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기도는 `축복이고, 능력이고, 응답`입니다. (막 11:12-14, 20-2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8. 24. 18:59

기도는 '축복이고, 능력이고, 응답'입니다. (막 11:12-14, 20-25)


  DJ 정부 때 중국대사를 역임한 김하중(金夏中)장로님이 쓴 '하나님의 대사' 라는 저서에 보면, 그 분은 기도하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고 자신을 소개합니다.
  어머니는 새벽마다 자신의 방 앞에 엎드려 오랜 시간 기도하셨는데, 기도 소리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었으며, 식사 때마다 가족의 이름을 부르며 간절히 기도하는 바람에 항상 밥은 식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신앙이 없었으며 그나마 불교신자와 결혼한 후 교회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그의 부인이 시어머니의 전도로 믿게 되었고, 그에 딸이 아빠를 위하여 금식  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 그 딸 때문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 분이 기도를 시작하면서 외무부의 아태국장이 되는 일을 경험하면서 기도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답니다. 47세에 세례 받을 때 살아 계신 하나님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 분의 체험 고백입니다.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무엇인가 뜨거운 것이 몸 속으로 확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고는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때부터 그는 무슨 일이든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일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김대중 대통령 의전비서관으로 근무할 때도 먼저 기도하고 대통령을 만났습니다.
  한 번은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도중에 보고에 대해 기도로 준비하지 않은 것이 생각나 핑계를 대고 나와서 기도하고 다시 들어갈 정도였습니다.
  그 분이 주중대사로 근무하던 시절에 가장 힘들었던 일은 신종 전염병 급성호흡기증후군 일명 'SARS' 때문이었습니다. 중국 전역이 불안에 흔들렸을 뿐 아니라, 각 나라들은 기업인, 유학생, 대사관 직원까지 철수를 명령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중한국대사관은 철수하지 않았습니다. 김 대사가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철수하지 말라고 하셨고, 중국에 있는 한국인은 한 사람도 이 병에 걸리지 않게 하겠노라고 하셨으며, 기도하는 가운데 사스가 곧 끝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었답니다.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대사관 직원들을 독려하면서 버티었습니다.
  이 일이 중국 정부당국자들과 중국인들을 크게 감동시켰습니다. 그의 기도는 단순한 기도가 아닙니다. '믿음으로 보는 기도, 믿음으로 듣는 기도, 믿음으로 이미 아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기도가 축복입니다. 기도가 능력입니다. 기도는 응답입니다. 어떤 목사님은 '기도는 임신이다.'라고 임신부에 비교해서 말해 주었습니다.
  맞습니다. 여인이 임신하면 달이 차면 분명히 아이는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해 놓으면 응답으로 역사해 주십니다. /아멘!/ ◀제목 소개!▶


  ①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본문은 마21:18-22절에도 나오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동일한 사건을 취급하면서 마태와 마가는 순서를 바꿔서 교훈을 주십니다.
  마태는 성전 성결 문제를 먼저 다루었고,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뒤에 다뤘습니다. 그러나 마가는 무화과나무 저주 사건을 먼저 다루었고, 성전 성결 운동과 정화운동은 나중에 다루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한 무화과나무가 서 있는데 잎이 무성합니다. 열매가 없음에 실망하신 예수께서 다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라고 저주를 하셨습니다.
  다음날 베드로가 무화과나무를 보며 말하기를 '선생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다 말라죽었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이나, 성전정화사건이나 다 영적인 깊은 뜻이 있는데 성전 정화운동은 그 당시 형식적이고, 의식적인 예배의식 종교지도자들은 책망한 사건이요, 본문의 사건은 신앙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은 향하여 주시는 메시지이고, 우리를 향한 메시지입니다. /할/
  예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은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데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열매 없이 잎만 무성했던 것입니다. 열매 없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라는 예표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열매는 생명입니다. 유대교의 잎만 풍성하고 생명이 없는 종교를 저주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는 무화과나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열매 없는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에게 있었는데, 두들겨 맡기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맞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해서, 또한 종교 지도자들을 대신해서 이 무화과나무가 맞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보고 '열매 없는 것은 저렇게 망하는구나' 깨닫고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메시지였고, 또한 오늘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믿/
  우리 주변에는 나 때문에,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매 맞는 무화과가 많이 있음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할/ '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나를 예수 믿게 하기 위해서' 내 주변에 있는 것이 깨질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때로는 내 대신 자녀가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내 대신 부모가 맞기도 하고, 때로는 형제가, 이웃이 맞을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나를 깨우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사업과 직장이 맞기도 하고, 때로는 나라가 맞기도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깨우치기 위하여서 멀리서부터 점점 가까이로 때려오실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회개하지 아니하면 부득불 나를 심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멘입니까?/
  오늘 우리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열매 없는 인생의 종말이 저렇구나' 깨닫고, 열매맺는 지혜로운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나라마다 나라꽃이 있습니다. 국화(國花)가 있습니다. 미국은 감람나무가 국화입니다. 영국은 장미, 프랑스는 백합, 일본은 벚꽃, 우리나라는 무궁화가 나라꽃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국화는 무화과입니다.
  본문에서 무화과는 단순히 하나의 나무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왜 예수님이 무화과를 저주했습니까? 열매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주받은 무화과나무를 바라보는 제자들을 향해 예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아주 소망 적인 메시지가 그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물론 너희들도 열매가 없다. 그러나 염려하지 말라 너희에게는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느냐?' 믿음의 본질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믿음, 미쁘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혹 열매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면 열매가 열릴 줄로 믿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믿음과 기도' 그리고 '신앙의 열매'입니다. 
  예수께서 베다니에서 아침 일찍 예루살렘으로 가시다가 열매가 없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제자들이 다 보는 앞에서 '지금부터 영원히 사람들이 너에게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고 하시니 제자들은 무심코 그 이야기를 듣고 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이튿날 또다시 예루살렘에서 나와 베다니를 지나가는데 베드로가 보니까 어제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바싹 말라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 주님이 어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고 하자, 예수께서 믿음과 기도에 대한 위대한 교훈을 22-25절까지 주시고 계십니다. /할/
  여러분,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 아들이 무슨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없다고 그렇게 화를 내셔서 무화과를 저주했느냐?'고 말할 사람도 있는데, 예수님이 그 말을 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에 대한 법칙을 실물 교육을 시키신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믿음의 기도가 중요합니다. /아멘!/
  

  ②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이튿날에 일어난 사건입니다(12).
  '이튿날 저희가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마21:17절을 봐야합니다. '그들을 떠나 성밖으로 베다니에 가서 거기서 유하시니라' 예수님의 숙소가 베다니에 있었습니다.
  베다니에는 누가 삽니까?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형제들이 삽니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집에서 쉬시고 이른 아침에 예루살렘으로 오셨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약 2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안식일에 성전에 올라가기 알맞은 거리라고 다른 성경에 표현되어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예수님께서 조반을 드시기 전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시장하신지라!' 예수님께서 시장 끼는 느끼셨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인성을 봅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가지신 분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요, 신성을 가지신 분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인성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시장기를 느끼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영지주의라는 이단이 있었는데 이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하나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하는 가현설을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십자가에 달리신 분도 사실은 인간의 몸을 잃고 오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환상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주님이 '시장하셨다'고 하는 말은 그분이 중보자로써 신성과 인성을 입으시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 임을 분명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할/


  ③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13-14)
  동일한 사건을 취급한 마21:19절에 보면, '길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얻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무화과나무는 당시 팔레스틴 지방을 포함한 지중해 지방의 대표적인 과실수로 매우 소중하게 재배하는 작물입니다. 그 당시는 길가에 있는 과일을 누구든지 따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무화과 열매는 '가난한 자의 양식'이라고 불릴 만큼 누구나 다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주인이 따로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길 가다가 시장한 사람이 따먹을 수 있는 것이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꽃이 없는 것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입니다. 그런데 이 나무의 열매는 잎이 피기 전에 열매를 생기고 그 열매 속에 꽃이 들어있답니다. 그러니까 좀 특이한 나무입니다. 보통 나무들은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보통입니다.
  지난번에 고향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어 우리 총회 증경총회장님이신 최현기목사님의 교회를 갔습니다. 거기서 모여 전주로 가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모님이 아침 식사를 주시면서 무화과 열매를 한 접시를 올렸습니다. 굉장히 맛이 있었습니다. 아주 달고 부드러운 맛이 났습니다. 그 교회에서 농사를 지은 것이랍니다. 교회 옥상에 가보니까 화분에 심어 약 50그루가 넘게 키우고 있었는데 나무마다 열매가 많이 맺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열매 먼저 맺고 그 열매 속에 꽃이 핀 다음에 잎이 무성해지는 그런 나무랍니다. 무화과나무는 영적으로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교회를 가리키고 성도를 가리키는 나무인데 이것은 신앙적으로 깊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할/
  화려한 꽃이나 무성한 잎보다는 열매를 먼저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기대하듯이 오늘 우리들에게서 열매를 원하시는 것을 보여준 사건입니다. 또 유대 땅의 이 무화과나무의 특징은 일 년에 두 번씩 열매를 땁니다. 즉 이른 여름에 따고 또 늦은 가을에 따는 과일 수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라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을 나누어주고 유익을 주라고 했습니다. 제사장 나라가 되어서 온 세상을 다 품에 안고, 그들을 위하여서 기도하며 또한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무화과처럼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열매를 주어서 유익하게 하도록 계획을 하셨습니다. /할/
  그런데 이스라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처럼 하나님 앞에서도, 세상에서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열매 없는 나라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는데, 사실은 이 나무를 저주했지만 그 내면에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저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화과를 저주하신 것처럼 주후 30년경에 저주가 임했습니다. 무화과나무가 맞는 모습을 보고도 이스라엘이 깨닫지 못하자 40년 후인 주후 70년에는 직접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때리셨습니다.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점령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학살을 당했는지, 335만 명이 디도 장군의 말발굽 아래서 칼날에 무참히 살해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들, 상상해 보세요. 335만 명이라고 하면 아마 대전시민이 거의 다 죽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엄청난 학살이 일어났습니다.
  십만 명 정도가 포로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안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자기 자식을 잡아먹는 처참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은 돌 하나, 돌 위에 층 놓이지 아니하고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40년 전에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가 저주받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열매 없으면 저렇게 되겠구나' 깨닫고 회개했으면 이스라엘은 40년 후에 이렇게 비참하게 맞지를 않았을 것이고, 2천 년 동안 나라 없는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스라엘은 끝까지 회개의 열매를 맺지 않다가 말라진 무화과나무와 같은 징벌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교회 또한 길가에 심겨진 무화과나무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을 '산 위에 드러낸 동네'에 있는 존재라고 합니다. 산 위에 있는 동네는 모든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을 주시하여 봅니다.
  오늘 길가에 있는 무화과나무는 얼마나 잘 보이겠습니까? '너희는 세상에 빛이고 소금'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열매 맺는 삶을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열매 맺는 삶입니다. 그런데 본문에 길가에 서 있는 무화과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 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잎사귀 외에 아무것도 없더라' 무슨 말입니까? 열매를 얻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무에는 종류가 있습니다. 어떤 나무는 재목으로 쓰이는 나무가 있고, 또 어떤 나무는 잎사귀만 사용하는 나무가 있고, 그러나 대부분의 나무는 열매를 얻는데 사용됩니다.
  오늘 무화과나무의 가치는 꽃이 아름답거나 목재가 좋은데 있는 것이 아니고 열매 맺는데 그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가 열매 맺는 책임을 못할 때는 그 나무의 가치는 상실합니다. 주님은 그 나무를 향해 '영원히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고 저주하셨습니다.
  세례요한은 눅3:9절에서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했고, 예수님은 요15:2절에서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고 하셨고, 또 8절에서는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할/

 
  ▶본문에서 우리는 몇 가지 귀한 복음적인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열매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요15:2절을 보세요!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열매를 많이 맺으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신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열매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통하여 나타나는 좋은 행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7:16-18절에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할/
  좋은 열매의 신앙을 가리켜 '주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21절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계19:8절에서는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무엇인가? 
  ⑴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마3: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이전에 행실을 버리고 온전히 달라진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거룩한 모습을 좇아 새로운 삶을 사는 것이 회개의 참모습이요, 회개의 참열매입니다.
  ⑵빛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엡5:8-9절에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여기 '착함'은, 사랑을 기초로 한 선한 행실입니다.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 신앙의 의무를 다하는 삶입니다. '진실'은 속과 겉이 같아야 합니다. 위선, 외식이 있어서는 아니 됩니다.
  ⑶전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열매가 바로 영혼구원입니다.
  ⑷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갈5:22-23절에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⑸고전13장의 사랑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⑹찬양의 열매, ⑺기도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아멘!/


  ㉡열매 없는 나무는 저주를 합니다.
  본문에서는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마21장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요15장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를 드시면서 '너희는 가지다 그런데 그 가지가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은 결국 잘리워서 말라져 불에 던지어 타 버릴 것이라' 이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열매 맺지 않은 나무를 그냥 오래도록 두시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무화과를 저주했다함은 이스라엘에 대한 저주를 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민족적 사명을 선민으로서의 종교적인 사명입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이스라엘은 겉만 무성했지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열매 없는 교회, 열매 없는 성도는 하나님의 저주하십니다. 오늘 본문이 그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입니다. /할/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안에 꼭 있어야 합니다.
  요15:5절에서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또 7절에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할/ 주님은 열매를 원하십니다. 열매 없는 나무는 생각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열매 맺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아멘!/
 

  ④제자들의 반응은?(20-21)
   마21:20절에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가로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행동이 전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고 참으로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들은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는 예수님께서 어째서 열매 없는 나무를 이렇게 무자비하게 저주하셨을까요? 제자들은 갈등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이상히 여겨' 의아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놀라워하는 표현입니다.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주님의 말씀 한마디에 어떻게 무화과나무가 마를 수 있었는가 하는 감탄과 찬양이 섞인 물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에 의해서 그 나무가 그대로 말라버린 눈앞에 사실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 우리 예수님이 그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까? 그 이유는 영적인데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한 그루 무화과나무라 할지라도 잎만 무성하고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이러한 심판과 저주를 받게 된다는 사실을 제자들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또 한번 말합니다. 무화과나무는 그 당시 유대교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아니 어떻게 말씀 한마디 던지니까 무화과나무가 죽는가?' 그들의 놀램은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의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22-24절에서 그들에게 믿음의 세계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음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아멘!/


  ⑤믿음의 기도가 축복이고, 능력이고, 응답입니다(22-24).
  ㉠이런 축복의 근본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오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능력과 기적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본문에 의하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아주 간단한 대답입니다. 믿음이란 하나의 신앙의 용어로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에너지요, 힘입니다. /믿/
  본문의 말씀과 같이 이 믿음은 산을 옮길 수도 있는 즉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여기서 산은 비유적이고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도저히 내가 해쳐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가 해결할 없는 것, 전혀 불가능해 보이는 것' 이런 것들이 다 산입니다.
  우리들의 문제, 환란, 시험, 고난도 이런 산에 비유합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개인적으로나 가정적으로나 교회 적으로나 산이 있습니다. 작은 산도 있고, 중간산도 있고 큰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산이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라'
  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 하나님 속에 있는 능력, 예수님 속에 있는 능력과 기적을 나의 삶으로 끌어오게 하는 수단과 방법이 곧 믿음입니다.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무슨 말씀인가? '태산과 같이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라 할지라도 믿음만 있으면 능히 해결할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멘!/
  ▶여기서 우리는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될 중요한 말씀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으라'(22)는 말씀과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는 말씀과 '무엇이던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24)는 말씀입니다. 이상의 말씀들을 한데 묶어 정리하면, '믿으면 된다는 것이며, 할 수 있다는 것'이 됩니다. /아멘!/
  그런데 이 말씀은 참 어려운 말씀인데도 쉽게 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보다 막연한 말이 없습니다. 인간의 지식과 노력으로는 이 말의 뜻을 바로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주님의 저주 한 마디에 말라버리는 것을 보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서 제자들이 어떻게 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주님이 주신 대답이 바로 '하나님은 믿으라'입니다. /할/
  우리 앞에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는 문제와 갈등이 직면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대의 답은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아멘!/
  ▶성경에는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요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에 제자들이 불안과 두려움과 근심에 쌓여 있었지만 그때 주님이 하신 첫 번째 말씀이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음성이 최고의 답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은 '하나님에 의하여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돈으로 사는 상품이 아닙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선물입니다. 하나님에 의하여 믿음을 가지라는 이 말씀이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믿음도 우리에게 올 수 없습니다. 그 분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에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엡2:8절에 '믿음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야 합니다. 이 믿음은 '성공이냐 실패냐?'라는 차원이 아닙니다. '나를 행복하게 하느냐 불행하게 하느냐'하는 정도가 아닙니다. '믿으면 영생이요 믿지 않으면 멸망'이라고 했습니다. /할/
  문제는 우리가 이 믿음에 대해서 그런 심각함을 가지고 응답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절대절명의 과제가 믿음인데도 불구하고 다만 내가 마음의 평안과 사업의 확장을 위해서만 믿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믿음이 아닙니다. '믿으면 영생이요 믿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아멘!/
  오늘 이 시간 목숨을 내놓고 열광하는 곳이 있습니다. 특히 주일날 그런 곳이 있는데 그곳은 경마장입니다. 경마장에는 목숨을 걸고 경마에 도박을 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경마 도박에 걸린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경마도박을 위해 가족도 잊어버리고 동생의 결혼식에도 가지 않을 정도라고 합니다.
  여러분, 믿음은 그 정도의 돈을 따느냐 못 따느냐의 차원이 아닙니다. 믿으면 영생이고 믿지 않으면 멸망입니다. 이와 같은 절대절명의 사건이 믿음인데도 인간들은 믿음에 대한 반응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이 '귀 있는 자는 들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에 따라 신관과 신앙이 결정됩니다. '말씀 한 마디로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한나의 고백처럼 '살리기도 하시고 죽이기도 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주실 수도 있고, 주신 것을 다시 취하실 수도 있는 하나님이시며, 높이기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시는 하나님, 즉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면, 그 신앙은 철저하고 확실한 신앙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확신이 중요합니다. 구원의 확신, 응답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의심하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습니다.
  '의심한다.'는 말의 본래 뜻은 '판단이 엇갈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류 최초로 의심을 품은 사람은 아담의 아내 하와였습니다. 어느 날 뱀이 속삭인 말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은가 뱀의 말이 옳은가 판단이 엇갈리기 시작했고,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지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 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말씀하시자 도마는 그 말씀 한마디에 자신이 지녔던 모던 의심을 버리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20:28)라고 고백했습니다. /할/


  ㉢본문에서 이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한 단계 더 구체적인 믿음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즉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은 원론이므로 주님은 이제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먼저 알고 믿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천지창조는 믿고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연구해보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고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알고 믿으려면 십자가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믿고 알아야 합니다. 이해하고 알고 믿으려는 것은 지식이나 헬라철학의 차원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할/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믿음은 상당히 구체적인 대상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라고 했는데 여기에 두 가지 주제가 아주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첫 주제는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그 말씀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주님이 말씀하는 그것이 없다면 내가 믿을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이 있기 때문에 믿으라는 것입니다. /할/
  믿음의 객체입니다. 믿음은 내가 믿어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믿을 근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 주님의 말씀이 믿음의 객체요. 믿음의 근거입니다. /믿/아멘!/
  두 번째는 '마음에 의심치 않으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질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자세에 따라 그 믿음이 성립됩니다. 의심이라는 병은 세상에 어떤 병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믿음은 의심을 극복하고 갈등을 극복하고 고난을 극복하면서 강한 믿음으로 자라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의심하지 말라'의 헬라어원의 뜻은 '통하여 판단하다. 결정하다.'는 뜻으로, 환경으로 보아, 눈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마음속에서 불가능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고 판단하거나 결정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멘!/
  약16:7절에서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던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고, 8절에는 이런 사람을 가리켜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갈팡질팡하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할/


  ㉣믿음의 기도는 '그대로 되니라'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카놀 산토스'라는 사람이 사업을 하다 부도 위기에 처했습니다. 수백만 달러의 빚을 지고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걱정과 근심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자살할 생각으로 밤늦게 병원을 나섰습니다. 그때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찬송은 조그마한 교회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한 늙은 부인이 꿇어앉아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때 갑자기 산토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는 예배당 바닥에 엎드려 통곡하며 회개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무거운 짐이 사라지고 마음에 희망이 생겼습니다. 무거운 짐을 모두 주께 맡겼습니다. 믿음으로 생각을 바꾼 것입니다. /할/
  재기를 위한 자본이 없자 그는 쓰레기 수거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돈을 모아 치킨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선풍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 작은 사업이 발전하여 산토스 치킨이라는 대형 체인점이 되었습니다. 죽음에 직면했던 사람이 믿음으로 생각을 바꾸니 희망이 보이고 성공이 보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아멘!/
  짧은 본문에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이 두 번이나 나옵니다. 23절에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리고 24절에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런데 본문에 나온 내용은 황당한 데가 있습니다. 멀쩡하게 살아있던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저주 한 마디로 뿌리째 말랐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얘기는 더 놀랍고 황당합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할/


  ㉤우리 주님이 본문에서 강조하시는 말씀이 무엇인가? 기도입니다.
  사실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이게 말이 되는 얘기입니까?
  그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 중에 아무도 그 말을 곧이듣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이 이런 극단적인 예를 들어가면서 기도를 가르쳤을까요? 도대체 기도가 뭐 길래? 왜 예수님은 지나가던 소도 웃을 얘기를 하면서 그렇게 극단적으로 기도를 가르쳐야만 했을까요?
  이제 사흘이 지나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고 이 땅을 떠나야 됩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고아처럼 이 세상에 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무엇으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의 손에 뭔가 쥐어줘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생살이에서 최고의 무기인 '믿음과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할/
  여기서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은 기도의 능력을 보여준 실제'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기도란 '산들을 명하여 바다에 던져져라' 할지라도 그대로 되게 하는 능력이 있다고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기도의 능력은 이런 것입니다.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그런데 우리가 본문에서 주목해야 될 중요한 말씀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24절 말씀입니다. '믿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응답 받은 것으로 믿어야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할/
  마21:22절에서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지금 우리 주님이 믿음의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믿고 구하면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가 죽는 것 정도가 아니라 이 산더러 바다로 옮겨지라고 해도 옮겨진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산이 바다로 옮겨진다는 것은 정말 믿으세요, 저도 대답하기 참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본문 속에서 영적인 귀중한 진리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믿음의 세계를 상상할 수 없는 데까지 열어주신 것이고, 믿음의 세계는 그 이상의 것도 바라보아라! 너희들이 나보다 더 큰 일을 하리라'는 우리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도한 대로 된다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 주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아멘!/
  여러분, 어떻게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까? 그 누구라도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는 없습니다. 용사도, 천하장사도 안됩니다. 하지만 기도하는 사람은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수 있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기도는 실패의 산을 옮깁니다. 기도는 질병의 산을 옮깁니다. 기도는 문제의 산, 염려의 산, 두려움의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 기도는 힘입니다.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푸념이 아닙니다. 기도는 주술이 아닙니다.
  기도는 능치 못함이 없습니다. 기도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질병이, 암 덩어리가 녹아집니다. 기도하면 길이 열립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의 지혜가 떠오릅니다. /할/
  기도는 우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합니다. 기도는 우리의 환경을 바꾸어줍니다. 기도하면 우리의 영혼을 묶고 있는 모든 어둠의 사슬이 끊어집니다. 기도하면 사단의 올무에서 풀려나게 됩니다.
  기도하면 좋은 일이 일어납니다. 기도하면 질병이 떠나갑니다. 기도하면 치료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그래서 기도가 축복이고, 능력이고, 응답입니다.
  사38장에 보면 히스기야가 병이 듭니다. 죽을병에 걸린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병이 들어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히 울면서 눈물로 통곡합니다. 하나님은 이 기도를 들으시고 히스기야를 15년 동안 생명을 연장해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히스기야는 질병의 산을 기도로 옮겼습니다. /아멘!/


  ㉥용서가 능력입니다(25).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는데 우리가 이웃을 용서 안 하면 하나님이 우리 죄도 용서 안 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눅17:3-4절에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계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응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미움은 마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용서해야 하나님도 나를 용서하시고 내가 남을 축복해야 하나님도 나를 축복하시고 내가 남을 사랑해야 하나님도 나를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믿/
  그래서 마5:23절에 보면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맺힌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웃과 꼬인 것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우선 먼저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신 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8월 24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