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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요한 웨슬리 성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8. 12:06

요한 웨슬리 성자

 

 

18세기 부패하고 타락하였던 영국을 전도와 경건운동으로 구출하였던 감리교단의 창설자 요한 웨슬리는 1703년 6월 13일 영국 링컨주 엡워스 마을에서 사무엘 웨슬리 목사의 자녀들 중에 15번째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 수산나는 오랫동안 청교도 생활을 한 분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매우 엄격한 규율 아래서 양육하였다. 그녀는 가족들을 작은 일이라도 기계처럼 정확하게 시간에 맞추어 생활하도록 하였으므로 아이들도 태어날 때부터 규칙적인 생활을 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 주기도문이나 짧은 기도문, 간단한 교리문답 혹은 성경구절들을 외웠다. 수산나는 웨슬리의 유년시절부터 성경말씀을 암기하도록 하였고 올바르게 인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언제나 가르쳐 주었다. 또한 자녀들에게 항상 존댓말을 쓰도록 가르쳐 주었고 거짓말이나 야비한 말은 일절 엄금하였으며 난폭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하였다.

 

1720년(17세) 웨슬리는 차트하우스를 졸업하고 옥스포드 크라이스트 처취 대학에 들어갔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웨슬리는 다른 학생들과 비교해 볼 때 논리적 재능과 문학적 소질이 월등히 뛰어났으므로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

 

1725년(22세) 졸업을 앞둔 웨슬리는 목사가 될 것인가 아니면 다른 길을 택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저녁에 요한 웨슬리는 자신이 다니던 대학교의 수위와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 수위가 남루한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자네, 집에 가서 다른 옷을 입고 오게나 그려"하였다. 그랬더니 그 사람은 "예, 나는 옷이라고는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라도 하나님 앞에 감사합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럼 자네 오늘 무엇을 먹었나?" "예, 죄송합니다마는 나는 오늘 종일 물밖에 먹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라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제 밤이 깊었으니 어서 숙소로 돌아가게. 지금 돌아가지 않아서 쫓겨나게 된다면 무엇으로 감사할 터인가?" "예, 찬 돌 위에서라도 잘 자리가 있으니 감사하지요." "자네 매우 가상하이! 입을 것도 먹을 것도 잠잘 자리도 없는데 감사하다니 그러면 그밖에 자네가 감사하는 다른 조건이 무엇인가?" "예, 나는 하나님께서 내게 생명을 주시고 또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과 섬길 생각을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합니다." 웨슬리는 수위의 말을 듣고 깊은 감화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종교에는 자신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경지가 있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또한 이때 웨슬리는 제레미 테일러의 『거룩한 삶과 죽음』을 읽고 큰 감동을 받게 되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이 책을 읽는 중에 한없는 감동을 받고 나의 생명 전체를 하나님께 바치기로 결심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게 되었다. 이러한 책들은 웨슬리의 양심을 각성시켰고 그의 심령에 종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그 후부터 웨슬리는 매주 성찬식에 참석하였으며 말이나 행위로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조심하였다. 또한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기도하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1727년(24세) 웨슬리는 목회를 하던 부친의 건강이 갑자기 악화되어 그곳에서 2년 3개월 정도 아버지를 도와드리면서 생활하는 가운데 목사안수를 받게 되었다.

 

1729년(26세) 다시 옥스포드로 돌아온 웨슬리는 신성클럽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 모임에서 첫 번째로 하는 일은 성경공부였다. 그들은 함께 열심히 기도하였고 원어성경과 고전을 깊이 연구하였다. 매주 성찬식을 하였고 주 2회 금식을 하면서 자신들의 생활을 철저히 반성하고 선행을 열심히 실천하는 생활을 하였다. 웨슬리와 신성클럽의 회원들은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매주 한 번이나 두 번 정도 방문하였다.

 

이즈음 웨슬리는 매우 불쌍한 소녀를 만난 적이 있었는데 돈이 없어서 적선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자신의 서재에 훌륭한 그림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가련한 소녀의 기한(飢寒)을 면케 해줄만한 돈으로 벽을 장식한 것이라고 자책한 그는 이때부터 매년 28파운드만을 자신의 생활비로 쓰고 나머지 돈은 전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쓰기로 결심하고 실천하였다.

 

1735년(32세) 웨슬리는 미국의 조지아와 캐롤라이나 지방에 영국 식민지를 건설하고 있는 오글레소프 장군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장군은 웨슬리에게 조지아주의 선교사로 갈 것을 제의하였고 웨슬리는 그전부터 북미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즉시 수락하였다. 

 

다음해 2월에 4개월 동안의 긴 항해 끝에 미국의 조지아주 동부지역에 있는 사바나시에 도착한 웨슬리는 그곳에서 재판소로 사용하던 건물을 빌려 임시로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그는 열심히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애썼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국교회의 권위와 의식을 중요시하는 고(高)교회파의 한 선교목회자로서 그 제도를 따라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에게 교회주의와 금욕주의적인 양식을 공급하였기 때문에 열렬한 선교활동과 충성스러운 노력을 했음에도 좋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실패하게 되었다. 결국 웨슬리는 극심한 좌절감을 품고 1737년(34세) 12월 3일 귀국 길에 올랐다.

 

웨슬리가 미국의 조지아주에서 선교한 기간은 약 2년 반 정도인데 이 기간동안 선교목회의 실패, 불행한 연애사건, 중상모함과 배신을 당하면서 자신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 의로운 생활을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완전히 부서지게 되었다. 처절한 실패감을 가지고 영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을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에는 자신이 매우 부패하고 타락한 인간이라는 것과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의로움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영국으로 돌아온 웨슬리는 모라비아교의 피터 볼러 목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피터 볼러와 신앙문제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의를 하면서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듣고 큰 기쁨과 평안을 얻게 되었다.

 

1738년(35세) 5월 24일 저녁, 런던시의 올더스케잇 거리에 있는 어느 집회장소에 웨슬리가 참석하였는데 거기에는 성경연구와 기도를 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모여 있었다. 집회가 진행되는 중에 설교자는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어주는 것이었다. 그 말씀을 듣는 중에 요한 웨슬리는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지며 복음을 크게 깨닫고 풍성한 은혜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제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구나. 그동안 나는 내 자신의 의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보려고 했는데 그것은 참된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구나!" 이때 웨슬리는 사람의 행함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완전한 의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과 공로를 통해서 주시는 은총으로만 의롭다함을 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복음 즉 의인이 된다는 복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 후에 웨슬리는 독일에 가서 마렌브론에 있는 모라비아 교도들의 영적 지도자인 진젠돌프(Ludwing von Zinzendorf, 1700-1760) 백작을 두 주간 동안 만나게 되었고 또한 헤른후트에 살고 있던 모라비아 교도들의 경건한 생활모습을 보았는데 그 기간동안에 이미 새롭게 받은 종교적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진리에 대한 폭넓은 깨달음과 더욱 큰 확신을 얻게 되었다.

 

1739년(36세) 1월 1일에는 런던시의 페터레인에 있는 집회장소에서 웨슬리를 중심으로 하는 60여명의 신앙동지들이 모여서 철야기도회를 갖게 되었다. 웨슬리는 그 집회 중에 있었던 상황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오전 3시경, 우리들이 모두 열심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들에게 임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은 넘치는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여 큰 소리를 쳤으며 어떤 사람은 땅에 엎드려 황홀경에 빠져있었다."

 

그 철야기도회가 있었던 때로부터 사흘 후에 그 집회에 참석했던 일곱 명의 교역자들은 다시 모여서 앞으로 진행해야할 전도활동에 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그들의 가슴속에는 전도에 대한 열정이 불같이 타오르게 되었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은 열렬하게 전도활동을 하였는데 그들은 런던을 중심으로 옥스포드와 부리스톨, 킹스우드 등지에서 눈부신 성과를 거두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전도자들이 그당시 교회의 가르침과 다른 사상을 선포하고 교회의 사치와 목회자들의 타락을 지적하였기 때문에 모든 교회들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이때 북미대륙의 선교사로 가있던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가 영국으로 돌아왔다. 설교자로서 명성이 높았던 휫필드는 자신도 영국교회에서 외면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부리스톨시 부근에 있는 킹스우드에서 광부들을 모아놓고 노천설교를 시작했는데 그의 설교는 불덩어리를 내뿜는 듯했다. 처음에는 200명 정도가 모였는데 다섯 번째 설교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러자 휫필드는 웨슬리에게 즉시 부리스톨로 와달라고 서신을 보냈다. "요한 형제여, 어서 내게로 오십시오. 이제부터 우리의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홍수를 사람의 손으로 막아낼 수 없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어려우니 어서 와서 설교를 해주기 바랍니다." 휫필드의 초청으로 부리스톨시로 간 웨슬리는 도시밖에 있는 넓은 들에서 4,000명이 모인 가운데 처음으로 노천설교를 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거리에서라도 설교해달라고 하는 요청이 사방에서 들려왔다.

 

웨슬리의 설교를 듣는 중에 많은 사람들은 찔림을 받아 자기들의 죄를 깨닫고 통회하며 눈물을 흘리고 고민하다가 경련을 일으키며 울부짖기도 하고 혹은 실신하기도 하였다. 웨슬리의 전도를 방해하던 사람들까지도 설교를 듣고 감동과 충격을 받아 땅에 쓰러지는 일들이 생겼다.

 

웨슬리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날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어떤 때는 5천 명, 어떤 때는 1만 명, 어떤 때는 2만 명이 구름 떼처럼 몰려왔다.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은 지난날의 더러운 죄악을 씻고 마음과 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웨슬리는 1739년 11월 17일 한 친구에게 킹스우드에서 나타난 전도의 성과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써 보낸 일이 있다.

 

"정황은 이미 변했습니다. 킹스우드에서는 현재 1년 전과 같이 욕설이나 불경한 언사가 들리지 않습니다. 싸움을 하거나 소란을 피우는 일이나 혈기를 부리는 일이나 시기하는 일 등이 없어졌습니다. 오직 평화와 사랑만이 지배합니다."

 

그런데 1740년(37세) 다시 북미대륙으로 건너간 휫필드는 미국의 전역을 다니면서 큰 부흥운동을 일으켰다. 그는 뉴잉글랜드에서 전도여행을 하던 중에 칼빈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사귀면서 예정론을 받아들여 "모든 사람들이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웨슬리의 이론을 반대하게 되었다. 다시 영국으로 돌아온 휫필드는 각처를 다니면서 예정론을 전하였기 때문에 이로 말미암아 신도회가 와해되거나 이탈자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웨슬리는 '자유은총' 즉 '거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라는 유명한 설교를 하였으며 후에 그 설교문을 출판하였다. 그러자 휫필드는 '웨슬리에게 붙이는 글'이란 소책자를 써서 웨슬리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논쟁으로 말미암아 신성클럽 즉 메도디스트 회원들은 자연히 두 파로 갈라지게 되었다. 두 사람은 각각 자신이 믿는 바를 강력히 주장하여 대립이 심각하였는데 얼마 후에는 다시 옛날의 우정을 회복하였다. 휫필드는 1770년 별세하기까지 영국과 북미대륙을 돌며 전도활동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의 큰 업적에 대해 맥티어 감독은 "휫필드는 마르고 거친 땅을 한번 신선케 하고 비옥케 한 다음에는 그 땅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반면에 웨슬리의 전도활동은 시냇물이 일정한 길을 따라 흐르는 중에 점점 커지고 깊어져 끊일 줄 모르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웨슬리와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을 전하는 중에 환영도 많이 받았지만 핍박도 많이 받았다. 그들의 전도사역의 초기에는 영국교회의 감독과 목사들의 비난과 공격이 많았다. 웨슬리의 전도활동이 불길처럼 사방에 퍼져나가자 국교회의 목사들은 교회의 문을 닫아버리고 각처에서 불량배들을 시켜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을 향하여 돌멩이를 던지고 주먹과 몽둥이까지 휘두르도록 만들었다.

 

또한 웨슬리의 설교를 듣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이 큰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돈을 벌고 있던 사람들이 웨슬리를 극심하게 미워하고 박해하였으며 그의 전도활동을 방해하였다. 다시 말해서 수많은 술주정뱅이, 도박꾼, 창녀들과 음행을 즐기는 사람들, 오락이나 관광이나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즉 온갖 더러운 범죄의 수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술집이나 오락실, 도박장, 유곽 등의 영업을 하는 사람들이 피해의식을 가지고 깡패들을 동원하여 요한 웨슬리의 전도활동을 도처에서 훼방하였다. 특히 영국 중서부에 자리잡고 있는 스태포드주 북쪽 '암흑촌'에 있는 웬스베리와 왈살과 달래스톤의 주민들은 난폭할 뿐만 아니라 무법자들 같았다.

 

웬스베리에서는 1742년(39세) 11월부터 전도하기 시작하였는데 마귀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서 박해가 극심하였다. 어느 날 웨슬리는 설교를 하고 돌아오다가 불량배들에게 둘러싸여 몽둥이로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끌려갔다. 웨슬리가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 허술한 헛간이었다. 그 불량배들은 "정신이 드냐. 이제 설교를 그만두겠다고 다짐만 해. 그러면 살려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여기서 죽는거야"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즉시 눈을 감고 기도했다. "하나님, 이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지금 이 사람들은 자기의 잘못을 모르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이때 일어났다. 그 기도를 듣고 나서 불량배들은 모두 머리를 숙이고서 울어버렸던 것이다. 이 불량배들 가운데 큰 변화를 받고서 평생동안 웨슬리를 따라다닌 사람도 있었다.

 

다음 해 10월에 웨슬리가 다시 웬스베리에 갔을 때 폭도들은 웨슬리의 숙소를 포위하고 "그 목사 놈을 잡아내라! 그 놈을 우리가 죽여버리겠다"고 고함을 치면서 덤벼들었다. 웨슬리는 침착하게 사람을 시켜 폭도들의 괴수를 불러오게 하였다. 들어온 괴수의 얼굴은 살기가 흘러 넘쳤다. 그러나 그가 웨슬리로 더불어 몇 마디 주고 받는 동안 이리와 같던 그는 양처럼 온순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다시 그 괴수로 하여금 폭도 중에 자기를 제일 반대하는 사람들을 데려오라고 했다. 그는 나가서 두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들의 분노는 머리끝까지 올라있었다. 그러나 웨슬리가 그들로 더불어 잠시 이야기를 하는 중에 그들의 분노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웨슬리 앞에 머리를 숙였다. 세 괴수를 설복한 웨슬리는 밖으로 나가 의자 위에 올라가서 폭도들에게 "당신들이 나를 어떻게 하렵니까?"하고 물었다. 폭도들은 "재판소에 가자"고 하였다. 웨슬리는 조금도 두려움 없이 "그거 좋은 말씀이요. 내가 기쁜 마음을 가지고 가겠소"라고 대답하니, 그의 대답하는 태도와 위엄은 난폭한 그들의 마음을 정복하였다.

 

이렇게 폭도들의 흥분이 가라앉게 되자 일부는 돌아갔는데 남아있는 이삼백 명의 폭도들은 웨슬리를 끌고 폭우를 무릅쓰고 어두운 밤에 한시간 동안이나 걸어서 그 지방장관에게 갔으나 면회를 거절당하였다. 그들은 울분을 참지 못하여 웨슬리를 다시 왈살로 데리고 가서 그곳 재판관에게 호소하였다. 그러나 그 역시 이런 일에 간섭하려하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돌아오는 중에 왈살의 폭도들이 웨슬리를 데리고 갔던 사람들을 습격하여 웨슬리를 빼앗아 마구 구타하여 많은 상처를 내었다.

 

이때 웨슬리는 목소리를 높여서 미친 듯한 폭도들에게 "여러분 내말 좀 들어보시오!"하고 외쳤다. "아니다, 아니다. 그 놈의 골통을 부셔버려라. 그 놈을 단번에 처치해라." 웨슬리가 소리를 높여 말을 하였으나 그 폭도들은 "그놈을 끌어내려라"고 계속 소리질렀다. 웨슬리는 다른 방도가 없음을 깨닫고 큰 소리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웨슬리의 간절한 기도는 폭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폭도들의 두목은 웨슬리의 기도를 듣고 두려운 마음이 생겨 웨슬리를 향하여 "여보시오. 나는 당신을 위하여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나만 따라 오시오. 어느 누구도 당신의 머리털 하나라도 어떻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웨슬리는 그 두목과 몇몇 사람들의 보호아래 무사히 숙소까지 도착하였다.

 

웨슬리의 전도활동을 방해하던 폭도들은 웨슬리와 그의 동역자들뿐만 아니라 메도디스트 회원들의 집까지도 습격하여 창문과 테이블, 의자, 장롱들을 모조리 때려부수고 값진 물건들을 빼앗아갔다. 아무도 그 폭도들을 제지할 수 없었다. 습격을 당한 신도들은 그곳 치안책임자에게 보호를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1744년(41세) 2월 18일 '화이트 홀 앤드 런던 이브닝 포스트' 지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메도디스트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일으킨 폭동'이라고 기재되었다. 폭도들은 메도디스트 회원들이 폭도들이며 방화범들이라고 엉뚱하게 죄과를 뒤집어 씌웠다.

 

또한 폭도들은 웨슬리가 설교할 때 돌과 쓰레기 등 오물을 던지고 욕설을 퍼부었다. 웨슬리는 폭도들에 의해 심하게 구타를 당하여 선혈이 낭자한 때도 많이 있었으나 담대하고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웨슬리는 폭도들을 대할 때 피하거나 위축됨 없이 용감하게 그들과 정면으로 대하였다. 웨슬리의 이 용감한 태도가 도리어 그를 많은 어려움에서 구출하였다. 폭도들은 웨슬리의 위엄 있는 언어와 빛나는 눈빛과 영적 감화력에 여지없이 압도되고 말았다.

 

폭도들의 괴수로서 웨슬리에게 덤벼들었던 조지 클리프톤이란 사람은 웨슬리의 용감한 정신과 태도에 깊은 감동을 받아 회개하고 자기의 동료들을 떠나 메도디스트회에 가입하였다. 찰스 웨슬리가 그에게 "당신은 나의 형님을 어떻게 생각하시오?"하고 물으니 그는 "예, 나는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 그 중에 누구 하나도 그를 살해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나는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웨슬리와 그의 교도들은 직접 폭행을 당하는 것 외에도 여론과 신문과 잡지 등으로 가혹한 공격을 받았다. 이 책들은 웨슬리를 매국노, 이단자, 반역자, 배교자, 민중을 기만하는 자, 제수잇당의 가면을 쓴 자 등으로 불렀다. 웨슬리와 그의 동료들은 이런 수모와 박해 그리고 수많은 비난 속에서도 끝까지 참고 나갔다. 그러다가 1750년대 후반부터는 박해가 줄어들고 자유롭게 전도할 수 있는 문이 열렸다. 이것은 요한 웨슬리의 인격과 능숙한 통솔력 그리고 그가 박해를 당하는 중에 보여준 모범적인 행실로 말미암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웨슬리는 교회정치와 행정능력이 풍부하였다. 웨슬리는 그의 전도로 얻은 신도들의 지도와 육성과 관리를 위하여 여러 가지 제도를 만들어 실시하였는데 연합신도회, 속회 그리고 신도상호간의 친교를 위한 애찬회와 철야기도회 등등이 그것이다. 또한 그는 평신도 전도자를 등용하여 설교와 심방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하도록 하여 조직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1744년부터는 해마다 연회를 열어 일반 신도들의 지도와 훈육문제, 영국교회와 관계문제, 신도들의 조직문제, 평신도 사역자 문제 등등 메도디스트회를 위한 전반적인 모든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1784년에 열린 연회에서 웨슬리는 '포고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메도디스트 전도인들 중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백인이 매년 1차씩 모임을 갖고 감리회 전체를 치리한다는 것이다. 이 감리교단의 회장은 웨슬리가 임종할 때까지 역임하였다.

 

또한 웨슬리는 사회사업의 선구자였다. 그는 킹스우드에 광부들의 자녀를 위해 학교를 세우고 뉴캐슬에는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파운드리 교회나 웨스트 교회에서는 자선사업의 본부를 만들어 여러 가지 사업을 하였다. 빈민학교를 개설하여 가난한 집 아이들을 가르치고 가정구조회를 조직하여 옷이나 음식을 거두어 사람들을 구제하였다. 그밖에도 웨슬리는 파운드리와 웨스트와 브리스톤에 병원을 설립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는 빈민은행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매우 싼 이자로 대출을 해 주었다. 웨슬리는 평생을 노동자, 빈민, 죄수, 과부, 노예 등 불우한 사람들과 동고동락을 했다.

 

1751년 2월 18일 요한 웨슬리는 영국의 북쪽지방으로 전도여행을 떠나려고 하던 중에 빙판에서 넘어져 발목을 크게 다쳤다. 그는 여행을 일단 중단하고 노아 바질 미망인의 집에서 일주일간을 유숙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 여인과 비극적인 결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녀는 성격이 원래 포악하고 남달리 질투심이 강한 여성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웨슬리를 감시하고 때로는 남편의 포켓을 뒤져 편지들을 훔쳐 읽고는 조그만 꼬투리라도 있으면 폭언을 하였다. 그를 늘 의심하기 때문에 그가 마차 여행을 다닐 때에는 그가 떠난 다음 그의 뒤를 쫓아가 마차 안에 누가 타고 있나 조사를 해보기도 하였다. 한번은 애란에서 전도여행 중에 어느 숙소에서 들었을 때의 일인데 웨슬리의 동역자였던 존 햄슨이 그 숙소를 방문하였다. 그가 문을 열어보니 웨슬리는 방바닥에 넘어져있고 웨슬리의 부인은 시근덕거리면서 손에 머리카락 한줌을 쥐고 있더라는 것이다. 웨슬리의 부인은 남편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다녔던 것이다. 이러한 웨슬리의 비참한 결혼생활은 1782년 10월 14일 그녀가 웨슬리보다 10년 먼저 세상을 떠남으로 막이 내렸다. 웨슬리는 그녀의 자제하지 못하는 질투심과 악독하고 포악한 성품 때문에 30년을 암담하게 지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웨슬리는 "하나님은 나의 오랜 세월 동안의 고난을 선으로 바꿔주셨습니다. 만일 그녀가 좀더 좋은 아내였다면 나는 하나님의 크신 사업에 충성을 다하지 못하고 그녀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 더 힘썼을지도 모릅니다"라고 하였다.

 

웨슬리의 생전에 메도디스트 운동은 스코들랜드 북쪽에 멀리 있는 쉐틀랜드섬을 제외하고는 영국전역 어느 섬에나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북미대륙에도 1760년부터 이민간 메도디스트 회원들에 의하여 복음진리가 전파되어 교회들이 세워지게 되었고 1769년부터는 선교사들을 파송하기에 이르렀다. 1770년에는 미주 메도디스트교 기초를 닦은 프랜시스 애즈베리를 선교사로 파견하여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말년에 웨슬리는 자신의 노쇠함을 느끼면서도 여전히 잉글랜드와 웨일즈,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등 영국 각처를 순회하면서 전도를 하고 신도회를 시찰 지도하였다. 1790년 웨슬리는 최후의 연회를 브리스톨에서 열었다. 당시 감리회의 신도수는 영국에 71,463명, 북미에 43,260명, 그밖의 선교지에 5,350명이었다. 

 

웨슬리는 신체가 날로 쇠약해가므로 모든 일을 중지하고 시트로드교회에 있는 그의 사택으로 돌아와 병석에 누웠다. 1791년 3월 2일 오전 6시, 평생 4만여 회의 설교를 하고 400여권의 책을 저술한 위대한 하나님의 종, 요한 웨슬리는 88세의 생애를 마치고 영원한 안식의 나라로 들어갔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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