 기쁨으로 충만해졌다. 다음날 프랜시스는 이제까지 망설이며 피해왔던 나환자 병원을 자발적으로 찾아가서 불쌍한 환자들에게 자신이 가져온 물건을 나누어주고 흉측하게 보이고 역겨운 냄새가 나는 그들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었다.

 

이렇게 새로운 신앙생활을 열성적으로 시작한 프랜시스가 어느 날 다미안 성당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을 때 '프랜시스야, 네가 나의 집을 세워다오. 나의 집이 다 쓰러져 가는구나'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다. 프랜시스는 자신이 기도하고 있던 다미안 성당을 수리하라고 명령하신 줄로 알고 즉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집으로 달려가 상점에 있는 값진 옷감들을 팔아서 큰 돈을 만들어 가지고 성당의 노사제에게 갖다드렸다. 그리고 그는 성당 근처에 있는 동굴에서 기도생활을 하며 성당을 열심히 수리하였다. 얼마 후 상업 때문에 여행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 벨라도네는 상점에 있던 값비싼 물건들이 없어진 것을 보고 분개하면서 프랜시스가 성당에 바쳤던 돈을 모두 찾아왔다.

 

어느 날 상점에서 일을 하고 있던 벨라도네는 아우성치는 소리를 듣고 밖을 보았는데 사람들 가운데서 프랜시스가 미치광이처럼 놀림받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벨라도네는 수치심과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고 사나운 맹수처럼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가서 아들을 심하게 때린 후에 끌어다가 지하실 마루바닥에 내버리고 문을 잠가놓았다. 며칠 후에 벨라도네가 다시 여행을 떠나자 어머니 삐까부인은 프랜시스를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풀어주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벨라도네는 프랜시스가 계속해서 동네사람들의 비웃음과 놀림을 받고 있는 것을 보고 만약 그런 생활을 버리지 않는다면 모든 것을 빼앗고 상속받을 자격까지 박탈하고 아씨시에서 쫓아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주교관을 찾아갔다.

 

1206년(24세) 4월, 어느 날 아버지와 아들은 교회의 법정에 출두하게 되었다. 그 자리에서 주교는 "하나님께 봉사하려면 부친의 것은 모두 돌려드려라"고 하였다. 그때 프랜시스는 조용히 일어나 잠시동안 가까운 방으로 들어갔다가 벌거숭이가 되어 군중 앞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여러분, 지금까지 저는 삐에뜨로 디 벨라도네를 아버지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아버지의 것을 모두 돌려드립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삐에뜨로 디 벨라도네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다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 한 분만을 아버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러면서 프랜시스는 벗은 옷과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벨라도네의 발 밑에 놓았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었다.

 

그 후에 아씨시를 떠난 프랜시스는 굽비오에 있는 나병원에서 생활하며 나환자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그 병원에서 나환자들에게 봉사하다가 프랜시스는 성당을 수리하기 위해 아씨시로 다시 돌아왔다.

 

프랜시스는 아씨시의 거리를 다니면서 성당수리를 위해 도움을 청했다. 그러다가 필요한 건축 재료들이 생기면 그것을 손수 어깨에 메고 와서 성전을 수리하였다. 이와 같은 프랜시스의 열성과 희생적인 생활을 보고 감동을 받은 다미안 성당의 노사제는 프랜시스에게 음식을 날라다 주었다. 이러한 생활을 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프랜시스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청빈생활이 이런 것인가? 아니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은 문전걸식을 하면서 고난을 받아야 되지 않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내가 할 일이 그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다음날부터 프랜시스는 마을로 내려가서 그릇을 들고 집집마다 구걸을 하기 시작했다.

 

다미안 성당의 수리를 끝내고 프랜시스는 베드로 성당의 수리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뽀르치운꼴라 성당을 수리하게 되었다. 뽀르치운꼴라 성당은 후에 프랜시스 수도원의 요람이 된 곳으로서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한 장소였다. 성당수리를 마치고 난 뒤에 프랜시스는 은수자로서 뽀르치운꼴라 성당에서 일생을 보낼 계획으로 매일매일 일과의 대부분을 기도와 명상으로 보냈다.

 

1208년(26세) 2월 24일, 프랜시스는 뽀르치운꼴라 성당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을 때 설교자는 마태복음 10:5-15 말씀을 봉독하였다. "예수님께서 이 열 둘을 내어보내시며 명하여 가라사대 …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가면서 전파하여 말하되 천국이 가까왔다 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꾼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 이 말씀을 들은 프랜시스는 큰 기쁨과 감격을 느끼면서 부르짖었다. "이것이다. 나는 내가 찾고 있던 것을 드디어 찾았다. 이 말씀이야말로 내가 마음으로 갈망하던 것이다. 오늘부터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나는 오로지 마음을 다하여 이 말씀을 지키며 살 것이다."  예배를 마치고 성당에서 나온 프랜시스는 입었던 겉옷을 벗어버리고 새끼줄을 허리에 매고 농부들이 입는 두건이 달려있는 밤색 옷을 입고 맨발로 주님의 평화를 전파하는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프랜시스가 전파하는 평화의 복음을 듣고 점점 형제들의 수가 많아지게 되었다. 프랜시스는 형제들의 수가 11명이 되었을 때 자신들의 수도적 생활양식에 대한 교황의 인가를 받기 위하여 로마로 가게 되었다. 그때 교황은 프랜시스를 두 번 만나게 되었는데 두 번째 만나기 전날 밤에 이상한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교황은 교황청 안에 있는 웅장한 라떼란 성당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탑이 기울어지고 벽이 부서지는 것을 보았다. 그순간 한 남자가 라떼란 성당 앞에 있는 광장으로 오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쓰러져 가는 성당으로 가까이 가더니 기울어지고 있는 벽 앞에 멈추어 섰다. 쓰러지고 있는 성당의 벽에 그 남자가 깔리는 순간 신기하게도 그는 성전의 벽과 같이 큰 거인이 되더니 자기의 어깨를 벽에 대고 쓰러지고 있는 성당을 큰 힘으로 밀어서 다시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자 라떼란 성당을 보고 있던 그 남자가 얼굴을 돌렸는데 그때 교황은 그가 바로 아씨시에서 온 가난한 형제 프랜시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프랜시스를 다시 만난 교황은 추기경들을 향하여 "참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교회를 재건할 거룩한 사람이오!"라고 말하였다. 프랜시스와 그의 형제들은 탁발수도회를 설립할 수 있는 교황의 인가를 받음으로써 큰 기쁨과 감격을 가지고 로마를 떠났다.

 

교황으로부터 수도회의 인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아씨시의 사람들은 프랜시스의 설교를 듣고자 모여들었다. 청중들은 프랜시스의 설교를 듣고 자신들의 범죄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다. 또한 게으름, 사치, 탐욕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청빈생활을 하자고 호소하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고 프랜시스를 따라 생활하고자 열망했다. 성직자로부터 평신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프랜시스를 본받기 위해 힘을 썼기 때문에 아씨시의 사회 분위기는 점점 달라지게 되었다.

 

1211년(29세) 프랜시스는 사순절을 트라시메네 호수에 있는 무인도에서 금식하며 지냈다. 그는 처음에 40일 동안 온전하게 단식을 하려고 하였으나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40일 단식을 하신 예수님과 똑같이 하는 것보다 반 조각의 빵을 먹음으로써 교만에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1212년(30세) 사순절에 프랜시스는 아씨시의 산 조르조 성당에서 "세상을 가볍게 여길 것과 고신극기와 자발적인 가난 그리고 천국을 열망함과 예수님께서 수난당하신 것"을 설교하였다. 이때 아씨시에서 가장 유력한 명문가의 딸이었던 글라라는 큰 감동을 받고 프랜시스를 따라서 청빈생활을 하고자 결단을 하고 뽀르치운꼴라로 향했다. 그때부터 2주 후에 글라라의 여동생 아네스도 집을 나와 수도서원을 하였다. 얼마 후에 그들은 다미안 성당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는데 남성들만 프랜시스의 수도회에 들어가서 수도생활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동경하고 있던 많은 처녀들이 글라라와 함께 수도생활하기 위해 다미안 성당으로 모여들었다.

 

이 무렵에 프랜시스는 자신이 복음서의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늘 괴로워하였다. 온전한 사랑과 겸손, 온전한 자비와 인내, 온전한 충성과 절제 등등의 빛의 열매를 더 온전히 맺기를 원하였지만 마음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정욕과 죄의 세력 때문에 큰 고민에 빠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그해 겨울을 대부분 치우시 근방에 있는 고지대에 세운 움막에서 깊은 명상과 기도를 하면서 지냈다. 프랜시스는 때때로 절망에 빠져 과거에 있었던 자기의 노력이 아무 쓸데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또한 그는 독신생활을 포기하고 결혼을 했으면 하는 생각이 마음에 들어왔다. 이런 유혹이 집요하게 밤새도록 떠오르자 프랜시스는 벌떡 일어나 옷을 벗고 새끼줄을 가지고 자기 몸을 사정없이 때렸다. 이렇게 가혹한 고문을 하는데도 그 유혹이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집밖으로 나가서 일곱 개의 눈사람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눈사람 앞에서 자기를 향하여 조롱하며 말을 하였다.

 

"자, 봐라. 프랜시스야! 네가 가정을 꾸미고 싶어하는 네 가족들이 모두 여기 있단다. 저기에 있는 큰 것은 너의 마누라이고 그 곁에 있는 네 개의 눈사람이 너의 두 아들과 두 딸이다. 이쪽에 있는 큰 것 두 개는 네 집의 머슴과 하녀다. 그리고 너는 이 가정의 가장이다. 이 식구들은 모두 너만 의지하고 있다. 그들은 추워서 죽을 지경이다. 빨리 옷을 입혀야지! 식구가 너무 많다고? 그렇다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그만 두어야지. 할 수 없다고? 이 멍청한 친구야, 육신이 이 세상에서 가정을 꾸미고 살아간다면 이렇게 벅찬 거야. 이 땅에 사는 동안은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는 거야. 너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라." 이렇게 하는 동안에 유혹은 사라졌다. 프랜시스는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리면서 움막으로 되돌아왔다.

 

또한 프랜시스는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올려드려야 하는데도 자신이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큰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속에서 해방되어 은둔생활을 하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고민에 빠져있던 프랜시스는 글라라 자매와 실베스텔 형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응답을 받게 되었다. "당신은 밖으로 나가서 사람들에게 설교를 하세요.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신 목적은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부른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프랜시스는 성령의 불과 큰 은혜를 받게 되었고 그동안에 있었던 모든 고민이 해결되었다. 이와 같이 치열한 육체의 욕망과의 싸움에서 해방된 프랜시스는 사명에 대한 큰 확신을 얻고 큰 기쁨과 감격에 넘쳐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다.

 

프랜시스의 생활과 설교, 그 형제들의 경건한 생활모습을 통하여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이 수도회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들은 두 명씩 짝을 지어 이탈리아 전역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다. 프랜시스와 그의 형제들은 가는 곳마다 좋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수도자들의 수는 급속도로 증가되었다. 이렇게 모여든 형제들은 종종 프랜시스의 교훈을 듣고 본받는 생활을 할 수 있었으며 직접 격려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수도회의 형제들이 급속히 많아지면서 이러한 기회가 점점 없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각처에서 전도활동이나 수도생활을 하다가 뽀르치운꼴라에 모여서 프랜시스를 만날 수 있는 일정한 시기를 정하였다.

 

1216년(34세) 5월 29일 성령강림주일에 첫 번째 총집회를 갖게 되었다. 그 후부터 프랜시스와 그의 형제들은 매년 성령강림축일과 성 미카엘 대천사 축일에 '총회'를 열게 되었다. 또한 프랜시스는 수도회가 급속도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많은 회원들을 질서 있게 지도하기 위하여 여러 관구로 분할했다. 이 관구들은 설립된 지방의 이름을 따서 불렀고 각 관구의 지도자는 관구장이라고 하였다. 이듬해 봄 프랜시스는 뽀르치운꼴라에서 성신강림 총회를 개최하였다. 이때부터 프랜시스와 그의 형제들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에 선교지역과 관구를 정해서 형제회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219년(37세) 총회 때부터는 이교도들이 살고 있는 나라들까지 그 형제들을 파송하였다. 프랜시스도 자기를 대신하여 두 사람의 총장 대리자를 지명하여 세워놓고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지역으로 갔다. 그는 전쟁터에 수개월 동안 머물면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다. 다음해 여름 프랜시스는 수도회가 큰 어려움에 직면한 사실을 듣고 급히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본래 작은 형제단이 생긴 동기가 프랜시스의 영적 감화력 때문이었는데 수도회의 인원이 갑자기 불어나고 비대해지면서 프랜시스의 인격과 영적인 영향을 직접 받지 못한 회원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따라서 작은 형제들 중에는 프랜시스의 정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프랜시스가 없는 수개월 동안 아씨시에 남아있던 수도회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더욱이 프랜시스에 대한 소식이 한동안 두절되어 있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소문까지 떠돌게 되자 개방적인 생각을 품고 있던 형제들은 두 명의 총장대리와 함께 모든 것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프랜시스가 없는 동안 가장 유력한 형제들을 소집하여 총회를 열고 다른 수도단체들의 회칙을 참작해서 개정한 회칙을 공포한 것이다. 그 내용은 학문을 장려하고 규율을 완화시켜서 복잡하게 하고 그때까지의 회칙에 없었던 많은 내용들을 새로 규정하였다.

 

이탈리아로 돌아온 프랜시스는 자신이 없는 동안 일어났던 반역과 배신으로 말미암아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프랜시스는 그가 없는 사이에 형제회 안에서 일어났던 분열과 잘못된 개혁들을 처리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랜시스는 장기간 동안 수많은 단식과 다양한 극기생활로 말미암아 건강이 악화되었기 때문에 총장직을 사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는 신앙생할을 시작하면서부터 좋은 음식은 절제하였고 짧은 시간 앉아서 잠자는 생활을 계속하였기 때문에 그의 육신은 아주 약해져 있었다. 더욱이 그가 이집트에서 전도활동을 하는 동안 눈병이 심해져서 거의 볼 수 없게 되었다.

 

1220년(40세) 9월 29일 총회 때 프랜시스는 까따니의 삐에뜨로를 총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삐에뜨로 총장은 그 다음해 1221년 3월 10일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어 세 번째 총장이 된 사람은 엘리야 봄바르네였다. 그 엘리야 총장은 프랜시스의 뜻과는 달리 학문을 장려하고 수도회의 사업을 확장하고 많은 권력을 추구했기 때문에 프랜시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 주었다.

 

프랜시스는 비록 총장의 직분은 사퇴했지만 점차 수도회가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미비된 회칙의 부족한 점을 많이 느끼고 회칙을 개정하기 시작했다. 1223년 회칙이 완성될 때까지 두 번이나 다시 쓰게 되었다. 왜냐하면 개혁을 원하는 형제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쉽게 양보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23년(43세) 5월 총회에 참석한 프랜시스는 자신이 준비한 회칙을 제출하였다. 그해 11월 9일 프랜시스는 자신이 만든 회칙에 개혁을 원하는 형제들의 의견을 반영해서 수정하고 보완한 새로운 회칙을 만들어 교황 호노리노 3세로부터 인가를 받게 되었다.

 

프랜시스는 1224년(44세) 6월에 열린 총회에 참석하였는데 이 집회는 프랜시스가 참석한 마지막 총회였다. 그때부터 몇 주 후에 프랜시스는 건강이 조금 더 좋아진 것 같아 충실한 형제들 몇 명과 함께 알베르나산으로 들어갔다. 그 산에 도착한 프랜시스는 주님과 더욱 더 깊은 영적 교통을 하기 위해서 함께 갔던 그 형제들을 남겨놓고 혼자 더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매일 큰 바위 위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들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였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여, 제가 죽기 전에 두 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제가 바라는 것은 할 수만 있다면, 오! 사랑하는 주님, 당신께서 그 큰 수난 가운데서 견디신 고통을 내 영혼과 육신이 감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 하나는 성자 하나님이신 당신의 그 타오르는 사랑, 죄인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감내하신 그 큰 사랑을 할 수만 있다면 제 마음속에 부어 주시옵소서!"

 

이처럼 간절한 기도가 불꽃처럼 타오르던 어느 날 하늘로부터 찬란하게 빛나는 여섯 날개를 가진 한 스랍천사가 프랜시스 곁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프랜시스는 그 천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오상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고 또 여섯 날개 중에 둘은 머리 위에 있었고 또 두 날개는 나를 수 있도록 펼쳐져 있었고 다른 두 날개는 온몸을 감싸고 있음을 보았다. 프랜시스는 이 모습을 보고 두려움과 함께 기쁨과 슬픔과 놀라움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신비한 환시가 사라졌을 때 프랜시스는 하나님께 대한 강렬한 사랑과 열정과 불을 느꼈다. 또한 프랜시스의 육체에는 예수님의 거룩한 상처와 똑같은 신비로운 오상이 남겨졌다. 그의 양손과 양발에는 손가락을 넣을 수 있을 만한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또한 오른쪽 옆구리에는 창에 찔린 자국이 나타나 살이 헤어져 붉은 피가 맺혀있었다. 그의 옆구리에서는 가끔 피가 흘러나와 수도복을 적시곤 했다. 프랜시스는 이 모든 신비적 체험을 감추려고 하였으나 성흔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말년에 프랜시스는 알베르나산에서 받은 오상과 위장병 등으로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다. 또한 그의 눈은 거의 소경처럼 되었다. 형제들은 프랜시스가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염려하였으나 그는 명랑한 표정으로 도리어 걱정하는 형제들의 마음을 안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날이 갈수록 프랜시스의 병세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1226년(48세) 10월 프랜시스는 자신의 임종이 가까운 것을 알게 되자 형제들에게 마지막으로 권고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청빈한 생활을 충실히 하라고 특히 청빈의 상징인 작고 초라한 뽀르치운꼴라에 충실하라고 당부하였다.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며 천국의 문입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임종하던 날 프랜시스는 형제들에게 자신의 몸에 먼지와 재를 뿌려달라고 부탁했다. "곧 나는 먼지와 재가 될 것입니다." 해질 무렵에 그는 "나는 여호와께 부르짖습니다"로 시작하는 다윗의 시 142편을 노래하면서 조용히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갔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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