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5:30-47)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5. 21. 23:05

오클라호마 주에 가면 아다라는 조용한 동네가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부터 십 수 년 전 조용한 마을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데보라 카터라는 스무 살난 젊은 여성이 살해된 것이었습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수사하는 중 강력한 용의자로 로널드 윌리암슨 이라는 청년을 지목하고 이에 대한 물증을 찾으려고 온 힘을 쏟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경찰이 확보한 증거는 카터가 살해 되는 던 그녀와 얘기하던 것을 보았다는 사람, 그녀를 죽이는 꿈을 꾼 적이 있다는 윌리암슨의 자백, 그리고 윌리암슨이 범죄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엿들었다고 하는 교도소 사람의 말이 고작이었습니다. 이 정도로는 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기란 불충분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수사관들이 결정적인 단서를 잡았습니다. 그것은 사건 현장에서 머리카락 네 개를 발견했는데 현미경 조사 결과 그것이 윌리암슨의 것과 일치한다고 결론 지은 것이었습니다. 수사관들은 과학적 증거를 확보하고 윌리암슨을 체포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끔찍한 범죄는 마침내 해결되고 아다의 주민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윌리암슨은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형 집행을 위해 보낸 9년을 포함하여 12년간 옥중에서 고생한 후 있는 동안 나온 DNA 분석결과는 그는 살인범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결국 윌리암슨은 1999년 4월 15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윌리암슨의 유죄를 입증해 준 머리카락은 어떻게 된 것인가? 범행 현장에서 그의 머리카락이 발견되었다면 이는 그가 살해에 연루되었다는 강력한 증거가 아닌가? 그러나 사실 당시 현장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은 윌리암슨의 머리카락과 정확히 일치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범죄학자가 서로 일관성이 있다고 결론을 내렸을 뿐입니다. 따라서 현장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은 윌리암슨의 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윌리암슨의 것으로 간주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 것입니다. 만일 윌리암슨에게 유죄 판결을 내리려 했다면 더 정확한 증거를 제시해야만 했습니다. 정확하지 않은 증거로 인해 아무 죄 없는 사람에게 고통을 가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믿을만한 근거로 과학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 동안 현미경을 가지고 머리카락 대조를 통해 살인범으로 지명되었다가 풀려난 사람이 18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과학적인 증거 가운데도 많은 허점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과학적인근저를 가지고 판단하는 인간의 판단에 오류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많은 경우 그 증거를 어떻게 판단하느냐? 인간의 감정과 믿음이 결부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경우는 어떠할까요? 그 동안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해 왔습니다. 이는 보통 인간으로는 할 수 없는 너무나 엄청난 주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가리켜 자신의 친 아버지라 했습니다. 자신은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한 일을 한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살리심과 같이 자신도 자기의 원하시는 자들을 살린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하나님께서 공경을 받으시는 것과 똑 같은 공경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일과 동일한 일을 행하시는 사람, 아버지와 같이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는 사람, 아버지와 동일한 공경을 받아야 할 사람, 이 말을 종합하면 이 분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나는 하나님이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말할 때 우리는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받아 들여 예수님을 구세주로 받아 들이든지 아니면 거절하든지 둘 중의 하나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예수님을 4대 성인중의 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이런 어중간한 입장을 취한다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는 하나님이다 라고 주장한 사람이 만일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그는 미친 사람이거나 정신 병자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취할 수 있는 태도는 두 가지 중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주장한대로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든지, 아니면 정신병자나 미친 사람이든지 둘 중의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혹 여러분들 가운데 이런 분이 있는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싶소. 그러나 믿을만한 증거가 있소. 증거가 대시오. 그럼 내가 믿겠소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지 모릅니다. 저는 그 분들께 말씀 드립니다. 분명히 믿을만한 증거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기록되었습니다. 요한복음 20:31절을 보시면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먼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납득할 수 없는 증거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자기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31절을 보시면 내가 만일 나를 위하여 증거하면 내 증거는 참되지 아니하되 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증거는 법정에서 증거하는 것을 말합니다. 법정에서 어떤 사실에 대해 여부를 물을 때 그 근거가 무엇이요 라고 묻는다면 내 양심이 이를 증거하오 라고 말한다면 이는 법정에서 받아들일 만한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생각할 때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고 주장할 지라도, 남들이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뭔가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임에 틀림 없습니다. 이와 같은 논리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십니다. 32절을 보시면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이가 따로 있으니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는 그 증거가 참인줄 아노라 고 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세례 요한의 증거입니다. 32절을 보시면 너희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매 요한이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였느니라 고 말합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말은 너희가 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너희가 직접 세례 요한에게 사람을 보내지 않았느냐는 말입니다. 요한복음 1:19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서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을 보내어 세례 요한을 조사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세례 요한은 자신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에 불과하다. 자신은 왕의 행차에 앞서 행하는 전령에 불과하다. 내 뒤에 오시는 위대한 분이 있는데 나는 그 분의 신들메를 풀기에도 감당치 못할 사람이다. 그렇게 말할 때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나아 오심을 보고 바로 저 분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바로 내가 전에 말했던 분이 바로 이 분이다 하면서 증거할 때에 그들은 직접 옆에서 목격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바로 이것을 들었지 않았느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시 세례 요한은 인기 절정의 선지자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례 요한을 35절에 있는대로 켜서 비치는 등불로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그의 증거는 신뢰할만한 증거입니다. 만일 그 세례 요한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증거했다면 증거하는 사람의 인격으로 보아서 그의 말도 신뢰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멧시지의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 멧시지를 누가 전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멧시지가 옳다 해도 멧시지를 전하는 사람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면 그 사람의 멧시지도 믿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은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향기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설교자의 고민입니다. 설교자가 아무리 유창해도 설교자의 인격에 문제가 있다면 그 설교는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나의 인격에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면 사람들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믿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말씀하신 것은 그가 믿을만한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증거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이적을 통한 증거입니다. 36절을 보시면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나의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 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를 통해 그 역사가 나를 증거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성경 안에는 예수님을 통해 나타난 수 많은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적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먼저 숫적인 우세입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을 책에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에 그 책들을 쌓아 둘 자리가 부족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만큼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이적의 특징은 질적인 우세입니다. 때때로 이방 종교에서도 이적이 나타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적은 그 질에 있어서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에는 7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 왕의 신하의 아이를 고치신 이적,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이적, 떡 다섯 덩이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리고 오 천명을 먹이신 이적, 물위를 걸어가신 사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신 이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은 지 나흘이 된 썩어 부패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이적입니다.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이적은 예수님께서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신 이적입니다. 여러분 이런 이적들은 다른 종교에서 도무지 흉내낼 수 없는 이적들입니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이적은 모든 사람 앞에서 공공연히 이뤄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이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사람들의 눈을 통해 변화를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38년 동안 전혀 일어나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던 병자가 일어나 걸어간 것처럼, 죽어 썩어 냄새 나는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난 것처럼 예수님의 이적은 분명히 변화를 목격할 수 있는 이적이었습니다. 이것들은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 주는 분명한 증거였습니다. 요한복음 10:37,3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이러한 이적을 통해서 예수님은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한 것입니다.

 

셋째는 아버지의 하나님의 증거입니다(37-38). 기적을 통한 증거 이외에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직접적인 증거를 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 세 번에 걸쳐 음성을 들려 주셨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시면서 하늘에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 기뻐하는 자라. 

 

둘째는 변화산 상에서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세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상에 올라가셨을 때에 갑자기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습니다. 이 때에 구약의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에 하늘에게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 그리고 마지막 한 번은 요 12:28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영광스럽게 입성하셨을 때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좇으면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할 때에 온통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왕이 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의 영광을 버리시고 고난의 길을 택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의 길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기꺼이 그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 이 때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37절을 보시면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나를 증거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넷째 증거는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39절을 보시면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여기 상고한다는 말은 신중하고 주의 깊게 고찰한다는 말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깊이 파헤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알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이 이렇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임을 증거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를 믿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요?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두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40절을 보시면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만일 오늘날 세례 요한과 선지자가 있다면, 만일 오늘도 예수님이 일으키셨던 기적들을 다시 볼 수 있다면, 만일 오늘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온다면, 만일 내가 성경을 더 많이 안다면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거지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자기형제들을 회개시켜 달라는 부자의 요청에 대해 아브라함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 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기적을 보았다고 다 믿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믿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내게 오기를 원치 않는도다.

 

여기 온다 는 말은 헬라어 에르코마이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좇는다 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주님 앞에 나온다는 것은 곧 주님을 좇아간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사람들은 주님 앞에 나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좇아가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좇는다고 하면서도 멀찌감치 좇아갑니다. 이득이 될 때는 좇는 척 하다가 손해가 될 때는 멀리 도망갑니다.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그는 가장 열심히 예수님을 좇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내가 죽을지언정 주를 좇겠나이다. 그러나 막상 예수님께서 체포되셨을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저주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가장 신망 있는 선지자 세례 요한의 멧시지를 직접 들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일으키셨던 기적들을 직접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로 믿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실 그들의 마음에는 예수님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신학자 죤 스타트가 좋은 비유를 들려 주었습니다. 여러분이 나이아가라 폭포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고 합시다. 지도를 보고 노선을 정하고 하이웨이를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가까이 왔을 때 여러분들은 나이아가라라는 지명이 쓰여 있는 표지판을 보게 되실 것입니다. 그 표지판을 따라가다가 드디어 나이아가라 폭포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 폭포를 향해 들어가실 것입니다. 그런데 나아아가라 폴까지 다 왔는데 들어가지 않고 그 주변만 빙빙 돌 분은 안 계실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영생의 근원 되신 예수님이 오셨을 때 그들은 영생의 근원이신 예수님께 오지 않고 그 주변만 맴돌았던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들이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은 예수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43절을 보시면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영적인 세계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라는 통로 외에는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음의 방법 외에는 다른 길이 없는 것입니다. 이성의 눈을 가지고는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열릴 때 우리는 그 곳에 예수님이 계심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할 때 교수님 중에 한 분은 학기말 시험에 주기도문을 영어로 외워 쓰게 하고, 성경의 아름다운 문장을 외워 쓰게 했습니다. 더 나아가서 문학도들을 위한 성경을 편찬하신 그런 분이 계셨습니다. 이 정도 되면 우리는 그 분이 믿음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 분은 무신론자였습니다. 한 번은 수업 시간에 하나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느냐고 비판을 하는 말을 하길래 그렇게 함부로 치부하지 말라고 저하고 논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많아도 믿음의 눈이 뜨여지지 않으면 예수님을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 탄생 당시 서기관들은 성경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탄생하실 것이라는 것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주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헤롯 왕이나 종교 지도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열렸던 목자들, 동방 박사 그리고 마음이 가난했던 시므온과 안나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얘기를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1940년대 후반 장래가 촉망되는 두 명의 젊은 목사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챨스 템플턴이요 다른 한 사람은 빌리 그래함입니다. 이 둘은 서로 절친한 친구였고 모두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부흥사로서 수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고 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도 유명했지만, 탬플턴 역시 빌리 그래함을 능가할 정도로 훌륭한 부흥사가 되리라고 전망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한 때 탬플턴이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1200석이 되는 좌석이 곧 차고 넘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템플턴은 회의라는 폭탄을 맞고 좌초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에 대해 믿음을 잃게 된 계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우연히 아프리카의 한 흑인여자가 죽은 아기를 안고 있는 하늘을 쳐다보는 사진을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당시 그곳은 처참한 가뭄을 겪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먹을 물이 없어 죽은 아기를 안고 하나님이 야속하다는 듯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비였습니다. 그런데 비를 내려 주지 않는 신은 사랑과 자비의 신일 수 없다. 이를 계기로 그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불가지론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Farewell to God: My Reason for Rejecting the Christian Faith 하나님과의 작별: 내가 기독교 신앙을 떠난 이유라는 책을 발간하고 평생 기독교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감은 그에게만 찾아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빌리 그래함 역시 한동안 성경에 대한 회의로 혼란을 겪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영감을 부정하던 그러한 시기였습니다. 그 회의가 빌리 그래함에게도 찾아왔습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민했습니다. 성경을 공부했고 기도했고 많은 묵상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러던 중 그는 결심했습니다. 비록 내가 다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음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이후 두 사람은 완전히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탬플턴은 소설가로 시사 해설가로 평범한 길을 걸었으나 오늘날 빌리 그래함의 명성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바입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증거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이성이 타락했기 때문에 우리의 판단 역시 잘못되었습니다. 그럼으로 타락한 이성을 가지고는 진리를 진리로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합니다. 신앙 세계는 믿음이 아니고는 들어갈 수 없는 세계입니다.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에도 믿지 못하는 것은 주님을 좇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내가 주님을 영접하겠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고백할 때 그 동안 이해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하나 풀리는 경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 더 말씀 드릴 것은 하나님에게 작별을 고하고 하나님을 떠나갔던 챨스 템플턴, 그가 최근에 다시 하나님을 그리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증거를 보여 주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모든 증거를 믿음으로 받아들이겠니? 

 

 

출처 : csbang`s blog
글쓴이 : csbang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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