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찬양이 축복(祝福)의 통로(通路)입니다! (엡 1:3-14)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8. 31. 08:06

찬양이 축복(祝福)의 통로(通路)입니다! (엡 1:3-14)


  ▶미국 뉴저지주의 프린스턴 신학대학에 신약학 교수가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분은 채플 시간에 전혀 찬송을 부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합니다. 이유인즉 본인이 음치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은 교수의 별명을 '음치'라고 붙여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교수가 어찌된 일인지 채플시간에 찬송을 힘차게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놀란 학생들은 음정도 틀리고 박자도 희한하게 틀렸지만 목소리만은 힘차게 나오기에 의아심이 생겼습니다.
  강의 시간에 교수에게 물었습니다. '교수님 무슨 일이십니까? 찬송을 다 부르시고' 그랬더니 겸연쩍은 표정으로 고백하기를 '전날 밤 꿈을 꾸었다는 겁니다. 천국에 이르러 노크를 했더니 베드로가 누구냐고 묻더랍니다. 그래서 자신을 어릴 적부터 신자요 지금은 신학대학 교수라고 소개를 했더니, 베드로가 장부 같은 것을 뒤지며 말하기를 공부는 많이 해서 아는 건 많은데, 찬미의 제사를 올린 기록이 없군요. 천국은 지식이 많은 신학 박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드린 자를 원합니다. 다시 가서 찬송을 많이 부르다가 오시오!' 하더니 천국 문이 탕하고 닫혀서 깜짝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는 것입니다.
  찬송의 능력, 찬송의 기쁨, 찬송의 기적, 찬송의 제사를 지식적으로 많이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입술의 고백으로 드려지는 찬양을 받고 싶어하십니다. /아멘!/
  찬양은 곡조 있는 기도이며,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나오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찬양할 때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응답하십니다.
  왜 그럴까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우리가 찬송할 때, 우리 주님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제목 소개!▶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 있는 성도에게 쓴 편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옥중서신으로 분류됩니다. 사도 바울은 비록 감옥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서 에베소 성도들을 향해 처음 터져 나온 것은 축복이었습니다.
  2절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이 말씀에서 '은혜'는 헬라인의 인사말이고 '평안'은 히브리인의 인사말입니다. 모든 언어를 통틀어서 축복하고 싶은 사도 바울의 마음이 묻어 있습니다.
  복을 빌어주는 것은 크리스천의 삶의 방식입니다. 남을 불평, 원망, 짜증, 비난, 정죄 등은 크리스천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참 행복한 여러분들은 축복으로 하루를 열고 축복으로 마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에게 축복할 수 있는 자격은 형편에 있지 않습니다. 내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할/
  1-2절에서 사도 바울의 인사를 빼면, 이 편지의 사실상의 첫 단어는 '찬송하리로다.'입니다.
  3절에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사실 찬송만큼 중요한 것도 없으며 모든 신학적 노력의 결론도 찬송이고 우리의 믿음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 또한 찬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가 천국에 올라가면 하늘나라에서는 기도도 성경공부도 전도도 다 필요 없어질 것이지만 찬송은 영원히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할/


  ▶누구에게 찬송할 것인가? 성 삼위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⑴4-6절에서는 '우리를 자녀로 택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라'고 했고, ⑵7-12절에서는 '자신의 피로 우리의 죄를 속량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하라'고 하셨으며, ⑶13-14절에서는 '우리의 구원을 인 치신 성령님을 찬송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은 왜 우리가 이 성 삼위 하나님을 찬송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3절에서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 때문입니다. /아멘!/
  여기에 나오는 신령한 복은 육적인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입니다.
  이러한 복을 받은 자들은 마땅히 하나님을 찬송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감옥에 갇혀 사슬에 매인 상태에서도 나의 주님을 '찬송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할/
  그런데 찬양은 논리적으로 생각해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깊이 생각하고 묵상하다가 깨달아지는 은혜 속에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그냥 터져 나오는 것이 찬양입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이런 찬양이 터져 나오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①오늘 주제가 찬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 가운데 '음악이 있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사실 신앙의 깊은 표현이 음악을 떠나서는 불가능할 때가 많이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는 일생동안 세 가지의 관계를 떠나지 못하고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입니다. 이 세 가지의 관계가 언제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기를 노력해야 합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창조물로서 사람이 일평생 접근하며 살아가야 할 대상이고,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라서 절대적으로 사랑의 관계로 연결되어져야 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중요한 관계를 연결 지어주는 것으로서 감정이라는 것이 작용해야 되고, 그 감정을 작용하는 데는 음악이라는 힘이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가장 중요한 연결 체가 바로 예배인데 그 예배는 성가대의 송영으로부터 시작해서 송영으로 끝을 맺도록 예배의 모범이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 보면, 성전 안에서 심지어 전쟁터에서 성가대가 성가를 불러서 인간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행위를 가져왔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나의 값을 깨닫는다.'고 말한 20세기 위대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이 '기도하는 일'이고, 두 번째가 '음악 감상을 했다.'고 합니다.
  그에게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 누구냐고 물었을 때. 그는 서슴없이 '모차르트'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렇게 인간의 깊은 영혼을 움직이는 음악을 만들었는가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그의 음악을 평생 들었다고 합니다. /할/
  시편은 주로 '기도와 찬양'으로 엮어져있는데 히브리 민족은 음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아주 잘한 것으로 성경에 나타납니다.
  시150편에 '여호와를 찬양하라. 성소에서 찬양하며 권능의 궁창에서 찬양하라 그의 행동을 인하여 찬양하며 그의 광대하심을 찬양할지어다. 나팔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라 춤을 추면서 찬양하고 현악과 퉁소로 찬양할지어다. 제금으로 찬양하며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할지어다. 호흡이 있는 자는 다 여호와를 찬양할지어다.'
  사43:21절에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송하라고 인간을 지으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음악의 종교가 된 것'입니다. /할/
  여기 찬송이란 악기를 연주하고 목소리를 높여 노래를 하라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도 찬송입니다. '찬송이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하나님이 하신 일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를 마음으로, 몸으로, 입술로, 노래로 드리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것이 찬송입니다. 성도가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것이 찬송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자녀 삼으신 목적이 바로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서입니다. /아멘!/
  ▶세상에서 보면 우리 모두의 존경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노래가 있습니다.
  어머니는 희생의 대명사, 존경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어머니 노래'가 있습니다. '나실 때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때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그래서 어머니를 찬양하는 노래가 생겼고, 선생님은 고마운 분이라 존경해서 '스승의 노래'가 생겼고,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에게 바치는 노래'는 아직까지 없습니다. 아마 영원히 안 나올 거 같습니다.
  우리 민족성은 본래부터 노래를 좋아하는 백성입니다. 생활 가운데 무엇을 하든지 자신의 감정을 그 하고 있는 일에 맞추어서 노래로 표현한 민족입니다. 산에 나무를 하러 가면서 부르는 노래가 따로 있습니다. 그러면 나무를 해서 등에다 잔뜩 걸머지고 그 무거운 짐을 지고 땀을 흘리면서도 그 고난을 해소하는 노래가 있어서 즐겁게 했습니다.
  지금은 모 심는 일이 기계화되었지만 몇 십 년 전만 해도 엎드려서 하나씩, 하나씩 논에다 모를 심었는데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이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해결하기 위해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모를 심으면서 그 노래를 부르면 힘든 고난을 잊어버립니다.
  또, 여섯 명이 양쪽에서 어깨에 장대를 꽂아서 무거운 짐을 운반하는 일이 있는데 그것을 하면서도 그냥 가는 게 아닙니다. 장단을 맞추어서 '어기어 차, 어기어 차!' 하면서 발을 맞추어서 재미있게 했습니다.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의 아름다운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시집살이하는 며느리가 부르는 노래도 따로 있습니다. '고초당초 맵다 하나 시집살이 당할 손가?' 그러면서 고난을 참았습니다. 하다 못 해 사람이 죽어서 상여를 매고 나가면서도 그 슬픔과 고통을 이기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제가면 언제오나 어엉차 어어어야!' 상두꾼이 종소리를 쩔렁쩔렁 흔들면서 부르면 모두 따라서 '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 하면서 '딸네 집에 갔더니 술 한 잔도 안 주고!' 이렇게 고난을 다 노래로 소화시켰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는 슬퍼서 그 서러운 역사 때문에 문학이 '비애 문학'으로 발전했습니다. 몇 십 년 전만 해도 우리 한국의 가수가 히트송을 부르려면 이별가를 불러야 했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허공' '이별의 부산 정거장' '비 내리는 호남선' '목포의 눈물' '그때 그 사람' 다 이별가입니다. 비가 오고 헤어지고 울어야 사람의 감정을 건드립니다. 그런데 지금 가수들의 노래를 들어보십시오. 그런 애절한 감정이 없습니다.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모이면 노래 불러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민족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노래를 좋아하느냐 하면 온 세상에 노래방 문화가 이렇게 발전한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답니다.
  여러분, 세상사람들도 이렇게 흥이 겨워 노래하는데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 속에 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줄 믿습니다. /아멘!/
  히브리말로 '찬송하다.'는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그 중에서 제일 많이 쓰이는 단어가 '하랄' 즉 '영광을 돌리다.'는 말인데, 이것이 '할렐루야'가 된 것입니다.
  ▶시골 은행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할머니 한 분이 은행 여직원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창구 여직원이 물었습니다. '할매, 비밀번호가 뭐라요?'
  그러자 할머니는 아주 가는 목소리로 '비/둘/기'라고 말했습니다. 매우 황당한 여직원이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할매요, 비밀번호를 말 안 하면 돈 못 찾는다 앙이요, 비밀번호 말 하이소'
  그러자 살짝 입을 가리신 할머니는 한 번 더 '비/둘/기'라고 했습니다. 인내에 한계를 보인 여직원은 '할매요, 바쁜데 지금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와 이라는 교? 퍼뜩 비밀번호 대이소!'라고 나무라듯 말했습니다. 그제야 할머니가 비밀번호를 말하는데 온 은행 직원들은 배꼽을 잡고 웃고 말았습니다. 할머니의 비밀번호는 바로 '9999'이였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은행창구에서 내 돈을 찾는데도 이 비밀번호를 꼭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여는 비밀번호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할렐루야 찬송하리로다.'입니다. 헬라어로는 '하나님 송축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아멘!/
  ▶프랑스 황제 루이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을 완성하고 프랑스의 권위를 세계에 널리 떨친 왕입니다. 하지만 그는 철저한 카톨릭 신자로 신앙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고 신교를 엄청 박해했다고 합니다. 특히 신교의 대표격이던 '세오졸프'에게 '칙령 거역 죄'라는 죄목으로 파리 에펠탑 꼭대기 위의 감옥에 가뒀습니다.
  그 해 부활절에 루이14세는 황제의 위엄을 갖추고 호화찬란한 부활절 행렬 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내를 주름잡고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세오졸프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찬송을 큰소리로 부르기 시작합니다.
  '할렐루야 우리 예수 왕의 왕이 되시고 우리들의 중보되심 성령 증거하시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 구주 예수 부활하사 처음 열매 되셨네'(159장)라는 곡이었습니다.
  그때 '왕의 왕은 예수님 밖에 없다.'는 가사가 루이14세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곧장 감옥으로 달려가 세오졸프의 손을 잡고 자신의 잘못을 고백한 후 그를 석방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포했다고 합니다. /할/
  여러분, 왜 우리가 주님을 찬양해야 합니까? 그 분이 우리들의 '만 왕의 왕'이시기 때문에 찬양해야 합니다. /아멘!/
 

  ②어떤 방법으로 찬양해야 하나요?
  ⑴'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찬양하라'고 합니다.
  시150편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양하되 '나팔 소리로 찬양하며 비파와 수금으로 찬양하라'고 합니다. 또 '소고 치며 춤추어 찬양하며 현악과 퉁소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큰 소리 나는 제금과 높은 소리나는 제금으로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악기를 다 동원해서 찬양을 드리며 목소리뿐만 아니라 온 몸으로 춤을 추며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합니다. /아멘!/
  ⑵찬양할 때 정성을 다하여 찬양해야 합니다.
  아무리 많은 악기로 찬양을 해도 찬양하는 자의 마음 중심이 빠져 버리면 하나님께서 그 찬양을 받으실 리 만무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시므로 외형적으로 아무리 화려해도 그 마음에 정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아십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모든 악기를 동원하여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듯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찬양을 올려야 합니다. /할/
  ⑶또 찬양은 기쁨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생각할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기쁨을 우리가 늘 가지고 살아야 그 신앙이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다윗은 법궤가 시온 산으로 옮겨질 때 넘치는 기쁨 때문에 에봇이 보이도록 춤을 추며 찬양을 했습니다. 왕으로서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고 미갈 에게 핀잔을 받을 정도로 다윗은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든 인간적인 체면을 버리고 오직 기쁨으로 춤과 찬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기쁨의 찬양을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십니다.
  ⑷'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시150:6)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호흡이  있는 자는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습니다. 그것은 호흡을 주신 분 즉 생명이 주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을 받으시기 위해 온 세상 만물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있는 모든 존재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든 호흡을 가진 존재가 그 존재 목적을 성취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언제까지 찬양을 해야 합니까? 호흡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찬양해야 합니다. 아니 죽은 이후 영원한 세계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할/


  ③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까?(3)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복을 좋아합니다. 인간은 복을 받고 살아갈 자격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이 복에 대해서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구약성경은 눈에 보이는 복을 말씀합니다. 자손의 복과 물질의 복과 형통의 복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많은 자손과 넓은 땅과 복의 근원이 되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은 대체적으로 눈에 보이는 복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을 말씀합니다. 눈에 보이는 복은 말 그대로 만져지고 보이는 복들입니다. 물질적이고 이생 적이고 양적인 땅의 복을 말합니다.
  땅의 복은 한결같이 화려합니다. 높고 많고 귀하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것들입니다. 이런 복의 공통점은 지극히 일시적이고 변하는 것들이라는 점입니다. 화려함이 있는 동시에 유한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런데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은 '사랑, 희망, 소망, 은혜, 부르심, 자녀 됨, 죄 사함 받음, 구원받음의 복들'입니다. 겉에서 볼 때 화려함은 없으나 영원하고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복이 훨씬 더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복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은 모두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집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신학의 중심입니다. 예수 안에서 주어지는 복은 한결같이 영원한 복들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그 복을 가리켜서 '신령한 복'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


  ④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말로는 '신령한 복'이라고 했습니다만 영어로는 '영적인 복'입니다. '하늘에 있는 영적인 복'과 대조되는 말은 '땅에 있는 육적인 복'입니다. 돈에 여유가 생기고 몸이 건강해지고 자식이 잘되는 것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내 영혼의 구멍과 허전함은 그런 것들로 채워지지 않습니다. 채워진다 하여도 순간적이요 일시적입니다.
  에베소 사람들은 헬라의 제우스신이 준다고 생각했던 물질적 번영을 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이 복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복이 진정한 복이라고 말합니다. 당시 에베소 사람들은 아테네 여신이 인간에게 행복을 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영적인 복이 진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할/ ▶그렇다면 그 진짜 복이 무엇인가?


  ㉠'선택해 주신 복'입니다(4).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여기 '택함 받음'은 '많은 사람 중에서 내가 선택됨'을 뜻합니다. 이 택함 받음의 반대개념은 '버림받음'입니다. '탈락함'입니다. 이것이 또 가장 슬픈 일입니다. 부모에게 버림받는 것은 분명 불행입니다. 직장에서 버림받는 일도 불행입니다. 친구들로부터 왕따 당하고 이웃으로부터 버림받는 일도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나를 택하셨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창세전에' 말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래서 이 복이 신령한 복입니다.
  어떤 청년은 아내 감을 찾는데, 청년 눈에 들면 부모가 반대하고 부모가 좋아하면 청년마음에 안 들고, 청년과 아버지가 좋아하면 어머니가 반대해서 결혼을 아직까지도 못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데도 힘들고 신중해야 하는데 하물며 이 세상에 티끌처럼 많은 사람들 중에 잘난 사람도 있고 똑똑한 사람도 있고 지혜로운 사람도 있고 강한 사람도 있는데 그 많은 사람들 중 내가 주님에 의해 선택되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이라도 깨달았다면 그 사람은 '신령한 복'을 아는 사람입니다. /할/
  ⑴여기 '흠이 없는' 이 말이 신약성경에 8번쯤 나오는데, 이 말은 구약에서 희생제사를 드릴 때 예물에 흠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사랑 안에서 흠이 없다는 것입니다. 나의 도덕적 완전함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내 존재가 거룩해졌고 흠이 덮여졌다는 법적인 선언입니다. /할/
  '흠이 없다.'는 헬라어의 '아모무스'의 '모무스'는 희랍신화에 나오는 조롱과 비난의 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내 죄를 덮어버리면 비난의 신 모무스가 두 눈을 부릅뜨고 내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는 그런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피의 완전한 능력, 완전한 거룩을 말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복, 영원한 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할/
  ⑵선택의 교리가 우리에게 주는 신령한 복은 흔들리지 않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구원의 근거가 내게 있다면 그건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땐 구원받은 것 같다가 내가 실수하고 넘어지고 잘못을 범하면 구원이 뿌리부터 흔들립니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가 하나님의 선택하심에 있기에 그 구원은 왔다갔다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처럼 변덕스런 분이 아닙니다. 천국에 있는 당신의 자녀를 기분 나쁘다고 지옥으로 쫓아내시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나를 자녀로 삼으셨으면 내 조건 여하에 따라 변경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선택교리가 주는 영적인 복입니다. /할/
  ⑶여기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왜 선택하셨는가?'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기 위한 뜻'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순결하시기 때문에 구별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할/
  ▶백의에 천사 '나이팅게일'이 그의 나이 30세가 되던 날 이런 일기를 썼다고 합니다.
  '오늘 내 나이 서른이 되었다. 예수가 그의 사명을 시작한 나이다. 주님, 저도 오늘부터 당신의 부르심에 따라 살겠습니다. 유치했던 생각은 이제 버리고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신 주님의 목적에 순종하겠습니다.'
  그 후 헌신적인 간호사로서 나이팅게일은 세상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성공적인 생활의 비결이 무엇이냐?'라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그녀는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비결은 하나뿐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선택해 주신 그 뜻에 나를 맡기고 사는 일입니다.' /할/


  ㉡하나님의 아들이 된 복입니다(5-6).
  우리를 선택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은 '그 기쁘신 뜻대로 예정'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 예정이란 말은 '미리 정했다.'는 뜻입니다.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는 일본이 낳은 종교가입니다. 고배(神戶)에서 첩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머니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는 늘 첩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눈치를 보며 자라야만 했습니다. 본처의 자식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천대를 받았습니다. 왜 나 같은 것을 낳았느냐고 늘 부모를 원망하며 자랐습니다.
  어느 날 담 모퉁이에 기대서서 생을 비관하고 있을 때 북 치고 나팔 불며 지나가는 구세군 전도대를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전도하며 외칩니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 순간 가가와 도요히코는 가까이 다가가 물었습니다. '기생 아들도 사랑하시나요?' '아무렴, 하나님은 어떠한 죄인이라도 사랑하십니다.' 그 말을 들은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후에 그의 글 가운데 '나는 기생 아들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당당히 외쳤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중에서도 최고의 복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복'입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피조물입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신다고 합니다. 이를 성경은 '양자 됨'이라고 말합니다.
  원래 유대인의 개념엔 양자 됨이 없습니다. 성경은 로마의 양자 개념을 빌려와 복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사회에서 어떤 귀족이나 부자에게 자식이 없으면 때로 노예 중에서 아들을 삼는 일이 간혹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뉴스거리가 될 수밖에 없었고 노예에겐 천지개벽과도 같은 신분상승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할/
  ▶1962년 당시 천문학적 제작비인 1,500만 불을 들여 만들고 무려 8번이나 재개봉을 했던 영화가 있습니다. 125,477명이 출연, 제작기간 10년이 걸려서 만든 영화 '벤허'입니다. 아카데미 11개 부문을 수상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기록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벤허는 허(Hur)씨의 외아들이란 뜻입니다. 허씨 가문은 예수님과 같은 시대 예루살렘에서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살던 부호가문이었습니다.
  어느 날 로마의 신임 총독이 부임하게 되고 부임 축하 행진 중에 벤허의 여동생의 실수로 기왓장이 총독의 머리에 떨어지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총독을 수행하던 멧살라라는 장교가 있었는데 그는 벤허의 옛친구였습니다.
  바로 그 멧살라가 벤허의 어머니, 누이, 연인을 감옥에 보내고 재산을 몰수하고 벤허를 노예로 팔아 벤허는 갤리선의 노를 젖는 중노동을 합니다. 노예가 된 벤허는 갤리선(노예를 이용한 군용선)의 사령관 아리우스의 눈에 띄게 되고, 이 배가 해적선의 습격을 받았을 때 벤허는 사령관을 구하는 생명의 은인이 됩니다.
  그래서 사령관은 벤허를 양자로 삼고 끼고 있던 반지를 벤허에게 끼어줍니다. 그때부터 벤허는 아리우스 가문의 모든 권한을 누릴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게 됩니다. 벤허는 로마의 귀족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멋있는 복수를 합니다. 이것이 양자라는 로마의 제도입니다. /할/
  요1: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우리는 나를 선택해 주시고 당신의 자녀 삼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해야 합니다. 6절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여러분,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한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창조물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들과 모든 생명체에게 이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산 속의 초목들을 보십시오. 누가 보지 않아도 산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휘하고 살아갑니다. 꽃들을 보세요, 날아다니는 새들을 보세요!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고 삽니다.
  그것은 사람의 의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6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양하라고 하십니다. /할/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마틴 루터'는 '성경을 짜보면 피가 흐른다.'고 말했습니다. 참깨를 틀에 넣고 짜면 고소한 기름이 나옵니다. 잘 익은 포도를 짜면 달콤한 포도즙이 나옵니다.
  그러나 성경을 짜면 피가 나옵니다. 십자가는 피 흘림의 사건입니다. 우리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주님의 피 흘리심이 성경의 중심 이야기입니다. /할/
  여기서 '속량'이란 말은 '값을 치르고 다시 사서 자유케 한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본래 노예 시장에서 쓰여진 단어입니다.
  당시 로마 귀족들은 노예를 시장에 팝니다. 노예들은 쇠사슬에 묶여 서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나다가 노예를 보고 흥정합니다. 비싼 대가를 지불하고 샀습니다. 노예의 주인은 돈을 내고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죄의 노예에서 속량하시려고 그의 독생자 외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하시면서 내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은혜 중 가장 큰 은혜는 죄 사함의 은혜입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벌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형벌을 아들에게 지우고 아들 안에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죄만 사해주신 것만 아니라, 자녀가 되게 하셨습니다.
  바울의 신앙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되고 있습니다. 죄 사함의 문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해결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흘린 피 값으로 마귀의 노예가 된 우리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자유케 하셨습니다. 이것이 마땅히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이유입니다. /아멘!/
  ▶18세기 독일에 '진젠도르프' 백작이 살고 있었습니다. 많은 재산과 토지를 가진 사람입니다. 어느 날 미술관에 그림을 보러 갔습니다.
  이 그림 저 그림을 보다가 한 그림에 눈이 멈춰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죽으신 그림이었습니다.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이 쓰여 있습니다. 양손에는 대못이 박혀 있습니다. 그리고 허리는 창에 찔린 채 피가 흘러내리는 그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피가 진짜 흐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진젠도르프'는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의 그 모습을 보는 순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회개의 기도를 합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 때문에 피를 흘리고 죽으셨는데, 나는 예수를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습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 충격적 사건이 진젠도르프 백작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자기만을 위해 살던 진젠도르프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 이웃을 위해 사는 사람으로 변화되어졌습니다. 많은 토지를 떼어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마침 그 때 모라비안 교도들이 신앙의 박해를 피해 진젠도르프의 영지 가까이 피신을 왔을 때 그들에게 많은 땅을 내어주었습니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그곳에 헤른포트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경건 운동을 펼치게 됩니다. /할/
  그렇습니다. 진젠도르프의 눈에 보였던 예수의 붉은 피가 십자가에 흐르고 있음을 우리도 보아야 합니다.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아도 아무 감각이 없습니다. 예수의 붉은 피를 보아도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필립 브룩스' 목사가 중한 병에 들어 병원에 입원을 했는데, 교회의 성도들이 문안을 가도 방문을 사절합니다. 병 문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시의 유명한 법률가 잉거솔이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성도들이 말하기를 '잉거솔도 면회를 못하고 돌아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브룩스 목사가 잉거솔의 방문을 받아들였습니다. 잉거솔은 우쭐해졌습니다. '내가 유명인사가 되니까 브룩스 목사가 방문을 허락하고 만나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잉거솔이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저 같은 사람을 만나주시니 영광입니다. 기회를 주시다니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그런데, 브룩스 목사가 그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하기를 '다른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 만나겠지만, 왠지 당신과는 만날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기에 세상에서 한 번 보고 가야 한다면서, 그를 깨우쳐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였습니다. /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흘리신 피로 구원받았기에 찬송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려야 합니다. /아멘!/


  ㉣지혜와 총명을 주신 복입니다(8).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하셔서 하나님의 뜻의 비밀을 알게 하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십자가의 구원의 은혜를 알게 하셨습니다. /할/
  여러분, 진정한 지헤와 총명은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알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혜자 솔로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에베소에는 수없이 많은 이방 신들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아는 축복입니다(9).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된 비밀입니다. 그것은 예수 안에 들어온 자에게 열어주신 구원에 은총입니다. 이 비밀은 아무나 아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비밀이란 특정한 사람 외에 누구도 모르는 것을 말합니다. 가령 관공서나 군대엘 가면 1급 비밀, 2급 비밀, 3급 비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자연계에 숨겨있는 비밀을 연구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을 과학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는 이 비밀을 많이 발견한 사람은 앞서가게 되고 인정받기 마련입니다.
  가령 번개는 예부터 있었으나 그 속에서 전기의 원리와 비밀을 발견하여 전기를 쓰게 되었으니 얼마나 편리합니까? 물을 끓일 때 주전자의 뚜껑이 수증기에 의해 들썩거리는 것도 예부터 보아왔으나 그 수증기에서 기관차의 원리를 발견하여 우리 생활의 편리함을 제공하게 된 것은 근대의 일입니다.
  원자는 태곳적부터 존재해 왔으나 그 비밀을 찾아내어 현대는 원자핵의 분열을 이용하여 원자력 발전소도 건설하고, 원자력 잠수함도 띄우고, 원자력 병원을 세워 질병까지 고치고 있지 않습니까?
  이와 같이 자연계와 우주 계의 숨겨진 비밀을 알아내어도 굉장한 유익이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비밀을 안다고 하면 그 얼마나 축복이 되겠습니까? /할/


  ㉥주안에서 하나(통일)되는 축복입니다(10).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우리의 조상이었던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하나님의 품을 떠난 이후 인간의 역사는 분쟁과 분열로 점철된 역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토록 금실이 좋았던 아담과 하와가 갈라섰고, 가인과 아벨 형제가 갈라서지 않았습니까?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하나됨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은 문화적 전통, 시대적 전통, 세대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무엇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까? 복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할/


  ㉦주안에서 기업이 될 복이 있습니다(11).
  '우리가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나니' 이 말은 예수 믿는 우리는 주안에서 하나님의 후사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조물주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따라서 그 후사가 된 우리는 다 그의 기업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참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찍이 다윗 왕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외쳤습니다.
  부잣집 아들은 비록 그의 주머니가 비었다 해도 부족을 느끼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버지의 소유가 모두 자기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 가난한 중에도 자족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주를 통하여 하나님의 기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멘!/


  ㉧성령으로 인 침을 받는 복입니다(13-14).
  여기의 '인 치심'은 '도장 찍음'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문서의 진실성을 보증하거나 소유를 표현하는 행위입니다. 여기서 인 치심을 받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음을 표시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할례로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임을 표시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자신이 믿는 종교의 기호를 몸에 표식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심령에 하나님의 소유된 표시를 가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구원에 확신입니다. /할/
  서류에 도장을 찍어 그 사실이 틀림없음을 확인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확인의 증거를 만드신 것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로 보증하기 위해 성령의 인 치심을 통해 확신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43:1절에서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나의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감옥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았기에 찬양할 수가 있었습니다. /할/
  ▶독일의 '힐츠' 산맥에는 카나리아를 사육하는 조류공원이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카나리아의 소리를 들은 방문객들은 놀라운 탄성을 지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공원의 주인은 새를 팔 때 노래를 주도하는 솔리스트(Solist) 카나리아는 절대로 내놓지 않는다고 합니다. 카나리아 새들의 합창단 속에는 노래를 주도하는 몇 마리의 솔리스트가 있는데, 이 새들이 다른 새들을 자극해서 아름다운 화음을 엮어내는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삶이 힘이 드십니까? 앞날이 암울합니까? 인생살이가 고통스럽습니까? 솔리스트 카나리아처럼 먼저 찬송을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나를 택해주신 하나님, 아들이 되게 하신 하나님, 죄를 사해주신 하나님, 하늘에 기업을 주신 하나님, 성령으로 인치며 돌보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찬양'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8월 31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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