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우리의 소망은 하늘나라 의의 면류관입니다! (딤후 4:6-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4. 9. 8. 06:21

우리의 소망은 하늘나라 의의 면류관입니다! (딤후 4:6-8)


  내일은 추석입니다. 추석은 우리민족의 최대 고유의 명절입니다. 추석명절의 특징은 햇곡식으로 떡을 해 놓고 햇과일을 나누어 먹으며 민족이 같은 마음으로 축제의 날로 지키는 날입니다. 예부터 이날 온가족들이 성묘를 했고 벌초도 했습니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 유리왕 때부터 조정에서 편을 짜서 놀이를 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추석날 길쌈대회도 했습니다. 활쏘기 대회도 했습니다. 그네를 타는 시합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상도 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래가 되어 온 동네 온 국민이 추석을 명절로 지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도 이 추석을 최대명절로 보내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추석을 '중추, 칠석, 월석'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원래 추석을 '가위' 또는 '한가위'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다가 우리도 중국을 본받아서 중추의 '추'자와 월석의 '석'자를 따서 '추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추석 명절이 되면 고향을 찾아 민족 대이동이 이루어집니다. 이 '고향'이란 말은 듣기만 해도 정겹고, 생각만 해도 푸근한 말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하고 고향을 찾는 열심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귀성 전쟁'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고향길이 고생길이지만, 기어코 고향을 찾아가야 직성이 풀리는 게 바로 우리 민족입니다.
  1만 6,000㎞나 되는 먼바다로 나갔다가 알을 낳기 위해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처럼, 모두들 떠나온 길을 거슬러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좀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좀더 높은 지위를 갖기 위해, 좀더 깊은 공부를 하기 위해, 좀더 나은 생활을 위해.. 저마다 고향을 떠났습니다.
  성냥개비 만한 새끼 연어가 어른 팔뚝 크기로 자라나듯이, 고향을 떠날 때보다는 한결 넉넉해져서 어떤 이는 대리에서 과장으로 승진을 했고, 어떤 이는 전셋집의 설움을 털어 내고 아파트를 하나 장만했고, 어떤 이는 공부를 마치고 박사가 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신형 자가용을 타게도 되었습니다.
  수백, 수천 마리의 연어가 떼를 지어 돌아오듯이 고향으로 가는 모든 길들이 자동차와 사람들 빼곡이 들어찹니다. 그야말로 '귀성 전쟁'입니다. 그 짜증나는 기나긴 시간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우리는 거의 본능적으로 고향을 향해 가는 것입니다.
  고향은 생각만 해도 설렙니다. 어렸을 때 정든 부모형제와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함께 지냈던 일들이 마냥 그립기만 합니다.
  이렇게 그립고 좋은 고향이기에 모든 사람들이 기를 쓰고 고향을 찾아갑니다. 여러분은 언제 고향 생각을 많이 합니까? 몸이 병들었을 때, 늙고 쇠약해 졌을 때, 머나먼 이국 땅에서 특별히 명절이 되면 사람들은 고향을 더욱 그리워합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소원은 죽어서 고향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유독 한국인만의 정서가 아니라, 모든 인간의 공통된 귀소본능입니다. /할/


  ▶사람들이 고향을 찾는 이유가 몇 가지 있습니다. 
  ⑴귀소본능 때문입니다.
  이것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돌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귀소본능은 연어나 진돗개, 비둘기 같은 짐승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서 예전에 같이 학교를 다니던 동창들이 그리워지고 어릴 때 어머니가 해 주시던 음식들이 먹고 싶어지는 것이 다 귀소본능의 증거입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향수병이 됩니다. 이런 육체적인 향수병이 있는 가하면 사람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영적 귀소본능이 있습니다.
  ⑵나그네 본능 때문입니다.
  사실 인생 전부가 나그네의 길입니다. 원로 가수 최희준은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를 물었습니다. 그리고 대답하기를 '구름처럼 정처 없이 흘러만 가는 인생'이라고 노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나라 천국을 행하여 달려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믿/
  왜 인생이 나그네입니까? 이 땅에서의 생활은 잠시 잠깐이고 이 땅 이후의 하늘 나라의 생활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약4:14절에서 말하기를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했고, 시144:40절에서는 '사람의 날은 헛것 같고, 그의 날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고 했으며, 시102:11절에서는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쇠진함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의 생활을 단7:18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들이 나라를 얻으리니, 그 누림이 영원하고, 영원하다.'고 하셨습니다. /할/
  ⑶안식본능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나 나그네로 사는 삶의 고달픔을 고향에서 쉬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겁니다.
  ⑷영접본능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금의환향은 아니더라도 고향에 가면 내 부모나 형제가 아니면 친구나 나를 알아주는 친척이라든지 반겨줄 것 같은 기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그네 인생 길의 특징은 언젠가는 반드시 본향으로 돌아가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육신의 고향이 그렇게 소중한 것'처럼, 아니 그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이 소중하다는 사실'입니다. 육신의 고향을 잃어버린 실향민의 그 안타까움 이상으로 영혼의 고향을 잃어버린 '영적 실향민'은 정말 불쌍한 인생입니다. /할/
  그렇다면 우리 영혼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바로 '하나님 품', 우리가 장차 돌아갈 '하나님 나라'입니다. 전12:7절에 '흙(육신)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신(영혼)은 그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창조주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하셨습니다.
  히11:13-15절에서 '이 사람들(아브라함, 우리 믿음의 조상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으니 이같이 말하는 자들은 본향 찾는 것을 나타냄이라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중 국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는 세상 국적 대한민국이며 다른 하나는 천국 시민권입니다. 빌3:20절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아멘!/
  우리가 누구인가? 100년 미만의 세상나라가 아니라 영원한 영생복락의 나라 행복의 나라, 천국의 시민권 자들입니다. 엄청난 축복 자들입니다. /믿/
  그런데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육신의 즐거움 때문에 영원한 행복의 나라, 찬란한 천국을 망각하고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 세상나라는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하늘나라 의의 면류관'입니다. /할/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평생을 보내고 은퇴하는 노부부가 배를 타고 뉴욕으로 돌아옵니다.
  뉴욕 항에 도착했을 때 부두에는 수많은 인파가 몰려 있었고 군악대가 환영음악을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부부는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신들을 환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비행사 '린드버그'를 환영하고 있었습니다. 단발 비행기로 대서양 횡단의 성공을 거둔 그가 손님들과 함께 배를 타고 온 것입니다.
  한 평생 아프리카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자신들을 맞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는데 린드버그를 환영하는 사람들은 부두에 꽉 차있었습니다. 모두가 린드버그를 환호하며 열광합니다.
   선교사 부부는 허름한 호텔에 여장을 풀고 그 날 밤 통곡을 합니다. '하나님, 아프리카 오지에서 복음 증거로 평생을 보내고 돌아왔는데 환영은커녕 알아보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겨우 대서양을 횡단한 비행사에게는 전 뉴욕시민이 환영하고 있으니 이럴 수가 있습니까?'하고 하소연하며 부르짖습니다.
  그때 노부부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사랑하는 종아, 린드버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환영을 받는 것이란다. 하지만 너희는 고향에 돌아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너희의 고향은 뉴욕이 아니라 하늘나라이니라. 너희들이 하늘나라 고향에 돌아올 때는 린드버그가 받은 환영과는 비교도 안 된다. 천군 천사가 나팔을 불며 맞이할 것이고 천국에 먼저 간 사람들이 모두 환영할 것이며 예수께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라. 그리고 무엇보다 너희를 기다리는 상급인 면류관이 있느니라. 그 때까지 참고 기다리거라' /아멘!/ 우리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시기를 소원합니다. /할/


  ①바울 사도의 그 당시 상황과 그의 고백이 무엇인가?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로마 지금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사형 당할 날이 얼마 안 남았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때 디모데를 향하여 편지를 썼습니다. 그 편지가 오늘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디모데후서입니다. 바울이 이 땅에 마지막 남겨 놓은 글입니다. 바울이 쓴 성경 13권 중에 마지막 성경입니다.
  본문에 보면, 진정 바울은 부끄러움도, 후회도, 아쉬움도 없는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자신의 미래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믿음의 아들 디모데를 향하여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것을 비유적으로 말하면, 바울은 경기에서 승리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그는 달음질에서 승리했습니다. 권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씨름에서 승리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땀을 닦으면서 재판석을 바라봅니다. 재판장은 그의 이름을 부를 것입니다. 그는 재판장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재판장은 그의 머리에 면류관을 씌어줄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에 메달을 걸어주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그가 받을 면류관을 가리켜서 '의의 면류관'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아멘!/
  우리도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도 바울의 고백적인 신앙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고백을 드릴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할/
  그런데 여러분! 아무리 자기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웠다고 할지라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하면 하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합니다. 우리의 고향인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면 예비되어 있는 의의 면류관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믿음을 지킨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오늘 본문의 말씀을 기록한 의도가 무엇입니까? 자신의 삶을 과시하면서 자랑하기 위해서였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도 또한 우리 모두도 '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믿음을 따라 사명을 다하기를 바라면서 이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아멘!/
 

  ②'의의 면류관'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특별히 선별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가져야 할 가치관은 한마디로 '세상 적인 가치관'을 버리고 '성경 적인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육신 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삶에서 영적인 것을 귀하게 여기는 삶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아멘!/


  ▶주님이 기뻐하는 성경적 가치관이란 무엇일까요?
  ⑴'무엇을 했느냐'보다 '무엇이 되느냐'를 더 가치 있게 여겨야 합니다.
  마7:17절에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많은 신앙 인들이 '좋은 열매'를 맺으려고 나름대로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힘써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좋은 나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만 되면 열매는 저절로 맺게 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복의 열매는 저절로 따라오는 것입니다. 즉, 심령의 변화입니다. 물이 포도주 되는 역사입니다. /할/
  롬12:2절에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⑵'얼마나 소유했느냐'보다 '어떻게 썼느냐를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느냐, 얼마나 큰 권세를 잡았느냐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람이 얼마나 돈을 가치 있게 썼느냐를 귀중히 보십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버는 돈을 계산하시지 않고 쓰는 돈을 계산하신다.'고 했습니다.
  수십 억의 재산을 벌었어도 자기와 자기 가족만 위해 썼거나 술 먹고 도박하고 방탕한 생활에 다 써 버렸다면 차라리 엽전 두 푼이라도 값있게 쓴 가난한 과부만도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막12장에 그 가난한 과부가 가장 많이 헌금했다고 칭찬을 하신 것입니다.
  또 주님께서 자기만 위해 쌓아둘 줄 아는 어리석은 부자를 향해 눅12:20절에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고 하셨습니다. 
  수백 억의 재산을 가졌어도 자기만 위해 사는 사람보다 꽁보리밥에 된장찌개만 먹으면서도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도우며 사는 사람이 더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
  돈의 액수는 같아도 어디다 썼느냐에 따라 그 가치는 전혀 다릅니다. 가령 십만 원을 술 한잔 먹는데 써 버린 것과 병들어 죽어 가는 자를 도와주는 것, 그 가치는 전혀 다릅니다. /할/
  ⑶육신보다 영혼이 잘 되는 것이 더 가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한3서 2절에 '사랑하는 자 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육신은 수박의 껍질에 비한다면 영혼은 수박의 알맹이 같고, 육신은 식물의 잎과 같다면 영혼은 식물의 뿌리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육신보다 더 중요하고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건강이 먼저가 아니고, 사업이 잘 되는 것이 먼저가 아니며, 영혼이 먼저 잘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잠깐 있다가 늙고 시들고 썩어 없어지는 것이요 영혼은 지금부터 영원히 살아남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도 잘 되기를 원하시고 건강하기를 원하시지만 그 보다 영혼이 잘 되는 길을 택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⑷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는 생활에 더 가치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막10:43-44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높은 자리에 앉아서 섬김을 받는 것에 더 가치가 있는 줄 알지만 실상은 섬김을 받는 것보다 남을 섬기는 데 더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면서 섬김의 모습을 보이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하며 섬김을 받는 자리를 달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좌정승 우정승 다 해먹겠다는 말입니다.
  이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참으로 안타까운 심정으로 말씀하시기를 '인자 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이런 삶을 바울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당하게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멘!/
  우리도 이와 같이 바울 사도의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우리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아멘!/


  ③사도 바울은 '그의 일생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며 살아왔습니다(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웠도다.'
  여기 '관제'는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드리던 제사법의 일종입니다.
  민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야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는 세 단계로 이루어졌습니다.
  먼저 짐승을 잡아서 번제로 불태워드렸습니다. 그 다음에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은 소제를 그 위에 뿌렸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번제물과 소제물 위에 부었습니다.
  이때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붓는 것을 가리켜서 전제 또는 관제라고 칭합니다. 그러니까 맨 먼저 짐승을 번제로 드리고, 그 다음에 기름을 섞은 곡식 가루를 소제로 드리고, 마지막으로 포도주를 관제로 드렸습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향기롭게 드리기 위함입니다. /할/  
  지금 이 말씀을 하는 바울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약 30년 전,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에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때부터 바울은 그의 직무를 다하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아낌없이 불태웠습니다. 말하자면 바울의 삶은 이미 하나님께 번제로 드려졌던 그런 삶을 살았습니다.
  갈2:20절에서 그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할/  
  바울은 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습니다. 여기 '떠날 기약'은 자기의 죽을 때를 의미한 것입니다. '가까왔도다.'라는 말로 자기의 죽을 때가 이미 다가왔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공항에 가면 각종 항공편의 스케줄이 스크린에 떠올라있습니다. 스크린 상에는 출발이 있고 도착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말하는 떠남은 스크린 상에 나오는 출발과 같은 것입니다. 다른 곳으로 가기 위해서 있던 곳을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할/
  그때 바울은 자기가 곧 목 베임을 당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이는 참으로 참혹한 죽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코 자기의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럽게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육신의 장막을 벗어버리면, 의로우신 재판장이 준비해 놓으신 영원한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 때문입니다. /할/ 우리가 이 소망을 놓쳐서는 절대 안 됩니다. /아멘!/


  ④바울은 '싸우고, 마치고, 지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에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싸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제 선한 것을 위하여 싸우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에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며 핍박하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말미암아 하나님을 위하여 악한 마귀의 세력과 싸우고 죄와 투쟁하는 성도가 된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헬라어로 '아고나'라고 되어 있는 데 이는 격투기 선수들이 혼신을 다 하여 싸우는 모습을 그리는 말입니다.
  로마 원형 경기장은 2000년 전에 세워진 운동장입니다. 그런데 5만 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운동장 가운데 사자나 호랑이 같은 맹수와 사형수를 싸움을 시킵니다. 그러면 사자 밥이 되느냐 살아남느냐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맹수와 싸워서 이기면 살려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건 결사적인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5만 명의 군중들은 그런 실제적이고 잔인한 싸움을 보면서 즐겼습니다. 이 때 사형수는 죽느냐 사느냐의 싸움이라 그야말로 필사적인 싸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에서 지냈으니까 이런 경기를 보았거나 들어서 알고 있거나 둘 중에 하나였습니다. 이런 모습을 생각하며 감옥에서 자기는 선한 싸움을 일생 싸워 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태어나 8일 동안 생사의 기로에 선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8일이 지난 다음에야 하나님과 선민계약인 할례를 베풀라고 했습니다. 8일이 지나야 생존 여부가 결정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태어나면 가정과 사회, 국가와 자신의 생존을 위해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만 됩니다. /믿/
  ▶우리도 선한 이 싸움을 싸워야 합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필요합니다. 현대의 전쟁은 무기 개발 전쟁이라고 합니다. 우리의 이성으로는 상상하기도 힘들만큼 가공할 위력의 최신 무기가 첨단 과학의 도움으로 계속 개발되고 있답니다.
  지금 인간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만 해도 지구를 몇 십 번이나 멸망시킬 정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 북쪽에 김씨가 그 무서운 핵을 만들려고 발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핵은 무섭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서학자들은 '성경에서 말하는 불 심판이 바로 인간 스스로의 죄로 인하여 비롯될 핵전쟁이라고 설명'하기까지 합니다. 아무튼 인간은 육적인 전쟁에 이기기 위해서 끊임없이 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싸울 것은 이러한 눈에 보이는 육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영적 존재인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마귀와의 싸움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것은 자기와의 싸움입니다.
  그렇습니다. 이 영적 싸움에서 가장 큰 적은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나 자신을 이기는 것이 제일 어렵습니다. 내 속에는 나말고 또 다른 내가 들어 있습니다. 그것이 '나의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내 생각이나 내 뜻과는 상관없이 편견이 들어 있고 나태함이 들어 있고 고집이 들어 있고, 교만까지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자꾸만 게으름을 피우고 싶고, 놀고 싶고 타락하고 싶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것과 싸워야 합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나 자신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같은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자신은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의 육신과 더불어 싸웠습니다. 자신의 정욕과 싸웠습니다. 이생의 자랑과 세속적 욕심과 싸웠습니다. 나태와 안일, 교만과 싸웠습니다. 내가 죽어야 영이 삽니다. /아멘!/
  그 다음 '세속, 세상'도 무서운 적입니다. 오늘날 이 세속의 물결이 너무나 거셉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이 세속의 풍조에 그냥 휩쓸려 가고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향락에 빠지고, 세상 유행에 빠지고, 오락에 빠집니다. 그래서 자꾸만 믿음에서 멀어지고 세속의 물결에 깊숙이 묻혀서 세상의 풍조를 따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다음 우리의 큰 적은 '사탄 원수 마귀'입니다. 사탄은 참 교묘하게 우리를 파고듭니다. 우리의 의지를 늘 시험합니다. 그래서 엡6:11절에서 '마귀의 궤계'라고 했습니다. '궤계'란 교묘한 속임수를 의미합니다. 즉 마귀는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신학자 'c.s 루이스'는 '마귀가 가장 다루기 쉬운 성도는 마귀의 존재를 믿지 않은 성도'라고 했습니다. 마귀가 있는 것조차 모르는 성도들에게 마귀는 얼마나 안심하고 들어가 '궤계'를 부리는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는 무엇인가? 엡6:10-20절에 보면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는 것이고, '믿음을 굳게 하는 것'입니다. /할/
  ▶하나님의 전신갑주가 무엇인가? 6가지입니다.
  ⑴진리의 허리띠로 무장하라! 허리는 중요합니다. 우리 몸의 중심입니다. 힘은 허리에서 나옵니다. 허리를 다치면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래서 역도 선수들은 허리를 보호하기 위해서 굵은 허리띠를 매고 합니다. 경찰이 범인을 체포하면 허리를 잡습니다. 또 보호소에 널 때에는 허리띠를 풀어버립니다. 왜? 힘을 못 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로 허리띠를 매라고 합니다. 이 말은 예수 중심, 말씀중심으로 살라는 말입니다. 권력 중심이 아닙니다. 지식 중심이 아닙니다. 물질 중심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중심으로, 말씀 중심으로 살 때 우리는 세상을 이기고, 자신을 이기며, 사단의 권세를 꺾고 이기고 승리하게 될 줄 믿습니다. /아멘!/
  ⑵가슴에 의에 흉배로 무장하라! 가슴에는 심장이 있고 양심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 양심을 잘 지켜야 합니다. 사람이 죄를 짓게 되면 이 양심이 괴롭고 아프고 떳떳하지가 않습니다. 이 양심이 병들면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가슴에 의에 흉배를 붙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신앙인은 양심을 보호하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양심에 가책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입니다. /할/
  ⑶양 발에 평안에 복음의 신발로 무장하라! 로마군인이 세계를 지배하는데 획기적인 공헌을 한 것 중에 하나가 군화랍니다. 그들은 신을 특수하게 만들어서 아무리 오랜 시간을 행군해도 발이 상하지 않고 평안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도 복음의 신발로 무장합시다. 그래서 가는 곳곳마다 생명을 구하는 전도자가 됩시다. 하나님은 전도자의 발걸음을 축복하십니다. 그래서 롬10:15절에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할/
  ⑷양손에 믿음의 방패로 무장하라! 그렇습니다. 세상을 이기는 힘은 믿음입니다.
  방패는 막아내는 것입니다. 요일5:4절에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주님은 막9:23절에서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아멘!/
  ⑸머리에 구원의 투구로 무장하라! 그리스도인의 투구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현재의 온전치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생명록에 나의 이름이 이미 기록되었다는 확신입니다. 이것이 마귀의 궤계를 물리치고 죄의 권세를 물리칩니다. /아멘!/
  ⑹성령의 검으로 무장하라! 그렇습니다. 성령 충만이 은혜 충만입니다. 전신갑주의 마무리는 성령충만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성령의 능력은 절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믿/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습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가지 말아야 할 길을 달려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달려만 간다고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달려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길은 달려가야 할 길을 달려가야 합니다. /아멘!/ 가기 위해서는 정학한 목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목표는 무엇인가? 예수입니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할/
  여기 '달려갈 길'이란 정해진 코스를 말합니다. 사람마다 달려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여기 '달려갈 길'이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말합니다. 자기의 맡은 바 책임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행20:24절에서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맡긴 사명을 다하려고 생명을 내놓고 일생동안 달려가며 충성을 다했다는 고백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바쳐서 달려가도 아깝지 않은 그 길이 사명입니다. 땀과 눈물이 나도 즐겁고 피를 흘려도 두렵지 않습니다. 이 길이 사명의 길입니다. 이 길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믿/
  그런데 그 사명에 길은 사람마다 길이와 고난도가 다르게 주어집니다. 그러나 길건 짧건, 장애물이 있건 없건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종착점도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우리는 그 길을 마쳐야 합니다. /할/
  ▶동물의 왕국을 보면 아프리카 정글에 표범같이 생긴 치타가 있습니다. 동물 중에 가장 빠르게 달리는 동물입니다. 한 시간에 70 킬로미터를 달릴 수 있습니다. 차와 경주할 수 있는 동물입니다. 그런데 치타가 먹이를 구하려 다니다가 수 십 마리 사슴들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멀리서 봅니다.
  그러면 그 중에서 한 마리를 목표로 정합니다. 그리고 그 동물만 보고 맹추격을 합니다. 바로 옆에 다른 사슴이 있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쉽게 잡아먹을 수 있는 다른 동물이 옆에 가만히 있어도 관심도 없습니다. 오직 처음에 정한 그 목표물만 바라보고 달립니다. 그리고 기어코 그 동물을 잡아먹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사명만 바라보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그 달려갈 길의 종착지인 로마 감옥까지 달려왔습니다. 힘이 들었어도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것이기에 마지막까지 달렸습니다. 고통을 당하면서도 편안한 길을 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대로 달려 사명의 길을 마쳤습니다. /할/
  여러분! 우리 각자에게는 달려갈 길이 있습니다. 각자가 맡은 바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11세기에 영국의 헨리 3세가 왕이 되고 나서 나라를 다스리는 일이 너무나 힘이 들었습니다. 수도원에서 하루 종일 기도하고, 말씀을 보는 수도사가 몹시 부러웠습니다. 그래서 수도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리처드' 수도원장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저를 수도사로 받아 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수도원장이 왕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글쎄요, 수도사가 되려면 중요한 규칙이 있는데 그것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것이 무엇입니까?' '수도원의 생명은 순종입니다. 왕의 자리에 있던 분이 철저히 순종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걸고 맹세합니다. 철저히 순종하겠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자격이 있습니다.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당장 왕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맡기신 백성들을 제대로 섬기십시오.'
  그렇습니다. 왕의 사명이 따로 있고, 군인의 사명이 다로 있고, 경제인에 사명이 따로 있듯이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는 각자 주어진 사명이 있습니다. 그 사명이 어떤 사명이던 우리는 끝까지 충성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의 사명이 있고, 어떤 사람은 섬김의 사명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봉사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는 '예배와 선교'의 사명이 있습니다. 이 사명을 감사하며 지켜야 합니다. /아멘!/
  고전4:1-2절에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마라톤 경주를 보면 많은 사람들이 출발선에서 동시에 출발하여 달리기 시작을 하지만 마지막까지 전 코스를 다 달려가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신앙의 경주 장에서도 시작하는 사람은 많으나 끝까지 마치는 사람은 얼마나 될지 아무도 모릅니다.
  성경에 보면 달려갈 길을 중도에 포기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관제로 부음이 될 때까지, 순교할 때까지 달려갈 길을 다 달리며 마쳤습니다.
  그러므로 힘이 들어도 달려갈 길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 됩니다. 끝까지 달려서 마쳐야 합니다. 면류관을 내게 주시리라는 확신으로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승리하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아무리 선한 싸움을 잘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하였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지 못한다면 하늘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고향인 하늘나라에 가지 못한다면 예비 되었던 의의 면류관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마24:13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믿음은 내가 지키는 것입니다. 누가 내 신앙을 지켜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의 신앙의 지키기 위해 먼저 내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의 귀를 잘 지켜야'합니다. 롬10:17절에 '복음을 들으므로 말미암아 믿음이 난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잘 들고 잘 지켜야 합니다. 계2:29절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할/
  ▶그 다음에 '우리의 눈을 잘 지켜야'합니다. 다윗이 어느 날, 옥상에 올라갔다가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봄으로 죄를 졌고, 아담과 하와도 '보암직'한 것 때문에 하나님을 반역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입을 잘 지켜야'합니다. 잠4:24절에 '궤휼을 네 입에서 버리며 사곡을 네 입술에서 멀리하라'

  ▶마지막으로 '우리의 발을 잘 지켜야'합니다. 잠4"26절에 '네 발의 행할 첩경은 평탄케 하며 네 모든 길을 든든히 하라' /할/
  여기 '믿음을 지켰으니'에서 '지키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처녀가 정조를 지킬 때 쓰는 용어이며, 군사적으로는 군인이 성을 지킬 때 쓰는 용어입니다. 파수(把守)를 뜻합니다. 경계하여 지킨다는 의미입니다.
  내 것으로 만들기보다는 그것을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돈은 벌기보다 쓰고 간직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권력은 손에 넣기보다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골을 넣기보다 지키기가 어렵습니다. 챔피언 벨트를 매기보다 방어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성이나 고지를 빼앗기보다는 점령한 고지를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가 공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깨어 지켜야 합니다. '공격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경계에 실패한 군인은 용서받을 수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경계와 파수를 철저히 하면 지킬 수 있습니다. /아멘!/


  ⑤우리의 소망은 하늘나라 의의 면류관입니다(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하늘나라 의의 면류관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았습니다. 벧후3:13절에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할/
  '이제 후로는' 앞에서 말한 사도바울의 신앙을 잘 지킨 후에 자신 있게 바라보는 마음입니다. 우리들도 뭔가 하나님 앞에 떳떳한 신앙의 행위가 있을 때 자신감이 붙습니다.
  여기 '면류관'이란 신약의 말 가운데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왕관'입니다. 이는 왕권이나 권력의 표상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스테파노스'란 말로 '둘러씌운다.'란 어원에서 나온 말로 당시 운동 경기의 승리자에게 수여하던 것으로 '월계수나무, 상수리나무' 등의 잎을 엮어 만든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 왕들이 쓰던 '왕관'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혹자는 '왕관'이 그리스도에게 합당한 것이라면, 본 구절의 '면류관'은 성도들에게 합당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면류관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하며 다스리는 특권을 얻습니다. 계3:21절에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할/
  그런데 바울은 본 절에서 단순히 '면류관'이라고 하지 않고 '의의 면류관'이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자에게 수여되는 면류관'이라는 뜻으로 많은 주석 가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의의 면류관'외에 '생명의 면류관'(약1:12/계2:10), '영광의 면류관'(렘13:18/벧전 5:4), '자랑의 면류관'(살전2:19), '썩지 않는 면류관'(고전9:25), '열두 별의 면류관'(계12:1), '금 면류관'(계4:4/14:14), '화려한 면류관'(겔16:12) 등의 표현이 있는데, 이는 모두 충성스런 성도들이 내세에서 받을 상급을 표시한 것이고 우리를 위하여 주께서 예비해 놓으신 것입니다.
 여기 '예비 되었으므로'는 '따로 남겨두다', '보존하다'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장래에 준비될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된 것으로 이 면류관을 받는다는 이 소망이 바울에게 늘 용기를 주었고, 우리들에게도 큰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
  그 반대로 '가시 면류관'(마27:29/요19:5), '썩을 면류관'(고전9:25), '교만한 면류관'(사28:1) 등의 표현도 있는데, 이는 그 반대로 하나님께 충성하지 못하고 교만하여 주를 떠나 불순종한 자들에게 주어질 저주들을 표시한 것입니다. /할/
  그런데 이 의의 면류관을 어떤 사람들이 받을 수 있습니까?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들이 받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의의 면류관은 특수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고 주의 재림을 오매불망 기다리며 사모하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에게 의의 면류관을 상급으로 주시는 하나님은 은밀한 중에 보시고 갚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여기 '의로우신 재판장'은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킵니다.
  ▶성경에는 세 종류의 심판이 나옵니다.
  첫째, 분리되는 심판입니다. 곡식과 가라지가 분리되고, 양과 염소가 분리됩니다.
  둘째, 벌받는 심판입니다. 생명 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가 받는 심판입니다.
  셋째, 상을 받는 심판입니다. 성도들이 그 충성한 대로, 상을 받는 심판입니다.
  그리고 '주의 나타나심'은 '주의 재림'을 의미하며, '사모하는' 이 말은 '사랑하다'라는 의미로 재림에 대한 간절한 기다림을 나타냅니다. /할/
  저는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들도 '선한 싸움 잘 싸우고, 사명의 길 잘 달려가고, 믿음을 굳게 지켜' 의의 면류관을 받아 쓰는 축복의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2014년 9월 7일 대예배설교)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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