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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사50:4-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8. 16:50

고난의 종 예수 그리스도

이사야 50:4-9

 

오늘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위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는 예수님을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환영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예루살렘의 입성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난은 목요일에 잡히시고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를 고난주간으로 부르면서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깨닫는 시간으로 보내게 됩니다.

우리 교회는 한 주간 동안 특별 새벽기도회로 모이게 되는데 조금 힘들더라도 조금 고달프더라도 모두 함께 모여서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며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오늘 종려주일에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의 노래라고 이름 붙여진 본문중 하나입니다.

이사야서에는 4개의 종의 노래가 나오는데, 42:1-4, 49:1-7 52:13-53:12, 그리고 오늘 본문입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종의 노래는 앞으로 오실 메시야가 이렇게 종처럼 고난을 받고 치욕을 겪으면서 자신의 소명을 다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아주 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도 주님께서 받으실 고난을 잘 설명해주고 있는데, 오늘 본문에 나오는 가 누구인가? 하는 것은 오래 동안 성경학자들의 연구와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성경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그 는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건축했던 스룹바벨이라고 하기도 하고, 에스라와 느헤미야와 같은 신앙적이고 열정적인 애국자라고도 합니다.

혹은 바벨론 침략과 유대의 패배로 고통 받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말한다고도 하고, ‘학자’ ‘열다’ ‘알다와 같은 교육적인 용어들을 근거로 이사야 예언자의 스승이라고 추측하기도 합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잘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호칭을 받을 만큼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때문에 고난을 겪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가 이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과 희망의 소식을 전하고 몸소 보여주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이 고난의 종으로 표현된 를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로 보면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고난의 종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고난의 종이었고 처음부터 끝까지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던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고난은 떼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난의 상징인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분은 이 세상에 오실 때부터 고난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마구간에 태어나셨고, 이름 없고 별 볼일 없는 마리아와 요셉의 가정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실 때 마귀는 물질의 길, 기적의 길, 세상부귀와 같은 멋있고 인기 있는 길을 가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모두가 좋아할 수 있는 그 길을 버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인기가 없고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그 고난의 길을 걸어가신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엄청난 수치와 고통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고난의 길을 완주하셨습니다.

이 길은 분명 쉬운 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길도 아니었고 인기 있는 길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놀림 받고 조롱당하고 고난당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런 길을 왜 주님이 가셨을까요?

무엇보다도 이 길이 하나님이 원하시고 뜻하신 길이심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에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말씀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것내 기뻐하는 자라는 두 가지 의미가 복합되어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말씀은 시편 27절에서 인용된 말씀이었습니다.

시편 27절에 보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구세주이심을 확증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다시 한 번 자신이 육신적으로는 요셉과 마리아의 아들이었지만 영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이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은 이사야 421절에서 인용된 말씀인데요,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는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종은 곧 고난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42장은 고난의 종을 노래한 성경으로 우리 주님은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고난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종합해보면, 너는 내가 보낸 하나님의 아들이며 구세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구세주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고난의 종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주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의 사명을 감당할 때 고난의 종으로서 그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고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고난 받고 죽으시는 모습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에게 있어서 종의 길, 고난의 길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이 이 길을 걸어갔고 우리도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가 회피하면 그것은 주님의 제자가 아니고 주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주님이 걸어가신 길을 우리도 걸어가야 하고 주님의 뒤를 우리도 따라가야 합니다.

이 길을 걸어가신 주님은 나중에 부활의 주님이 되시어서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갈 때 주님이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하는 삶을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이 길을 걸어가신 주님께서 온 인류의 구원자가 되었듯이 우리가 이 길을 걸어갈 때 많은 영혼을 구원하게 될 줄 믿으면서 이 길을 걸어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프리카 로디지아(짐바브웨)에서 무조레와(Abel Tendekayi Muzorewa) 주교에게 아프리카 국민회의 의장을 맡아달라는 제안이 왔습니다.

그 자리는 항상 백인 정권에 의해 투옥, 추방, 살해를 당하는 위험한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기도하며 고민하는 주교에게 어떤 친구가 시를 보내 주었고 그 시를 읽은 주교는 큰 사명감을 회복하고, 그 길을 갔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이기주의적이다.

그래도 그들을 사랑하라! /

당신이 좋은 일을 해도 사람들은 당신이 이기적 속셈을 가졌다고 비난할 것이다.

그래도 좋은 일을 하라! /

당신이 성공하면 가짜 친구들도 얻고, 진짜 적들도 얻을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

당신이 오늘 하는 선행이 내일이면 잊혀 질 것이다.

그래도 선을 행하라! /

당신이 정직하고 진실하면 상처를 받을 것이다.

그래도 정직하고 진실하라! /

가장 큰 아이디어를 가진 가장 큰 사람들은

가장 작은 아이디어를 가진 가장 작은 사람들에 의해서 살해될 것이다.

그래도 큰 생각을 하라! /

사람들은 약자들을 좋아하지만 강자들을 추종할 것이다.

그래도 약자들을 위해서 일을 하라! /

여러 해 세워놓은 것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질 것이다.

그래도 세워라! /

당신이 최상의 것을 세상에 주어도 세상은 당신을 차 버릴 것이다.

그래도 최상의 것을 주라! /

 

이 고난의 길, 종의 길은 분명 쉽거나 편한 길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어렵고 힘들고 고달픈 길이 될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 길을 걸어가야 하고 본받아야 합니다.

주님이 가신 길이기에, 주님께서 오라고 하신 길이기에, 주님께서 원하신 길이기에, 주님이 승리하신 길이기에 우리도 이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떻게 그 길을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그렇게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시고 고난의 길을 걸어가실 수 있었던 이유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는,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와 귀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학자들의 혀를 내게 주사 하는 말씀이 있고, 나의 귀를 깨우치사 학자들 같이 알아듣게 하시도다.’는 말씀이 있고 5절에서는 주 여호와께서 나의 귀를 여셨으므로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여기에 나오는 학자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 신학자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제자,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 주님께 적용해본다면 우리 주님은 분명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이고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깨달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의 혀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한 사람인 나를”(40)-주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으셨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하고”(38) 주님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보았습니다.

말씀을 들을 수도 있지만 직접 보는 것은 더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주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눈으로 보았고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그렇게 듣고 본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결과는 사람들의 핍박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전하고자 하면 우리에게도 분명 반대가 있고 핍박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유일한 구원자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돌을 들어 치려고 할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 독선적인 사람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화평을 깨트리고 화목을 저해하는 사람이라고 비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들은 하나님의 말씀, 생명의 말씀, 진리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판이 있고 핍박이 있고 따돌림이 있어도 말씀을 전해야 합니다.

그 말씀이 곤고한 자를 도와주고 죄와 허물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살리는 유일한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신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7절에 보면,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심으로하는 말씀이 있고 9절에서도 주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시리니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도우신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주님은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고, 수염을 뽑는 자들에게 뺨을 맡기고, 모욕과 침 뱉음을 당하여도 얼굴을 가리지 아니하셨습니다.

기꺼이 그 모든 고난을 감수하셨고 몸으로 그 모든 고난을 체험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특별히 고난을 받을 때, 주님을 위하여 일을 하고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할 때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셔서 우리를 도우시는 줄 믿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여기에 너희는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과 주님은 항상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주님을 위하여 고난의 길을 걸어가실 때 부활하신 주님이 항상 여러분 곁에 계시고 여러분들을 도우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담대하게 이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여러분 가까이 계시고 여러분들을 절대 혼자두지 아니하시고 도와주실 것입니다.

 

세 번째는 주 여호와께서 주님을 의롭다고 인정해주셨기 때문입니다.

 

8절에 보면, “나를 의롭다 하시는 이가 가까이 계시니 나와 다툴 자가 누구냐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를 의롭다고 하고 우리를 잘 했다고 칭찬하고 우리에게 상급을 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는 없는 줄 믿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걸어가면서 때로는 힘들고 지치기도 하고 때로는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꼭 옳은 것인가? 하는 회의가 들 수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이 길을 걸어가는 자를 의롭다 하시고 칭찬하시고 상급을 주실 것을 확신하면서 이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세상의 인정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세상의 평가는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세상의 평가가 우리를 살릴 수 없습니다.

세상의 평가가 우리를 의롭다고 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겠습니까?

의롭다 하신이가 하나님이신데 누가 정죄하겠습니까?

하나님께 인정받고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최고로 승리하는 것이요, 최후로 승리하는 것이요 가장 잘 살은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을 때 주님은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습니다.

모든 무릎이 그 이름에 꿇게 하셨습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셨습니다.

고난의 끝은 결코 고난이 아닙니다. 영광이요 승리요 면류관입니다.

내가 살고 다른 사람을 살리는 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을 따라 이 고난의 길을, 이 십자가의 길을, 이 겸손의 길을, 이 낮아짐의 길을 걸어가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barnaba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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